* * *
뒤집어진 채로 계곡물에 둥둥 떠다니는 뿔 달린 소녀.
평상에 앉은 단비가 태화를 흘끗하며 수박을 아삭거렸다.
“죽었나?”
“저 정도로 죽을 년이 아냐.”
세희는 그렇게 말하고 화채를 호로록 마셨다.
그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태화가 고개를 들고 고래처럼 물을 내뿜었다.
“푸우웃! 콜록, 콜록! 야, 천세희! 너 뒤질래?!”
“태화야, 빨리 안 오면 화채 다 먹는다.”
“앗, 나 먹을래. 남겨줘! 야, 오지윤. 국자 내려!”
“니가 빨리 온나.”
곧 태화도 먹자판에 끼어들었다.
아이들은 평상에 앉아 과일과 화채를 먹었고, 어른들은 그제서야 쉬거나 놀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상호는 쉬는 것을 택하고 평상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이고, 노는 것도 힘들어 죽겠네…….’
그런데 무언가가 그의 발바닥을 쿡쿡 찔렀다.
‘……뭐여.’
고개를 드니 효은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하냐? 안 오고?”
“……뭐야, 나 쉴 거야. 애들이랑 놀았잖아.”
“더 놀면 죽냐?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이리 와.”
“아니 어른끼리 뭔 물놀이야…….”
경치 구경이나 하고 말 것이지. 상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다혜야, 이리 와. 저기 계곡 쪽 바위에 앉아 있자.”
“아으.”
다혜가 그의 뒤를 따랐다.
여자 어른 다섯은 이미 계곡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담그고 있었다. 방금 발을 담근, 머리카락 끝이 하얗고 몸이 매끈한 게 효은.
머리카락이 온통 하얀 게 해련.
호리병처럼 요철이 확실한 게 민정.
키가 작고 연갈색 곱슬머리를 한 게 설미.
다가오는 상호를 흘깃 째려보는, 말총머리를 한 게 미진.
항상 빳빳한 양복 때문에 잘 몰랐는데 의외로 몸이 좋았다.
‘저 사이에 내가 껴서 뭘 하라는 건지…….’
이야기에 낄 수는 있을지 걱정이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효은의 옆에 앉았다.
귀를 기울여보니 다들 미진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설미가 미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남자친구한텐 뭐라고 하고 왔어?”
“그냥 학교에서 선생님들이랑 놀러 간다고 했어요.”
“남자친구는 평소에 잘 해줘?”
“어…….”
미진은 상호와 효은, 정확히는 X급 헌터인 효은의 눈치를 살피며 떠듬떠듬 대답했다.
“네. 잘 챙겨주고…… 제 생각 많이 해줘요.”
“부럽네~.”
효은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상호를 꼬나보았다.
“내 남친은 말도 없이 음식 뺏어먹고~, 어린 여자애들이랑 논다고 같이 밥도 안 먹고~, 밤일도 드럽게 못하는데.”
“야…….”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효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설미가 중얼거렸다.
“엄청 잘하던데…….”
“응?”
그 말에 해련을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효은의 눈동자가 번개같이 상호를 향했다.
“너 이 새끼…….”
“……아니거든.”
“개새끼야. 대체 안 건드린 여자가 누구야? 너 저번에 그 까페 점원하고도 한딱가리 했지?”
“아니라고! 애도 있는데 말 좀 예쁘게 해. 설미 누나! 누나가 뭐라고 좀 해봐요…….”
정령으로 순찰을 시키다가 훔쳐본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걸 아는 상호는 억울한 눈으로 설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설미는 곧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해명해 주었다.
“으응, 아니…… 우연히 너랑 상호랑 있는 걸 봐 가지구…… 조금…… 봤어. 근데 잘하는 것 같아서…….”
“니가 얘랑 안 해봐서 그래.”
효은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가 잘하는 줄 알아. 그러면서 힘으로 막 누르고, 하다가 지 혼자 짜증내고……. 짐승이야, 아주 그냥.”
“그래? 그렇게 보이긴 했는데…….”
그렇게 보이긴 뭘 그렇게 보인다는 걸까. 상호는 아이들이 들을까봐 노심초사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효은이 한마디 툭 뱉었다.
