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 아침.
“오른쪽으로 갔어야지.”
또렷하고 날카로운 꾸중이 날아왔다.
“오른쪽으로 반 발짝만 갔으면 네 검으로 막을 각도가 만들어지잖아. 대체 여태 뭘 배운 거야?”
“……윽.”
은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검을 늘어뜨렸다.
무예가들이 오는 수련 도장. 평범한 도장과 달리 옆으로도, 위로도 넓었고, 벽에는 거울이 없었다.
바닥에 깔린 푸른 매트에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발을 놓는 것도 항상 옆으로 움직이라고 했지. 앞뒤로 움직이는 건 상대한테 맡기라고, 그럼 너는 각도만 신경 쓰면 된다고! 그새 잊어버린 거냐?”
아버지의 호통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은율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은율의 입에서 불분명한 웅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하셨어요.”
“뭐?”
“강한 적을 상대로 이것저것 재지 말라고 하셨어요. 계산하면 주저하게 되고, 그 시간만큼 반응이 늦어진다고…….”
“그러면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막 지르겠다고?”
“도망치라고 하셨어요.”
“뭐?”
“다음에 만나서 쓰러트리면 된다고…….”
은율의 아버지, 도우송의 코에서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 선생이 너한테 그렇게 가르쳤다고?”
“네.”
“그런 약한 마음가짐 때문에 성적이 그렇게 떨어지는 거야. 싹 잊어버려. 넌 아무래도 다시 배워야겠다.”
우송은 목검을 들어 은율을 가리켰다.
“반도 바꿔. 베테랑인줄 알았더니 개똥철학을 가르치고 있군. 무예를 배우라고 보냈더니 쓸데없는 것만…….”
그때 도장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안대를 쓰고 검을 짚는 청년과 머리를 굵게 땋은 소녀.
은율은 둘을 보고 환하게 반색했지만,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우송이 상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강 선생.”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말을 이었다.
“은율이 수업하러 왔습니다.”
“지금은 내가 가르치는 중이라서.”
우송의 날카로운 눈빛이 상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강 선생이 우리 딸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조금 의심이 들던 참이요.”
“사람 셋이 있으면 그중 한 사람한테는 배울 게 있다고 하잖습니까.”
상호는 씩 웃으며 세희와 은율을 눈짓했다.
“아버님도 저희 셋 중 한 사람한테는 배울 게 있겠지요.”
어이가 없었을까. 우송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 선생.”
“예.”
“등급이?”
“B급입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네가 나보다 무예를 잘 알까?”
“강한 헌터와 좋은 교육자는 기준이 달라서요. 최고의 헌터가 최고의 선생은 아닌 법입니다.”
그 말에 세희가 상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작였다.
상호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우송과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전국평가까지만 맡겨 주십시오, 아버님.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송이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언제요?”
“오는 일요일입니다.”
상호는 확신에 가득 찬 눈빛을 보냈다.
“한번 믿고 맡겨 보시죠. 어차피 아버님 예정에는 없던 평가잖습니까.”
그제서야 우송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보지.”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애들하고 수업하러 가보겠습니다.”
상호는 은율에게 웃으며 입구를 턱짓했다.
그런데 우송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1등.”
“네?”
“1등 아니면 인정 안 합니다.”
우송의 눈빛은 아직도 날이 서 있었다.
“1등 못 하면…… 2학기엔 반을 바꿀 거요.”
“알겠습니다.”
흔들림 없이, 자신만만한 목소리.
상호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굽히고 아이들과 함께 도장을 나섰다. 등 뒤로 우송이 가만히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세희가 그를 향해 물었다.
“최고의 헌터는 최고의 선생님이 아니에요?”
“아무래도 그렇지.”
“그건 선생님이 틀린 것 같아요.”
“응?”
“제가 아는 최고의 헌터는 최고의 선생님이던데요.”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싸우는 것과 이끄는 것은 천지차이라는 것을.
그런데 은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웃했다.
“저어…….”
“응? 은율이 왜?”
“최고의 헌터는 누구 말하는 거예요? 최고의 선생님은 알겠는데…….”
엎드려 절 받았구나. 상호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세희의 입꼬리가 살살 올라갔다.
“은율이는 언제쯤 알게 돼요?”
“나중에, 조금 먼 나중에……. 확실한 건 언젠가는 분명히 알게 되겠지.”
“그렇겠죠?”
“응.”
같은 비밀을 간직한 둘. 상호와 세희는 서로를 돌아보며 키득거렸다.
그 모습에 은근히 소외감이 들었는지, 은율은 서운한 표정으로 상호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말해주세요, 저도…….”
“미안~.”
“수녀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수녀님도 교생 일 잠깐 하셨다고 들었는데…….”
“으음, 뭐. 대충 비슷하다고 해 둘까? 세희 네가 보기엔 어때?”
“한 50프로 정도는 근접하지 않았나~ 싶어요.”
“뭔데, 뭔데……. 말해줘…….”
“안 돼~.”
낄낄대는 둘과 쩔쩔매는 하나는 그렇게 건물을 나섰다.
217. 각자의 이유
‘날도 좋군.’
건흠은 학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학이라 교정이 한산했다. 사복을 입은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돌아다녔고, 텅 빈 주차장엔 학생들의 예쁨을 받는 길고양이가 거닐고 있었다. 불 꺼진 본관은 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학생도, 교직원도 쉬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시기.
원래대로라면 건흠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겠지만, 사정이 있어 그러지 못하고 학교에 남아 있었다.
‘곧인가.’
전국평가까지 3일.
신청은 오래전에 끝냈다. 그가 맡은 아이들 중에서 전국평가를 나가는 아이는 딱 한 명.
