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2화 (232/501)

* * *

상호는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애들은 별로 없네?’

평가는 이미 시작됐다. 세희와 은율도 경기장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경기장 주변에 선 아이들의 줄은 상호의 예상보다 훨씬 짧았다.

경기장을 반반 나눠 1학년, 2학년. 각각 100명쯤. 밖에 있던 수백 대의 차들은 학교에서만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마 헌터 협회 직원들, 언론사 기자들, 그리고 헌터와 관련된 사업을 하는 사람들.

‘하긴 헌터 학교가 100개씩 있는 것도 아니고…….’

전국에 헌터 양성 고등학교는 50개가 채 안 되니, 학교마다 1학년 2학년을 두세 명씩 뽑아 왔다고 하면 얼추 계산이 맞는다. 상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른 아이들의 경기를 구경했다.

방식은 학교에서의 평가와 대동소이했다. 정령이 만든 경기장에 결계를 치고, 보호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전투.

사람들은 굳이 객석에 올라가지 않고 경기장 주변에서 구경을 했다.

‘다혜는 어디…… 아, 저긴가.’

다혜는 이미 상대를 쓰러트리고 경기장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애는 누구야?”

“예현여고 전투복인데……. 명문은 명문인가.”

“저분이 예현여고 교장이지? 꼭 붙어 다니네. 기대를 많이 받나 본데.”

해련도 함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상호는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예현여고의 위상을 실감했다.

‘엄청 유명한가 보네. 나는 다른 학교는 이름도 모르는데…….’

그때 은율이 경기장으로 올라서는 게 보였다.

상대는 이름 모를 학교의 남학생.

‘되게 늙어 보이네. 남고생 맞지?’

상호는 그런 의문을 품으며 둘을 주시했다.

세희와 은율 둘 다 여중 출신은 아니니, 남학생과도 싸워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세희는 1등으로 졸업해서 장학금 받고 예현여고에 온 거고.

은율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

‘자주 이겨 봤겠지.’

맨몸 격투에서야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불리하지만, 검술은 그렇게 심하지 않다. 내공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 약간의 차이도 없어지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은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색이 어둡고. 식은땀을 흘리고.

‘배탈이라도 났나?’

상호도 덩달아 당황했다.

돌연 은율과의 상담이 떠올랐다. 남자 어른을 보면 가슴이 선뜩해진다던.

‘노안이라 그렇구나……!’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동병상련의 아픔이 느껴져서.

‘저 녀석 잘못은 아니지…….’

은율이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상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둘의 움직임을 찬찬히 살폈다. 왼쪽으로 옆걸음을 치는 남고생, 그에 따라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는 은율.

‘저 녀석도 자기 학교에선 순위권이겠지.’

예현여고의 평범한 학생들과는 다를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남고생은 제법 빠르게 은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타이밍도 매섭고, 노리는 곳도 정확했다.

하지만.

채앵

부러진 칼날이 하늘을 날았다.

은율은 재빨리 검을 집어넣고 도망치듯 경기장을 내려왔다. 졸아든 마음을 진정시키려는지 가슴팍에 손을 얹고서.

남고생은 찌르던 자세 그대로 부러진 검을 들고 서 있다가.

곧 기우뚱하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풀썩……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쓰게 웃었다.

‘무서워서 더 세게 때렸네…….’

전화위복이 되었다. 앞으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들의 대화가 들렸다.

“규모가 더 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인재 발굴의 기회도 늘어나고, 관심도 늘어나고 언론도 좋아하고…….”

“규모도 규모지만 너무 졸속이 아닌가 싶습니다. 적어도 3일, 4일 정도 시간을 둬야 정확한 평가가 될 텐데요. 애들도 휴식을 취하고…….”

“헌터는 땅에서 파내는 게 아닙니다.”

익숙한 목소리.

상호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저기 서 있는 심판, 안전요원 모두 S급 상위 헌터들입니다. 협회 소속 직원도 있고, 아르게스 방면을 지키는 헌터도 있고, 경찰과 협력하는 이들도 있지요. 저 사람들을 한군데 묶어두는 것만으로도 나라 어딘가에 부담이 생깁니다.”

