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224/501)

* * *

찔렀다.

틀림없이 찔렀다.

세희는 멍하니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찌르라고 했다.

살갗에서 멈추지 말고, 내장을 볼 작정으로 찌르라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그렇게 찔렀는데.

온 힘을 다해 찔렀는데.

또르륵

세희의 얼굴에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으.”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는 다혜의 목에서 보석이 부서져 내렸다. 보호 마법을 걸어주는 아티팩트가.

세희는 바닥에 산산이 흩어지는 녹색 파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명확하지 않은 의문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휩쓸었다.

저게 왜 부서지는지. 아니 그보다도 칼을 뽑아야 하는지. 출혈이 심해지는 건 아닌지, 아프진 않은지.

굳어버린 세희의 얼굴을 다혜의 손이 쓰다듬었다.

“……아으.”

손끝에 피가 묻어났다.

그 피에 놀란 건지, 아니면 피가 묻은 세희의 얼굴에 놀란 건지. 다혜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상처의 고통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세희는 숨을 삼키며 나직하게 다혜를 불렀다.

“언니?”

대답은 없었다.

“크르…….”

짐승의 으르릉거림만이 돌아올 뿐.

세희는 바로 앞에서 돋아나는 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다혜의 눈이 노랗게 번득였다.

 209. 얄팍한 거짓말

눈빛. 노란 눈빛. 세희는 자신을 노려보는 그 찢어진 동공을 마주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온몸이 저리는 감각. 맹수를 철조망 하나 없이 맞닥뜨릴 때처럼. 다리가 떨리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크르…….”

다혜가 검을 손에서 놓았다.

그 순간 강대한 기운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윽!”

“크륵……!”

둘은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밀려났다.

둘뿐이어야 할 결계 안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희야, 이리 와.”

민정이 손을 까딱였다. 그녀의 옆에는 상호와 효은이 서 있었다.

효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난 왜 들어와야 해?”

“남들한텐 내가 아니라 니가 해결한 걸로 보여야 하니까.”

상호의 손이 효은의 어깨를 잡고 민정의 뒤로 밀어붙였다.

“넌 물러나 있어. 여기서 제일 약한 게 너잖아. 누나, 밖에 안 보이는 거지?”

“응.”

“좋아.”

상호는 검을 짚으며 경기장으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세희에게 다가가 피가 튄 얼굴을 한번 쓱 어루만지고,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누나 옆에 가 있어.”

“……네.”

세희는 부러진 검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대답했다.

터덜터덜 걸어간 세희가 민정의 옆에 서자 그 앞에 결계가 하나 더 생겨났다.

상호는 그 결계를 확인하고 다혜를 돌아보았다.

“한번 보자. 얼마나 강하길래 교장선생님이 뺨까지 긁혔는지.”

“크르르…….”

다혜가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고 눈을 까뒤집었다.

몸에서 붉은 강기가 타오를 듯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상당하네.”

하지만 초강기는 아니다.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소매를 걷었다.

“와 봐.”

그의 검지가 까딱였다. 낚싯대의 미끼처럼.

다혜는 그걸 보고 물고기처럼 잽싸게 달려들었다.

“크륵!”

침이 흐르는 입 사이로 뾰족한 이빨이 보였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상호의 가슴팍으로 다혜의 손이 날아들었다. 손에 두른 강기가 용의 발톱처럼 날카로웠다.

상호는 그 모습과 속도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빠른 건가?’

학생치고는 당연히 빠르다. 하지만 다혜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할 터.

옛날에 싸웠던 놈들은 어땠던가. 워낙 과거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실전에서 물러나 있기도 했고.

‘아냐, 느려. 확실히. 이 정도로는 부족해.’

이게 전부라면 실망이다. 상호는 손을 들어 다혜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다혜가 재빨리 몸을 뺐다.

“……크륵.”

다혜는 상호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네 발로 착지했다.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가득한 걸 보니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모양이었다.

“감은 좋구나.”

상호는 씩 웃었다.

“감도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 물론 정말로 감이 좋았다면 애초에 덤벼들지도 않았겠지만.”

“크륵?”

다혜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웃하고 상호의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탐색전을 하는 짐승이라. 상호는 내공을 끌어올리며 다혜의 뿔을 응시했다.

