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7화 (227/501)

* * *

점심부터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으음.”

도현은 신음을 뱉으며 핸드폰을 잡았다.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게 된 지 반년째. 몸이 축난다 하더라도 일반인보다는 훨씬 건강했지만, 남들과 다른 시간에 졸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비몽사몽한 눈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효은이네.’

얘가 웬일일까, 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얘는 요즘 일들…… 모르겠지.’

66부의 존재는 알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를 것이다. 그 사실이 도현에겐 다행스러웠다.

그래서 전화를 받았다.

“……어, 나다. 효은아.”

[저녁에 모여서 밥 먹을 건데. 올 거야?]

다짜고짜 본론부터.

도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바빠서…… 못 갈 것 같아.”

바쁜 것도 사실이고, 민정과 상호를 보기도 힘들었다. 설령 만나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그 후에 사람을 잡아 죽일 것을 생각하면.

식사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돌아오는 길에 자살할지도 몰랐다.

“둘한테 잘 말해 줘. 일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주말 낮부터 디비자고 있으면서 뭔 소리야?]

“주말 낮에 자는 이유를 생각해 봐라. 에휴…….”

동생이란 연놈들이 부협회장을 꿀통으로 안다. 도현은 축 처진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다음에 보자, 끊는다.”

[어.]

통화가 끊겼다.

그는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 * *

‘에휴…….’

예상대로였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아이들은 상호와 말문을 트지 못했다. 자기들끼리만 눈짓으로 소통을 할 뿐.

‘밥 먹는 애들한테 계속 말 시키기도 좀 그렇고…….’

그래서 결국은, 밥을 다 먹은 후에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카페로 향했다. 어떻게든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상호는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자, 먹어.”

쟁반에는 빙수가 세 그릇 놓여 있었다. 아이스크림과 과일 따위로 화려하게 장식된 빙수.

초란이 쭈뼛쭈뼛 숟가락을 들며 물었다.

“선생님은요……?”

“난 됐어. 여기 커피 있잖아. 선생님 신경쓰지 말고 먹어, 어서.”

“네…….”

초란과 하솔은 조금씩 빙수를 먹기 시작했다.

가은은 상호를 두어 번 흘겨보고 나서야 숟가락을 들었다. 꼭 빙수에 약이라도 탄 취급이었다.

상호는 쓰게 웃고 말을 꺼냈다.

“먹으면서 들어. 가은이랑 하솔이.”

“네.”

“저번에 교장선생님께서 혼내신 거 봤지?”

하솔이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2학기에 너희 둘 성적 꼭 올리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이제 명분이 생겼다.

상호는 부드럽지만 완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방과후 수업 들어 줬으면 좋겠다. 방학에도.”

“싫어요.”

가은이 즉답했다.

“성적을 꼭 올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성적 잘 받으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너 졸업한 뒤에 직장 구하기도 쉽고. 공무원이라든가…….”

그 말에 가은의 눈 밑이 꿈틀했다.

“선생님.”

“응?”

“은율이 언니가 뭐 말했어요?”

상호의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니? 경찰이라든가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는데?”

“경찰이요?”

“아, 아니. 공무원, 공무원. 어쨌든 안 했어. 방금 이야기는 그냥 내가 생각한 거야.”

“……흠.”

가은이 빙수를 한 번 먹고 말을 이었다.

“성적 올릴 생각 없으면요? 안 받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치만 교장선생님이 시키신 일이라서…….”

“저는 제 방식이 있어요.”

상호는 난색을 지었다.

“네가 그렇다면 강요를 할 수는 없지만…….”

포기하라면 포기할 수 있었다. 가은을 가르치는 일은 그에게 아무런 이득도 돌아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일을 때려치울 것도 아니니.

“선생님은 널 가르치는 게 일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널 귀찮게 할 수밖에 없어. 내가 널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너무 고깝게 여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봐서요.”

하는 거 봐서요, 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다.

상호는 빙긋 웃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어째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저 사람 뭐야?”

“납치범인가? 애들 표정이 안 좋은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칼까지 들었어, 어머, 어머…….”

큰 오해를 산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깡패같이 생긴 인간이 여고생들을 데리고 카페에 왔으니. 상호는 뒤를 흘끗하며 살짝 웃었다.

그러자 뒤에서 소곤거리던 여인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금 봤어?”

“눈빛 뭐야? 어머…….”

“애들이 납치를 당해준 것 같은데?”

……어쨌든 해결했다.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아이들에게 말했다.

“천천히 먹어. 좀 쉬다 가자…… 응?”

잔 아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작은 쪽지.

굳이 안 봐도 뭔지 알 것 같았다.

‘못 본 척해야 돼…….’

