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501)

* * *

꽤나 값져 보이는 아파트.

상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16층을 누르는 은율을 바라보았다.

‘교실에 있을 때보다 표정이 안 좋네.’

겉으로 감정을 잘 드러내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상호의 눈동자가 바쁘게 이리저리 굴렀다.

‘아파트 앞에서 헤어졌어야 했나?’

온 김에 인사 한번 하겠다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잘못된 결정이 아니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도 없고.

‘뵙고 가야지, 뭐. 어쩌겠어…….’

상호는 가슴을 졸이며 16을 향해 올라가는 숫자를 쳐다보았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율이 먼저 내렸다.

‘문부터가 비싸 보이네.’

도둑이 들면 문도 떼어가겠다. 상호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은율이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은율은 현관을 쓱 둘러보더니 아직 들어서지 않은 그를 돌아보았다.

“두 분 다 외출하셨나 봐요.”

상호의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

“아, 잘됐다. 그럼 선생님은 이만…….”

“쉬고 가세요.”

은율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몇 시간째 운전하느라 피곤하시잖아요.”

그 말도 맞긴 하다.

하지만 은율의 부모가 돌아오면 무슨 취급을 받게 될지가 눈에 선했다. 상호는 손을 내저어 한사코 거절했다.

“괜찮아, 난 차가 편해…….”

“조금만…….”

은율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같이 있어 주세요.”

상호의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그런 사건이 있었던 아이가, 남선생과 단둘이 집에. 은율의 부모가 경찰을 불러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은율아, 나 죽어……, 사회적으로…….’

하지만 그의 몸은 은율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 *

“드세요.”

은율이 앉은뱅이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주 펄펄 끓고 있다. 한 모금 마시면 내장까지 익혀버릴 것처럼. 상호는 가습기마냥 올라오는 김을 보며 은율의 뜻을 깨달았다.

아주 오래 눌러앉다 천천히 가시라.

‘곤란한데…….’

상호는 살짝 잔을 잡았다가 그 뜨거움에 흠칫하며 손을 뗐다.

‘많이 곤란한데……. 아, 그래.’

차라리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자. 그러면 의심을 덜 받을 것이다. 그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아버님이…… 헌터셨지?”

“네.”

“어머님도 그쪽 일 하시고.”

“네.”

“집에 자주 없으셔?”

“네.”

“그렇구나…….”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무예가시고…….”

“네.”

“어머님은 마법을 쓰시는데 현장직은 아니시라고.”

“네.”

“외동이랬지?”

“네.”

“…….”

대화를 하기보다는 그냥 같이 있고 싶은 걸까.

상호는 뜨거운 차를 억지로 홀짝이며 은율의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옷장, 책상, 책장.

책장에 꽂힌 책은 내용도 무겁고 무게도 무거워 보였다.

‘딸한테 기대가 크구만…….’

나빛과는 경우가 다르다.

상호가 그렇게 방을 살피고 있자 은율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그 낌새를 알아채고 황급히 시선을 찻잔에 고정했다.

‘너무 대놓고 봤나?’

빨리 나가고 싶다. 그는 내공을 입 안에 두르고 차를 털어 넣었다.

은율이 그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서려 했다.

“더 가져올…….”

그런데 다리가 탁자에 걸리고 말았다.

은율은 급히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전투 중도 아니고 방심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넘어졌다.

상호의 품으로.

“앗.”

상호는 엉겁결에 은율을 안아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은율의 뺨이 아주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

“괜찮아?”

“……네.”

상호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은율을 일으켜 세우려는 때.

삑 삑 삑──

현관에서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216. 세 명이 길을 가면

“어머.”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이 흠칫하며 입을 가렸다.

“그…… 강 선생님?”

“아, 예.”

상호는 황급히 일어나서 허리를 굽혔다.

은율은 그의 앞에 태연히 앉아 있었지만, 붉어진 얼굴과 가쁜 숨은 아직 가다듬지 못했다.