‘용혈이 만든 건가?’

그렇다면 저걸 부수는 것으로도 다혜의 용혈을 줄일 수 있을 터. 생각과 동시에 상호의 내공이 움직였다.

“크르르악!”

하지만 다혜에게서 뻗어 나온 기운이 상호의 내공을 밀어냈다.

허공섭물로 뿔을 부러트리려던 상호는 내공을 거두고 계획을 바꿨다.

‘그 정도 싸움머리는 있구나.’

어지간히 강한 놈들에겐 허공섭물이 먹히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내공 따윈 검기보다 약한 게 당연했기에.

더욱 강하고 정제된 내공이 필요한 것이다.

상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일단 뿔부터 부러트리고 상태를 보자.’

손에서 검푸른 강기가 타올랐다.

강기는 점차 짧은 검의 형상을 이루더니, 온전한 모습을 갖추자마자 다혜의 뿔을 향해 날아갔다.

뿔이 단칼에 썩둑 잘려나갔다.

“크르……!”

다혜가 눈에 불을 켰다.

뿔을 자른다고 폭주가 잦아들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상호는 짚고 있던 검을 들어 빙글빙글 돌렸다.

“화나냐? 그럼 와 보라고. 네가 어느 수준인질 알아야 하니까 말이야.”

그 말에 다혜가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뒤로 빼려는 기색이 없다. 상호는 다혜의 속도와 자세를 살피다가 냉큼 손목을 잡아 뒤로 패대기쳤다.

콰앙

“크으……!”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치솟았는지, 다혜는 벌떡 일어나 네 발로 땅을 짚었다. 침이 줄줄 흐르는 입에서 불꽃이 연신 팔락였다.

날카로운 강기의 발톱이 상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학습능력이 없구만.”

상호의 간단한 손짓에 다혜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똑같은 방향. 똑같은 속도. 기술은 아예 모르는 것 같고.”

상호는 손끝에 내공을 모았다.

“자기 급소를 얼마나 내보여주는지도 모르고, 속임수는 생각 자체를 못 하네.”

그의 검지가 다혜의 목과 등에 꽂혔다. 눈 깜빡할 사이에 열 번 이상.

“네 밑천은 다 알았다.”

손가락에서 흘러들어간 내공이 다혜의 혈과 신경을 타격했다.

다혜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움찔거리다가, 땅에 등부터 처박히고는 폐에 남은 모든 숨을 토해냈다.

“케흑……!”

“가만히 있어.”

상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다혜의 목을 짚었다.

용혈이 체내에서 날뛰는 게 느껴졌다. 이전에 확인했을 때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그동안 숨어 있었구나.’

이 정도의 기운을 다스리려면 얼마만큼의 내공이 필요할까. 그만큼의 내공을 얻으려면 얼마나의 시간이 필요할까.

상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무식한 놈이 힘만 세 가지고는……. 그래도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충분히 할 만 하겠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가능은 할 것이다. 상호는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다혜의 목에 한 자락 내공을 남겨둔 채.

“쉬어, 이제.”

“크륵……!”

다혜는 몸을 한 차례 경련하더니 바닥에 축 늘어졌다.

“끝났어?”

효은이 그를 향해 물었다.

상호는 허공섭물로 다혜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알 한다 이 새끼야. 지보다 약하다고 학습능력이 없네 밑천이 보이네…… 어휴, 어쩌다 저런 새끼를 만났나 몰라.”

“…….”

할 말이 없다. 상호는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 * *

“어때?”

해련이 물었다.

“직접 보니까 뭔가 알겠어요?”

“예.”

상호는 교장실 소파에 누인 다혜를 내려다보았다.

평가는 끝났다. 세희에게 진 다혜가 4등. 기력이 다 빠진 세희가 기권패로 3등. 다른 학생들이 1, 2등.

“강기는 강해졌지만…… 전투는 오히려 약해요. 교사들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이 안 통해서 위험한 거지…….”

“자기가 공격당하면 튀어나오는 것 같죠?”

해련은 자고 있는 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격만 안 당하면 괜찮으려나? 이사장한테 그렇게 말해 볼까요?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아뇨.”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공격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아마 세희한테 찔려서 놀랐던 게 아닌가…… 싶어요.”

