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6화 (236/501)

* * *

다음 날 아침.

상호는 창가에 서서 눈을 끔뻑였다.

“……안녕.”

“안뇽~.”

“안녕하세요.”

여섯 명이 창턱에 매달려 있었다.

세희, 태화, 이츠키, 미래, 이서.

그리고 가은까지.

“가은이……도 안녕.”

“…….”

상호가 손을 흔들어도 가은은 반응하지 않았다.

얼굴 보면서는 이야기 못 하겠다는 건가. 그는 그렇게 여기고 창문을 열어 아이들을 들였다.

미래가 헬멧의 프로펠러를 끄며 물었다.

“오늘 메뉴 뭐예요?”

“김치찌개.”

이번엔 태화가.

“뭐 넣었어?”

“돼지고기.”

“앗싸~. 근데 쌤.”

태화는 식탁을 향해 신나게 달려가다가 침대 앞에서 정지했다. 침대에서는 효은이 얇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자고 있었다.

“했구나.”

“……뭘.”

“언제 잤어?”

“제때 잤어. 쟤가 게으른 거야. 니는 신경 끄고 밥이나 먹어.”

“웅.”

소란스러워서 잠을 깼는지, 효은이 이리저리 뒤척였다. 상호는 그릇에 밥을 담다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밥 지금 먹냐?”

이불에서 튀어나온 발이 위아래로 까딱였다.

“말을 해, 말을.”

“먹는다고.”

그는 밥을 한 그릇 더 담아 식탁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둘러앉은 식탁에 상호와 효은이 끼자 공간이 매우 협소해졌다. 4인용치고도 작은 식탁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효은이 상호의 팔에 팔꿈치를 부딪치며 말했다.

“야, 어제 설미한테 들었는데.”

“뭐야, 친구 먹었어?”

“그렇게 됐어. 어쨌든. 이번에도 다같이 놀러 가자던데.”

“들었어.”

“어디로 가냐?”

“글쎄…….”

상호는 세희를 흘끗했다.

태화와 이츠키는 같이 워터파크를 갔지만, 세희는 못 놀았으니.

“세희야. 바다가 좋아, 계곡이 좋아?”

“음…….”

세희는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계곡도 가보고 싶어요. 한 번도 가본 적 없어서……. 바다는 저번에 갔으니까.”

미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언니들 바다 갔어? 작년에?”

“응. 우린 다 갔어. 이츠키랑 나디아만 빼고.”

“선생님이랑?”

“응.”

“재밌었어?”

“대단했지~.”

태화가 코웃음을 쳤다.

“비키니 입었는데 껴안고 던지고~. 끈 풀릴 뻔하고, 흠뻑 젖고~.”

김치를 집으려던 상호의 젓가락이 우뚝 멈췄다.

“……너희 그때 비키니 안 입었잖아.”

“그랬나? 근데 우리는 그렇다 쳐도, 수녀님 끈은 풀었잖아~.”

“내가 언제!”

“오일 바른다고~.”

“아.”

봤구나.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뭐 어때……. 그때 이미 사귀고 있었어.”

“그냥 그렇다고~. 그리고 우리 껴안고 던지고 한 것도 팩트잖아. 아냐?”

“……맞긴 한데.”

“우리 다리 만지고 등 만지고 다 했잖아. 아냐?”

“맞긴 한데…….”

“그냥 그렇다고~.”

태화가 혀를 쏙 내밀었다.

세희는 태화를 째려보며 혀를 찼고, 효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상호를 꼬나보았다. 미래는 눈을 끔뻑이며 언니들의 눈치를 살폈고, 이서는 무관심.

그리고 가은은 바로 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벌레를 보는 눈빛.

‘안 돼…….’

그간의 노력이 말짱 도루묵이 되게 생겼다. 상호는 애써 웃으며 가볍게 물었다. 태화의 말은 중요치 않다는 것처럼.

“가은이도…… 갈 거지?”

“…….”

묵묵부답.

점점 커지는 압박이 상호를 짓눌렀다.

‘아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구나.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맨밥을 퍼먹었다.

가은의 눈앞에서 1초라도 빨리 꺼지기 위해.

222. 진실

“4일이요?”

미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1박2일도 아니고, 2박3일도 아니고…… 3박4일이요?”

“네.”