은율의 어머니도 그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은율이.”

“……네.”

“무슨 일 있니?”

“아니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 공기가 싸늘해지려 할 즈음, 상호는 은율의 어머니의 시선을 끌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그, 저어……. 잠깐 이야기하면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은율의 어머니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 그게…….”

“안 하셨나 보네요.”

“……예에.”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이 아빠 오면 차려드릴게요.”

은율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가버렸다. 뭐라 사양할 새도 주지 않고.

상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가장 짧은 대답뿐이었다.

“네…….”

* * *

“차린 건 없지만…….”

많았다.

“많이 드세요.”

“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식탁에는 요리가 여럿 올라와 있었다. 그냥 밥반찬이 아니라 요리. 메인 디쉬.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먹다 얹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그는 수저를 들기 전에 부부의 눈치를 살폈다.

한쪽은 날씬하면서도 다부진 여인. 은율처럼 키가 크고 서구적인 인상이었다. 조금 넓은 어깨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사람이 아니라 무기를 앉혀놓은 줄 알았다.

‘살벌하네…….’

곰이라기엔 날렵하고, 범이라기엔 맹렬하지 않았다. 덩치는 크지만 눈빛은 날카로우면서도 고요한 것이 꼭 벼려진 검을 보는 것 같았다.

곧은 자세. 맺고 끊음이 확실한 행동거지.

‘S급 정도인가? 선생들보다 좀 더 강해 보이니…….’

상호의 평가는 끝났지만, 은율의 아버지는 아직 상호를 살피고 있었다.

곧 그 입이 열리고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딸아이가 신세 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신세를…….”

말이 이상하다. 이래서야 자신이 은율에게 무언가를 받아내고 있다는 뜻으로 들리지 않는가.

상호는 눈동자를 굴리며 재빨리 덧붙였다.

“……지고 있는 건 아니겠습니다만, 어쨌든 아닙니다.”

“그래요? 딸아이가 학교에서 잘 지냅니까?”

“예. 은율이 반장 일도 잘 하고 있고…….”

“반장?”

아버지의 의아해하는 목소리에 은율이 움찔했다.

말하면 안 되는 내용이었을까. 그게 대체 왜 말하면 안 되는 내용인가.

상호는 일부러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예. 동생들이 은율이를 잘 따라서요.”

“그런가요.”

은율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는가 보네요. 그런데…….”

“예, 말씀하세요.”

“성적은 작년보다 많이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아.”

다혜 때문에. 상호는 곤혹스러워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게…… 조금 특이한 애가…… 전학 비슷한 걸 와서요. 그 아이가 좀 비정상적으로 강해서 그렇습니다. 연말평가 때는 제대로 된 성적이 나올 겁니다.”

“그렇군요.”

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상호에게는 조금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느낌.

그때 상호는 똑똑히 보았다. 음식을 집는 은율에게 은율의 어머니가 눈치를 주는 것을.

은율은 조용히 그 음식을 내려놓았다.

‘웬만하면 남의 집 교육에 가타부타 하지 않겠지만…….’

먹는 것까지 뭐라 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은율이 살이 찐 것도 아닌데.

상호는 일부러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며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은율아, 왜 더 안 먹어?”

“아, 저, 저는…….”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많이 먹어야지. 어머니께서 기껏 이렇게 차려 주셨는데. 얼른 더 먹어.”

“……네.”

은율은 젓가락을 드는 시늉만 하고 음식을 집지 않았다.

은율의 어머니가 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은율이는 입이 짧은 편이라서요.”

그건 상호도 알았다. 실제로 은율은 다른 아이들보다 입이 짧았다. 하지만 방금은 누가 봐도 먹고 싶은데 못 먹은 것이었다.

원래 입이 짧은 게 아니라, 입을 짧게 만든 것이 아닐까.