“……으음.”

“평가의 취지는 알겠습니다만, 부협회장인 제 입장에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기척을 느꼈는지, 도현의 눈동자가 상호를 향했다.

“굳이 규모를 키우지 않아도 사업적으로 흥행시킬 방법은 많다고 봅니다. 그쪽으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도와드리죠. 전 만날 사람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양복을 입은 이들이 도현에게 허리를 굽혔다.

상호는 도현과 눈을 마주쳤다. 흔들림 없이 고요한 눈빛으로.

‘알고 있어.’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태화에 관한 일을 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연락을 피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현은 상호의 소재지를 알고 있으니.

66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잘못한 게 없다면…… 직접 와서 말하라고.’

상호는 검지로 예경의 검을 톡톡 두드렸다. 일부러 도현에게 보이게끔.

그러자 도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입가를 우물거리다가.

상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야지.’

상호도 도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218. 저마다의 사정

도현은 피로에 찌든 눈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너도 왔구나.’

예현여고가 참가하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중에 상호의 제자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때 벚꽃 축제에서 본 네 명의 아이들. 일단 뿔이 달린 아이는 안 왔고, 아마 저 멀리 머리를 굵게 땋은 아이인 것 같았다.

도현은 상호를 향해 걸어갔다. 도중에 대화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달라붙었지만, 가볍게 뿌리치고 똑바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둘은 서로를 마주했다. 칼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지.’

도현은 그런 뜻을 담아 옆으로 턱짓을 했다.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좀 걷자고.”

“그래.”

둘은 경기장 외곽을 걷기 시작했다.

도현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상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슨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

화가 났는지, 아니면 별생각 없는지.

그렇지만 상호는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도현이 먼저 묻게 되었다.

“잘 지내냐?”

“그럭저럭.”

상호치고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형은?”

“죽을 맛이다.”

도현은 숨기지 않았다.

“잡아서 죽이고, 잡아서 죽이고…… 곧 하루에 두 명을 죽이는 날이 올지도 몰라. 그날이 오면 난 미치게 되겠지.”

“부하들한테 맡겨.”

“내가 살인 공장 공장장이냐?”

도현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상호는 태연하게 흘려 넘겼다.

“세상 모두가 부담할 일인데 형만 그러는 게 미련한 거지. 나였다면 나 혼자 책임지진 않았을걸.”

“네가 그럴 수 있었을 것 같냐?”

도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오히려 이게 편한 일이다. 이런 일을 남에게 맡겼다가는…… 죽은 사람 원한도, 죽이게 한 사람 원한도 모두 내가 사게 되겠지. 그러면 믿을 만한 사람은 다 떠나가고……, 나 혼자 남게 되는 거야.”

“그걸 가지고 형을 원망하는 놈들이 잘못된 거라니까? 지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언제까지 혼자 책임질 건데?”

상호가 검지를 들어 도현의 얼굴을 가리켰다.

“똑똑히 알아둬. 난 형이 전혀 안 불쌍해. 형이 바보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이거는.”

“이게 내 최선이다.”

“최선이 아니라 아집이겠지. 원하는 사람 하나 없는…….”

“상호야.”

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구석진 곳이었다.

“나 아직 안 미쳤다.”

“그건 알아.”

“그런데 내가 곧 미칠지도 몰라.”

도현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그때가 되면…… 형이 미쳤구나, 하고 그러려니 해라. 네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을 내리더라도…… 한 번만. 딱 한 번만 이해하고…… 양보해 줘라.”

“글쎄.”

상호는 무정하게 돌아섰다.

“난 세상에 빚진 거 없어. 내 X대로 할 거니까, 형이 세상을 위하든, 사람을 죽이든, 무슨 짓을 하든 상관 안 해. 하지만 만약……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을 한다면.”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쏘았다.

“나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 명만 바치면 된다고. 한 명으로 수백의 목숨을, 나아가 세상을 지킬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은 열리지 않고.

