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9/501)

* * *

수업도 종례도 모두 끝난 후.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교실을 나섰다.

“멍! 미래야! 같이 가!”

“이서야, 같이 가자. 헤헤…….”

“나디아. 운동 가까?”

“네!”

 서로 꼭 붙어서 가는 아이, 투닥대는 아이. 조용히라도 무리에 끼어서 가는 아이.

 그런 아이들 사이로, 혼자 걷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은율은 그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가은아.”

 가은이 고개를 들어 은율을 바라보았다.

“응.”

“같이 가자.”

 가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율은 살짝 웃고 가은의 옆으로 다가섰다.

교실에서 본관 입구까지는 2분. 본관 입구에서 기숙사까지는 6분.

붙잡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한다면 8분가량의 시간이 허락된다. 은율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가은이 너 성적 잘 나왔더라.”

“응.”

“무공을 미리 배웠던 거야? 중학교 때부터?”

“……응.”

“심법? 아니면 보법이나, 경공 같은 거?”

 그 질문에 가은이 은율을 흘끗했다.

너무 빨랐을까. 은율은 아차 싶어 멋쩍게 웃었다.

“내가 그런 게 많이 궁금해서. 뭐 특별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별거 없어. 그냥 검이랑, 몸 쓰는 거.”

 그거야 헌터 지망이라면 중학교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계속 배워오는 것이다. 대답으로는 한없이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더 캐묻는 것도 자연스럽지가 않아서, 은율은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네.”

“언니는 1등이었다며.”

“아, 그건 그렇지만…….”

“3등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가은의 눈이 은율을 쓱 훑었다.

“검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법은 잘 알고 있겠네.”

“으응, 뭐. 다른 애들 만큼은…… 알고 있지.”

“그런데 말로 사람 상대하는 법은 조금 서툰 것 같아.”

“……응?”

 은율은 당황하며 가은과 눈을 마주쳤다.

“말로 사람 상대하는 법?”

“응.”

 가은은 은율을 꿰뚫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시켰지?”

 알고 있었을까.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것 같았어. 너무 뻔하잖아. 반장이 되자마자 나한테 붙는 건.”

 가은은 본관 입구를 걸어 나오며 말했다.

“도와줄 필요 없어. 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선생님이 무슨 이유로 언니를 나한테 붙였든…… 도와줄 필요 없어.”

“그렇구나.”

 은율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근데 난 선생님 때문에 너랑 친해지려는 건 아냐.”

“……그래? 정말?”

“응. 그냥 내가 너랑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자신보다 훨씬 큰 사고를 겪은 아이.

은율은 상호와는 관계없이 가은을 도와주고 싶었다.

뭘 어떻게 도와야 할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러니까 그냥…… 나랑 놀아주기만 해도 돼. 굳이 네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 할 필요는 없어.”

 은율은 웃었다.

“난 말로 상대하는 게 서투르니까…… 네가 가르쳐줘.”

“……나라고 해서 능숙하다는 건 아니야.”

 가은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은율의 시선을 피해서.

“어쨌든 알았어. 선생님 때문은 아닌 거. 의심해서 미안해, 언니.”

“으응, 아냐.”

 은율은 씩 웃고 가은의 곁에서 걸었다. 기숙사까지는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대충 5분쯤 걸릴 거리.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딱 좋을 시간이었다.

“가은이 넌 무슨 음식 좋아해?”

 191.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

“중학교 때 배운 무술이래요.”

 옆자리에서 은율이 말했다.

“어머니 관련한 사건에 투입된 경사분께서…… 몇 년 동안 계속 가르쳐 주셨대요.”

“경사…….”

 상호는 벤치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로 주변을 살폈다. 엿듣는 사람이 있을까봐.

“헌터 경찰인가 보네?”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어요.”

“잘했어. 꼬치꼬치 캐물을 필요는 없으니까.”

 둘은 본관과 여학생 기숙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와 있었다. 가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뒤를 밟히지 않으려고 퇴근하는 척, 하교하는 척을 하고는 문자로 연락을 해서 밀약을 맺었다.

덕분에 자꾸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것이, 조마조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슬한 맛이 있어서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러면 가은이는 꿈이 경찰이래?”

