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2화 (222/501)

* * *

“자.”

태화가 바나나 우유를 내밀었다.

맨날 얻어먹기만 하는 애가 웬일로 이럴까. 세희는 창가에 기대어 서서 멀뚱한 표정으로 그 우유를 받아들었다.

“뭐야.”

“마시라고.”

“아니, 누가 그걸 물어? 왜 안하던 짓을 해.”

“싫어? 싫음 말고.”

태화는 콧방귀를 뀌며 포장을 뜯어서 자기가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세희는 그게 아깝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년이 약을 탔는지 약을 먹었는지 분간이 가질 않아서.

“쯥, 맛만 좋구만.”

원샷을 마친 태화가 플라스틱 병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어쨌든. 언니한테 속 시원히 말해 보라고.”

“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세희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태화의 눈길을 피했다.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말 안 할 거야? 누가 때렸냐고.”

“니가 알아서 뭐하게.”

누구한테 맞았다는 것까진 알고 있나 보다. 세희는 톡 쏘아붙이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별일 없었어. 선생님께서 다 해결했고.”

“해결했어? 근데 왜 표정이 맨날 죽상이야?”

태화가 눈 아래를 검지로 끌어내리며 혀를 빼쭉 내밀었다.

“못생긴 얼굴 더 못생겨지게.”

“꺼져.”

“내 예쁨 좀 나눠줘? 자.”

태화는 자기 입술을 엄지로 쓱 훑더니 세희의 볼에 쓱 문질렀다. 양쪽 볼에 한 번씩.

세희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굳이 거울을 확인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훨씬 예뻐졌네. 이제야 사람 같다, 야. ……웁!”

낄낄 웃던 태화의 입술에 세희의 손바닥이 마구 비벼졌다. 입가에 틴트가 왕창 번지도록.

세희는 자신의 작품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개예쁘네.”

“야! 빠가년아! 오늘 개잘먹었는데! 아 진짜!”

“그러니까 그런 짓 하지 말라고.”

“……X바.”

태화는 툴툴거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그래서. 쌤이 뭘 해결했는데.”

“궁금해?”

“안 궁금하겠냐? 애가 눈탱이 밤탱이가 되어서 왔는데. 하나빛이 치료하기 전까진 넌지도 몰랐어.”

“참나…….”

세희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려 했다. 그때 매점 한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때 그 3학년들.

세희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뭐야. 왜 또 죽상…….”

태화도 세희의 표정 변화를 확인하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쟤들이야?”

“응.”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들 또한 세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두 명은 세희와 태화를 보고 움찔하더니 자기들끼리 무어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세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또 누구 삥이나 뜯고 있었겠지…….’

그런데 3학년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세희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 두 명과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왜 오는 거지?’

이제 3학년들과 세희의 거리는 한 걸음밖에 되지 않았다. 세희는 공격이 날아오지 않을까 의심하며 3학년들의 손과 발을 흘끗했다.

그때 3학년들이 입을 열었다.

“미안.”

그 의외의 말에 세희의 눈이 한 차례 끔뻑였다. 완전히 얼이 빠져서.

그러거나 말거나 3학년들은 말을 이었다.

“때린 거. 우리가 심했다 싶더라고.”

“걔한테도 이제 안 그럴 테니까…… 잊어 주라.”

둘은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다리를 건들거리고, 시선을 자꾸 다른 곳으로 돌리며.

‘사과를 할 줄은 몰랐는데.’

세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사과를 받는 게 맞을지, 안 받는 게 맞을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알았어요. 나도 이제 괜찮으니까.”

“……그래.”

3학년들은 어색한 사과를 마치고 쏜살같이 매점 밖으로 사라졌다. 그런 둘의 뒷모습을 태화가 멀뚱히 쳐다보았다.

“뭐야, 싱겁게. 저런 찐따들이랑 싸웠다고?”

“선생님 때문이겠지.”

세희는 쓰게 웃었다.

“우리 선생님 인기 많잖아.”

필시 그 이유일 것이다. 인기 많은 선생님의 반 학생이라서. 소문이 퍼지면 자기네들 반에서도 척을 지게 될까봐.

그래서 세희도 그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 언니에겐 하지도 않았겠지.’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그쪽인데 말이다. 세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매점 문가로 향했다.

“가자.”

“야. 잠깐만.”

“뭐.”

“나 빵 하나만 사줘.”

“…….”

* * *

“그래서 말인데…….”

건흠은 교장실 소파에 마주 앉은 다혜에게 말했다.

“이번 기말평가는 쉬는 게…… 어떨까 싶어, 다혜야.”

“아으.”

다혜가 눈을 내리깔았다.