그저 멀어지는 상호를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나도 내 신념이 있다. 내게도 물러설 수 없는 한계가 있어. 세상이 나더러 그 선을 넘으라고 한다면…… 부득불 네 선을 침범할 수밖에 없다.’

그는 터덜터덜 경기장을 향해 걸어갔다.

* * *

“쟤는 누군데 목검으로 사람을 패고 다니냐?”

주변에서 학생들이 소곤거렸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아, 나 저기 다니는 애한테 들었어. 너무 강해서 검을 못 들게 했대.”

“뭐? 뭔 소리야, 그게. 쟤넨 아티팩트가 없어?”

“몰라. 근데 진짜 세긴 하네.”

그 말대로 세희는 상대를 순식간에 쓰러뜨리고 내려왔다.

하지만 은율에겐 보였다. 세희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목검이 손에 익지 않았는지, 혹은 내공과 근육이 적어서 남학생들을 상대하다가 체력이 바닥났는지. 어떠한 이유에서든 상당히 지친 상태라는 것을 은율은 알 수 있었다.

경기장에서 내려온 세희가 은율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겼지?”

“응.”

둘 다 당연하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 언니는?”

“저쪽에.”

세희의 시선이 은율의 검지 끝을 향했다.

그곳에서는 다혜가 한 남학생을 결계 끝까지 날려버리고 있었다.

“아으!”

아웃으로 들린다면 착각일까. 은율은 그 모습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이겨야 할지.

고민이 얼굴에 드러났을까. 세희의 손이 은율의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응?”

“너한테 가기 전에 내가 보내버리면 되잖아.”

그 말에 은율은 잠시 멍했다가 설핏 웃었다.

“그러게.”

“그러니까 걱정 말고 1등이나 해.”

세희는 그 말을 남기고 다혜가 있는 경기장을 향해 걸어갔다. 당당하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부럽네.’

은율도 다음 경기를 위해 자리를 떴다.

* * *

거르고 걸러 32강.

세희는 경기장에 올라서서 목검을 들어 올렸다.

“점점 일찍 만나게 되는 것 같네요.”

“아으아으.”

“나한테 진 거 기억나요?”

“아으?”

다혜가 멍청한 표정으로 놀리듯이 고개를 저었다.

“므앙~, 므앙~.”

“……그럼 기억나게 해줄게요.”

세희는 한숨을 쉬고 다혜에게 달려들었다.

다혜는 반 발짝 뒤로 물러나 가볍게 목검을 피했다. 그러고는 가볍게 통 하고 뛰어올라 세희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무언가가 세희의 목을 훑었다.

바람보다 빠르게 다가온 칼날의 예기.

‘……윽!’

세희의 목에 난 솜털이 바짝 솟았다.

간신히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어느새 착지한 다혜가 칼집으로 발목을 거는 것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앗……!”

훨씬 빨라진 움직임. 세희는 당황하며 목검으로 땅을 짚고 팔의 힘으로 뛰어올랐다.

그동안 봐주고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기말평가에서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는 어느 정도 상대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진심이 아니었다 이거야?’

세희는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려 목검으로 다혜를 내리쳤다.

아니, 다혜가 있던 곳을 내리쳤다.

‘늦었다…….’

당황한 세희의 허리에 다혜의 검이 날아들었다.

“크윽!”

목검보다 묵직한 고통.

땅바닥에 처박힌 세희는 고개를 들어 다혜를 올려다보았다.

“아……으.”

“……뭐라는 거예요.”

세희가 묻자 다혜가 검지를 들었다.

하나.

“1등이요?”

“아우으으.”

다혜는 빙긋 웃고는 휘적휘적 걸어 경기장을 내려갔다.

말도 못 하면서 달랑 1등이라고만 말하고 가버리면 뭔 뜻인지 어떻게 알아듣는가. 세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하는 언니야, 진짜…….”

참으로 답답한 사람.

그녀는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심판의 부름을 듣고 일어나 힘없는 발로 경기장을 터덜터덜 내려왔다.

