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501)

 * * *

방과 후.

“안녕히 계세요~.”

“내일 봐요.”

“난 저녁~.”

 아이들은 상호에게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갔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상호는 은율의 앞에 마주 앉으며 멋쩍게 웃었다.

“은율이가 반장이네, 이제.”

“네.”

“오늘부터 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남으라 그랬어. 첫날부터 미안하긴 한데…….”

“괜찮아요.”

“그래?”

 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시계를 한 번 흘끗하고 말을 이었다.

“짧게 이야기하고 끝낼게.”

“길게 하셔도 괜찮아요.”

“……그래?”

“네.”

 은율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아주 길게 하셔도 괜찮아요.”

 상호는 어째선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으흠, 어쨌든…… 선생님이 있잖아, 반장을 뽑은 이유가…… 몇몇 애들하고 덜 친한 것 같아서. 그리고 또 수업을 하려면 알아야 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걸 알 수가 없어서. 그래서 중간다리가 좀 필요해서 뽑은 거거든?”

“네.”

“가은이랑 이야기 좀 많이 해줄 수 있을까?”

 은율은 더 묻지도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모습이 꽤나 믿음직스러웠다.

상호는 시계를 한 번 더 흘끗했다. 은율이 괜찮다면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어서.

“시간 괜찮아?”

“네. 더 있어도 괜찮아요.”

“그러면…….”

 함부로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상호는 책상 위에 놓인 은율의 손을 향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싫어할까 봐.

 그러자 은율이 손을 그의 손 밑으로 살며시 집어넣었다.

“괜찮아요. 선생님은…….”

“……그래.”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은율이 네가 반장이니까, 그리고 비밀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으니까 말해주는 거야.”

“네.”

“가은이는 어머님이 안 계셔.”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상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머님께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으셨대. 그리고 가은이는 남자를 싫어한대. 그것 때문에 나한테 가은이를 보내신 거고……. 무슨 말인지 알지?”

 은율은 상호에게 내어주지 않은 다른 쪽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가 깊었다.

“……네.”

“가은이 과거를 캐내라는 게 아니라, 선생님하고 조금 친해질 수 있게 도와달라는 뜻이야. 가은이가 원하는 게 뭔지, 뭐 그런 걸 알고 싶어서.”

 상호는 은율의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느긋하게 해도 돼.”

“네.”

 은율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구해줬던 소녀.

키가 작아서 허리를 굽혀야 그 품에 안겨 울 수 있었다.

“맡겨주세요.”

“그래. 고맙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가 생기거나, 필요한 게 생기거나…… 하여튼 특별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시간 상관없으니까. 뭐……, 특별한 일이 없어도 심심하거나 하면 연락하고.”

“그럴게요.”

“그래. 이만 나가자.”

 출석부가 상호의 손으로 날아들었고, 은율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나란히 교실 문을 나섰다.

‘그러고 보면…… 은율이랑 이렇게 둘이 걷는 건 처음인 것 같네.’

 상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은율을 돌아보았다.

우연일까, 은율도 마침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키가 커서 다른 아이들보다 눈이 가까웠다.

“……아.”

 은율이 황급히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하얀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홍조가 노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상호는 알 길이 없었다.

‘은율이도 의외로 표정이 많구나.’

 그렇게 애써 지나쳐 넘기려 했지만, 그 자신의 뺨도 조금 붉어져 있었다.

노을보다는 좀 더 진한 빛깔로.

 190. 불량배

“이야…….”

 지윤은 단비의 식판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야……. 와……. 어……. 그래 무면 맛있나?”

“응!”

 식판에서는 밥과 튀김과 김치와 북엇국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단비가 그 기적적인 화합의 결과물을 숟가락으로 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맛이 많이 나잖아!”

“우리 정신도 많이 나갈 것 같은디.”

“먹어봐, 멍!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아오, 나 얘랑 같이 밥 못 먹겠어!”

 태화는 숟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내동댕이치고 세희를 째려보았다.

“야, 너는 이런 건 선도 안 하냐?”