둘의 옆에서는 해련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건흠은 해련을 흘끗하고 다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평가를 보고 싶다 해도…… 선생님들 판단에 따라 강제로 못 보게 될 수도 있어. 그래도 일단은 네 의사를 알아야 선생님들이 조치를 취할 수 있으니까…… 묻는 거야. 다혜야, 평가 볼 거야?”

“아으.”

아니라는 뜻 같았다. 건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는 쉬고…….”

“주 선생.”

“……네?”

해련이 빙긋 웃었다.

“내가 듣기로는 보고 싶다고 한 것 같은데.”

건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가요?”

“응. 목소리에 힘이 있잖아.”

그런 걸로 알아들을 수가 있나. 건흠은 멍하니 탁자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혜가 그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다혜야.”

“으아.”

“보고 싶어?”

“므앙.”

고개라도 끄떡여다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말 못하는 설움만 커질까 봐 그러지 못했다.

건흠은 그저 웃었다.

“그래. 그러면 일단은 그쪽으로 생각해 볼게.”

“아으아으.”

“옆방에서 운기조식하고 있을래?”

“아으.”

다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련의 개인실로 들어갔다.

곧 다혜가 들어간 문이 닫히자 건흠이 해련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으음.”

해련은 다혜가 일어난 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다.

“위험하긴 하죠. 다른 아이들보다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예.”

다혜가 폭주하는 기준을 모르니까.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또 사고가 나기라도 했다가는, 그때는 정말로 감당이 안 될 터였다.

되도록이면 평가를 안 보는 것이 모두에게 좋았다.

“다혜는 어차피 장학금 대상도 아니고, 성적이 큰 의미 없으니까…… 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건흠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해련은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주 선생.”

“예.”

“학교에 X급이 와 있는 건 알지요?”

“그렇습니다.”

건흠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명을 떠올렸다. 저승부대 출신 신앙인 나효은 수녀.

해련이 다리를 꼬고 발끝을 까딱였다.

“지금 학교에 X급이 꽤 많이 있단 말이지. 주 선생도 알고 있나?”

“강 선생 말입니까? 직접 확언을 들은 건 아니지만……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응. 그러면 이야기가 쉽네. 지금 저승부대 출신이 학교에 세 명 있어요. 주 선생이 아는 두 명, 그리고 내가 데려온 한 명. 그리고 나까지 합하면 X급이 총 네 명 있는 셈이지.”

건흠은 해련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이사장님 관할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뭐라 하시지 않을까요?”

“내가 볼 땐 충분히 안전할 것 같은데. 안전장치를 좀 더 갖춘다면 말이야. 한번 X급들이랑 의논해 보고, 다혜가 평가를 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볼게요.”

“제가 뭐 정할 수 있는 게 있겠습니까.”

유난히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요즘이었다. 건흠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혜가 평가를 보고 싶어한다면…… 저는 적극 밀어줄 수밖에 없지요.”

해련은 그 모습을 보고 쓰게 웃었다.

“다혜가 말로 표현을 못 하는 거지…… 속으로는 주 선생한테 제일 고마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주 선생이 판단을 잘못하더라도 다혜는 원망하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겁이 나는 겁니다.”

건흠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까봐…….”

“그거야 뭐, 사람 앞길은 알 수 없는 법이니.”

해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알 수 없는 게 앞길이라면 나아갈 수 있을 때 나아가는 게 좋잖아요? 이참에 다혜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 보죠. X급이 모여 있는 지금이 적기니까.”

“……그도 그렇습니다.”

건흠은 납득하고 해련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들어가요. 다혜한테는 내가 설명해 놓을게.”

“네.”

그는 해련에게 허리를 굽히고 교장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고 복도를 걷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건흠의 시선이 등 뒤의 교장실을 향했다.

‘그런데 다혜는 왜 꼭 평가를 보려는 거지?’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하지만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으니. 건흠은 걸음을 멈춘 채로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다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처럼 멀쩡히.

그는 그런 희망을 품으며 다시금 발을 옮겼다.

207. 바르게 살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예?”

상호는 뜨끔해서 미진을 돌아보았다.

“뭐가요?”

“뭔 말을 했길래 교장선생님이 부탁을 하시냐구요.”

미진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저번에 1학년 예선 2학년 본선 보셨잖아요. 그러면 이번엔 2학년 예선 보고 1학년 본선 보던가, 아니면 적어도 똑같이라도 해야지 왜 2학년만 보시겠다는 건데요? 그리고 왜 교장선생님이 저한테 1학년만 봐 달라고 말씀을 하시는 건데요?”

“다 사정이 있겠죠.”

상호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유는 당연히, 다혜의 시합을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교장선생님이 시키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너무 저한테 그러지 마요.”

“1학년 애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생각 좀 하고 사세요.”