“한번 해볼래? 빌려줄게.”
‘?’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게 X발 무슨 소리인가. 너무 당황해서 욕도 안 나오는 채로 설미를 돌아보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 어으……응? 그…… 뭐를?”
“난 상관없어. 이 새끼는 아직도 남의 여자라서. 설미 니가 하고 싶으면 하루쯤은…… 꺅!”
효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상호가 그녀를 끌어안고 계곡물로 몸을 던졌기 때문에.
깊이 가라앉았다가 물 위로 나온 둘은 뒤엉켜서 엎치락뒤치락하기 시작했다.
“죽자, 이년아. 같이 죽자. 너 때문에 내가 못 살아, 진짜! 10년 전부터 계속!”
“죽자고? 죽자고? 그래 죽어. 같이 죽어 이새끼야! 언니, 이 새끼 절대 작은언니 옆에 묻지 마. 무조건 내 옆에 묻어. 이 개새끼 사랑한다는 거 지랄인지 아닌지 볼라니까!”
민정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쥐불놀이 불꽃마냥 튀는 물보라를 피하느라.
네 여인과 한 소녀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혜야, 이리 와. 미진 양, 우리 수박이나 더 먹을까?”
“좋죠. ……저기, 설미 언니.”
“으, 응?”
“얼굴이 너무 빨개요.”
“아, 더워, 더워서. 좀 덥네, 아하하…….”
설미는 어색하게 웃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상호와 효은은 이제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이 씨X랄…… 안 놔?”
“같이 죽자매! 먼저 죽어!”
“염병…….”
설미는 곧 돌아서서 종종걸음으로 미진의 뒤를 따랐다. 홍시보다 더 붉게 볼을 물들이며.
다시금 둘을 돌아보는 눈빛에는, 어째서인지 부러워하는 기색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225. 앙화의 불씨
“……상호야.”
설미가 우물쭈물하며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아 꼼지락거렸다.
“괜찮을까?”
“…….”
상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어떡해……?”
“…….”
상호의 앞에서는 고기 한 줄이 구워지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 오늘의 마지막이 아니라 여행 동안의 마지막.
내일까지 구워 먹으려고 가져온 고기가 다 동나고 있었다.
“더 사올 걸 그랬나봐. 그치…….”
“…….”
“뭐라고 말 좀 해봐…….”
말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자애 둘이서 20인분을 먹어치우는 기적을 봤는데.
그 기적을 행한 범인들, 다혜와 지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구워지고 있는 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양보하이소.”
“므앙.”
상호는 고기를 가위로 자르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부족해? 뭐 더 만들어 줄까?”
“아입니더. 딱 그 한 줄만 무면 될 거 같은디.”
“아으아으.”
지윤도, 다혜도. 고기가 익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상호가 고기를 뒤집을 때마다 둘의 손이 연신 움찔했다.
기름이 떨어질 때. 숯불에서 불꽃이 피어오를 때. 둘의 눈도 함께 화르륵 불타올랐다.
‘다음에는 60인분쯤 사와야지…….’
상호는 한숨을 쉬며 다 구운 고기를 반으로 나눠 각자의 접시에 놓았다.
지윤이 접시를 내려다보며 꿍얼거렸다.
“이것만 무면 배 안 차는데…….”
이 무슨 끔찍한 소리인가. 그럼 지금까지 먹은 건 어디로 갔나.
상호는 난색을 지으며 식탁을 둘러보았다.
“밥이랑 쌈이랑 해서 먹어. ……근데 밥이 다 어디 갔냐?”
“다 묵었지예.”
“…….”
상호는 궁금함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지윤아. 잠깐만 이리 와봐.”
“예?”
지윤이 눈을 깜작이며 상호에게 다가왔다.
그러다가 상호가 지윤의 웃옷을 들춰 배를 확인하자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아잇! 남사시럽게…….”
“눌러봐도 돼?”
“지금은 안 됩니더.”
평소보다 볼록 튀어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복근이 탄탄했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절대 고기 다섯 근이 들어갈 위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누르지 말라고 했지만, 상호는 기어코 검지로 지윤의 복근을 눌렀다.
