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빛이 잘 싸우네.”
스탠드에 앉은 효은이 중얼거렸다.
“누가 가르쳤는지 참 궁금하다. 그지?”
“갑자기 뭔 소리야?”
상호는 그 옆에 앉은 채로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내가 가르쳤지.”
“웃기네. 나빛이가 왜 니 제자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가르쳤구만.”
“뭘 끝까지 가르쳐? 니 성창은 그냥 물량빨이잖아. 어검술은 내가 가르친 거라고.”
그 순간 나빛의 성창이 상대의 검을 미끄러지듯 타고 들어가 가슴팍을 쳤다.
상호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효은을 돌아보았다.
“봐봐. 니가 저런 걸 할 수 있냐? 니는 그냥 여러 개 만들어서 동시에 찌르고 끝이잖아. 저게 다 어검의 묘리를 가르쳐서…….”
“그래, 니 잘났어 새끼야.”
효은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빛이 니가 가져라, 그래. 너만의 나빛이 해서 잘 키워갖고 혼자 먹으라고.”
그 말에 상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바로 옆에 민정과 해련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난 니가 여고에 왜 왔는지 확실히 알았어, 등신아. 발정나서 눈에 뵈는 게 없는 들개 같은 새끼…….”
“……집중할 거야. 조용히 해.”
상호는 그렇게 일축하고 경기장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오후 본선 중. 본선에 올라간 건 나디아를 제외한 2학년 전원.
나디아는 상호가 다른 어른들과 함께 있는 게 불편했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 앉아서 경기장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다혜는…….’
상호의 눈동자가 가장 가까운 경기장을 향했다.
다혜는 이미 제일 먼저 64강전을 마치고 경기장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옆에 선 건흠이 다혜의 팔뚝을 토닥였다.
지금은 다혜를 감시할 필요가 없다.
“나 우리 애 좀 보고 올게.”
상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가서자 나디아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깜짝 놀란 푸른 눈은 상대가 상호라는 것을 알아보고 긴장을 풀었다.
“누구 보고 있어?”
상호가 묻자 나디아는 검지를 들어 구석의 경기장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지윤과 이츠키가 싸우는 중이었다.
부적을 두른 칼과 주먹이 맞부딪혔다.
그 모습을 본 상호는 나디아에게 운동을 시켰던 일이 떠올랐다.
“나디아.”
“네.”
“운동은 잘 하고 있어?”
“네.”
“손 줘봐.”
나디아가 손을 내밀었다.
상호는 그 손을 주무르며 상태를 살폈다. 꽤 근육이 붙은 것을 보니 이제 세희나 은율보다 조금 더 강할 듯싶었다. 내공 없이 순수한 근력만으로는.
하지만 그럼에도 양손검을 자유자재로 다루기엔 부족했다.
“잘 하고 있어. 잘 하고 있는데…… 조금만 더 노력하자. 지윤이처럼 물구나무서서 손으로 걸어다닐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강해져야 해.”
“네.”
나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향에서 떠나온 아이라 그런지 항상 눈빛이 깊었다. 상호는 그 바다 같은 눈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때 뒤쪽에서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꼬시네, 들개 새끼.”
상호는 반응하지 않았다.
“경기 같이 보자, 나디아.”
“네.”
둘은 지윤과 이츠키의 시합을 지켜보았다.
시합은 무릎에 몰래 부적을 붙여둔 이츠키가 지윤의 배에 니킥을 날리며 끝이 났다. 저주 때문에 봉사가 되어버린 지윤이 바닥을 더듬거리며 기어갔다.
“마, 이츠키! 어딨노! 내도 같이 내려가야 할 꺼 아이가! 계단이 으덴진 갈켜 줘야제!”
“패자는 기어서 내려오는 겁니다.”
이츠키는 그렇게 혼자서 쌩하니 내려와 버렸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나디아.”
“네?”
“나디아는 누구 이겨본 적 있어?”
“지랄.”
‘?’ 상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 뭐 잘못했나?’