평소보다 말이 거칠다. 아주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일단 저 화부터 달래야겠다. 자리에 앉아있던 상호는 일어나서 미진의 뒤로 돌아갔다.

마침 늦은 시간이라 교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앉아봐요.”

그가 어깨를 밀자 미진이 당황했다.

“뭘, 뭘 하려고, 또……!”

“앉아보라고요.”

상호는 미진을 의자로 밀어붙이고 어깨를 내리눌러 앉혔다.

“이미 뿔이 나 있으니까 사람 말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화부터 가라앉혀요.”

“읏…….”

미진은 다시 화를 내려는 듯 몸을 들썩였지만, 상호가 어깨를 주무르자마자 흐물흐물하게 퍼져 버렸다. 몸이 푸딩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고, 화가 풀리는 게 손으로 느껴지는데.”

“닥치……세요.”

“미진 씨는 남자친구한테도 그래요?”

“그걸, 왜 묻는…… 으으…….”

미진이 몸을 꿈틀거리며 사소한 반항을 했다. 하지만 몸에 전혀 힘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피부 아래 근육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었다.

상호는 손끝에 힘을 주어 조물조물 주무르며 웃었다.

“이쯤 되면 안마받고 싶어서 일부러 혼내는 거 아녜요?”

“미친 소리, 잘도…… 흐으…….”

그때 교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상호는 교무실로 들어오는 수녀를 보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웃는 표정 그대로.

머리끝이 하얀 수녀가 코웃음을 쳤다.

“대단하네, 이 새끼.”

“…….”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효은이 상호에게 다가와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상호는 황급히 검을 잡고 절뚝절뚝 끌려가며 싹싹 빌었다.

“잘못, 잘못했어, 누나. 그런데 그런 게 아니라…….”

“왜 맨날 늦나 싶더니 밀회를 즐기고 계셨어. 뭐? 나밖에 없어? 언니까지만이야? 염병을 하네.”

“아니라니까! 미진 씨한테 마음 없어, 애초에 미진 씨는 남친 있고…….”

“남의 떡이 더 맛있어 보이지? 나도 알아, 새꺄. 나도 언니가 먹는 게 X나게 맛있어 보이더라고, X발럼아.”

“아니라고, 제발 말 좀 들어…….”

“내가 뭐랬어. 바람을 필 거면 숨기지 말라고 했지? 근데 니는 새끼야. 천성이 더러운 새끼야. 여자 하나 두고 몰래 첩 길들이는 맛에 사는 새끼라고, 니는.”

“아니라고요…….”

“X까. 따라와. 븅신 쓰레기 새끼…….”

무지성 매도에는 지성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상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효은의 손에 붙잡혀 숙소까지 끌려갔다.

* * *

“선생님? 목에 상처가…….”

나빛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치료해 드릴까요?”

“아니.”

상호는 애써 웃었다. 아주 힘겹게.

“없애면 또 생겨.”

“왜 생긴 거예요? 꼭 할퀸 것 같은데…….”

“고양이가…… 고양이를 안으려고 했거든.”

“고양이요?”

나빛이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 고양이 키우세요?”

“아니, 키우는 건 아니고, 길고양이가 귀여워서……. 근데 들어올리니까 기분이 나빴나 봐. 발톱으로 확 긁어버리더라.”

나빛의 옆에서 듣던 지윤이 눈을 끔뻑였다.

“그기에 쌤이 와 당합니꺼?”

세희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둘의 머릿속에서는 아마 세계최강 고양이가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방심했어. 너무 귀여워서.”

“엄청난 고양이네예.”

“응. 엄청나더라.”

그 엄청난 고양이가 등까지 걸레짝을 만들어 놓았다. 옷이 스칠 때마다 상처가 소금을 뿌린 듯 쓰라렸다.

“……어쨌든. 오늘 시험이지?”

“예.”

“나는 오늘 2학년들 보러 갈 거고…… 1학년들은 미진 선생님이 봐주실 거야.”

그 말에 단비가 귀를 축 늘어뜨렸다.

“멍, 선생님 또 언니들만 봐…….”

다른 1학년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아마 자기들끼리도 말이 나왔던 것 같았다. 상호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최대한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사정이 있어서 그래. 2학기…… 아니면 적어도 내년에는 너희만 보러 갈 때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나 생각 말고 평가에만 집중해.”

“멍, 내년에는 언니들 3학년이라 언니들 보러 가고, 언니들 끝나면 또 새로 들어온 1학년들 보러 가고…….”

“아니야! 아니야. 안 그래 단비야. 선생님은 당연히 너희도 중요하고…….”

“그치만 3학년은 3학년이라 중요하고, 언니들은 첫 제자고, 우리는 계속 언니들한테 밀리다가 새로 들어온 1학년들한테도 밀려나고…… 멍.”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꼭 그 말대로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납득시킬 만한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1학년 안 받아. 내년에.”