“네. 졸업하면 바로 시험 볼 거래요.”

 그렇다면 사람을 상대하는 무술을 본격적으로 가르쳐야 할 듯했다. 몬스터를 상대할 아이들과는 다르게.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좀 알겠다. 그런데…… 은율이 넌 소원권 같은 건 안 써?”

“네?”

“일을 잘해도 네가 뭘 좋아하는지를 모르니까…… 그냥 소원권을 줄까, 싶다가도 네가 그건 잘 안 쓰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 말에 은율은 살짝 당황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모으고 있어요.”

“그래? 그럼 그냥 소원권으로 주면 돼?”

“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알았어. 그럼 소원권으로 줄게. 근데 모아서 어떻게 쓰려고?”

“조금 더 어려운 소원으로…… 쓰고 싶어서요.”

“……너무 어려운 소원은 아니었으면 좋겠네.”

 상호는 쓰게 웃었다.

“어쨌든 알겠다. 도와줘서 고마워.”

“네.”

 은율은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들어가세요.”

“응, 내일 보자.”

 상호는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인간을 상대하는 무술과 괴물을 상대하는 무술. 둘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상호는 일부러 그 내용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아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을 상대해야 하니까.

‘그래도 한 번쯤 짚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지.’

 그래서 상호는 칠판 앞에 섰다.

원래는 야외에서 수업을 할 시간이라, 아이들의 표정에는 궁금증이 가득했다.

“오늘은 왜 안 나가는 거야?”

 태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나가자 나가자 노래를 부르더니. 뭐 어디 아파?”

“이론수업이야.”

 상호는 짤막하게 답하고 물백묵을 들었다.

“너희는 헌터가 되려고 여기 있는 거지?”

“응.”

“네.”

“헌터가 상대하는 게 뭐야?”

“몬스터.”

“그래.”

 칠판 왼쪽에 ‘몬스터’가 적혔다.

“헌터는 몬스터와 싸워서 인간을 지키는 직업이지. 그럼 또 묻자. 최초의 무술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을까? 단순한 무기술 말고, 체계적으로 정립된 무술 말이야.”

“어……. 음……. 싸우기 위해서?”

“뭐랑?”

“사람이랑?”

“그렇지.”

 오른편에는 ‘인간’이 적혔다.

“너희가 배우는 무술, 무예라는 것은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 개벽 전의 낡은 개념이 들어 있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몬스터를 잡아다가 대련할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사람만 상대하면서 사람 위주의 경험이 쌓이게 되지.”

 상호는 두 단어 사이에 선을 긋고 그 선을 손바닥으로 탕 쳤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몬스터를 잡는다는 목적. 사람을 통해 익히는 과정. 이 둘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거야.”

 몇몇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들은…… 잘못 배운 겁니꺼?”

“아니. 그렇게 배울 수밖에 없었지. 다만 이걸 알아야 해.”

 상호의 검지가 ‘인간’을 가리켰다.

“너희가 인간을 상대하는 직업을 목표로 했다면 어떤 것들을 배우게 되는지. 그리고 왜 그걸 헌터들은 배우지 않는지. 한번 생각하면서 들어 봐.”

“네.”

 아이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편의상 이쪽을 대인 무술, 이쪽을 헌터 무술이라고 하자.”

 상호는 ‘인간’ 아래에 ‘대인 무술’을, ‘몬스터’ 아래에 ‘헌터 무술’을 적었다.

“대인무술에선 항상 무조건 배우는 요소가 있어. 뭔지 알아?”

“어…….”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지윤이 손을 들었다.

“모르겠심더.”

“급소야.”

 상호는 칠판에 사람을 대충 그렸다.

“몸을 쓰건 무기를 쓰건 대인무술의 이상적인 목표는 급소 공격이지. 그래서 무술을 배울 땐 급소를 제일 먼저 배우게 되어 있어. 자, 너희가 아는 급소를 말해 봐.”

“목.”

“심장?”

“명치예.”

“관자놀이.”

“간.”

 잘 대답하고 있는데 태화가 또 초를 쳤다.

“X알.”

“쓰읍…….”

