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6/501)

* * *

“그래서 뭐였어?”

“아니래.”

상호는 출석부를 교탁에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걍 걔 성격이 지랄맞은 거였어.”

“오케이!”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상호와 아이들은 멀뚱한 눈으로 태화를 바라보았다.

“왜?”

“어제 말했잖아! 내가 틀리면 쌤 애 낳아준다고. 에잉~. 내기에 져서 어쩔 수가 없넹~. 켁!”

“앉아.”

상호는 순간이동으로 달려든 태화를 내공으로 붙잡아 자리로 돌려보냈다.

“어제 놀았으니까 오늘은 수업할 거야.”

“에~.”

“실내수업이잖아. 졸지 말고 잘 들으…….”

말하는 와중에 누군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오늘은 또 누구냐. 또 효은인가. 아니면 잡상인인가. 상호는 교권을 침해하는 이방인을 단죄하기 위해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교장선생님?”

교권의 총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늘 웃던 표정이 오늘은 어째 엄했다. 상호는 교실을 흘끗하고 해련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 일로…… 다혜는요?”

“민정 양이 돌보고 있어요. 그나저나 일단 나와 봐요.”

“네? 아, 네.”

상호가 복도로 나와 문을 닫자 해련이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강 선생.”

“네.”

“아이들 성적이 떨어졌다며. 1학년 아이들.”

“네?”

상호는 당황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계산을 잘못했나 싶어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평균은 훨씬 올랐는데요?”

“떨어진 애들이 있잖아.”

“있기야 있죠.”

“누구누구예요?”

“하솔이랑 가은이……요.”

해련이 쌍심지를 켰다.

“그 둘, 2학기에 무조건 성적 올려요.”

“그야……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상호는 해련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떨어진 애들도 그렇게 막 떨어지진 않았는데…….”

“떨어진 건 떨어진 거예요.”

“아니, 원래 그렇게…….”

성적 따지는 성격이 아니셨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어디 어른한테 따박따박 말대꾸하냐고 꾸짖을 게 뻔해서 속으로 삼켰다.

그래도 할 말은 있었다.

“다른 애들 떨어질 때는 뭐라 안 하셨잖아요…….”

“그건 작년이잖아. 작년에는 초임이었으니까 뭐라 안 했지. 근데 올해는 2년차잖아. 내가 2년차까지 편의를 봐 줘야 해요? 강 선생 아기 아니잖아?”

“예에…….”

그동안 안 혼난 거였구나. 상호는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었으면 설미를 시켜도 됐을 텐데. 뭐 하러 해련이 바쁜 일까지 제쳐두고 왔는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되면 뭐 어쩌겠냐, 까라면 까야지…….’

그는 양손을 공손히 모아서 허리를 숙였다.

“2학기엔 꼭 올리겠습니다.”

“그래야지.”

해련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매섭게 따진 게 미안했을까. 그녀는 곧 상호의 등허리를 토닥이며 멋쩍게 웃었다.

“강 선생이 잘 모를까봐 그랬어요. 다음에 잘하면 되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요.”

“네.”

“아이, 정없게 한마디로 답하지 말고~.”

“알겠어요…….”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해련은 그걸로 만족을 못 했는지, 자꾸 상호의 가슴팍에 어깨를 부비며 치근거렸다.

“어허~. 다정하게.”

“알았어요…….”

“맘에 안 들어. 다시. 상냥하고 따뜻하게.”

“알았다구요…….”

“사랑해요, 한번 해 봐.”

“사……, 네? 뭐요?”

상호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안 그래도 어제 아이들에게 효은과의 대화를 들켜서 곤욕을 치렀는데, 해련까지 이랬다가는 감당이 안 될 게 뻔했다.

“왜 이러세요! 학교에서…….”

“에이, 뭐 어때~. 그럼 귀에 살짝. 응?”

“아니…….”

사귀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사랑을 속삭여달라는 관계까지 진전되고 말았다. 은근슬쩍 다가오는 게 꼭 능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그냥 빨리 해주고 수업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해련의 귀에 입을 바싹 가져가서.

“……사랑해요.”

짧게 속삭이고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별안간 해련의 손이 멱살을 덥석 잡아끌었다. 상호는 황망히 그녀를 불렀다.

“……교장선생님?”

해련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코와 뺨이 뜨끈하게 익어 있었다.

“……더.”

“네?”

“더 해줘요.”

“어…….”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교실을 돌아보았다.

“수업……해야 돼요.”

“실내수업 아냐?”

“실내수업도 수업이죠……. 다음에 이야기해요. 너무 오래 있었어요.”

“그런가.”

해련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알았어요. 수업해야지……. 어쨌든 아이들 성적 안 떨어지게 조심해요.”

“네. 꼭 올릴게요.”

“갈게.”

해련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상호는 해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땀을 식히려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방금…… 눈이 좀 맛이 가셨던 것 같은데…….’

어쨌든 한숨 돌렸다. 그는 수업을 위해 서둘러 교실 문을 열었다.

“미안하다, 얘들아. 이야기가 좀 길…… 어?”