“끄읍.”
지윤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본 상호는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배 부른 것 같은데?”
“……아익! 쌤예!”
지윤은 상호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쫙 후려치고 펜션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토록 좋아하는 고기도 버려둔 채.
낄낄거리는 상호의 귀에 효은의 핀잔이 파고들었다.
“자연스럽네.”
“응? 뭐가?”
“스킨십이.”
“아니, 쟤는 성철이 형 딸이잖아. 조카 같은 거지…….”
“핑계도 자연스럽네.”
뭔 말을 못 하겠다. 상호는 손을 내젓고 임무를 마친 숯통에 물을 끼얹었다.
옆에 놓인 식탁에서는 다혜가 지윤이 남긴 고기를 신나게 집어먹고 있었다.
“느흐흥~.”
* * *
욕실이 하나일 때, 21명이 다 씻으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가.
그것은 머리카락 길이에 따라서도 다소의 차이가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21명 안에 서로 호감을 가진 남녀가 얼마나 있는지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걸 모르는 상호는 그냥 여자라서 오래 걸리는구나, 하고 하염없이, 세 시간째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킬 때.
“잠은 어떻게 자지?”
해련이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물었다. 누구에게랄 것 없이.
대답은 설미가 했다.
“애들이 방에서 다 잘 수 있을까요? 애들을 거실에서 재우고 우리가 방으로…….”
“아뇨.”
미진이 딱 잘라 거절했다. 눈동자가 상호를 향하고 있었다.
“애들을 방에서 재우죠. 거실은 사람들 왔다갔다하니까.”
“그러네. 근데 열다섯 명이…….”
“열넷이야. 다혜는 우리랑 잘 거라서.”
해련의 말에 상호는 방을 흘끗했다. 다혜가 민정의 감시하에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므아아앙!”
“아, 불닭소스네.”
“느아아아악!”
벌칙에 걸린 다혜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방은 잘 끼워 넣으면 열네 명이서 잘 수 있을 크기였다. 요를 세 개씩 두 줄로 깔고, 한 줄에 일곱 명이 붙으면 될 터였다.
남은 것은 상호가 어디서 자느냐.
설미와 미진의 시선이 상호를 향했다.
“상호는 효은이랑 잘 거잖아.”
설미에 말에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혼자 자도 되긴 해요.”
“혼자 자면 어디서 자게?”
“밖에서 잘 수도 있죠.”
“모기는 어떻게 하구? 물가인데다가 산모기인데…….”
“좀 물린다고 죽지는 않잖아요.”
설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안에서 같이 자.”
“그거는…….”
그와 설미 둘이서 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상호는 미진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겠어요?”
미진이 눈썹을 치켰다.
“왜 저한테 물어봐요?”
“아니, 미진 씨는 남자친구가 있으니까…… 싫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전 상관없으니까 교장선생님께 물어보세요.”
그쪽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역시나, 상호가 물어보기도 전에 해련이 대답했다.
“난 괜찮아~. 안에서 자요~.”
상호는 미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는데요.”
“왜 자꾸 저한테 물으시는데요?”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쯧…….”
미진은 혀를 차고는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서는 방금 막 효은이 나온 참이었다.
효은이 머리를 털며 상호를 째려보았다.
“야.”
“왜. 또 뭐.”
“너 내 칫솔 챙겼다매.”
“엉? 없어?”
“없어. 니 칫솔 썼어.”
“알았어.”
“알았어가 아니라 새끼야. 미안해가 나와야지 이 새끼는…… 참나.”
또 혼났다. 상호는 꿍얼거림을 입속에서 되새기며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혹시 효은이 착각한 게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효은의 말이 맞았다.
‘……없네.’
결국 그는 효은이 던진 칫솔을 받아 미진이 다 씻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바닥에 멀거니 앉아 있는데 방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아~, 나빛이 언니! 표정을 못 읽겠어! 아악!”
“헤헤헤…….”
또 도박의 재능을 꽃피우고 있구나. 상호는 아이들이 트럼프 카드로 도둑잡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아이들이 한마디씩 했다.
“쌤, 같이 해요.”
“들어오세요~.”
“응, 씻고 갈게.”