상호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서.

둘은 학교 근처 카페에 와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효은과 설미도 함께. 넷이서.

미진은 평소와 달리 편한 사복 차림이었다.

“머릿속에 놀 생각밖에 없어요?”

“나한테 그러지 마요. 설미 선생님이랑 교장선생님이 그러자고 한 거니까.”

“진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해요? 그렇게 남탓하면 살기 편하죠?”

“아니 진짜 나 아니라고…….”

상호가 아무리 항변해도 미진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설미가 쓰게 웃었다.

“상호 씨 말이 맞아. 나랑 교장선생님이 그랬어. 이틀도 사흘도 너무 짧다고……. 오랜만에 놀러 가는 거니까.”

“이거 봐요. 설미 언니는 후배를 위해서 거짓말까지 하잖아요. 뭐 느껴지는 거 없어요?”

설미와 효은은 서로 말을 놓고 미진에게도 말을 놓았다. 그렇게 되어 미진이 둘을 부르는 호칭도 언니.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니까……. 나도 나흘은 너무 길다고 생각해요. 그럼 사흘로 할까요? 2박 3일로.”

“죽어도 1박2일은 안 되죠?”

“너무 짧으면 애들도 싫어하니까.”

“……흠.”

미진은 다리를 꼰 자세로 발을 까딱였다.

“알았어요. 그럼 사흘로 해요.”

그 말에 설미가 당황했다.

“안 돼! 교장선생님이 계신데 우리 맘대로 바꾸면 어떡해…….”

“네? 진짜로 교장선생님이 정하셨던 거예요?”

“그렇다니까요, 왜 내 말은 안 믿고…….”

“선배님은 빠지세요.”

“왜 나만…….”

상호는 처량한 눈빛으로 효은을 돌아보았다.

“너도 뭐라고 좀 해봐. 사람이 부당하게 매도를 당하고 있는데…….”

“응? 뭐?”

효은이 빙수를 뜨다 말고 눈을 끔뻑였다.

“먹느라 못 들었는데. 근데 뭐 니가 욕먹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하루이틀이냐? 니 욕먹을 짓 하는 게.”

“됐어, 빙수나 먹어.”

한숨을 쉬는 상호에게 미진이 물었다.

“날짜는 나중에 조율한다 치고. 몇 명이 가는데요?”

그 말에 상호는 다시 효은을 돌아보았다.

“누나도 간댔지?”

“빙수나 먹으라매.”

“대답이나 해.”

“가지, 그럼. 혼자 여기 남겠냐?”

상호는 손가락을 꼽으며 속으로 셈을 했다. 일단 여기 넷. 해련, 민정. 그러면 다혜까지 확정이고.

세희와 태화는 무조건 따라올 테다. 다른 2학년들도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오겠지만, 사람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일단은 보류.

“최소 아홉 명, 최대 스물한 명이요.”

“네?”

미진의 눈이 퉁방울만해졌다.

“스물한 명이요? 아니……. 먹는 것도 문제고, 자는 것도 문젠데…… 그 돈은 누가 내요?”

“나.”

효은이 숟가락을 빙글 돌렸다.

“돈 걱정은 하지 마.”

“그럼 돈은 그렇다 치고…… 20명 밥은요?”

상호는 손사래를 쳤다.

“다 알아서 준비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래. 막내라고 너무 신경 쓰지 마.”

설미도 그를 거들었다.

미진은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는지 한결 풀린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근데 그럼…… 아직 애들한테는 안 물어본 거예요?”

“네.”

상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학이고 하니까, 가능하면 집에 직접 들러서 부모님들한테 여쭤볼까 생각 중이에요. 가정방문 겸해서…….”

“그래요?”

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반 나눠서 가죠.”

“어…….”

언뜻 듣기엔 나쁘지 않은 방법 같았지만, 그래도 담임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예의의 문제도 있고, 직접 얼굴을 마주해야 알 수 있는 것도 많으니까. 미진에게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

상호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알았어요.”

미진이 퉁명스레 눈을 흘겼다.

“그렇게 혼자 다 하세요. 늙어서도 혼자일 테니.”

“……여친 잘만 있거든요.”

그 여친은 바로 옆에서 빙수에 열중하고 있었다. 남친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는 관심도 주지 않고.

