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니 X바 그때 고하사 그놈이…….”
효은이 딸꾹질을 했다.
“인원보고를 했는데, 한명 죽었다 했는데 또 와서 인원 안맞는다고 한명 어디갔냐고 이 X랄을 해싸서…….”
“그렇구나~.”
“이 새끼도 또 그거 듣고 빡쳐가지고, 누구 놀리냐~ X빠빠야~. 이X랄 하는 거 작은언니가 잡고, 성철이 아저씨랑 친한 오빠들도 눈깔 돌아가서 일어나고, 대장님이 잡고 큰언니가 잡고……. X바, 말하다보니 빡치네. 그놈 요새 뭐해요?”
“가게 차렸대~.”
“빵꾸나서 망하겠네, 븅신 고문관 새끼…….”
효은은 병을 잡고 나발을 불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민정도 이미 취해서는 말없이 상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민정의 주사를 아는 상호는 한손을 그녀에게 내준 채로 자작을 했다. 옆에서 떠드는 두 여자에게 말려들었다간 술을 한 트럭은 마시게 될 것 같아서.
그러자 머리에 술잔이 날아들었다.
“B급따라! 술따리!”
“말도 똑바로 못하는구만, 그만 쳐마셔.”
상호는 잡아낸 술잔을 등 뒤로 숨겼다.
하지만 효은은 앞접시를 상호의 코앞에 들이밀고 몸을 기우뚱거렸다.
“따라라~. 따라라~.”
해련도 잔을 내밀었다.
“강 선생~. 꽉 채워 줘~.”
“……마지막이에요.”
상호는 그렇게 말하고 둘의 잔에 병을 기울였다. 술병이 아니라 물병.
둘은 술이 물인지도 모르고 입에 털어 넣었다.
“야, 큰일났다. 술이 물같아. 낄낄낄…….”
“나도~. 너무 많이 마셨나~.”
하지만 둘의 사이에서는 또 술이 오가고 있었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옆을 돌아보았다.
다혜가 신기하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므아.”
눈도 똘망똘망하고, 더 이상 으르릉거리지도 않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배 안 고파?”
“느웅.”
“들어가서 자. 재미없는 이야기 듣지 말고.”
“아으아으.”
다혜가 데굴데굴 굴러 방으로 향했다.
반주로 시작한 술판은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상호는 좀 더 자리에 남아 술을 홀짝이다가, 이야깃거리가 떨어진 효은과 해련이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알아채고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가서 잘게요.”
“가게~?”
해련이 고개를 기우뚱했다.
“그래~. 들어가~. 다혜는 내가 볼게, 누나들 데리고 들어가…….”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엄~. 내가 누군데~.”
영 미덥지가 않았지만, 해련은 걱정이란 걸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혜도 정신을 차렸고.
상호는 떡이 된 효은과 민정을 내공으로 들어 올렸다.
“가자.”
“한 병만…….”
한 잔도 아니고 한 병이라. 효은의 중얼거림을 듣자 상호의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밤에 죽이겠네 어쩌네 한 것도 잊었겠지.’
후딱 데려가서 재워버리자. 그는 두 여인을 들고 약간 가벼워진 걸음으로 해련의 방을 나섰다.
* * *
“……아.”
햇살이 얼굴에 닿았다.
상호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또 한판 거하게 했구만.’
방바닥에 맥주캔이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예전에 태화에게 줄 치킨과 함께 가져왔던 맥주.
옆에는 효은이, 다리 위에는 민정이 누워 있었다.
‘아오…… 머리야. 2차를 할 거면 자기들만 하지…….’
뺨이 어째 얼얼하다. 상호는 볼을 문지르며 지난밤을 떠올렸다.
술에 절어도 원한은 잊지 않았는지, 효은은 손바닥으로 쫙쫙 때려가며 밤을 새웠다. 덕분에 얼굴이며 몸이며 손자국이 한가득이었다.
‘시바, 그렇게 미우면 누나한테 양보하든가 할 것이지, 비키지도 않고 죽어라…… 에휴.’
그는 둘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옷을 입었다.
꼴을 보아하니 일찍 나가기는 글렀다. 어정쩡한 시간에 나가면 다른 선생들이 볼 테니, 방에서 나올 거면 아주 늦은 시간에 나오라고 쪽지를 적어 식탁에 두었다.