아이들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하솔에게 꽂혔다. 하솔은 백짓장보다 더 창백한 얼굴로 돌처럼 굳어 있었다.

“하솔이 어디 아파?”

“아……뇨.”

“그러면?”

“저어…….”

하솔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혹시 교장선생님이…… 혼내셨어요?”

“그냥 뭐, 꾸중을 듣긴 했는데. 들을 만해서 들은 거지.”

“죄송해요…….”

“……응? 네가 왜?”

상호는 멀뚱히 하솔을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아아, 성적 떨어져서?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지.”

“그게 아닌…….”

하솔은 우물쭈물해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자 상호의 의문이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하솔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묻지는 않았다.

그는 교탁 앞으로 걸어가 교과서를 집었다.

“수업하자, 수업. 1학기 거 싹 끝내야 놀든가 싸우든가 하지.”

* * *

“상호 씨.”

“네?”

뒤를 돌아보니 설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둘이 있는 곳은 급식소 교직원 입구의 줄. 옆에서 떠들썩하게 수다를 떠는 아이들 때문에 둘의 목소리는 멀리 퍼지지 않았다.

“아침에 교장선생님이 상호 씨 찾던데.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거요.”

상호는 머쓱해져서 설미의 시선을 피했다.

“반 성적 떨어진 것 때문에요. 오셔서 한마디 하시더라구요. 크게 혼나진 않았어요.”

“성적?”

설미가 눈을 깜빡였다.

“많이 떨어졌나 보네? 교장선생님이 뭐라 하실 정도면…….”

“아뇨, 평균은 올랐는데, 떨어진 애들이 좀 있어 가지고…….”

“그래?”

설미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왜지? 그런 걸로 혼낼 분이 아닌데……?”

“모르겠어요. 그래도 뭐, 다음번엔 다 올리면 되죠.”

“아니야, 말이 안 되는데……. 평균을 올렸는데 왜 혼이 나? 누군가는 밑을 깔아 줘야 다른 애들 성적이 올라가는 건데. 애들 성적을 어떻게 올리기만 해. 그런 건 혼날 일이 아니야.”

상호의 눈이 핑핑 돌았다.

“그럼 전 왜 혼난 거예요?”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교장선생님은 다른 뜻으로 말했는데 상호 씨가 잘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어.”

“아……, 그런가 봐요.”

상호는 아까 해련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숨은 뜻을 찾으려 노력했다.

‘……없는데?’

없었다.

뜻이 너무 명확해서 오해할 건덕지도 없다. 성적 떨어뜨리지 말고 무조건 전부 다 올려라.

‘으음……. 나한테 기대를 많이 하시나 보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긴 평범한 교사들과는 배경이 다르고, 해련과는 출신이 비슷하니까, 그녀에게는 더더욱 기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해야지, 뭐. 어쩔 수 없지…….’

상호는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설미가 무언가를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저기…….”

“네?”

“상호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럼요.”

“여자친구……, 헌터님 있잖아.”

뺨이 붉었다.

“작년 그때…… 부터야?”

그때라면 언제를 말하는 걸까. 이맘때쯤일까.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 수녀님이 누군지…….”

“네. 애초에 저 보겠다고 온 거라서.”

“그럼 원래부터 알고 지냈던 거야?”

“네. 어릴 때부터 알았어요.”

“부럽네.”

설미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하지만 상호의 귀에는 들렸다.

“네? 뭐가요?”

“아무것도 아냐. 상호 씨. 이번 방학에도 저번처럼 놀러 갈 거야?”

방학이라.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상호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기웃했다.

“글쎄요. 이번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애들도 많고 일도 많아서…….”

“가게 되면 나도 데려가.”

설미가 물끄러미 눈을 마주쳐 왔다.

“나 만날 사람 없으니까. 상호 씨가 책임지고 놀아 줘야 돼.”

상호는 무심코 친구 없냐고 물어보려다가 황급히 말을 삼켰다.

“그…… 으흠. 당연하죠. 다 같이 갈 때는 설미 선생님도 부를게요.”

“꼭이야.”

“네, 꼭.”

설미는 확답을 받아내자 살짝 웃었다.

“어디로 갈지 생각해 놨어?”

“글쎄요. 바다나, 계곡이나. 그런 데 가겠죠. 수영장은 제가 별로라서 안 갈 것 같아요. 교장선생님도 경치 보는 곳을 더 좋아할 것 같고…….”

“이번엔 미진 씨도 같이 가겠네.”

상호는 그 말에 멀뚱히 눈을 끔뻑였다.

“미진 씨요? 미진 씨는 남자친구 있잖아요. 안 올 것 같은데…….”

“놀러 가는 건데 뭐 어때. 상호 씨랑만 가는 게 아니잖아. 나도 있고 교장선생님도 있고.”

“그건…… 그렇죠.”

상호의 머릿속이 핑핑 돌아갔다. 작년에 바다 갔을 때가 세희, 태화, 나빛, 지윤, 은율, 효은, 해련, 설미.

상호 자신 빼고 여덟 명.

이번엔 민정도 갈 것 같고, 그러면 다혜까지 따라와야 하고. 거기에 미진까지 더하면 열한 명.