반에서 제일 약하다는 콤플렉스를 건드린 걸까. 상호는 잔뜩 쪼그라든 채로 나디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디아는 구김살 하나 없이 밝게 웃고 있었다. 원망이나 서운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도록.
그는 그 웃음에 용기를 얻어 다시금 물었다.
“나디아 요즘 힘든 거 있어?”
“지랄!”
상호는 차마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누가 가르친 거지……?’
아마 태화나 지윤, 혹은 이서. 십중팔구 셋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상호는 나디아가 그 단어의 뜻을 잘 모른다고는 생각지 못하고. 그리고 그 단어를 다른 누구도 아닌 세희가 가르쳤다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하고.
깊은 한숨만 푹푹 쏟아냈다.
‘업보다, 업보.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업보…….’
앞으로는 바르게 살리라. 바람도 안 피고 욕도 안 하고.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한창 32강이 준비 중인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208. 선혈
“으──아.”
다혜는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은회색 머리 소녀. 눈동자도, 눈썹도 같은 색. 온통 하얀 얼굴에 오로지 입술만이 붉었다.
그 소녀가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으.”
“저번에 한 번 싸워봤죠.”
“으아.”
지난 중간평가의 4강. 다혜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이 하나빛이라고 했던가.
나빛은 다혜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선생님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으?”
“가장 강한 첫 제자시라고…….”
“아으아으!”
다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콧대를 세웠다.
하지만 곧 나빛의 주변에 떠오르는 성창을 보고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느아?”
“곧 아니게 될 거예요.”
나빛의 등에서 황금빛 날개가 펼쳐졌다.
“제일 강한 건 나니까.”
곧 성창이 다혜를 향해 빗발쳤다.
작은 것은 작아서, 큰 것은 커서 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굳이 피할 이유가 없으니.
다혜는 검을 뽑아 휘둘렀다.
카각……
궤도가 비틀어진 성창들이 바닥에 마구 박혔다.
다혜는 그 성창을 밟고 뛰어올랐다. 순간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공중에 떠오른 자신의 몸조차도.
나빛의 시선은 다혜가 서 있던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느려.’
다혜는 경기장 결계의 천장을 가볍게 딛고 나빛의 등 뒤로 돌아갔다.
나빛에 대한 파악은 이미 중간평가 때 끝났다. 신앙인답게 너무 느린 동체시력. 자기가 빠르게 움직여본 적이 없으니 눈이 빨라지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다혜가 검을 휘두르는 동안에도. 나빛의 회색 눈동자는 땅바닥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다혜는 마음 놓고 검을 내리쳤다.
쉬익
시야 옆쪽에서 누르스름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상당히 빠른 움직임. 다혜는 눈동자만 돌려 그 무언가를 확인했다.
성창.
‘예측했구나.’
등 뒤를 노릴 줄 예상하고 이렇게 성창을 날린 것이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공격할 수 있게끔.
하지만 그마저도 느리다.
다혜는 손등으로 가볍게 성창의 옆면을 쳐내고 나빛의 등에 검을 휘둘렀다.
퍼억
“윽!”
나빛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처박힌 나빛의 등을 다혜가 가볍게 밟았다. 그리곤 목에 검을 살짝 가져다 대었다.
“아으.”
결계가 내려가고 진행교사가 선언했다.
“송다혜, 승.”
다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아무리 사기적인 능력을 가졌더라도 기본적인 속도와 힘에서 차이가 나면 이길 수 없는 게 당연한 법이었다.
“므흐흥.”
다혜는 그렇게 웃으며 경기장에서 내려갔다.
* * *
“아이씨…….”
태화는 코 밑을 쓱 문지르며 경기장에서 내려오다가, 바로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상호를 보고 움찔했다.
“……뭐! 나 열심히 했어!”
“알아 임마. 잘했어.”
상호는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고 경기장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건흠의 옆에 선 다혜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냥 쟤가 너무 강한 거야.”
“괴물이라니까.”
태화는 다리를 건들거리며 툴툴댔다.