해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른 건가?”

“다르죠.”

상호는 피가 튄 세희의 얼굴을 보고 놀라던 다혜의 눈빛을 떠올렸다.

“아픈 건 문제가 아닐 거예요. 아르게스에서 살아남은 아이잖아요. 수없이 다치고 고통에 둔감해졌을 텐데……. 그것보단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요. 특히 세희가 엮여서.”

“세희?”

“저번에도 세희가 당했었잖아요.”

세희는 민정과 효은의 옆에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해련은 세희를 흘끗하고는 다혜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정신적…… 하긴. 그런 일이 있었으니.”

조난이란 그런 것. 몸보다는 마음이 힘들다. 만물에 대한 투쟁을 홀로 외로이 이어나가야 하기에.

“근데 왜 하필 세희일까?”

“둘이 같은…….”

옆에서 세희가 듣고 있다. 상호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간신히 말을 돌렸다.

“……다니거든요. 같이 잘 다녀요. 친해서 그런 거겠죠.”

“그래?”

“네.”

“어쨌든.”

해련이 다혜의 배에 난 상처를 살폈다.

“이건 성력으로 나으려나 모르겠네. 융합체랑은 다르겠지? 저번에 구조했을 때도 성력으로 치료했던가?”

“네. 그때도 성력으로 치료했고…… 그렇게 깊지도 않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면 이제 다른 문제를 따져야겠네.”

해련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어떻게 세희가 아티팩트를 부순 거예요?”

“……그게.”

오히려 상호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분명 초강기도 한 번은 버티는 물건이었는데. 물론 작년에 테스트했을 때는 진심으로 죽자 사자 달려들진 않았었지만. 어쨌든 그의 공격을 한 번 막은 후에 부서졌었다.

상호는 민정과 눈을 마주쳤다.

“불량품은 아니었겠지?”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민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도 사람이라 확신은 못해…….”

“아닐 거예요.”

해련이 딱 잘라 말했다.

“내가 항상 전부 확인하니까. 답은 하나예요. 세희가 초강기를 썼다는 거.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대체 학생이 어떻게 초강기를 쓰는 거예요?”

다그치는 목소리.

학생의 안전이 달려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상호는 헛기침을 했다.

“그게…… 제가 가르친 심법이 조금 특이해서요.”

“강 선생 심법이에요?”

“네. 강기를 최대한 강하게 만드는 심법이라…….”

“세희가 초강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다혜에게 난 상처의 정도를 보니 아마 바늘만한 면적에 내공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호 자신이나 해련의 초강기와 맞먹는다니.

학생이 그 정도 경지에 오를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터였다.

“……으음.”

해련은 상호와 세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긴 뭐 일부러 그랬겠어요. 그래도 깜짝 놀랐잖아요. 그리고 그 모습을 애들도, 교사들도 봤을 텐데…….”

“……죄송합니다.”

“이사장이 또 뭐라 하겠네. 아이 참, 왜 이런 일만 생기는 건지……. 그 심법은 세희만 배운 건가요?”

“예.”

고개를 푹 숙인 상호의 앞으로 해련의 한숨이 쏟아졌다.

“그럼 일단, 세희는 다음부턴 목검을 쓰는 걸로 하고. 다혜는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게 학교에서도 도와주는 걸로. 이렇게 정리를 하죠.”

“네.”

상호는 소파에서 일어나다가 멈칫했다.

“다혜는…….”

“내가 신앙인 선생한테 데려갈게요. 가서 일 봐요. 애들 성적 정리해야 하잖아.”

“……그럼.”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세희를 돌아보았다.

“가자.”

“네.”

상호가 문가로 향하자 민정과 효은도 따라서 일어났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뭘 따라와. 일하러 가는 건데.”

“같이 가면 안 되냐?”

“방에나 가 있어. 세희랑 이야기하고 갈 거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세희와 함께 교장실을 나왔다.

둘이 이야기하기엔 교무실보단 교실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교실로 향하려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켁!”

“뭘 놀라요?”

미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는 괜찮대요? 세희는 어때. 괜찮니?”

“괜찮아요.”

