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등급대로 기똥차구만.”
“……으음.”
상호는 쓰러진 은율을 보며 침음했다.
은율이 2등. 다혜가 1등.
그렇게 결정이 났다.
‘차이가 분명하긴 했지만…….’
조금 일찍 끝난 감이 있었다.
다혜가 오늘따라 집중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은 여유롭게 상대의 수준에 맞춰주고, 장난도 치고 그랬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어쨌든 내기는 내가 이겼군. 기대하고 있으라고.”
돌아서는 혁의 목소리에는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상호는 속이 타서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진짜로 할 겁니까?”
“물론.”
“진짜요?”
“약속은 지켜야지. 방학이라고 안심하지 마. 내가 직접 학생들에게 일대일로 전달해 줄 테니.”
혁은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걸어갔다.
상호는 그 뒷모습을 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강자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니 강자인 것이고, 약자는 백 번 싸워 백 번 지니 약자인 것이다.
그래도 은율이 최선을 다했다면 상관없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무언가가 손바닥을 간질였다.
고개를 돌리니 세희가 검지로 그의 손을 긁적이고 있었다.
“왜?”
“이사장님도 알고 계세요?”
“응. 등급만.”
상호는 세희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세희가 눈을 깜작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응?”
“정말로 은율이 아버지랑 싸울 거예요?”
“싸운다……라고 할 정도까진 가지 않겠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호는 세희의 뺨을 살짝 집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반 반장을 다른 반으로 보낼 순 없지.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요.”
세희가 어깨를 들썩였다.
“만약 선생님이 실패하시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응?”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네가? 어떻게?”
“은율이가 옮긴 반을 터트리면 돼요.”
세희의 눈이 싸늘하게 번득였다.
가끔 세희의 똘끼가 감당이 되지 않는다. 상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세희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수단과 방법은 가려야…….”
“은율인 제 거예요. 아무도 못 가져가요.”
“사람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선생님한테만 나눠드릴게요. 반 정도는 드릴 수 있어요.”
“사람은 나누는 게 아니야……!”
“위아래로 나눌까요? 아니면 앞뒤?”
세희가 빙긋 웃었다.
상호는 어질어질해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마……. 사람은 물건이 아니잖아…….”
“괜찮아요.”
세희는 그의 손을 은근슬쩍 잡았다.
“선생님은 애들이랑 안 나눌 거니까.”
상호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차라리 나누는 게 나을 것 같다. 안 나누면 찢어버릴 아이들이라서.
최소 네 조각은 확정이다.
‘우리 애들…… 너무 무서워…….’
그는 한여름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219. 천사의 진노
“아으.”
다혜가 수여받은 꽃목걸이와 상패를 들고 건흠에게 달려왔다.
“아으으~!”
“그래, 그래.”
건흠은 씩 웃으며 다혜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어.”
“므앙~.”
다혜는 방긋 웃으며 상패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혁을 돌아보며 건흠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아으아으!”
“응?”
건흠도, 혁도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기웃했다.
셋을 지켜보던 해련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우리 선생님 월급 올려 달라는 것 같은데.”
“으, 으아.”
“그건 아니고? 그럼 잘 가르치니까 잘 봐달라, 그런 뜻인가 보네.”
“므앙.”
다혜가 콧대를 높이며 건흠의 등을 열심히 두드렸다.
이것 때문에 꼭 1등을 하겠다고 했던 건가. 건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 말에 다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붕붕 내저었다.
“아우으으.”
“응?”
의아해하는 건흠에게 해련이 다시금 알려주었다.
“자기가 더 고맙다는 것 같은데.”
“……아.”
그 말에 건흠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1년 전 가장 속을 썩였던 제자가, 이제는.
‘다 컸구나.’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다혜는 고맙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맙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고개 숙인 건흠과 그의 등을 다독이는 다혜를 놔두고, 해련은 혁에게 조금 떨어져 있자는 눈짓을 했다.
혁이 해련의 뒤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결국은 1년 꿇은 아이가 1등하게 됐군요.”