‘나빛이네는 이런 걸로 뭐라 안 했는데.’

그렇다고 따질 수는 없고. 그냥 맛있는 거라도 더 자주 사줘야겠다 다짐할 뿐.

그때 은율의 아버지가 물었다.

“강 선생님은 선생이 되기 전에 헌터 일을 했던 겁니까?”

“예.”

“어떤 몬스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다리에 들어 있는 놈이지만.

상호는 밥을 우물거리며 대답을 고민했다.

“GB 13이라는 놈이 있었어요. 흑룡이었는데, 아파트만한 놈이 산을 넘어서 도시로 오는 거예요. 그땐 제가 실력이 안 돼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스승님한테 붙잡혀서 같이 싸웠던 기억이 납니다.”

“GB면 옛날 분류방식이네요.”

은율의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거기다 13이면 극초기인데…… 강 선생님 나이가 몇이죠?”

“스물넷입니다.”

“아무리 못해도 7년, 8년 전인데…….”

상호는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놈이 본토에서 마지막으로 잡은 놈이라서 말한 건데.

GB 13을 잡은 후에는 저승부대를 만들어서 아르게스로 들어갔고, 거기서 잡은 놈들은 당연히 이들이 알 턱이 없었다. 심지어 이름도 부대원들끼리 대충 붙였다. 얼룩덜룩하면 바둑이, 침을 흘리면 질질이, 뿔이 많으면 삐죽이.

바둑이한텐 죽을 뻔했고 삐죽이는 구워 먹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좀 일찍 헌터 일을 시작해서요.”

“참전하셨나 보죠? 하긴 그때는 어린 헌터들도 있긴 있었으니까…….”

“예.”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은율의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리와 눈은 어쩌다?”

“저주 같은 겁니다. 악마 한 놈한테 잘못 걸렸던 적이 있어서요.”

“고생이군요.”

“예에.”

그 후로는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상호는 밥그릇을 금세 비우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더 드릴까요?”

“아니요, 충분합니다.”

그는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는 슬슬 가봐야 해서……. 그런데 두 분, 혹시 은율이 전국평가 나가는 거 알고 계신가요?”

둘 다 눈을 끔뻑였다. 금시초문인 듯했다.

“전국평가요?”

“네. 며칠 안 남았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자주 찾아뵙게 될 것 같습니다.”

“으음.”

은율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좋은 경험이 되겠죠. 잘 부탁드립니다.”

“예.”

상호는 고개를 다시 한번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자주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 말이 그녀에겐 희미한 위안이 되었다. 은율은 상호가 떠난 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식단은 잘 지키고 있니?”

은율의 입술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전국평가는 왜 말 안 했니?”

“…….”

“내일부터 아빠랑 훈련하렴.”

이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으니까. 은율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네.”

“그리고 아까, 너랑 강 선생이랑 둘만 있을 때. 뭐 하고 있었니?”

“이야기만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전국평가 성적 잘 안 나오면…… 2학기에 반 바꿀 거야.”

은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1등한 애 담임이라길래 네 말대로 보내 줬는데, 성적이 점점 떨어지네. 잘 가르치긴 하니?”

“네.”

“그럼 왜 성적이 떨어지는 거야?”

“선생님 말씀대로, 조금 특이한 사람이 있어서…….”

“그래도 같은 2학년이면 이겨야지.”

은율의 어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방에 가.”

“네.”

“운기조식 잊지 말고.”

“……네.”

은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방으로 향했다.

* * *

‘애를 기계처럼 키우네.’

상호는 현관문에서 귀를 떼며 입맛을 다셨다.

‘저러니까 그런 사고가 나지. 호X새끼가 이상한 짓을 시켜도 덥석덥석 받들고…….’

어른에게 반항 못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니까 경한의 눈에 든 것이다. 손쉬운 먹잇감으로 여겨져서.

상호는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내일은 아침 일찍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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