2학년이 다 가는데 유학생들만 따돌릴 순 없으니, 이츠키와 나디아까지 해서 열세 명.

그리고 아이들 입단속이 될 리가 없으니 1학년까지 가게 된다면.

‘……20명이네?’

졸지에 버스를 운전하게 생겼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애들 따로 어른 따로? 안 돼, 15명을 혼자 돌보느니 버스를 운전하고 말지……. 답이 없네. 아 씨, X됐다.’

그냥 버스를 전복시키자. 사람은 허공섭물로 지키면 된다. 상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설미는 많이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보니까 1박은 너무 짧더라. 2박 정도는 되어야 하겠더라구.”

“2박이요? 안 돼요, 교장선생님도 바쁘고…… 저도 일이 많고…….”

“교장선생님은 일주일도 괜찮다고 하셨어.”

“언제 말한 거예요? 아니 우리 반에서 놀러 가는 건데 나만 빼놓고 이야기를…….”

“그래서 우리끼리 절충을 했지. 3박 4일로.”

“저기……, 제 말 들리는 거 맞죠?”

“푸후훗…….”

설미는 웃으며 상호와 함께 급식소로 들어갔다.

212. 어긋남

“오늘 할 거 있냐?”

옆에서 효은이 물어도 상호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침대에 한껏 늘어진 채로.

금쪽같은 주말. 아이들 가르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그는 일정을 확인하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응.”

“뭐 하는데?”

“사람 만나려고.”

“누구?”

“제자.”

“제자 누구.”

“1학년 애들. 이야기 좀 하려고.”

“그래?”

효은이 눈썹을 치켰다.

“언젠데.”

“점심. ……근데 왜 이렇게 캐묻는 거야?”

“아니, 저녁에 도현이 오빠 부를까 해서. 오빠만 오면 다 모이는 거잖아.”

“형은 바쁠걸.”

날이 꽤 지나긴 했지만, 도현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민정에게서도, 나로에게서도, 혁에게서도.

오히려 나로와 혁이 상호에게 묻는 실정이었다.

“한번 불러 봐. 오면 같이 먹고. 근데 어디서 먹으려고?”

“몰라. 간만에 비싼 데나 가볼까.”

“그래. 형도 사람들 알아보는 거 싫어하니까. 한적한 곳으로 가.”

상호는 검을 짚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난 애들 보고 올게. 형한테 연락 오면 나한테도 말해.”

“어린애들한테 푸욱 빠지셨어, 아주. 저러다 살림도 차리는 건 아닌가 걱정되네.”

“…….”

그는 한숨을 쉬고 방을 나섰다.

* * *

목련관 앞에 선 세 소녀.

상호는 그 앞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내렸다.

“왜 벌써 나왔어?”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솔, 가은, 초란. 하루에 한 번도 목소리 듣기 힘든 아이들.

상호는 머쓱해져서 헛기침을 하고 차 문을 열었다.

“다음부턴 선생님이 불렀다고 먼저 나오지 말고…… 좀 천천히 나와도 돼.”

“네.”

그나마 대답해주는 건 하솔. 고개를 끄덕이는 건 초란.

가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서 타.”

하솔과 초란이 쭈뼛쭈뼛 뒷자리에 탔고, 가은도 내키지 않는 듯 느릿한 걸음으로 뒤따랐다.

상호는 백미러로 셋을 바라보며 물었다.

“밥 안 먹었지? 뭐 먹으러 갈까?”

“피자!”

“응?”

이 깨방정 떠는 목소리는.

상호는 조수석을 돌아보고 눈살을 확 찌푸렸다.

“얌마, 안 내려?”

“뭐, 왜. 나는 가면 안 돼?”

태화가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사줘~, 사줘~.”

“잘 안 먹는 애들 사주는 건데 네가 따라오면 어떡해? 네가 제일 많이 먹었잖아! 대체 어떻게 알고 왔어?”

“차 소리만 들어도 알지.”

“개냐?”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내려. 넌 나중에 사줄게. 너만 먹으면 다른 애들이 또 섭섭해지잖아.”

“다 불렀는데?”

“……뭐?”

“저기.”

태화가 차창 밖을 가리켰다.

이화관에서 아이들이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잠옷 차림의 나빛, 나빛을 업은 지윤, 그리고 세희.

상호는 황급히 조수석 문을 열고 태화를 밀어냈다.

“야, 내려!”

“아앙~, 사줭~.”

“오늘은 얘들하고 면담할 거야. 나중에 사준다니까! 빨리 내려.”

“우씽.”

태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차에서 내렸다.

상호는 태화가 내리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드미러에 지윤이 길길이 날뛰는 게 보였다.

“쌤예! 와 지들만 안사주입니꺼!”

‘너희가 제일 많이 먹었다니까…….’ 먹여도 먹여도 끝이 없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교문을 나서서 핸들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맞다. 메뉴…….’

어디로 갈지 아직 못 정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얘들아, 뭐 먹을지 정했어?”

“아니요…….”

“…….”

“…….”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아이들.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까.

상호는 걱정을 품은 채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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