“뭐 어때요. 어쨌든 학교는 2년째잖아.”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겠습니까. 귀찮아질 텐데 빨리 데리고 나가죠. 언론에서 달라붙기 전에.”
“그래요.”
해련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기뻐하는 다혜와 건흠을 흘끗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잠깐은 만끽하게 해주자고요.”
혁은 혀를 찼다.
“기자들 몰려들고 나면 난 모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학생 생각은 지극하네, 류 이사장.”
“먼저 가겠습니다.”
“아닌 척은, 푸훗…….”
눈살을 찌푸리며 걸어가는 혁의 귀에 해련의 웃음이 파고들었다.
* * *
은율은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내려올 때도, 상호의 곁에서 걸을 때도. 건물을 나와 상호의 차로 걸어갈 때까지도.
상호는 그런 은율을 바라보다가, 세희에게 눈짓으로 뒷자리를 가리켰다.
“은율이는 앞에 타.”
“네…….”
은율이 힘없이 차 문을 열었다.
상호는 세희와 은율이 차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운전석에 올라 벨트를 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렇게 될 경우도 다 생각해 뒀으니까.”
은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혼날 게 두려운 걸까. 아니면 반을 옮길 게 두려운 걸까. 상호는 조심스럽게 은율의 어깨에 손끝을 붙였다.
“은율아?”
“……싶었어요.”
“응?”
“이기고…… 싶었어요.”
손끝으로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졌다.
“꼭 이기고 싶었는데…….”
은율이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상호는 사람 좋게 웃으려다가, 은율의 턱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많이 낙심한 듯했다.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나. 위로가 되긴 할까. 둘이서 대화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닌데.
상호는 고민하다가 별것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를 내었다.
“뭐 어때? 2등이면 충분하지.”
“네?”
은율이 촉촉한 눈을 깜빡였다.
“1등해야…… 반에 계속…….”
“그건 아직 안 일어난 일이잖아.”
상호의 손이 핸들을 잡았다.
“이제부터 해결하면 되는 거지. 가자. 너희 아버님 뵈러.”
질질 짤 것도 없고, 질질 끌 것도 없다.
상호는 차를 몰아 은율의 집으로 향했다.
* * *
안대를 쓴 얼굴이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2등했습니다.”
“…….”
은율의 아버지, 우송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끔뻑였다.
둘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2등?”
“예. 저번에 말했던 그 특이한 아이한테 졌습니다.”
상호는 은색 상패를 흔들었다.
그 흔들림을 따라 우송의 눈동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게 자랑인가?”
“2등도 잘한 거 아니겠습니까?”
“분명 1등을 해오는 게 약속이었을 텐데.”
우송이 이글거리는 눈빛을 상호에게 보냈다. 감정이 확연한 게 이제는 검이 아니라 범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상호는 그 눈빛을 가벼이 흘려 넘겼다.
“사람이 1등만 하고 살 수는 없지요. 아버님도 헌터 1등은 아니시잖아요.”
명백한 시비. 그 말에 우송의 살기가 상호를 덮쳤다.
압박감이 거실을 가득 채우자 상호의 뒤에 서 있던 세희가 은율을 방으로 잡아끌었다.
“들어가자.”
“자, 잠깐만, 아빠, 선생님…….”
“괜찮아, 괜찮아.”
둘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순간 우송의 내공이 상호를 옥죄어 들어왔다.
우송은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내뱉듯 말했다.
“누가 틀렸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나?”
“1등을 못 한 순간부터요?”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버님. 이기고 지는 건 병가지상사입니다. 1등이 꼴등이 될 수 있고, 꼴등이 1등이 될 수 있지요. 제가 틀린 게 정해진 것도 아니고, 아버님이 틀린 게 정해진 것도 아니고, 은율이 인생이 망한 것도 아닙니다.”
“뭐…….”
“인생에 무를 수 없는 건 뒤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송의 코에서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선생이라 이건가? 날 가르치겠다는 건가?”
“하나 여쭙겠습니다.”
상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송을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아버님이 생각하시기에 좋은 선생의 조건은 뭡니까?”
“강해야지.”
우송도 같은 눈빛이었다.
“자네가 경험이 많을 순 있어.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돼. 강해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법이니까.”
