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7화 (217/501)

* * *

“늦네.”

상호는 책상에 앉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딱 한 곳, 뒷줄의 창가 쪽 끝자리가 비어 있었다.

“세희 어디 갔는지 아는 사람 있어?”

“멍.”

단비가 손을 들었다.

“어디 갔어?”

“매점에서 뭐 좀 보고 온다고 했어요.”

“매점?”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효모 통밀빵이라도 사러 갔나.

그때 별안간 격렬한 마나의 폭풍이 느껴졌다. 거리는 멀었지만 규모가 컸다.

“어?”

아이들도 희미하게나마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들고 눈을 깜빡였다.

“어?”

“방금 뭐야?”

“바람인가? 뭐지? ……선생님?”

상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나의 폭풍에 다혜와 민정의 기운이 섞여 있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하나였다.

‘그걸 끊었다고?’

아무리 준 S급이라 해도 쉽게 끊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터였다. 게다가 지금껏 잘 차고 다녔는데, 굳이 끊을 이유는 또 뭔지.

상호는 다혜의 기운이 점점 더 사나워지는 것을 느끼며 문가로 걸어갔다.

“너흰 가만히 있어. 화장실도 가지 마. 선생님이 알아보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마.”

“네…….”

아이들이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로 나온 상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이제 다혜의 기운은 투우장의 소처럼 미친 듯이 폭주하고 있었다.

이미 사달이 났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잠깐만.’

상호의 몸이 멈칫했다.

이 방향은.

‘매점…….’

세희.

‘설마.’

계단으로 갈 시간이 없다. 걸어갈 시간도 없다. 상호는 복도 창문을 돌아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3층 서쪽 끄트머리.

매점은 2층 동쪽 끄트머리.

‘……따질 때가 아니다.’

그는 창문을 열고 창턱에 올라섰다.

* * *

세희는 눈앞에 나타난 이를 쳐다보았다.

다혜가 달려들자마자 창문을 깨고 나타난 이.

자신과 다혜 사이를 가로막고 선 뒷모습에서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투기가 피어올랐다.

“아이고…….”

해련이 혀를 찼다.

“애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됐을꼬, 쯧쯧…….”

그 앞에서 다혜가 침을 뚝뚝 흘리며 해련을 노려보았다.

“크르륵…….”

“학생을 상대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치, 세희야?”

넋을 놓고 있던 세희는 해련의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물러나 있으렴. 거기 너희도.”

마찬가지로 해련의 등장에 얼이 빠져있던 3학년들도, 곧 헐레벌떡 뒤로 물러났다.

해련의 시선이 다혜의 손목을 향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강한 수갑을 채워야 하나 싶었는데…… 그걸 부술 줄은 몰랐네. 강 선생도 이것까진 예상 못 했으려나.”

해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매를 걷었다.

“그놈의 용혈이 뭔지……. 어쨌든…… 와라, 아가야.”

“크르륵.”

다혜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온몸을 뒤덮은 두터운 강기. 그 뚜렷한 형상은 조금씩, 미세하게, 하지만 확실히 일렁이고 있었다.

불꽃처럼.

세희는 멍하니 다혜를 바라보았다.

‘설마……?’

해련의 눈이 반짝였다.

“네 나이에 그런 걸 쓰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못 봤는데……. 으음.”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혜가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다혜가 해련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해련의 볼에 가느다란 혈선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본 세희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해련에게 상처를 내다니.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격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크르르…….”

다혜가 음침하게 웃었다.

꼭 비웃는 듯한 분위기로.

해련은 상처가 난 볼을 매만지다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멋진데.”

왼손은 뒷짐을 진 상태.

“실력만 보면 졸업해도 되겠어. 그런데…… 학교는 공부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란다.”

세희는 순간 자신이 잘못 봤나 싶었다.

‘……어?’

말을 하는 도중에 해련의 모습이 둘로 나뉘어 보여서.

자신만 잘못 본 것은 아니었는지, 다혜 또한 당황하며 신경질적으로 으르렁 소리를 냈다.

“크륵!”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혜는 곧 반사적으로 펄쩍 뛰어 천장을 박차고 저 멀리까지 물러났다.

해련은 어느새 다혜가 서 있던 곳의 뒤쪽에서 웃고 있었다.

“이게 맞으려나 모르겠네. 평소랑 똑같이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크륵?”