저걸 읽어 버리면 그때부터 곤란해진다. 받아준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없고, 그렇다고 매정하게 내쳐 버리면 상처가 될 테니.

못 본 척하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다. 상호는 일부러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런데.

“선생님, 이거…….”

하솔이 그 쪽지를 주워 상호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되면 무시할 수가 없다. 상호는 곤혹스러웠지만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응? 그게 뭔데?”

“선생님 잔에 붙어 있었는데요…….”

“그래?”

쪽지를 펼쳐 보니 역시나 전화번호.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쪽지를 접어 쟁반에 놓았다.

“뭐였어요?”

“아니, 그냥……. 시간 없냐고 해서. 근데 선생님은 여친 있잖아.”

일부러 카운터까지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알바생들 중 한 명이 갑자기 시무룩해지는 게 보였지만, 상호가 그것까지 신경 써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초란이 그를 불렀다.

“선생님.”

“응?”

“그분이랑 진짜 사귀는 거예요?”

“응.”

상호는 쓰게 웃었다.

“왜, 안 사귀는 것처럼 보여?”

“네. 항상 싸우고 계셔서…….”

“……크흠.”

남들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건 그냥…… 어릴 때부터 봐서 그래. 맨날 싸웠었거든. 그래서 나도 걔도 그게 편해서…… 그렇게 지내는 거야.”

“그런가요……. 그럼 그분이 첫 여자친구세요?”

“아니. 전에 한 명 있었어.”

그때 가은이 갑자기 툭 물었다.

“전여친하고는 왜 헤어졌어요?”

말투만 들으면 꼭 강력범죄 용의자를 취조하는 것 같았다. 아마 애인을 토막쳐 유기한 사이코패스를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상호는 평범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표정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은의 말투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뭐.”

초란과 하솔이 그와 가은의 눈치를 살폈다.

이 아이들과는 언제쯤 어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상호는 어떻게든 입꼬리를 올리고 의자에 느긋한 척 늘어졌다.

손으로는 예경의 검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리며.

* * *

“오늘은 안 잡아와도 돼요.”

리주의 말에 도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죠.”

“아, 실수.”

리주는 커피가 든 잔을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루에 담아서 데려오지 않아도 돼요. 뭐가 다른진 모르겠지만.”

“왜요?”

“자원자가 한 명 와서.”

도현은 기뻐하지 않았다.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텅 빈 눈으로 되물을 뿐.

“확보해 놨어요?”

“네.”

리주는 잔을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오랜만의 휴일이 되시겠네요.”

휴일.

도현은 잠시 가만히 서서 그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어디 놀러 가실 건가요?”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고.”

그는 리주를 남겨두고 사무실을 나갔다.

운이 좋다. 오늘 같은 날 시간이 생기다니. 기쁠 수는 없지만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시간은 저녁 8시.

‘좀 늦었나?’

도현은 서둘러 효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네.’

다음은 민정.

이번에는 금방 받았다.

[아, 오빠.]

“밥 먹고 있어?”

[나는 효은이랑 먹었고, 상호는 애들이랑 나가서 먹고 있는데……. 바빠서 못 온다는 것 같더니, 이제 괜찮아?]

아다리가 안 맞는구나. 도현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 조금 여유가 생겼는데……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둘이서라도 한잔 할까?]

“아니, 부모님도 뵈어야 해서.”

시간이 난 김에 본가에 들를 생각이었다. 그래서 술은 못 마시고 밥만 동생들과 같이 먹을 생각이었는데. 잠깐이라도.

하지만 세상은 그 잠깐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알았어. 오랜만에 얼굴 보고 싶었는데……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줘.”

[그래.]

민정이 힘없이 대답했다.

[오빠도 힘내.]

“……끊을게.”

도현은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운이 좋은 날인 줄 알았는데.’

세상의 톱니바퀴는 항상 어그러져 있고.

인간은 그 톱니 사이에서 갈려나가는 생쥐일 뿐이다.

도현의 머릿속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전우들의 무덤 앞에서 상호가 했던 말.

세상이 너무도 싫다던.

‘나도야.’

도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도…… 세상이 싫다. 그런데 그거 아냐, 상호야. 나는 내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들을…… 그 400명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이 일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놓고 싶어도, 놓을 수가 없어. 아무리 세상이 싫어도…… 나는 세상을 저버릴 수가 없다.’

하여도 죄, 않아도 죄.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설움을 가슴에 품고, 도현은 복도를 걸어갔다.

213. 솔직히 좀 그래

“아으.”

건흠은 고개를 들었다.

복도 쪽 창문에 다혜가 달라붙어서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으아으…….”

지금은 수업 중. 건흠은 살짝 눈인사만 건네고 다시 칠판을 향해 돌아섰다.