“나쁜 짓이 아니잖아. 그리고 애 놀래키지 마.”

 세희도 태화를 마주 째려보았다. 단비는 태화가 숟가락을 던지는 소리에 놀라서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단비야, 신경 쓰지 마. 밥 먹어, 밥.”

“멍…….”

 단비가 머리에 달린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태화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자신의 식판에 놓인 튀김을 집어 단비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아 해.”

“응?”

“먹어. 튀김 본연의 맛을 느껴 보라고.”

“멍…….”

 단비는 입을 벌려 그 튀김을 받아들였다.

“우움.”

“맛있냐?”

“움.”

“많이 먹어.”

“멍!”

 단비의 꼬리가 다시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세희는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은율을 돌아보았다.

은율은 평소와 달리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가은과 함께.

‘또 가은이한테 붙어 있네.’

 딱히 싫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살짝 서운한 느낌이 들려 했다. 섭섭하기 직전의 단계.

‘그렇지만…… 나도 선도부 때문에 같이 못 놀 때가 많으니까.’

 은율도 이제 반장이 됐으니, 이전처럼 놀고 싶을 때 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데 옆에서 이츠키가 속삭였다.

“세희.”

“응?”

“저기 좀 보십시오.”

 이츠키가 검지로 교직원 식탁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혜가 식판에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먹고 있었다.

“오양보다 많이 먹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그러게.”

“저렇게 먹으면 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딘가론 나오겠지.”

 그때 식판을 든 상호가 다혜의 옆에 앉았다.

“다혜 맛있게 먹고 있어?”

“아으.”

“응? 먹어 보라고? 괜찮아, 나도 받아온…….”

“느아아아.”

 둘은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이츠키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몸을 볶다? 몸을 섞다?”

“……깨를 볶는다일 거야. 아마도.”

“그런데 저렇게 많이 먹으면서 음식은 나눠줍니다.”

“그러게.”

“오양보단 나은 것 같습니다.”

“머어?”

 지윤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이츠키의 튀김을 가져갔다.

이츠키는 지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세희에게 말했다.

“역시 오양보단 나은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지윤이 다시 튀김을 돌려놓았다.

“그렇지만 귀엽기는 오양이 더 귀여운 것 같기도.”

“그렇제?”

“농담이지만.”

“에라이…… 쯧.”

 세희는 둘을 무시하고 밥을 깨작이며 다혜를 보았다.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밥을 많이 먹는 걸까. 저래서는 식후에도 매점에 가서 군것질을 할 것 같았다.

‘순찰도 해야 하니까…… 한번 가 볼까.’

 세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 * *

역시나였다.

매점에는 디저트를 먹으러 온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 학생들 사이에서도 당당하게 배를 채우려고 빵을 사는 한 사람.

세희는 다혜를 멀리에서 지켜보았다.

‘대체 배에 뭐가 있는 걸까…….’

 한 5인분은 먹어 놓고서 또 뭘 먹는다니. 그러고도 살은 전혀 안 찌고.

아무리 봐도 불가사의한 몸이었다.

‘먹는 것만 모으면 사람 하나 만들겠다. 참…….’

 다혜가 빵을 집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맛있는 빵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혜는 배를 채우는 게 목적이라는 듯이 아무거나 턱턱 골라서 품에 안았다.

어느새 품에 빵이 한 아름이었다.

“으햐…….”

 다혜가 군침을 삼키며 계산대로 달려갔다.

세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번에 다혜의 빵을 뺏었던 3학년들은 보이지 않았다.

‘밥을 먹었다면 안 오겠지…….’

 오늘은 아마 안 뺏길 것이다.

다혜가 빵을 먹으러 교무실까지 가는 도중에 그 3학년들을 마주치더라도, 점심시간 이후니까, 굳이 다 팔고 남은 저 인기 없는 빵들을 뺏어 먹으려 하진 않을 것이다.

‘괜히 걱정했나.’

 세희는 한숨을 쉬고 매점의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입구에서 학생 두 명이 걸어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세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 저기.”