얼마 뒤에 미진이 욕실에서 수증기와 함께 걸어 나왔다.
미진은 욕실 앞에 앉아 있는 상호를 보고 움찔하더니, 또 그 표정을 지으며 게걸음을 쳤다.
“왜 거기 있는 거예요?”
“아니 내 차례니까…….”
상호는 한숨을 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 씻고 나왔을 때는 효은이 아이들의 게임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방으로 향하자 아이들이 빨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선생님~.”
“응.”
“진실게임 해요~.”
“응.”
상호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아이가 열넷, 거기에 효은과 민정. 그런데 아이 한 명이 이불을 덮은 채로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이츠키였다.
“사카시타는 왜 누워 있어? 어디 아파?”
“졸리대요.”
미래가 그렇게 말하며 상호의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손바닥 모양이 오목하게 패인 반구형의 물체.
“이게 뭐야?”
“거짓말탐지기요.”
“…….”
대체 뭘 물어보려고 이런 것까지 가져왔나.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그냥 거짓말해도 되는 거지? 벌칙으로 전기충격만 받고?”
“아뇨, 진실을 말할 때까지 해야죠.”
그건 고문인데.
어쨌거나 도망칠 구석은 없으니. 그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게임은 뭘로 하게?”
“이거요.”
아이들이 동시에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서.
또 사람을 조지려 하는구나. 상호는 손사래를 치며 몸을 뒤로 뺐다.
“안 돼, 안 돼. 나 이 게임 안 해.”
“에이, 왜요~.”
“또 남자, 안대, 절름발이, 선생, 이런 것만 할 거잖아!”
“쳇, 들켰네.”
태화가 혀를 차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해. 저번에 수련회 때 나온 거는 하지 말기로. 오키?”
그런 조건이라면야.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손가락 다섯 개를 올렸다.
“그래. 한번 해 봐.”
그러자 세희가 제일 먼저 말했다.
“저랑 잔 사람 접어요.”
‘?’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공격이 차례대로 날아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랑 잔 사람 접어.”
“저랑 잔 사람. 헤헤…….”
“지랑 잔 사람 접으이소.”
“…….”
남은 손가락은 단 하나. 상호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효은이 그를 삐딱하게 꼬나보고 있었다.
“나랑 잔 새끼.”
원턴킬.
딱히 이길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상호는 손을 그대로 내려 거짓말 탐지기에 내려놓았다.
“그래, 그래……. 그래서, 뭐가 궁금해.”
아이들이 서로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잠깐이었지만 상호의 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 눈빛에 서린 장난기까지도.
질문은 미래가 했다.
“선생님.”
“응.”
“우리 반에 마음에 드는 여자애가 있다, 없다.”
머리가 순간 어지러워졌다.
“……뭐?”
“시작~.”
미래는 그렇게 말하고 거짓말 탐지기의 버튼을 눌렀다. 불빛과 함께 삐용삐용 음악이 흘러나왔다.
상호는 혹시 자신이 쓸데없는 착각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되물었다.
“그냥…… 그냥 마음에 드냐고? 다 좋지, 그거야…….”
“아니, 이성으로요.”
“이성으로는 당연히 없지.”
당연히.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런데 손바닥에서 찌르르한 전기가 올라왔다.
‘……켁!’
황급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렸지만 이미 흐른 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손을 움찔하자 아이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꺄하하하! 있나봐, 있나봐~.”
“누군데요? 누군데요~?”
“없어! 없어, 진짜……, 아오.”
상호는 한숨을 쉬며 거짓말 탐지기에서 손을 빼려 했다.
그런데 세희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세희야?”
“진실이 나올 때까지 하셔야 해요.”
세희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바로 거짓말 탐지기의 버튼을 눌러 버렸다.
삐용삐용.
상호의 얼굴에 진땀이 줄줄 흘렀다.
“아니야, 이 기계가 이상한 거야……. 진짜야…….”
“2학년들 중에 있어요?”
“없어……!”
찌리릿.
“끄응…….”
상호는 자포자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있어. 됐지? 다음 판…….”
“안 돼요. 버튼 누른 다음에 진실 떠야 돼요.”
“제발…….”
