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5화 (225/501)

* * *

“이열~.”

태화가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십대천왕~.”

“…….”

“삼좌~.”

“……시끄러.”

세희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앞에서 단비가 뒷자리를 돌아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멍, 세희 언니. 소문 진짜야?”

“뭐가.”

“진검이 너무 강해서 봉인했다는 거…….”

“가검이야.”

“그럼 가검인데도 너무 강해서 봉인한 거야?”

“……아니야.”

“그럼 왜 목검으로 바꿨어?”

“다 사정이 있어…….”

“뭔데에에~. 알려줘어어~.”

알려줄 수 없다. 담임의 비밀이니까. 세희는 달라붙는 단비를 밀어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 때면 꼭 옆에서 놀리는 인간이 있었다.

“그것도 모르냐?”

“멍?”

“칼에 흑염룡이 사는 거야.”

태화가 실쭉 웃었다.

“한번 뽑으면 피바람이 부는 거지. 피에 미쳐 가지고…….”

그 말에 단비가 눈을 깜작였다.

“근데 칼 부러졌잖아.”

“앗.”

태화의 눈이 핑핑 돌아갔다. 설정구멍을 때우기 위해.

“……손으로 들어갔어.”

“손?”

“응. 흑염룡이 손에 들어가 가지고. 칼을 들면 미쳐 날뛰는 거지.”

“진짜야? 언니?”

단비가 눈을 반짝이며 세희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냐며 핀잔을 날리고 싶지만, 세희는 이미 비슷한 경우를 한 명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입으로는.

“진짜겠니?”

“멍, 진짜면 재밌을 거 같은데…….”

“세상은 재미로 돌아가지 않아.”

“멍…….”

단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앞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렇지만 태화의 깐죽거림은 도통 멈추질 않았다.

“이야~. 너무 강해서 힘을 봉인한 삼좌~.”

“시끄러워.”

“목검으로도 전교생의 반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데~.”

“……너 이리 와.”

참다못한 세희는 태화의 꼬리를 잡고 손바닥으로 싹싹 비볐다. 태화가 팔다리를 배배 꼬며 몸을 움찔거렸다.

“아, 씨, 미안해! 잘못했어…….”

“흥.”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상호가 들어왔다.

기말평가 전보다 표정이 훨씬 좋았다. 세희와 아이들은 밝게 웃는 상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응? 뭐어……, 그렇지.”

상호는 출석부에 끼워둔 성적표를 읽었다.

“세희가 3등, 태화가 5등. 은율이가 9등, 나빛이가 17등, 사카시타가 20등에 지윤이가 33등.”

64강에 든 아이들은 이렇게 6명. 나디아는 권외.

세희와 이츠키를 빼면 전부 패자조 1등이었고, 그것도 넷 중에 셋은 다혜에게 떨어진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1학년은.

“이서가 6등, 하솔이가 9등, 가은이가 13등, 아리가 31등에 미래가 35등, 단비가 61등, 초란이가 62등.”

“뭐?”

태화가 토끼눈이 되어 이서를 돌아보았다.

“얘가 반 1등이야?”

“응.”

“어떻게?”

“수업을 잘 들은 거지.”

상호는 씩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이서도 잘했고…… 아리랑 미래랑 단비랑 초란이도 본선까지 올라왔네. 다들 잘했어. 근데…… 둘은 조금 떨어졌네.”

하솔이 고개를 살짝 숙였고, 가은은 고개를 돌렸다.

“평가 방식이 이래서 어쩔 수 없이 운이 따르지만, 그래도 어쨌든 너희는 중간평가 때 너흴 이긴 애들을 추월하지 못한 거지. 다른 아이들은 어느 정도 추월을 했고. 특히 이서가.”

하솔의 중간평가 등수는 3등. 가은은 7등.

둘 다 스스로도 만족을 못 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상호는 그걸 알아채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서가 왜 너희보다 등수가 높은지 알아?”

대답은 하솔이 했다.

“아니요…….”

“선생님을 믿고 따라와서야.”

“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은이 콧방귀를 뀌었지만, 상호는 개의치 않았다.

“너희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서는 계속 방과후에 수업을 받았어. 하솔이는 평가 준비 기간에만 가끔 나왔고, 가은이는 아예 안 나왔지.”