상호는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한숨을 쉬었다.

‘에휴, 얘가 내 편을 들어주는 날이 올까…….’

* * *

문가에 선 단비가 꼬리와 양손을 동시에 흔들었다.

“멍멍, 안녕히 가세요~.”

“응, 단비 나중에 보자.”

상호도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대부분의 집이 흔쾌히 승낙을 해 주었다. 계곡으로 2박 3일, 반 전체가 여행을 가는 것을.

3박 4일이 아닌, 2박 3일. 그와 미진이 함께 이뤄낸 쾌거.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진 씨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에휴, 하루라도 깎아서 다행이다.’

이제 남은 곳은 2학년들, 그리고 하솔의 집.

상호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2학년 애들은 전화로 해도 될 거고…….’

정확히는 전화로 해도 되는 게 아니라 전화로 해야만 한다. 나빛과 지윤을 만났다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제 하솔이네만 가면 되겠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핸들을 잡았다.

* * *

평범한 주택이었다.

주택이란 것 자체가 그다지 평범하지 않은 감이 있지만, 어쨌거나 외양은 평범한 주택이었다. 서울의 주택가라는 점은 좀 비범한 것도 같았다.

나빛의 집과 꽤 가까웠다. 대충 차로 20분. 신호나 차가 막히지 않으면 10분.

‘서울 온 김에 나빛이네도 들를까…….’

상호는 성창을 어떻게 맞아야 덜 아플지 계산하며 하솔의 집으로 다가갔다.

이미 오겠다는 연락을 준 터라, 대문 옆 벨을 누르자마자 누군가 안에서 달려 나왔다.

곧 발소리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아, 하솔이 안녕.”

“안녕하세요…….”

하솔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호는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하솔아, 이야기 들었어?”

“네?”

하솔은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다같이 계곡으로 3박 4일 여행 간다고…….”

“응?”

상호의 눈이 끔뻑였다. 3박 4일이 아니라 2박 3일인데.

잘못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2박 3일이야.”

“네?”

하솔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당황하며 떠듬거렸다.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뭘 죄송해. 별일도 아닌데. 들어가자.”

“아, 네.”

둘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 * *

“잘 오셨습니다.”

“…….”

상호는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저어……, 아직 밥때가 아닌…….”

“남기셔도 괜찮습니다.”

“다른 집에서 다과를 너무 많이…….”

“맛만 보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솔의 부모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상호는 먼저 앉지도 못하고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하솔이 그의 뒤에 공손하게 시립해 있었다.

그부터 앉아야 이들 모두가 앉을 듯했다.

‘모르겠다, 난…….’

그가 식탁 앞에 앉자 다른 셋도 자리를 잡았다.

뱃속의 과자 반죽이 찻물을 먹고 불어 있었지만, 그래도 차렸으면 먹는 것이 예의라 억지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상호는 밥을 목구멍에 욱여넣으며 하솔의 부모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뭐지……?’

어머니 쪽은 일전에 공개수업에서 봤다. 그래서 이미 눈에 익었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 쪽도 눈에 익었다.

‘어디서 만났던가?’

그건 아닌데.

누구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닮기야 하솔이랑 닮긴 했겠지.’

목소리를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언제 들었지……?’

상호는 고개를 기웃하며 숙주나물 무침을 집었다. 머릿속 생각 때문인지 입에 넣는 반찬들 맛도 익숙했다.

‘되게 맛있네. 하솔이네 어머님이 만든 건가? 딱 내 입맛인데…….’

효은이 이렇게만 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먹고 싶으면 지가 알아서 차려 먹으면 될 일이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인 법이니. 이런 밥을 해 주는 배우자가 있으면 기쁠 것 같았다.

입맛에 맞는 밥을 먹으니 옛 생각이 났다.

‘집밥이랑 똑같네.’

지금 집밥과도 같았고, 어릴 적 집밥과도 같았다.

상호는 언제 배불렀냐는 듯이 식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하솔의 아버지가 씩 웃었다.

“음식이 입에 맞으신가 봅니다.”

“아, 예. 뭔가 제 어머니 밥이랑 맛이 비슷해서……. 특히 이 나물이요. 어머님께서 만드신 건가요?”

“나물은 제 어머니가 하셨습니다.”

“아, 하솔이 할머님이…….”