다른 경기장에서는 이미 16강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잘 올라왔네.”

상호는 은율을 돌아보았다.

“결승전이라고 딱히 긴장되진 않지? 넌 익숙하잖아.”

“…….”

“아직도 걱정돼?”

“……솔직히.”

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이긴 적 없다. 이길 뻔한 적도 없다.

세희에겐 비장의 수가 있는 모양이지만, 자신에겐 그런 것도 없었다.

“어떻게 이겨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말에 상호가 은율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치만 도망치진 않을 거지?”

“네.”

“지고 싶은 것도 아니잖아?”

은율은 눈을 치켜 경기장을 올려다보았다.

“네.”

“가서 후회 없게 싸워보라고.”

상호의 손이 은율의 등을 힘 있게 두드렸다.

은율이 경기장에 오르자 반대쪽에서도 다혜가 올라왔다. 다혜의 뒤편에는 팔짱을 낀 건흠과 뒷짐을 진 해련이 서 있었다.

은율은 하얗게 올라오는 결계를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 * *

“좋으시겠습니다.”

상호는 뒷짐을 진 채로 경기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둘 다 우리 학교라서.”

“당연하지.”

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기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내 목표는 이미 달성했고. 이제 자네 아이만 1등하면 되겠구만. 1등 못 하면 어떻게 되는지 기억하고 있지?”

‘아차……!’ 상호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물론……이죠.”

“기대가 커. 담임의 본모습을 애들이 알면 어떻게 될지.”

“…….”

“시작이군.”

혁이 턱을 들었다.

결계 속에서는 은율이 검을 들어 다혜를 겨누고 있었다. 그렇게 옆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언제든지 걸음을 무르고 어디로든 뛸 수 있도록.

그렇게 원을 그렸다.

“누가 이길 것 같나?”

혁의 물음에 상호는 고민했다.

“목숨을 걸으라면 다혜에게 걸겠습니다.”

“그럼 내기를 왜 했어?”

“목숨이 걸리진 않았잖아요.”

“내가 너무 가벼운 걸 걸었나?”

혁이 혀를 쯧 찼다.

“어쨌든 다혜가 이긴다, 이거지?”

“확률만 따지면 그렇다는 거죠.”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근데 전투는 확률이 다가 아니니까요.”

“개소리도 그럴듯하게 해야지. 확률이 다가 아니면 그 아닌 것까지 포함시켜야 확률이 되는 거지.”

“……대충 알아들어 주십쇼. 전 이제 집중해야겠습니다.”

은율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 * *

‘1등해야 돼.’

소녀는 그렇게 되뇌었다.

‘1등해야…… 선생님이랑 같이 있을 수 있어.’

치켜든 검이 시퍼렇게 빛났다.

소녀는 가까워지는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검을 내리쳤다. 상대는 별로 당황한 기색 없이 공격을 막았다.

감정을 알기 힘든 얼굴.

소녀는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은혜를 갚는 방법은…….’

소녀의 검이 상대의 어깨를 스쳤다. 아슬아슬하게.

‘이것뿐이야.’

예상외로 비등하다. 수련의 성과일까.

소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머릿속의 검로를 정확하게 다잡았다.

‘1등이 아니면…….’

노리는 곳은 어깨.

‘선생님이 내게 해준 게.’

소녀의 손이 검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려…….’

칼끝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상대의 눈동자가 소녀의 검을 포착했다. 소녀도 그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빠르게, 더욱 빠르게.

속도라면 자신 있으니까.

사악……

느려진 세상에서 검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흔들림 없는 검에서는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이 그랬다. 마치 진공에 검을 휘두르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소녀는 쓸데없는 감각을 소거해 나갔다.

상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

극도의 집중으로 바싹 마른 입속의 깔깔함.

상대에게 오롯이 집중된 시각과 청각.

종국에는 검을 쥔 손의 촉각마저 잊고,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만 남았다.

‘됐다.’

소녀는 성공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빼고.

‘오늘은 아니야.’

오늘만은,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온 힘, 온 마음을 다해서.

다혜는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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