하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다고 그 나머지 수업에서 특별하고 대단한 걸 가르친 건 아니야. 다 평소에도 가르쳐준 거야. 대신에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전투도 하면서 더 깊게 가르쳤지. 그게 어떻게 가능했냐? 다 이서가 선생님을 믿어서…….”

“구라치네.”

태화가 초를 쳤다.

상호는 태화를 째려보고 말을 이었다.

“……믿어서 가능했던 거야. 너희는 그럴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거지. 더 물어보고, 더 가르쳐 달라고 하고…… 그랬어야 해. 뭐……,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내가 대단한 사람이다, 나만 옳다, 내 말만 들어라, 이런 식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게 아니라 가르침이라는 게 쌍방향으로 교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네.”

하솔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성적이 떨어진 충격이 컸을까. 상호는 하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부드럽게 풀고 말했다.

“너희가 어떤 점이 부족한지, 뭘 배우고 싶은지, 목표가 뭔지. 그런 걸 알아야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거니까. 특히 너희 둘은 선생님하고 이야기도 잘 안 하잖아.”

“전 선생님한테 그런 거 말한 적 없는데요.”

이서가 뭔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퉁명스레 따졌다.

상호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확실히 방금 한 말은 대충 지어내는 개소리에 가까웠지만.

“……말 안 해도 알지, 그런 건.”

“그래요? 제가 뭘 배우고 싶어하는데요?”

“아무것도 안 배우고 싶어해.”

“…….”

정답이었는지, 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부루퉁히 고개를 돌렸다.

상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솔과 가은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제 겨우 1학년 1학기 기말평가니까. 앞으로도 시간은 많고, 지금부터 해 나가면 되지. 오히려 빨리 배운 셈이야.”

“네…….”

“천천히 생각해 봐. 이제 수업하자.”

그때 누군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부드럽게 똑똑이 아니고 거칠게 쾅쾅.

태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앗! 이 패턴은!”

“멍?”

“경찰이다!”

“경찰?”

“천세희 살인죄로 잡으러 왔나보다. 야, 빨리 내 치마에 숨어!”

“미친년이…….”

태화가 세희의 머리를 잡고 자기 다리 사이로 끌어내리려 했다. 세희는 목에 시뻘겋게 핏대를 올리며 버텼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쉬고 문가로 걸어갔다.

“손님일지도 모르는데 그러지 좀 마라. 가만히 있어. ……응?”

문을 열어보니 효은이 서 있었다.

“뭐야, 왜.”

“잠깐만 나와 봐.”

“응?”

멀뚱히 서 있던 상호는 효은의 손에 붙잡혀 밖으로 이끌려 나왔다.

수업 시간이라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뭔데? 말을 해.”

“너.”

눈빛이 진지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상호는 효은의 팔뚝을 살짝 감싸며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뭔데. 무슨 일 있어?”

“냉장고에 있는 복숭아 니가 먹었냐?”

“응?”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내가 먹었는데.”

“병신아! 왜 물어보지도 않고 처먹는데!”

“뭐 어때, 있으니까 먹었지……. 맛도 별로 없었어.”

“복숭아는 실온에 꺼내놓고 먹는 거야, 멍청아. 바로 먹으니까 맛없지.”

상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먹었는데 효은이 먹고 싶어 했을 줄은 몰랐다.

“저녁에 사올게.”

“됐어, 아침에 먹을라 그랬는데……. 걍 나가서 밥 먹고 올 거야.”

효은이 토라진 듯 눈을 흘겼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삐졌냐?”

“뭐?”

“삐졌냐고. 겨우 복숭아 하나잖아. 먹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누가 삐졌대? 그래, 먹을 수 있어. 근데 니가 홀랑 집어먹어서 짜증났다고. 그런 것도 말 못해?”

“그게 삐진 거지. 그럴 거면 먹을 거라고 말이나 해놓던가. 냉장고에 대충 처박고 표시도 안 해두면 내가 아냐?”

“왜 안 물어보는데?”

한껏 성이 난 효은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졌다.

상호는 그걸 보고 아차 싶으면서도, 겨우 복숭아 하나 때문에 이러는 것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웃어? 너 웃겨, 이게?”

“그럼 복숭아 하나 갖고 이 꼴이 나는 게 웃기지 안 웃기냐? 줄게, 줄게. 뱃속에서 꺼내 줄게. 입 벌려.”