순간 상호의 젓가락이 멈췄다.

‘……아니겠지?’

할머니라고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한 사람.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한다. 하지만 상호의 머릿속에서는 그간의 일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전화로 들었던 해련의 아들의 목소리.

은근슬쩍 끼워져 있던 하솔의 신청서.

해련의 방으로 찾아왔던, 목소리 작은 손녀.

‘우연일지도 몰라, 아직 확신은…….’

너무도 익숙한 반찬들의 맛.

다른 건 몰라도 미각만큼은 착각할 리 없었다.

‘……확정이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깨작이다가 잘 먹다가 또 깨작이니, 무엇 때문인지 궁금했으리라. 하솔의 어머니가 난색을 지었다.

“선생님? 물 좀 갖다 드릴까요?”

“아니요……, 으흠,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

안 먹으려 했는데 목이 막혀서 안 되겠다. 상호는 하솔의 어머니가 가져다준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해련의 손녀가 하솔.

이제야 두 사람이 왜 그런 행동들을 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만 빼고.

‘왜 숨겼지?’

하솔이 숨긴 것은 이해가 됐다. 조용하고 정직한 성격이니, 굳이 교장의 손녀라는 것을 알려 주목을 받거나 특별대우를 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련은.

‘쪽팔렸나 보구만, 교장이란 양반이 손녀를 반에 슬쩍 끼워 넣은 게…….’

하솔 때문에 고생을 한 건 아니지만, 해련이 그 몰래 그런 일을 했다는 게 조금 괘씸했다.

‘살짝 골려 주고 싶은데…….’

일단은 모른 척해야겠다. 그래야 나중에 역으로 속여먹을 방법이 생길 테니.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하솔의 부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들으셨지요? 제가 왜 뵈러 왔는지…….”

“예. 반에서 놀러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하솔이도 같이 가는 걸로 알면 될까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학부모들보다 특히 더 깍듯했다. 상호는 작년에 해련의 아들과 통화했던 것과, 해련의 방에 있던 아들의 사진을 떠올렸다.

‘그래, 그때 얼굴도 봤었구나. 20년 전 사진이긴 하지만…….’

아버지뻘에게 아버지란 소리를 듣다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기억이었다.

상호는 하솔의 아버지를 계속 보고 있기가 민망해서 빠르게 밥그릇을 비웠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차라도 한 잔…….”

하솔의 아버지가 하솔의 어머니에게 눈빛을 보냈다.

잘못하면 계속 잡혀 있겠다. 상호는 손사래를 치며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아니요. 또 다른 집에 들러야 해서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감사히 잘 먹고 갑니다. 아니, 마중은 안 나오셔도 됩니다.”

그는 그렇게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고 현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하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가세요.”

“으응, 하솔이 나중에 보자.”

상호는 집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안쪽에서 부부의 대화가 들렸다.

“어때 보여? 너무 젊지 않아?”

“생각보다 많이 어리긴 하네. 근데 뭐, 나이 든 것보단 오히려 나을 수도 있지.”

“자기는 괜찮아?”

“나? 뭐가?”

“어머님이 새시집 가시는 거.”

“뭐 어쩔 수 있나. 몇십 년을 사시다가 또 몇십 년을 살게 생겼는데……. 어머니가 알아서 하시겠지. 어머니가 누구한테 속거나 맞을 일은 없잖아. 그리고 저 정도면 많이 괜찮아 보여. 예의도 바르고.”

“근데 나는, 하솔이랑 비슷한 나이라서……. 게다가 선생님 주변에도 여자가 있을 거 아냐. 어머님이 상처받으실까 그게 걱정되는데…….”

“알아서 하시겠지. 어머니도 연애를 하고 결혼도 했는데.”

“그런가…….”

상호는 거기까지만 듣고 문에서 귀를 뗐다. 저쪽에선 해련과 자신의 사이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면…….’

해련은 그와 효은의 관계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 좋다고 달라붙는 것을 보면.

아마 효은처럼 기둥동서가 여럿이라도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을 터.

쉽게 밀어내지 못할 듯싶었다.

‘말라 죽게 생겼네. 살려면 밀어내야 하는데…….’

그러기엔 또 밥이 너무 맛있다. 그의 입맛을 정확히 저격하는 반찬들이라서.