‘밥은 뭐…… 알아서 해결하겠지.’
상호는 출근 준비를 마치고 대충 사과를 하나 챙겨 방을 나섰다.
* * *
남교사 숙소 입구를 나와 본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작은 체구에 반팔 원피스.
상호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설미 선생님.”
“……꺄아아아악!”
설미가 경기를 일으키며 펄쩍 뛰었다.
놀라기는 상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들바들 떠는 설미를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깜짝이야……. 왜 그래요?”
“으, 으으, 흐으…….”
설미는 양손을 가슴팍에 모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미, 미안. 상호 씨…….”
“아니 미안할 건 없는데…….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평소에는 안 그랬으면서…….”
상호는 설미의 어깨를 잡고 멀뚱히 바라보았다. 어디 아픈가, 무슨 큰일이 있었나 싶어서.
설미는 다리까지 후들거리며 애써 웃었다.
“으응, 아니야……. 상호 씨, 나 먼저 갈게.”
“아, 네…….”
그녀는 부리나케 상호의 앞을 떴다.
상호는 달려가는 설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설미에게 무슨 실수라도 했나.
하지만 최근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모르겠다. 또 뭔가 오해를 산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풀리겠지.’
그는 휘적휘적 본관으로 걸어갔다.
가다 보니 이번엔 해련이 다혜와 함께 걸어가는 게 보였다.
“교장선생님.”
“아, 강 선생.”
해련이 빙긋 웃었다.
“잘 들어갔어요?”
“네. 잘 주무셨어요? 다혜도?”
“잠이야 잘 잤지.”
“아으아.”
다혜가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해련의 눈빛이 좀 이상했다. 게슴츠레하다고 해야 하나, 야릇하다고 해야 하나. 아랫것을 내려다보는 듯하면서도 뜨뜻한 열기가 묻어 있었다.
상호는 그걸 의아하게 여겼지만, 일단은 먼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교장선생님. 설미 선생님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 좀 이상하던데…….”
“일?”
해련은 싱긋 웃었다.
“일이 있었지. 아주 큰일이.”
“무슨 일이요?”
“주술사 선생들이 정령한테 학교 순찰시키는 건 알지?”
“알죠.”
“내가 설미 선생한테 어젯밤에 남교사 숙소 순찰해보라 그랬거든.”
상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교사 숙소도 순찰해요?”
“늘 하는 건 아니지만 어제는 특별히 시켜 봤어. 그런데 어머…….”
해련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실쭉 구부렸다.
“개가 한 마리 있었대.”
“…….”
“임 선생은 숫처녀라 그런 거 잘 모르나 봐. 아이 참, 내가 봤어야 평가가 되는데……. 다음번엔 내가 옆에서 보고 있을까?”
이 미친 인간들 같으니.
상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퇴직할래요.”
“퇴직하면 더 힘들걸?”
“왜요.”
“그거야…….”
해련이 상호의 등허리를 슬슬 문질렀다.
“우리 학교 교직원이라서 참고 있는 거니까?”
“…….”
상호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교장선생님.”
“응?”
“설미 선생님한테는…… 뭐라고 말하죠?”
해련은 그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럴 필요 없어.”
“왜요?”
“이제 임 선생도 밤마다 강 선생 방에 정령 보낼 거거든. 틀림없이.”
“…….”
“한 번 보고 나면 계속 보게 되어 있는 법이야~.”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조선시대 신혼집 창호지에 침 바르는 것도 아니고.
‘이젠 화도 안 난다, 에휴…….’
학교에서는 죽어도 하면 안 되겠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본관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으흐흐.”
뒤에서 다혜가 웃었다.
206. 말문
“주 선생님?”
상호는 교장실 앞에 서 있는 건흠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는 것이 꼭 벌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뭐 하세요?”
“쉿.”
건흠이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운기조식 중이래.”
“다혜가요?”
“응.”
용혈의 치료.
제일 좋은 방법은 마나가 풍부한 아르게스 근처로 가서 축기를 하는 것이겠지만, 워낙 바쁜 사람들이라 자주 그러기는 힘들 터였다.
상호는 건흠의 옆에 다가서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다혜 시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시험…….”
건흠은 문을 흘끗하며 중얼거렸다.
“안 보는 게 안전하겠지. 다혜가 지금 시험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겠죠.”