“그럼 저보다 강한 교사를 찾아서 거기로 보내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되겠지.”
“알겠습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버님. 이게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음?”
우송은 상호가 들어 올린 손을 바라보았다.
검지와 엄지 사이, 얇고 희끗한 실 하나.
아니, 머리카락.
“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고, 두 개가 됐네. 네 개, 여덟 개……. 신기하지 않습니까?”
눈앞에서 그 수를 늘려가는 흰머리를 바라보며, 우송은 할 말을 잃었다.
한두 개 뽑아갈 때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이제는 느껴졌다. 8개, 16개를 뽑아가는데 모를 수가 있겠는가. 두피의 따끔거림이 지금도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런데도 상호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보이지가 않았다.
‘대체…….’
아주, 아주 희미한 바람만 눈썹을 간질일 뿐.
무예가의 자존심이 점차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러거나 말거나 상호의 손에는 새치가 한 움큼 쌓여가고 있었다.
“아버님이 따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는 흰머리만 봐도 알겠습니다.”
“…….”
“그렇지만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 보십쇼. 그렇게 칼마냥 날카롭고 딱딱하게 사니까 확 늙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젊게 살면 또 좋은 것이고…….”
“…….”
“다 됐습니다. 이야~ 회춘을 하셨네.”
상호는 허공섭물로 거울을 가져와 우송을 비췄다.
우송은 얼이 빠진 채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상호의 말대로 몇 년은 젊어 보였다.
이런 걸로 기뻐할 인종은 아니지만.
“……강 선생님.”
“예.”
“등급이?”
“B급입니다.”
“정말로?”
상호의 눈동자가 삐딱하게 천장을 향했다.
“그럼 설마 아버님보다 위겠습니까?”
그 말에 우송은 한 단어를 떠올렸다.
반신반의. 정확히 반반이었다. 명백히 자신보다 강하지만, 그래도 설마.
그러던 차에 상호의 안대와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헌터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
“……그렇군요.”
우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말하는 바는 알겠지만…… 아버지로서 어쩔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은율이는 사실상 1등이라니까요.”
상호는 쓴웃음을 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냥 특이한 애가 한 명 있어서 그렇지……. 아버님. 쓰레기통이 어디입니까?”
“저기, 주방 쪽에…….”
“감사합니다.”
상호의 손에서 머리카락들이 둥실 떠올라 주방으로 향했다.
“어쨌든간에…… 은율이는 잘 하고 있고.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저도 잘 하고 있으니…… 아버님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우송은 묵직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해결됐다. 상호는 마주 고개를 숙이며 상패를 내밀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송이 상패를 받아들었다.
그 내용을 읽기 시작한 우송을 뒤로하고, 상호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 은율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닫힌 문을 두드렸다.
“얘들아. 이야기 끝났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고 멀뚱히 서서 기다리는데, 안쪽에서 세희의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님.”
“응?”
“이게 대체…….”
상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선생님 들어가도 돼?”
“…….”
“들어…… 들어갈게.”
“…….”
문을 열자 은율이 덜덜 떨고 있었다.
그 옆에 선 세희가 상호를 향해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선생님.”
“으……응?”
“아무리 그래도 미진 선생님까지…….”
상호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니야.”
“남자친구 있다고 했는데…….”
세희와 은율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기어코 보냈구나.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게다가 교실에서…….”
“아니라고…….”
“그것도…… 억지로 책상에 눌러서…….”
“아니라니까……!”
증거를 인멸해야 한다. 사진을 싹 지우고 이사장을 차단해서. 상호는 애써 웃으며 둘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줘봐.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선생님…….”
은율이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저,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무슨 소리야!”
“그치만…… 선생님은, 괜찮으니까…….”
“아니,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준비할 시간을 주세요…….”
“……여기 너희 집이야!”
우송이 들으면 큰일 난다. 상호는 황급히 세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세희야. 학교 가자…….”
“전 그럼 차에서 부탁드려요.”
“무슨 소리야! 빨리 가자, 빨리…….”
그는 그렇게 세희와 함께 부리나케 은율의 집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