 그렇지만 급소가 맞긴 맞다. 전투에서는 민망한 걸 따지면 안 되는 법이고.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음낭이라고 해라. 어쨌든 맞아. 머리, 목, 심장, 명치, 간……. 다 익히 알려진…….”

“X알!”

“맞다고! 어쨌든 다 잘 알려진 급소들이지. 그런데 너희가 모르는 급소들도 많아. 하나 보여 줄게. 음…….”

 상호의 눈동자가 아이들을 살폈다.

“나빛이 잠시만 나와 볼래?”

“네~.”

 나빛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상호는 자신의 앞에 선 나빛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등에 손 좀 댈게. 괜찮지?”

“네.”

 나빛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뻗은 상호의 손이 나빛의 등허리를 꾹 눌렀다.

“……아흑?!”

 나빛이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깜짝 놀랐다.

“와, X바. 손만 댔는데 가버렸어!”

“……뭔 소리야, 임마. 가긴 어딜 가.”

 척추의 신경을 눌러서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상호는 나빛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사람 몸에는 이렇게 너희가 모르는 급소가 많아. 나도 인간의 몸을 백 퍼센트 다 알고 있는 건 아니고. 그런데 생각해 봐. 너희는 수천수만 종이나 되는 몬스터들의 급소를 다 외울 수 있겠어?”

“……아니요.”

“그게 대인 무술과 헌터 무술의 차이점이야.”

 상호는 나빛을 자리로 돌려보내고 아이들을 가리켰다.

“헌터 무술은 급소의 공부를 배제해. 몬스터의 분류가 확실하지 않고, 급소의 위치도 확실하지 않고, 인간의 기억력도 확실하지 않으니까.”

 머리가 날아가도 살아서 움직이는 놈들이 수두룩하고, 개중에는 적극적으로 약점을 속일 정도로 영악한 놈들도 많았다.

“즉 급소를 공략하는 능력보다는 공격과 수비, 회피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야. 이해했어?”

“대충은요.”

“그래서 내가 항상 강조하는 거야. 항상 의심하고 모든 상황에 대비하라고. 어떤 공격이 날아와도 반응할 수 있게. 너희가 급소라 여기고 공격한 곳이 급소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알았지?”

“네.”

“그리고…….”

 상호는 아이들을 쓱 둘러보았다.

“너희가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니까, 사람을 상대하는 법도 조금씩 가르쳐 줄게.”

 가은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사람의 급소도, 전투에서의 심리도…… 배우다 보면 쓸 날이 올 테니까.”

 상호는 쓰게 웃으며 목각인형을 일으켰다.

“우선 급소랑 혈부터 설명해 줄게.”

 * * *

가은은 겉으로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상호는 알 수 있었다. 사실은 귀를 활짝 열어놓고 한껏 집중하고 있음을.

표독스러운 표정을 보면 필시 순수하게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꼬투리를 잡고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듣고는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할 듯했다.

“자, 수업 끝.”

 상호는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오후 네 시.

몇 시간 동안 인간 급소와 심리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바로 종례하면 되겠네. 내일 주말이지? 쉴 땐 쉬고. 수련할 땐 수련하고. 운기조식 열심히 하고……. 월요일에 보자.”

“네.”

“그리고 세희랑 은율이는 잠시 남아.”

“응?”

 태화가 눈을 깜작였다.

“왜?”

“별것 아냐.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다른 애들은 가도 돼. 가서 쉬어.”

“안녕히 계세요.”

“응, 들어가.”

 아이들이 문을 나서고, 교실에는 넷만 남았다.

셋이 아니라 넷.

상호는 태화를 째려보았다.

“넌 왜 안 가?”

“왜 가야 돼?”

 태화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었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돼? 얘네 둘은 들어도 되는데 나는 들으면 안 되는 게 있어?”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고.”

 말 못 할 이유는 따로 있다.

상호는 태화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고 말을 이었다.

“여름에 전국평가가 있어.”

“전국평가?”

 금시초문이리라. 셋 모두 어리둥절해져서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곧 세희가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가야 해요?”

“응. 사정이 있어서…….”

 태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왜? 뭔데? 무슨 사정?”

“중요한 일이 있어.”

 무거운 표정과 엄숙한 목소리.