다혜는 해련을 노려보다가 흠칫하며 머리 오른쪽을 손으로 더듬었다.

뿔이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손톱만큼도 안 되는 뿌리만 남기고.

“……크아아악!”

해련이 그 잘린 뿔을 손에 들고 약 올리듯이 흔들었다.

“혹시 아프니?”

“크아아아!”

아픈 건 아닌 듯했다. 그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것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해련은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다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기가 강하면 뭐하니. 쓰는 법을 모르는데. 일단 꼴이 웃기니까…… 나머지 것도 잘라 줄게.”

해련의 손가락에서 금빛이 번쩍였다.

세희는 간신히 해련의 강기가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으로 본 것은 아니고 감으로.

다혜의 왼쪽 뿔이 단번에 잘려나갔다.

“크륵……!”

다혜는 바닥에 떨어지는 뿔을 보며 당황했다.

지성 없는 짐승이라도 상대의 강함은 알아보는 법. 해련을 향하는 다혜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했다.

“크르……으?”

그 눈동자에 비친 해련이 사라졌다.

다혜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서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일 정도로 아주 긴 시간 동안.

그러다 어느 순간.

“자렴.”

뒷목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지고, 눈앞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201. 용혈

머리에 남은 뿔이 조각조각 부서져 떨어졌다.

“크르…….”

뒷목을 정통으로 맞았지만 바로 기절하진 않았다. 짐승의 무의식이 몸을 놓지 않으려는 듯했다.

다혜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버르적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흐음.”

해련은 내공을 뻗어 다혜를 뒤집었다.

감은 눈. 얕은 숨. 얼핏 보면 기절한 것 같지만, 해련은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다혜의 눈을 까뒤집었다.

검은 눈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았다.

‘확실하네.’

해련은 그제서야 세희를 돌아보았다.

“괜찮니?”

“네.”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세희는 다혜와 해련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해련이 손바닥을 펼쳤다.

“오지 마. 거기 그대로 있어.”

세희는 더 다가가지 못했다.

“……네.”

그때 이미 부서진 창문을 또 부수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콰직

“……후우.”

상호였다.

상호는 옷에 묻은 벽돌 조각을 털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난장판이 된 매점과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뺨에 상처가 난 해련.

바닥에 쓰러진 다혜.

만신창이가 된 채로 구석에 멀거니 서 있는 세희와, 코피를 흘리는 여학생 한 명, 그 옆에도 한 명.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눈으로만은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상처는 또 뭐고…….”

상호는 해련의 볼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했다. 이 자리의 그 누가 해련을 다치게 할 수 있는지.

해련이 설핏 웃었다.

“서서 설명하기엔 너무 기네. 좀 있다가 같이 들어요. 거기 너희 둘.”

“……네?”

3학년들은 해련의 부름에 흠칫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둘에게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양호실 가서 치료받고, 담임선생님한테 말하고 교장실로 와.”

“네, 넵…….”

3학년들이 헐레벌떡 복도로 달려나갔다.

문가에는 마나의 기운을 느끼고 달려온 선생들과, 소동을 피해 도망친 매점 관리인, 그리고 가까운 교실에서 달려온 아이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해련은 그들을 흘끗하고 상호에게 말했다.

“난 여기 정리하고 주 선생 데려올 테니까, 애들 데리고 교장실로 가 있어요.”

“예.”

상호는 다혜를 안아 들고 세희를 돌아보았다.

“가자.”

세희는 말없이 상호의 곁에 붙어 그를 따라나섰다.

* * *

“어떻게 된 일이야?”

상호는 소파에 눕힌 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세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음이 편치 않은 듯이.

교장실에는 그들 셋뿐이었다.

“선생님, 혹시…… 그 언니 빵 뺏기는 거 알고 계셨어요?”

“응?”

상호의 눈이 끔뻑였다.

“……빵?”

“네. 아까 그 사람들이 그 언니 빵을 뺏었어요. 지금까지 계속.”

“계속? 한두 번이 아니라?”

“네.”

상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허벅지를 베고 누운 다혜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곧 고개를 들어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왜 말 안 했어?”

“제가…….”

세희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상호의 눈길을 피했다.

“직접, 때려눕히고 싶었어요.”

“……직접.”

상호는 세희를 바라보며 그 말을 되뇌고는, 한숨을 푹 쉬며 다시 다혜를 내려다보았다.

입마개가 없다.