세희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호는 이마에 쫙 배어난 진땀을 닦으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요? 퇴근도 안 하고…….”

“애들이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에 상호의 눈이 어리벙벙해졌다. 평가는 한참 전에 끝났는데.

“……기다리고 있다고요?”

“다들 보고 있었잖아요. 걱정되는 게 당연하죠.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할 거고.”

미진이 팔짱을 끼고 그를 째려보았다.

“빨리 가서 설명을 하든 종례를 하든 하세요. 30분 넘게 기다렸으니까.”

“아, 알았어요.”

상호는 세희와 함께 허둥지둥 교실로 향했다.

* * *

“앗!”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단비가 소리쳤다.

“쌤 왔어!”

“머라? 세희도 왔나?”

“응!”

“용케 깜빵 안 갔구마잉.”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상호와 세희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많이 궁금했나 보다. 상호는 그 똘망똘망하고 걱정 어린 눈빛들을 마주하며 교실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들어가 있어. 선생님 딴 데 안 가니까.”

“뭔 일이야? 걔는 어떻게 됐어?”

“세희 괜찮아?”

“다 설명해 줄게. 들어가, 들어가.”

상호는 앞문으로, 세희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교탁 앞에 선 상호는 자리에 앉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목걸이에 불량이 있었다고 하면 학교가 곤란해질 거고…….’

곧이곧대로 말하자니 꼬리를 물릴 게 뻔했다. 세희의 심법이 뭔지, 초강기가 뭔지, 상호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래서 뻥을 좀 세게 치기로 했다.

“케첩이야.”

“응?”

아이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케첩이요?”

“응. 다혜가 깜빡하고 전투복에 케첩을 넣어놨었대.”

“……뭘 깜빡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튀는 모양이 케첩이 아니었는데…….”

상호는 딱 잘라 말했다.

“케첩이야. 다른 반 애들이 물어보면 제대로 알려 줘. 다들 피라고 착각 많이 하겠더라.”

“그럼 왜 수녀님이랑 결계에 들어가신 거예요?”

“수녀님도 피라고 착각하셨나 봐. 그런데 같이 들어가서 보니까 케첩이더라고. 내가 직접 먹어 봤어.”

“엥……. 그럼 그 언니는 왜 또 쓰러졌어요?”

“쪽팔려서 쓰러진 척했대.”

“…….”

아이들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나오지가 않는 표정이었다.

상호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종례를 마치기로 했다.

“다들 고생했고. 기다리게 한 거 미안해. 늦었으니까 성적 이야기는 내일 하자.”

“…….”

“들어가~.”

그는 쾌활하게 손을 흔들고 교실을 부리나케 빠져나왔다.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따지고 들면 지어내기 힘들 것 같아서.

교실에서 의자 빼는 소리와 소곤대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우예 케첩이고? 말이 되나?”

“백 번 양보해서 케첩이었다 쳐도…… 그걸 왜 배에 넣고 다녀? 야, 천세희. 쌤이 구라 깐 거지?”

“케첩이야.”

“뻥치지 마! 너 칼 줘봐. 니 칼에 X나게 묻어 있을 거 아냐. 앗! 야!”

쨍그랑

“야! 미친년아! 저 새끼 튄다. 잡아!”

“케찹에 약을 탔는갑다.”

“멍, 선도부가 창문 깼어…….”

“…….”

상호는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210. 속도위반

다음 날 아침.

‘뭐여.’

상호는 모니터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뭔가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깜빡여도 보고, 비벼도 보았지만, 화면에 보이는 수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서가 1등이네?’

전교 1등은 아니고, 반 1등.

대진운이 좋지 않았는지 하솔과 가은의 등수가 낮았고, 대신에 이서는 성적이 훌쩍 뛰어올랐다. 그게 전교 6등.

상호는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가르친 보람이 있구만.’

물론 대부분은 세희와 은율이 때려 키운 것이지만, 어쨌든 그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방증이 될 터였다.

‘이제 이걸로 가은이 설득도 하고, 이야기도 좀 하고…….’

일사천리로 진행하면 될 터.

요즘 잘 안 풀리는 일이 많던 차에 그나마 좋은 일이 생겼다. 상호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로 향하는 걸음이 간만에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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