그가 슬쩍 입을 맞추려 하자 효은이 눈썹을 치켰다.

“꺼져!”

쫘악

시원한 싸대기 한 방.

상호는 얼얼해지는 뺨을 부여잡고 꿍얼거렸다.

“아니 진짜……. 누나, 그거 하나 좀 먹을 수도 있지…….”

“언니한텐 안 그랬겠지.”

효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언니한테는 하나하나 다 물어보고 그랬겠지. 니가 먹었겠냐? 먹기는커녕 껍질 까서 넣어놨겠지.”

상호의 가슴이 뜨끔했다. 그 말이 한 치의 가감도 없는 사실이라서.

효은이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니는 새끼야, 내 생각을 X도 안 해. 언니였으면 당연할 일들을 나한텐 전혀 안 해준다고. 그래놓고 날 좋아해? 믿겠냐? 그걸?”

“그때의 나하고 지금의 내가 다르잖아.”

상호는 자신을 밀어내는 효은의 어깨를 붙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예경이 누나한테 못해준 거 너한테 해준 것도 있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말로 안 하는 거지…….”

“흥…….”

“미안해, 진짜. 이따가 사올게. 이제 애들 시험 끝났으니까 좀 일찍 들어갈 거야.”

“……진짜지.”

효은이 코를 한 번 훌쩍였다.

“늦게 들어오기만 해봐.”

“진짜 일찍 들어갈게.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마트 들렀다가.”

“……약속 지켜.”

효은은 그제서야 돌아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어떻게든 넘어갔구나. 상호는 아주 긴 한숨을 쏟아내고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후우.”

너무 어렵다. 여자란 생물은.

그는 잠시 머리를 식혔다가 비틀비틀 교실 문으로 걸어갔다.

‘수업해야지, 수업……. 응?’

문을 여니 아이들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눈빛은 아니고, 일종의 감탄, 또는 경악.

상호는 당황하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들렸니?”

“예.”

지윤이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희와 지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나빛은 오히려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단비가 귀를 쫑긋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쌤 능력 개쩔어, 멍.”

미래는 놀란 표정이었다.

“선생님 X급 헌터님하고 사귀어요? 근데 수녀님인데…… 그래도 돼요?”

“……되더라.”

상호는 더 숨기지 못하고 시인했다. 애인이 있다고는 아이들에게 수차례 말해 왔기에.

아이들이 입을 헤 벌렸다.

“와…….”

“태화 언니가 말한 분이 저 분이야?”

“엉.”

“우와…….”

“선생님이 수녀님이랑…….”

소곤대는 1학년들 뒤에서 나빛이 웃으며 물었다.

“복숭아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랬던가. 상호는 머리를 기웃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잘 모르겠어. 과일을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복숭아를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네.”

그 말에 지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평소에는 별로 안 찾으신단 말입니꺼?”

“응.”

“근데 오늘 유난히 그랬다구예?”

“응.”

뭔가 원인을 알아냈을까. 상호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태화와 지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이네.”

“임신이네예.”

상호의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뭐?”

“백프롭니더. 지가 봐서 알아예. 지는 네 번이나 봤다 아입니꺼.”

지윤이 자신만만하게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태화도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무조건이지. 만약 아니라면……. 음……, 벌칙으로 내가 쌤 아이 낳아줄게.”

“…….”

평소 같았으면 개소리 말라고 혼냈겠지만,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상호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닿지 않았다.

지금은 안 되는데.

애들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진짜 애가 생긴다니.

‘불임……이라며…….’

과녁 밖에 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상호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무릎을 꿇었다.

상호가 교탁 뒤로 사라지자 아이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앗! 선생님 쓰러졌어! 어떡해?!”

“신앙인 선생님 불러…… 아닌가? 수녀님을 불러야 하나?”

“조만간 뷔페 함 가겠구마잉.”

“쌤! 걱정마. 난 쌤이 유부남이라도 오케이니까.”

“선생님 아들 귀여울 것 같아, 헤헤…….”

“선생님? 선생님?”

“죽었나 봅니다.”

상호는 1교시 내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211. 배는 하나인데 항구는 스물

“나 왔어.”

상호는 복숭아 한 상자를 들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누워 있던 효은이 고개만 슬쩍 들어 그를 보았다.

“왔냐? ……뭐야, 너 어디 아파?”