“말이 안 돼. 쟤는 평가 왜 봐? 꿇었으면 3학년들이랑 싸울 것이지.”
“어쨌든 2학년이니까.”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고 태화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넌 패자전 해야 되잖아.”
“세희랑 은율이는 어떻게 됐어?”
“세희는 4강 올라갔어. 은율이는 16강에서 다혜한테 떨어졌고.”
“개판이네. 아, 진짜. 쟤만 없었어도 내가 1등인데…….”
태화는 신경질적으로 돌부리를 걷어차며 패자조로 향했다.
4강에 오른 건 세희, 다혜, 그리고 이름 모를 두 학생.
아직까진 폭주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폭주하는지는 확인했다. 이제…….’
왜 폭주하느냐, 언제 폭주하느냐를 알아볼 차례.
상호는 다시 경기장에 오르는 다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세희야.”
“네.”
곁에 다가선 세희가 대답했다.
“이기진 못하더라도…… 한 방은 먹여봐.”
“이기고 올게요.”
거침없는 세희의 대답에 상호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
그는 곧 웃으며 대답했다.
세희는 그를 지나쳐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두려움이라곤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이미 뽑아둔 검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 * *
다혜는 경기장에 오르는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검은 눈. 까맣게 타오르는 눈.
그녀는 그 눈이 동그랗게 반짝일 때부터 봐 왔었다.
“으아.”
반갑다는 뜻의 인사.
세희는 꼭 그 웅얼거림을 알아들었다. 담임도, 상호 아저씨도 모르는데. 사실 상호 아저씨와는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없지만.
다혜는 그게 신기했다.
그래서 세희에게는 더욱 많은 말을 했다.
“아으아응.”
“결승이 아니라서 아쉽다고요?”
“아으!”
“난 별로 상관없어요.”
세희가 검을 횡으로 잡고 자세를 낮췄다.
“난 언니랑만 싸우면 장땡이니까.”
“아으아!”
다혜도 동감이라는 뜻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빙긋 웃는 다혜를 보고 세희가 뚱하게 중얼거렸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므흐흥~.”
“어쨌든 시작하죠.”
“아으.”
다혜는 세희를 바라보고 똑바로 섰다. 다리를 살짝 벌린 차렷 자세로.
‘저번엔 내가 갔으니까 이번엔 네가 와.’
그런 뜻이었다.
검조차 잡지 않는 그 모습을 보고 세희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구태여 무어라 따지지는 않았다.
“가요.”
상대에게 친절히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에 힘을 더하는 다짐.
세희가 검에 하늘색 검기를 두르고 달려들었다.
‘예쁘네.’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깔. 저 내공심법은 어디서 배웠을까.
다혜는 세희가 달려오는 동안에도 결계 너머 어딘가를 쳐다볼 여유가 있었다.
‘아저씨한테 배웠겠지.’
다혜는 상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교장과 수상할 정도로 친하고, TV에서 자주 본 것 같은 수녀와도 친하고.
용고기로 술판을 벌이기 전까지는 그냥 지나가던 베테랑 헌터에 B급 치고는 강한 교사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무언가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게 저 내공심법의 정체를 더욱 궁금하게 했다.
‘저번에도…….’
다혜의 눈이 세희의 검기를 훑었다. 검기. 강기가 아니라 검기.
그때 본 것은 저런 밋밋한 검기가 아니었다.
눈이 부시도록 밝게 타오르던, 하늘색 불꽃.
그 불꽃이 자신의 강기를 뚫고, 검을 부러뜨렸었다.
‘뭐, 안 닿으면 될 일이니까.’
피하면 그만이다. 다혜는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스릉……
소리마저 느리게 들린다.
아마도 남들에게는 씽 정도로 들렸을 것이다. 다혜는 느려진 세상에서 평범하게 검을 뽑아 세희의 목에 가져갔다.
‘아, 닿겠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보호 마법이 걸린 목걸이가 있지만, 그래도 세희의 목에 검을 대기는 싫었다. 그냥 조금만, 장난으로 끝날 수 있도록.