수갑도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 왜 다혜가 이렇게 된 거야?”

“제가 그 사람들이 또 빵 뺏는 걸 보고 싸웠는데…….”

세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말을 멈췄다. 자신도 다혜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그냥 예상하기로는.

“그 언니가 싸움 말리려고, 저랑 그 사람들 사이에 끼었다가…… 몇 대 맞았거든요.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이유인 것 같았다.

그 말에 상호가 고개를 기웃했다.

“맞았다고? 다혜가?”

“네.”

“너도?”

“네.”

“그럼…….”

상호는 다혜와 세희의 얼굴에 난 상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상처가…… 다혜랑 싸워서가 아니라 그 애들이랑 싸워서라고?”

“네.”

“얼마나 맞았는데?”

세희는 옷을 걷어 배를 확인했다. 하얀 배에 퍼렇게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상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니까, 빵을 뺏고, 널 때리고, 말리려는 다혜까지 때렸다…… 그거야?”

“중간에 제가 욕을 하긴 했지만.”

세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호의 머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끓어올랐다.

때마침 교장실 문이 열리고 문제의 3학년들이 들어왔다. 3학년들은 상호를 보고는 움찔하며 다시 나가려고 했다.

그런 둘의 귀에 상호의 살벌한 목소리가 꽂혔다.

“야, 너희.”

“네에…….”

“나랑 주 선생님이 준 돈으로 산 빵을 니들이 뺏어먹었다고?”

3학년들은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잘못, 잘못했어요…….”

“말 못하는 애를 상대로?”

“하, 하루에 한 개만…….”

상호의 머리에 열이 확 뻗쳤다.

“이 씨X년들아!”

그때 문이 또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뭐야, 이젠 학생한테 욕도 하나?”

류혁이었다.

이사장의 갑작스런 출현에 3학년들이 식겁했다. 사태가 너무 커진다고 생각했을까. 둘은 무릎을 꿇고 상호와 혁에게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정말요…….”

혁은 그런 3학년들을 훑어보다가,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3학년들에게 말했다.

“교실로 가.”

“저, 저희, 교장선생님이 불러서…….”

“너희는 나중에 다시 부를 거야. 돌아가.”

학생에게는 말투가 비교적 부드러웠다. 3학년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도망치듯 교장실을 빠져나갔다.

혁의 시선이 이번에는 세희를 향했다.

“너도 가 있어.”

그 말에 상호는 손을 뻗어서 멈추라는 손짓을 했다.

“얘는 같이 들을 겁니다.”

“민감한 이야기인데?”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당사자가 한 명은 있어야 이야기를 듣죠.”

혁은 물끄러미 상호를 쳐다보다가 상석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보고는 이미 받았어. 정령이 다 보고 있었거든. 싸움이 왜 일어났는지, 누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이미 다 알아. 당사자는 필요 없어.”

“민감하다는 이야기나 해 주시죠.”

“그 아이.”

혁의 검지가 다혜를 가리켰다.

“더 이상 우리 학교에 못 두겠어.”

상호의 눈가가 꿈틀했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건은 약속에 없었지. 도저히 감당이 안 돼. 봤잖아? 교장선생님 뺨 긁힌 거.”

“긁힌 것뿐입니다.”

“그걸 보통 학생들이 당하면 목이 따이겠지.”

혁은 상호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자네가 해결책으로 가져온 수갑부터가 제 역할을 못 하지 않았나? 더 이상 안 돼. 너무 강해, 그 애는. 주 선생도 제대로 통제 못 할 게 뻔해.”

“그럼 제…….”

제 반으로 데려오면 될 거 아닙니까, 라고 말하려 했지만 상호의 반에는 아리가 있었다.

상호는 할 말을 잃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그때 다시금 교장실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건흠과 해련이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선 건흠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다혜, 다혜는?”

“여기 있습니다.”

상호가 자신의 옆을 가리키자 건흠이 달려왔다.

건흠은 생채기가 난 다혜의 얼굴을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뒤따라 들어온 해련이 건흠의 등을 토닥이며 혁과 눈을 마주쳤다. 혁은 눈살을 한 번 찌푸리고는 건흠과 해련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들었어요?”

“예, 교장선생님께 대략…….”

“한번 설명해 봐요. 내가 아는 사실하고 같은지 보게. 교장선생님도, 강 선생도.”

혁은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며 손깍지 위에 턱을 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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