고민을 너무 해서 그런지 아릿한 두통이 올라왔다. 대문을 나서는 걸음마다 한숨이 푹푹 쏟아져 나왔다.

‘몰라, 나는 몰라. 그냥 그때그때 되는 대로 살래…….’

그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차에 올랐다.

223. 계곡으로

“세희야…….”

상호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진땀만 줄줄 흘렸다.

“얘들 좀 떼줘…….”

“떼긴 뭘 뗍니꺼. 지들이 물건입니꺼.”

왼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지윤이 그를 노려보았다.

“하긴 쌤이 지들을 사람으로 생각하겠습니꺼. 물건잉께 말을 씹지예. 지는 물건이라 못 걸으니까 들고 가이소.”

“네 이웃의 처를 탐하지 말지어다…….”

등에는 나빛이 매미처럼 붙어서 속살거리고 있었다. 목에 팔을, 허리에 다리를 휘감은 채로.

따뜻한 숨결이 상호의 귀를 간질였다.

“네 이웃의 처를 범하지 말지어다…….”

“안 범했어, 나빛아……. 간지러워…….”

“거짓된 자들을 멸하리이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내공으로 둘을 들어 올렸다.

“쌤 바빠. 계곡 가면 놀자, 응?”

“넵.”

“네에.”

그제서야 둘을 떼어놓고 출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기숙사 앞에 주차된 미니 버스. 옆에서는 해련이 허공섭물로 짐을 옮기고 있었고, 민정과 설미, 미진이 준비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상호의 옆구리를 찔렀다.

“왜.”

“안 도와?”

“난 운전하잖아. 니가 돕든가.”

“난 돈 냈거든.”

“참나…….”

상호는 효은의 허리를 슬쩍 끌어당기고 옆을 흘끗했다.

아이들은 빠진 사람 없이 제때 잘 도착했고, 지금은 버스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따로 떨어진 아이가 한 명.

“……아으.”

다혜가 상호를 보며 눈을 깜작였다.

입에는 입마개, 손목에는 수갑.

상호는 지금 다혜와 아리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은 괜찮아 보이지만…….’

용고기로 교육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다혜는 아리를 만나도 이전처럼 침을 흘리며 달려들진 않았다.

대신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맴돌긴 했다.

‘구속을 풀어주기는 조금 이른 것 같네.’

상황 봐서 풀어주든가 말든가 할 것이다. 그는 둘을 계속 시야에 담은 채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태화와 지윤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야, 니 수영복 가져왔냐?”

“내는 챙깄다. 근디 와 묻노. 당연히 가져가는 거 아이가?”

“아니, 그냥 이대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나, 해서.”

“뭔 소리고? 거치적거린다고 치마에 빤쓰만 입는 가시나가. 그 꼴로 물에 들어간다꼬?”

“젖으면 쌤이 좋아할 거 아냐.”

“미친년…….”

듣고 있던 상호는 몰래 태화의 뒤로 다가가 꿀밤을 놓았다.

“아야!”

“가져와.”

“앗, 들었쪙?”

태화는 검은 연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태화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출발 준비가 다 끝나 있었다. 상호는 사람들이 다 탄 것을 확인하고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았다.

미니 버스. 밴과 버스의 중간 형태.

‘긁히진 않겠지?’

어째 날이 갈수록 운전하는 차가 점점 커지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조수석 문이 열렸다.

옆을 돌아보니 설미가 벨트를 매고 있었다.

“가다가 피곤하면 얘기해.”

“누나 대형 있어요?”

“아니.”

“네?”

그럼 왜 말하라는 건가. 상호가 멀뚱히 바라보자 설미가 웃었다.

“응원해 줄게.”

“…….”

뭔가 했더니 겨우 응원이라.

그래도 벌써부터 저 뒤쪽에 처박혀 자는 누구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다. 상호는 백미러로 효은을 흘끗하며 한숨을 쉬었다.

‘에휴, 암만 봐도 내가 더 힘들게 사는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대접해주는 게 아니라 쟤가 나한테 먼저 대접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해주면 해준 만큼, 아니 그 배로 돌려줄 텐데. 자기는 그런 거 할 줄 모른다며 뻗대고만 있으니.

언제쯤 사랑받는 날이 올까.

‘모르겠다, 진짜…….’

곧 차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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