폭주 후로 다혜는 수업을 듣지 못했다. 건흠에겐 다혜를 완벽하게 통제할 능력이 없었기에.

“화약의 발명은 9세기 이전에 이뤄졌지만, 본격적인 화기의 발전은 19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다혜의 곁에는 항상 해련, 그리고 저승부대 출신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붙어 다녔다. 요즘은 아르게스 쪽으로 운기조식을 하러 간다는 모양이었다.

복도에서 해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혜야, 가자.”

“아으아으아…….”

“내일 또 오면 되잖니. 어서.”

“우으.”

창문에서 다혜의 모습이 사라졌다.

건흠은 다혜가 사라지고 나서야 창문을 바라보았다. 작년 한 해 동안 그랬었던 것처럼.

달려나가서 인사하고 싶지만, 지금은 수업이 먼저였다.

“이처럼 한 사람이 한 번에 여러 명을 죽일 수 있는 현대 개인화기의 발명은 전쟁의 판도를 크게 바꾸게 된다…….”

* * *

종례 시간.

건흠은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청소 깨끗하게 했냐?”

“네~.”

“그래. 가라. 3학년들은 잠깐 남고.”

“에에에~ 왜요~.”

“너희는 어서 가.”

곧 1학년과 2학년이 나가고, 자리엔 3학년들만 남았다.

건흠은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너희 다혜랑은 잘 지내?”

“다혜요?”

아이들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요즘은 보기도 힘들어서…….”

“기숙사에도 없고, 교실도 안 오잖아요.”

“찾아간 적은 없어?”

“교장선생님이 계셔서, 조금…….”

“부담스러워?”

“네.”

“그래도 오며 가며 만나긴 하잖아.”

“인사는 하죠. 그런데…… 말이 안 통하니까.”

결국 그게 문제인가. 건흠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말 많이 걸어 줘라. 대답이 돌아오진 않겠지만…… 아마 너희 할 말만 해도 좋아할 거야. 다혜가 너흴 딱히 귀찮게 하는 건 아니잖아.”

“그거야 물론 그렇지만…….”

아이들이 말꼬리를 흐렸다.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건흠은 엷은 한숨을 쉬고 출석부를 들었다.

“알았다. 들어가서 쉬어.”

* * *

다음 날 아침.

교장실에 들어서자 해괴한 광경이 건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 선생? 뭐해?”

“아, 이거요?”

소파에 앉은 상호가 태연히 대답했다.

“교육이죠. 용고기 끊는 교육. 금육교육이라고 해야 하나.”

상호는 다혜의 눈앞에서 고깃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그가 손을 살랑일 때마다 다혜의 입에서 으르릉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르르르…….”

수업 전에 잠깐 만나러 왔더니 요 모양 요 꼴이다. 건흠은 자리에서 말없이 웃고 있는 해련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상호에게 물었다.

“조례 안 가?”

“가야죠, 이제. 잠깐 와서 교육한 거예요. 틈날 때마다 하는 게 좋으니까.”

상호는 다혜를 묶은 내공과 용고기를 거두고 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참았어.”

“아르르릉…….”

“……참은 거 맞지?”

다혜가 이빨을 드러내자 상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건흠은 둘을 바라보다가 소파에 앉았다.

“잘 되고 있는 거야? 도움이 되나?”

“예. 자제심도 기르고, 용혈을 얼마나 억누를 수 있는지도 확인하고…… 조금씩 중독을 치료하는 거죠.”

용고기가 허공에서 비닐 랩에 둘둘 싸였다.

“최종적으로는 폭주하지 않게…… 그리고 아리를 봐도 달려들지 않게. 그래야 우리 없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잖아요.”

“그렇겠지.”

건흠은 고요한 눈으로 다혜를 바라보았다. 눈빛 속에 복잡한 심경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상호는 용고기를 냉동고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겠습니다.”

곧 교장실 문이 닫히고, 안에는 해련과 다혜, 건흠만 남았다.

해련이 건흠을 향해 물었다.

“차 한 잔 줄까요?”

“아닙니다. 저도 조례 가야 해서.”

“그러면 그냥 다혜 보려고 온 건가요?”

“예.”

건흠은 눈을 깜빡이는 다혜를 바라보았다.

“여기도 학생이 있으니까…… 조례하러 와야지요.”

“음.”

해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천천히 인사 나누도록 해요.”

“네.”

건흠은 조용히 다혜와 눈을 마주쳤다.

다혜는 그를 향해 빙긋 웃다가, 무언가 다른 낌새를 눈치챈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으?”

“응?”

“아으아…… 으으.”

“아무것도 아냐.”

그는 웃었다. 어렴풋한 아픔을 눈동자에 실은 채.

시계를 흘끗하는 그의 눈빛에는 야속함이 한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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