그 아이가 지금 교장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으아으~.”
다혜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건흠이 일어나려 하자 해련이 손을 까딱여 그에게 앉으란 뜻을 전했다.
“날이 덥네. 잘 쉬고 있어요?”
“예.”
건흠은 다혜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
“아으.”
다혜가 그의 옆에 앉았다.
슬그머니 거리를 두는 해련의 뒷모습을 흘끗하며, 건흠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다혜야.”
“으아.”
“전국평가 있잖아.”
“므앙.”
“안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에 다혜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므으으.”
“나가고 싶어?”
“아으아으.”
뜻이 확고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혜를 전국평가에 내보내려니 마음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사고가 날지 몰라서.
‘대체 왜 나가려는 걸까. 그걸 알고 싶은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때 다혜가 검지를 치켜세워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건흠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무슨 뜻이야?”
“아으. 아으.”
다혜는 그저 검지만 내밀 뿐이었다.
“아아으, 아으!”
“응……?”
한참을 골똘히 고민하고 나서야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1등하겠다고?”
“므앙.”
다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건흠은 설핏 웃었다. 제자가 열심히 하겠다는데 기쁘지 않을 선생이 어디 있으랴.
왜 꼭 1등을 하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그럼 전국평가 준비…… 열심히 하자.”
“아으아으!”
“오랜만에 대련 한번 할까?”
“으아으.”
“칼 가져오자.”
둘은 벤치에서 일어나 본관으로 향했다.
* * *
“오늘은 이쯤 하자.”
그 말에 은율과 세희가 검을 집어넣었다.
노을이 지는 공원. 은율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상호는 멀찍이서 구경 중인 동네 꼬마들과 노인들을 흘끗하고 말을 이었다.
“은율이 집중이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내일부턴 다른 곳으로 갈까?”
“아니요.”
은율이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 때문은…… 아니에요.”
“고민이 있나 보네.”
“……네.”
“지금 말하긴 좀 그런가?”
상호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세희를 돌아보았다.
은율은 다시 고개를 젓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가 1등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고민일 만도 하다.
상호는 손을 비비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을 지어냈다.
“다혜 때문이겠지. 그치?”
“네.”
“확실히 이기기 힘든 상대야. 그렇지만…….”
상호의 손이 은율의 손을 잡았다.
“전투의 목적은 생존이야. 그렇지?”
“네.”
“그래서 너희한테 강한 몬스터를 만나면 도망치라고 가르쳤던 거야. 강한 놈이랑 싸우면 백 번을 싸워도 백 번 진다. 한 번쯤은 천운으로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도박은 바라면 안 되니까, 도망쳐서 힘을 기르든가, 사람을 모아서 다구리를 치든가 하라고 가르친 거야.”
“……네.”
“그런데 전투의 목적이 생존이 아니라면?”
상호는 은율과 눈을 마주쳤다.
“생존이 목적이 아니라 상대를 쓰러트리는 게 목적이라면? 네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뭐겠어?”
“최선을 다해서…….”
“그렇지.”
답은 정해져 있다. 상호의 손과 눈에 힘이 실렸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일단 최고의 결과를 만들고 그 후에 계산하는 거야. 넌 싸울 생각만 해. 알았지?”
“네.”
대답하는 목소리가 한결 맑았다.
상호는 안심하며 은율의 손을 놓고 세희와 은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밥때가 됐네. 먹고 들어가자?”
“저, 저는 집에서…….”
“에이, 세희도 왔는데 같이 먹고 가.”
“어머니가 차려 놓으셨을 것 같아서요…….”
은율이 난색을 지으며 주춤주춤 집 방향으로 걸어갔다.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그래.”
상호는 손을 흔들었다.
저녁은 세희와 단둘이서 먹겠구나. 그렇게 여기고 돌아서는데 세희가 그를 올려다보며 불렀다.
“선생님.”
“응?”
“은율이 1등 못 하면 진짜로 포기하실 거예요?”
“아니.”
상호는 입맛을 쯥 하고 다셨다.
“그러면 아버님하고 맞짱 한번 까야지.”
누가 위인지 똑똑히 알려줄 것이다. 물론 학부모니까 적당히.
그런데 세희가 피식 웃었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그래?”
“네. 제가 선생님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아서.”
“으음…….”
그 스승에 그 제자라. 상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향해 걸어갔다.
“밥 뭐 먹을까? 한식이 좋지?”
“네.”
“국밥 어때?”
“좋아요.”
메뉴를 정할 때도 죽이 척척 맞는 스승과 제자.
이제는 걸어가는 걸음걸이마저 똑 닮아 있었다.
* * *
일요일. 대회 당일.
상호는 차 양옆을 둘러보며 진땀을 흘렸다.
“아이고……. 꽉 찼네.”
주차장에 차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많이도 오는구나. 이래서야 하루 만에 평가가 끝날지 걱정이었다. 상호는 혀를 끌끌 차며 주차장을 빙 돌았다.
마침 구석에서 차 한 대가 자리를 빼고 있었다.
‘다행이네.’
그는 주차를 마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리자.”
“네.”
세희와 은율이 차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린 셋은 고개를 들어 돔 형태의 구조물을 올려다보았다. 돔의 크기로 미뤄보아 안쪽의 경기장도 학교 운동장보다 네 배는 클 듯했다.
사람도 그만큼 많아 보였다.
‘그래도 토너먼트니까, 경기장만 많으면 금방 끝나겠지…….’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혜는 건흠이 데려오기로 했다. 그리고 다혜의 경기를 감시할 해련도 함께. 듣기로는 이사장까지 올 수도 있다는 모양이었다.
‘알아서 오겠지.’
그는 돌아서서 경기장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