 하지만 실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다. 상호는 혁이 보여줬던 사진들을 떠올리며 진지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근데 말해주기는 힘들고…… 어쨌든 전국평가 1등을 따야 돼.”

 세희가 눈을 반짝였다.

“제가 할게요.”

 설명도 안 듣고는 하겠다 한다. 상호는 난색을 짓고 손을 내저었다.

“일단 들어 봐. 1등을 따야 돼. 그런데…… 다혜도 거기 나올 거야.”

 그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태화마저도.

셋 모두 다혜의 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니까 한마디로…… 평가 전까지 다혜를 이길 수 있는 실력을 키워놔야 한다는 뜻이야.”

“가능해요?”

 세희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 언니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불가능은 아니야. 죽도록 힘들 뿐이지.”

 상호는 엄지로 등 뒤 칠판을 가리켰다.

“오늘 가르쳐줬지? 사람을 상대하는 무술. 그걸 완벽하게 익히고 나면 다혜를 이길 가능성이 생길지도 몰라. 다혜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밖에 모르니까.”

 오늘의 수업은 가은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다혜를 이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람의 급소, 사람의 심리. 그걸 너희가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새로운 무기가 생기는 거지. 그걸 이제 집중적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거야. 물론 어디까지나 전국평가를 나갈 사람한테만. 어때. 전국평가 나갈 거야?”

“네.”

 세희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율은 잠시 고민하더니.

“할게요.”

 태화도.

“해볼래.”

 상호는 태화와 눈을 마주쳤다.

세희와 은율은 하겠다고 할 줄 알았다. 둘 다 승부욕이 제법 있으니까.

태화도 마찬가지.

 하지만 태화는 대회에 내보내기가 조금 껄끄러웠다.

“넌 안 해도 돼.”

 상호의 말에 태화가 눈을 끔뻑였다.

“왜?”

“무예 1등이 필요한 거라서. 넌 굳이 할 필요 없어.”

 그런 설정이었다.

“어차피 대회 나가고 하면 너도 귀찮잖아.”

“이상하네.”

 태화의 고개가 기우뚱했다.

“쌤이 할 말이 아닌데.”

“절차가 힘들어서 그래. 그리고 한 반에서 세 명씩 나가면 눈치 보이잖아. 학교에서 나가는 인원이 정해져 있어.”

“우씨, 나도 같이 하고 싶은데…….”

 상호는 애써 웃었다.

“나중에 같이 놀아 줄게.”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럭저럭 합당한 이유가 되었을까. 태화는 나름대로 납득한 표정이었다. 상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세희와 은율을 돌아보았다.

“그러면 너희 둘이 하는 거네. 잘 생각했어. 근데…… 여태까지보다 훨씬 더 힘들 수도 있으니까, 그건 알아 둬.”

 은율이 물었다.

“그 평가는 언제예요?”

“8월 초. 아마 방학 즈음인가 봐.”

“1학기 기말평가는…… 어떻게 해요?”

“구르다 보면 기말평가는 알아서 잘 되겠지. 그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제일 중요한 건 연말평가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세희는 무언가 궁금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1등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맞아. 왜 말 안 해? 뭐 큰일이라도 나?”

 태화가 묻자 상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큰일이 나는 정도가 아니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

“그 정도야?”

“응.”

‘내가 죽어…….’ 상호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방금 건 농담이고. 너희는 그냥 최대한 노력해주기만 하면 돼. 너희가 뭘 책임질 필요도 없고, 부담 가질 필요도 없어.”

“응.”

“네.”

“대신 노력은 해야지. 오늘부터 특훈이야. 지금 수업하러 나가자. 태화 너도 온 김에 같이 해.”

 상호가 창밖을 가리키자 태화가 질색을 했다.

“엥? 나까지? 지금 바로?”

“너도 다혜는 이기고 싶잖아. 그렇게 게으름피우면 평생 다혜 못 이긴다. 옷 갈아입고 나와.”

“우씨……. 어째 오늘 수업 개꿀빤다 했어. 알았어. 먼저 나간다.”

 태화는 투덜거리며 창문을 열고 폴짝 뛰어내렸다. 상호는 남은 둘을 향해 멋쩍게 웃었다.

“힘들긴 하겠지만…… 되는 데까지 해보자. 괜찮지?”