“멍?”

단비가 귀를 쫑긋 세웠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안 받아요?”

“응. 너희…… 너희한테만 집중하려고. 그럼 된 거지?”

그 말에 1학년 아이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도 동생들 있었으면 좋겠는데…….”

상호의 마음속에 돌덩이가 하나 떨어졌다.

이러면 뭐 어쩌라는 걸까. 신입생을 받으라는 걸까 받지 말라는 걸까.

받겠다고 해도 뭐라 하고, 안 받겠다고 해도 뭐라 하고. 대체 어느 장단에 놀아야 미움을 안 받을 수 있는지. 돌파구를 찾고 있는데 마침 걸려든 게 있었다.

“우리도 언니들처럼 동생들한테 뭐 사주고, 이것저것 시키고 싶은데…….”

“……뭐? 누가 뭘 시켜?”

상호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 말에 1학년 모두가 태화를 돌아보았다.

태화는 그 눈빛을 받고 움찔하더니 적반하장으로 눈썹을 치켰다.

“야, 니들 웃긴다? 나라고? 내가 너희들한테 뭘 시킨다고? 얘랑 얘가 훨씬 많이 시키잖아!”

태화의 양손이 세희와 은율을 가리켰다. 한쪽은 선도부, 한쪽은 반장.

그러자 아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치만, 언니들이 시키는 건 언니들한테도 적용되는 거고…….”

“야,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초란이 너 은율이가 시켜서 교무실 간 적 있어, 없어?”

“있지만…… 그런 건 반장이라서 시키는 거…….”

“야, 이서. 너는 둘한테 X나 맞았잖아. 니가 말해 봐. 내가 많이 시켜, 이 둘이 많이 시켜?”

이서는 나빛의 눈치를 살피고 대답했다.

“……태화 언니.”

“이이익!”

태화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야! 내가 너희한테 대체 뭘 시켰는데!”

“뭐 잃어버리면 우리한테 찾게 시키고…….”

“언니 딴청부리는 거 안 걸리게 우리한테 등 꼿꼿이 펴라 그러고…….”

“맛있는 반찬 나오면 우리한테 한두개씩 더 받게 시켜서 자기가 가져가고…….”

줄줄이 소세지처럼 쏟아져 나온다.

태화는 진땀을 줄줄 흘리다가 상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혀를 빼물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잇힝~.”

“이태화.”

“아이씨, 애들이 장난치는 거야! 나 그렇게 심하게 안 했어!”

알고 있다. 심했다면 세희가 분명히 말했을 테니까.

상호는 엄한 목소리를 지어냈지만, 속으로는 춤이라도 출 듯 경박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평가 끝나고 남아.”

“아아아아니! 진짜로!”

태화가 발을 구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쌤 지금 신났지! 다 알아! 내년 신입생 이야기하다가 은근슬쩍 내 핑계 대면서 말 돌리는 거잖아!”

이럴 때만 날카롭구나. 상호는 속이 뜨끔해서 태화의 시선을 피했다.

혼을 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차마 윽박지를 수가 없었다.

“누가 혼낸댔냐. 이야기만 좀 하자는 거야. 평가나 잘 봐. 저번처럼 바보짓 하지 말고…….”

“앗.”

태화도 떳떳할 순 없었던 터라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계는 어느덧 나가야 할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호는 출석부를 교탁에 내려놓고 말했다.

“어쨌든 너희 다 시험 잘 보고, 1학년들은 다음에 예선 본선 다 봐줄 테니까 서운해하지 말고……. 슬슬 나가자.”

“네.”

“모여!”

“……이제 파이팅은 그냥 했다 치면 안 될까?”

“의식이에요.”

“요거이 안 하믄 힘이 안 난다 아입니꺼.”

“헤헤, 빨리 오세요.”

결국 상호와 아이들은 교실 가운데에 모여 손을 내밀었다.

“야, 비켜.”

“으잉, 내가 먼저 잡았어…….”

“나온나, 세희야. 내는 저번에도 못 붙었디.”

“나도야.”

평소처럼 2학년들이 상호의 손에 붙으려고 쟁탈전을 했다.

그런데 어째 1학년들도 은근슬쩍 상호의 손에 붙으려고 눈치싸움을 벌였다. 가은만 빼고.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얘들아?”

“네?”

“순서는 딱히 상관없잖아. 왜 너희까지…….”

“선생님 손에 붙어서 파이팅하면 성적이 좋아진대요.”

하솔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은근히 성적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이러지 않을 초란까지 그의 손바닥에 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애들이라 그런지 미신에 민감하구나…….’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뻘쭘하게 손을 내밀고만 있었다. 그 미신이 몇몇 아이들에겐 그저 손을 잡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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