평가 중에 폭주라도 하면 곤란하니 말이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건흠이 피식 웃었다.
“좋겠구만.”
“예?”
“1등하게 돼서.”
상호는 쓰게 웃었다.
문득 떠오른 궁금증이 그 웃음을 흐리게 만들었다.
“주 선생님.”
“응?”
“결혼하셨죠?”
“했지.”
갑작스런 질문이었을까. 건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건 왜?”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결혼하면 진짜로 자유가 없어져요?”
“자유? 아니야. 자유로울 수 있어.”
“어떻게요?”
“포기하면 돼.”
“…….”
상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그를 보고 건흠이 초연하게 웃었다.
“자유를 바라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법이거든. 자유로워지려고 발버둥치는 그 마음이 문제란 말이야.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면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거지.”
“그건 노예 아니에요?”
“그게 결혼이야.”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상호에게 건흠이 말했다.
“사람이 둘이면 여집합이 없을 수 없지. 교집합이 아무리 커도 겹쳐지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법이니까. 취향에서, 가치관에서…….”
그 말을 들은 상호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완벽히 겹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
“예. 먹는 것도, 싸우는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겹치는 사람.”
건흠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 사람이 자네한테 맞춰 준 거지.”
“……그런가요?”
“그런 거지.”
“으음.”
6년 만에 진실을 알게 되었다. 상호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야, 강상호!”
“왜요, 헌터님.”
“수업 끝났으면 빨리 들어올 것이지 어딜 싸돌아다녀? 따라와!”
효은이 그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상호는 그 손에 질질 끌려가며 건흠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건흠이 고개를 한 번 무겁게 끄덕였다.
꼭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포기해.’
자유로워지려는 마음이 문제다.
자유를 반납해라.
‘이런 뜻이구나.’
상호는 해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 * *
“야.”
책상에 엎드려 있던 태화가 고개를 빙글 돌렸다.
“요즘은 매점 안 가냐?”
“됐어.”
세희는 콧방귀를 뀌었다.
“또 뭘 얻어먹으려고.”
“친구한테 까까 하나 못 사주냐?”
“니나 나나 비슷한데 왜 나한테만 사달라 그래?”
“니가 제일 날 좋아하잖아.”
“지랄…….”
그 말에 단비가 귀를 쫑긋했다.
“멍, 세희 언니 욕 텄어.”
“이제 시작이디.”
지윤이 의자에 늘어지게 기대며 말했다.
“곧 너그들 부모가 하나씩 없어질기라. 조심해라이, 야도 쟈도 패드립 면역이라 반사해도 소용이 읎다 아이가.”
“멍……. 언니들은 저렇게 되지 마.”
단비의 시선이 다른 2학년들을 향했다. 나빛, 은율, 이츠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지랄?”
그 독특한 억양에 모두의 몸이 굳었다.
태화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툭 불거졌다.
“와 씨, 애가 말을 뗐어!”
“지랄.”
나디아가 눈을 깜작이며 되뇌었다.
하필 ‘네’ 말고 처음으로 말한 단어가 욕이라니. 세희는 당황하며 나디아에게 손을 내저었다.
“나쁜 말이야, 나디아. 하지마…….”
“지랄!”
나디아가 싱글벙글 웃었다.
이제 네 아니면 지랄만 하겠구나. 세희는 시험 삼아 물어보았다.
“나디아.”
“네!”
“매점 갈래?”
“지랄!”
나디아는 절대로 매점을 가지 않았다. 즉 이 지랄은 ‘아니’라는 뜻.
세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선생님이 알면 놀라실 텐데…….’
그때 태화가 소리쳤다.
“아 그래서 갈 거야 안 갈 거야! 빨리 정해.”
“안 간다고. 또 사달라고 징징댈 거잖아.”
“누가 사달래?! 같이 가기만 하자고!”
“야, 야!”
세희는 태화의 손에 붙들려 문가로 끌려갔다. 마법사 주제에 우악스러워서 뿌리칠 수가 없었다.
교실을 나서는 둘의 뒤로 아이들의 흐뭇해하는 듯한 시선이 달라붙었다.
“달달~혀, 그쟈?”
“사이좋네~.”
“저러고 사달라면 사주겠지?”
“뻔하지~.”
“……!”
세희는 얼굴을 붉히며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