“이름에 이응이 들어가요? 성까지.”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2학년 중, 성과 이름에 ‘ㅇ’이 들어가는 아이는 이태화, 오지윤, 도은율, 이츠키, 나디아.
안 들어가는 아이는 천세희, 하나빛.
하지만 이걸 따지기 전에.
“들어가고 자시고가 아니라 없다고! 없다니까……. 나 이거 못 믿겠어. 이런 싸구려 장난감 따위…….”
그 말에 미래가 눈을 부라렸다.
“장난감이라뇨! 제가 발명한 최신형 거짓말 탐지기인데!”
“아니, 아무리 봐도 문방구에서 3천 원에 사온 거 같은데…….”
상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효은에게 탐지기를 밀었다.
“니가 한번 해 봐.”
“그래.”
효은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탐지기에 손을 얹었다.
“질문해봐.”
뭘 물어봐야 효은을 당황시킬 수 있을까. 그는 고민하다가 회심의 질문을 날렸다.
“민정 누나보다 자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
“……흐음.”
효은의 눈동자가 상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별로 당황치 않은 목소리.
하지만 결과는 기계가 알려줄 것이다. 상호는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입술 아래서 우물거리며 탐지기를 주시했다.
그런데.
띵~동~
“됐지?”
“…….”
“븅신아, 내가 너처럼 싹수없는 새끼일 것 같냐?”
“…….”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탐지기를 노려보았다. 이 싹수없는 기계놈이 왜 자신한테만 전기를 쏘는지.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고.
그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 알았어. 계속 해봐.”
“앗, 은근슬쩍 넘어간다. 멍.”
“단비야…….”
“멍.”
결국 아이들의 뜨거운 눈빛을 피하지 못한 채, 탐지기에 손을 얹었다.
세희가 되물었다.
“이름에 이응이 들어가요 안 들어가요?”
상호는 빠르게 계산했다. 2와 5,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
‘……2가 더 무섭지.’
그래서 대답했다.
“안 들어가.”
찌리릿
“……안 들어간다고!”
다시금 소리쳐도 세희와 나빛의 표정이 변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세희는 싸늘하게, 나빛은 화사하게.
하지만 저 환한 웃음이 바로 앙화의 불씨임을, 상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외국인이에요, 한국인이에요?”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 빌어먹을 기계는 언제쯤 그의 말을 믿어줄는지.
한 명을 꼭 잡아야 끝이 나려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더 무서운 쪽으로 가야…….’
“한국인.”
찌리릿
“끄윽!”
“외국인. 오케이.”
태화가 실쭉 웃으며 나디아와 이츠키를 흘끗했다. 이츠키는 아직도 이불을 덮은 채로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그럼 나디아야? 이츠키야?”
상호는 머리를 굴렸다. 보나마나 이번에도 전기가 흐를 터.
덜 무서운 쪽은 나디아.
그렇다면 나디아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이츠키.”
상호는 그렇게 말하고 전기 충격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전기가 흐르지 않았다.
‘……뭐여.’
이 망할 기계가 갑자기 왜 이러나. 상호가 눈을 끔뻑이며 탐지기를 내려다보는 그때.
띵~동~
“…….”
상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게 아닌데.
“……아닌데.”
찌리릿
“끅……!”
상호는 몸을 움찔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냉랭한 표정으로 그와 이츠키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 진땀이 푹푹 배어 나왔다.
“아냐, 아냐, 이거…… 조작이야!”
“이츠키였네.”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아이들의 시선이 상호를 사정없이 찔렀다. 거기에 효은의 날카로운 눈빛까지.
그런데 손바닥에 또 전기가 흘렀다.
‘응?’
버튼도 안 눌렀는데.
상호는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이거.”
그때, 자는 줄 알았던 이츠키가 스르르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손에 작은 리모컨을 들고 있었다.
“선생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아니…….”
“본가엔 잘 설명해 두겠습니다. 결혼 비자나 준비해 주시는 겁니다.”
이츠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표정한 눈으로 혀를 쏙 빼물었다.
뭐라 따질 기운도 없다. 상호는 앉은 채로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단체로 속이면 어쩔 도리가 없구나…….’
고개 숙인 그의 머리 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