“네.”

“괜찮아요. 저흰 수업 좋아해요.”

 세희가 가방에서 전투복을 꺼내며 말했다.

가식 없이 믿음직스러운 대답. 상호는 그 말을 듣고 안심하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갈아입고 나와. 운동장에서 기다릴게.”

“네.”

 둘은 그렇게 대답하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192. 심리

6월.

기온은 아직 덥다고 할 정도가 아니었지만, 몸에 꼭 맞는 전투복을 입고 하루 종일 구르다 보면 한겨울이라도 땀이 나기 마련이라, 학생들에게는 실상 여름과 다름이 없었다.

고운 턱에서 탁한 땀방울이 떨어졌다.

“세상의 방향에는 가짓수가 없어.”

 상호는 검을 빙글 돌렸다.

“동이니 서니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 놨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에도 무한한 가짓수의 방향이 있고, 그 방향들에게는 그 어떤 고하도 우열도 없어. 편의상 위, 아래, 오른쪽 왼쪽처럼 많이 쓰는 방향을 정해 놨을 뿐이지. 하지만 인간이 행동하는 방향에는 가짓수가 있어. 몇 갤까?”

 은율은 땀을 닦고 검을 바로 잡았다.

“두 개요.”

“그래. 물러선다와 나아간다. 그 둘뿐이야.”

 상호의 검이 은율을 겨눴다.

“나는 네가 물러설지 다가올지 알고 있어.”

 참으로 허황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은율의 눈빛은 진지했다.

상호는 흐뭇함을 감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일까?”

“기세……인가요?”

“아니.”

 그런 흐리멍덩한 이야기가 아니다. 상호는 칼집을 짚으며 은율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미리 말해 줄게. 너는 물러날 거야.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은율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네가 지쳐 보여서? 네 어깨에 멍이 들어서? 네 손이 떨리고 있어서? 아니야. 나는 너랑 검을 맞댄 순간부터 알고 있었어.”

 상호의 검이 은율의 검에 살짝 닿았다.

“네가 신중한 성격인 걸 알아서가 아니라, 네 몸에서 느껴지는 무의식이 있어. 칼놀림, 발걸음, 시선의 위치……. 그 모든 걸 한눈에 보고 느끼는 거야.”

“……그러면.”

 은율의 눈이 반짝였다.

“이번 합에서 제가 물러난다는 뜻이신가요?”

“응.”

 상호가 대답하자마자 은율이 달려들었다.

검이 날아드는 곳은 인간의 급소. 겨드랑이.

베지 못하고 타격만 주어도 충분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위치.

‘나쁘지 않지.’

 상호는 정수로 잡고 있던 검을 빙글 돌려 역수로 잡았다.

 그리고 검을 팔꿈치에 단단히 붙인 채로 은율의 검을 쳐내고, 목을 향해 검을 찔렀다. 언제든 멈춰 세울 수 있도록 내공을 발출하며.

그럼에도 은율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다시금 이어진 은율의 공격. 상호는 재차 허리로 들어오는 은율의 검을 왼손으로 잡았다.

 그의 검은 이미 은율의 목에 닿아 있었다.

“……아.”

 움찔하는 은율의 목에서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맑은 눈동자가 상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틀리셨어요.”

“이미 알고 있었어.”

 상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말하면 네가 달려들 거라고.”

“그런 거예요?”

 은율이 눈을 깜작였다.

“그러면 제가 물러났으면요? 그랬어도 선생님 말이 맞다고 하셨을 거 아니에요?”

“글쎄. 모르는 일이지. 그렇지만 네가 달려들 거라고는 예상했어. 정말로.”

 상호는 씩 웃고 은율의 목을 살폈다. 상처는 아주 얕았다.

“사람의 심리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심리를 유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야. 잊지 마.”

“네.”

 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상호의 뒤로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상호는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칼날이 시퍼런 빛을 흩뿌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째앵

접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검의 주인이 공중제비를 돌고 바닥에 내려섰다.

상호는 검을 내리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세희 화났어?”

“아뇨?”

 세희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상호는 검을 맞댄 순간 세희의 검으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화난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빨리 저랑도 대련해요.”

“으응.”

 그는 진땀을 흘리며 검을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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