“아니?”

“근데 왜 다 죽어가?”

“응?”

상호의 시선이 방 한쪽에 놓인 거울을 향했다.

얼굴이 상당히 초췌했다. 병든 닭처럼. 눈 밑의 그늘이 한 치는 내려와 있었다.

다만 몸이 아픈 건 아니었다.

“그냥. 애들 가르치느라.”

“시험 어제 끝났잖아. 오늘도 수업을 했어?”

“응.”

“독하다, 참.”

효은이 혀를 찼다.

그러나 거짓말이었다. 수업은 안 했다. 늘 그렇듯 태화가 갖은 핑계를 대며 놀자고 졸라대서. 교실에서 에어컨 쐬며 영화 보고 쉬었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기, 그…….”

상호는 시원스레 말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저기…… 끄응.”

“뭐. 왜. 말을 해.”

“뭐 해줄 말…… 있지 않아? 중요한 거.”

“해줄 말?”

효은은 멀뚱히 상호를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뭔 소린가 했더니.”

그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다가와서는, 상호의 뺨에 손을 올렸다.

“아팠냐? 미안하다.”

“아니, 그거 말고.”

“……응?”

“뭐 소식 같은 거…… 없어?”

“대체 뭔 소리야?”

상호는 진땀을 흘렀다. 이걸 대놓고 물어보기는 너무 무섭고.

그가 쩔쩔맬수록 효은의 눈썹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야.”

“……응.”

“똑바로 말해. 뭐 때문인지.”

“그게…….”

상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저기, 아침에 그거 때문에…….”

“때문에?”

“먹는 거에 민감해진 거 보고…… 임신했나, 싶어서…….”

“……임신?”

효은이 눈을 깜빡였다.

“나 불임이잖아.”

“아는데, 혹시 그새 누나한테 치료받은 건가, 해서…….”

“참나, 흥…….”

효은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래. 임신했다, 새끼야.”

그 말에 상호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진짜?”

“어. 니 애야. 그리고 그 애가 빨리 복숭아 먹고 싶대.”

“자, 잠깐만.”

쏜살같이 날아온 과도가 수차례 번뜩이더니 순식간에 잘 깎인 복숭아를 내놓았다. 상호는 그 복숭아를 자르고 접시에 담아 효은에게 내밀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진상하듯 지극하기 그지없었다.

“자, 여기.”

“흐응.”

효은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래, 그렇게 잘하라고. 입으로만 사랑하네 어쩌네 하지 말고.”

“응…….”

“근데 사람이 둘인데 복숭아 하나 가지고 되겠어?”

“그, 금방 깎을게.”

상호는 허둥지둥 복숭아를 집어 또 깎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효은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진작 이럴 것이지. 쯧……. 야, 리모컨이 멀다.”

“여, 여기.”

“목도 마르고.”

“잠깐만, 금방 갖다 줄게…….”

“좀 뜨끈하고 달았으면 좋겠는데.”

“커, 커피 타 줄까? 매실도 있고…….”

“복숭아는 언제 줄 거야?”

“아, 아. 잠시만…….”

“뻥이야, 등신아.”

“……응?”

상호는 잠시 넋이 나가 버렸다. 뻥이라니 대체 뭐가 뻥이란 말인가.

얼빠진 표정을 한 그에게 효은이 속삭였다.

“진짜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진작에 니 굴려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었지.”

이미 그러고 계시잖아요,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효은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뻥이야?”

“응.”

“진짜?”

계속된 물음에 효은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있었음 좋겠냐?”

“아니.”

다행이긴 한데,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다. 상호는 싱거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효은이 뺨을 살짝 붉히며 눈을 마주쳐 왔다.

“니가 그렇게 애 갖는 데 적극적일 줄은 몰랐네.”

“응?”

“안 숨겨도 돼, 멍청아. 내가 널 얼마나 봤는데. 방금 엄청 아쉬워하는 표정이드만.”

“아닌……데…….”

“앞으로 조심해.”

효은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갑자기 생겨 있을 수도 있어.”

상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떠받들어주는 맛을 알게 해 버렸구나. 괜한 의심으로 진짜 재앙을 불러와 버렸다.

그의 손에서 염주가 물 흐르듯 굴러갔다.

‘제발, 제발 내년까지는 오지 마라,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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