종이 한 장. 다혜는 그 거리를 유지했다.
세희가 앞으로 뛰어드는 동안에도.
“큭……!”
세희는 조금 늦게 알아차리고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세희도 알 터였다. 다혜는 얼이 빠진 세희의 얼굴을 보고 빙긋 웃었다.
찌르려면 찌를 수 있었다.
‘그게 너랑 내 차이야.’
다혜는 일부러 다음 공격을 이어가지 않았다. 세희와 좀 더 놀고 싶어서.
다혜에겐 이 모든 평가가 그저 세희와 검을 맞대는 놀이에 불과했다.
“아으.”
다혜는 일부러 세희의 검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때 그 강기 한번 다시 보자. 그런 뜻으로. 하지만 세희는 당황하며 검을 뒤로 뺐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아무 때나 막 쓸 수 있는 건 아니구나.’
더 느긋하게 놀 수 있겠다. 다혜는 세희의 주변을 둥글게 달리기 시작했다.
세희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윽…….”
아마 세희의 눈에는 다혜의 모습이 여러 개로 나뉘어 보일 터였다.
예상대로 세희는 어디를 봐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다혜는 달리는 궤적을 점점 좁혀 들어갔다.
때로는 검을 들어 올리고, 때로는 내리고. 휘두르는 척을 하거나 뒤로 빼는 척을 하면서.
그러자 세희는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검을 부여잡았다.
“칫……!”
다혜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 미소를 보았을까. 펼쳐진 수십 개의 잔상 중에 하나쯤이 웃었을까. 갑자기 세희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화났나?’
신기한 마음으로 세희의 표정을 살피는 순간.
세희의 검이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아으!”
깜짝 놀란 다혜는 본능적으로 뒤로 뛰었다. 그 뒤를 세희의 검이 쫓아들었다.
예상보다 빨랐다. 칼이, 손이, 팔이.
손목과 팔꿈치, 어깨의 관절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다혜를 집요하게 쫓았다.
꼭 뱀과 같았다.
‘실력을 숨겼구나.’
그런 상대는 야생에 흔치 않다. 대부분은 첫눈에 들자마자 바로 발톱과 이빨을 꺼내니까.
허나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다혜는 영악한 몬스터들을 상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놀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눈앞으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어?’
퍼억
다혜는 황급히 그 무언가를 쳐냈다.
칼집.
‘휘두르는 걸 못 봤는데……?’
다혜의 눈동자가 땅을 향했다. 세희의 발이 조금 부자연스럽게 땅을 딛고 있었다.
밟아서 튕겨 올린 것이다.
‘속임수가 늘었어.’
저번과는 느낌이 다르다. 다혜는 칼집을 치우자 나타난 세희에게 검을 휘둘렀다.
세희는 그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검을 맞부딪쳤다.
‘응?’
다혜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피하는 데 성공했다면 굳이 검을 부딪칠 이유가 없는데.
그 순간 다혜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광경이 있었다.
‘……아.’
검을 부수려는 것이다. 다혜는 온몸의 내공을 끌어모아 검에 불어넣었다.
두터운 붉은색 강기가 보석처럼 선명한 경계를 띠었다.
스륵
아주 쉽게 베여나갔다.
“아?”
다혜의 검이 아니라 세희의 검이.
꼭 물을 가르듯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잘려 나갔다. 그래서 회전하지도, 날아가지도 않았다. 그저 잘 익은 과일처럼, 본체에서 똑 분리되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왜 이게 잘릴까.
다혜는 어안이 벙벙해하며 그 부러진 검을 바라보았다.
팍……
세희의 발이 땅을 박찼다.
그때서야 세희의 검이 밝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리도록 밝은 하늘색 빛으로.
불꽃이 다혜의 배로 날아들었다.
‘……아.’
만나본 적이 없다. 이렇게 싸우는 상대는.
당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약은 속임수는.
‘강하구나.’
다혜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