“계산 다 했네. 딱이다.”

 둘은 세희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혜에게 다가갔다.

“이야~, 벙어리. 빵이 많다?”

“……아으.”

 다혜가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둘은 자연스럽게 다혜를 매점 구석으로 몰아갔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세희는 귀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천천히, 조용히 셋을 향해 걸어갔다.

“돼지냐? 오전에 먹고 또 먹어?”

“아으.”

“아으? 아으가 뭔데, 똑바로 말을 해 봐, 친구야.”

“……으으.”

 3학년들이 다혜의 품에서 빵을 낚아챘다.

“많으니까 하나 가져간다?”

“아으…….”

“억울해? 억울하면 꼰질러 보든가, 장애년아.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쓰면서 어떻게 꼰지를 건데?”

 그 꼴을 보고 있던 세희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세희는 둘의 뒤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 말에 둘이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혜도 고개를 들어 세희를 바라보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세희의 눈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지난번 자신이 다혜에게 사준 빵을 뺏어간 사람들이었기에.

두 3학년이 세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뭐야? 2학년 아냐?”

“네가 뭔 상관이야?”

 세희는 팔에 찬 완장을 가리켰다.

“선도부요.”

“그래서?”

“그 빵 돌려줘요.”

 3학년들은 뜨끔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빵을 흔들며 웃을 뿐이었다.

“얘한테 받은 건데?”

“아닌 거 알아요.”

“진짜야. 너무 많다고 준 거라니까? 네가 뭔데 아니라 그래?”

 네 머리털도 너무 많으니까 뽑아줄까, 세희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다 듣고 있었어요. 빨리 돌려줘요. 안 그러면 교장선생님한테 말할 거예요.”

 그 말에 3학년들이 코웃음을 쳤다.

“교장선생님한테?”

“그래~. 일러 봐.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 봐. 낄낄…….”

 세희의 눈이 위로 휙 돌아갔다.

“이런 씨…….”

 안 그래도 담임을 닮아 성격이 더러운데, 겨우 참고 있는 와중에 신경을 박박 긁어대니 폭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희가 둘을 향해 손을 올리는 순간.

“아으……!”

 다혜가 세희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잡았다.

세희는 다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놔요!”

“느으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다혜는 세희를 놓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3학년들에게 빵을 더 쥐여주며 가라는 손짓을 했다.

3학년들은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니가 준 거다?”

“일 열심히 하네. 선도부.”

 낄낄거리는 웃음이 매점 밖으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다혜의 손이 느슨해졌고, 세희는 다혜를 세차게 뿌리쳤다.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왜 막아요? 왜 그걸 더 줘서 보내요? 저거 언니 돈 아니지 않아요?”

 그 말에 다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으.”

“언니 알바 못하잖아요. 다 선생님들이 주는 돈 아니에요? 그걸 저렇게 막 줘도 되는 거예요?”

“느우웅…….”

 다혜는 시무룩하게 웅얼거리다가, 곧 애써 밝은 웃음을 지으며 빵을 세희에게 내밀었다.

세희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바보 같아서 어떻게 살아요?”

“므앙.”

 다혜는 그저 웃었다.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다. 세희는 한숨을 푹 쉬고 빵을 되밀었다.

“언니나 먹어요. 난 교실 갈 거니까. ……응?”

 돌아서서 가려는데 다혜가 소매를 잡았다.

“아으.”

 다혜는 빙긋 웃으며 세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힘이 아주 셌다. 세희는 그 힘에 다혜와 자신의 실력 차이를 다시금 실감했다.

이해가 안 됐다.

‘이렇게 강하면서 왜 맨날 당하고 사는지…….’

 세희는 그렇게 다혜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향했다.

* * *

“아웅.”

“맛있어?”

“우앙.”

 상호는 교무실로 쳐들어온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빵을 마구 집어먹는 다혜와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세희.

어째 세희의 표정이 어두웠다.

“세희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뇨.”

“무슨 일이 있었다는 표정인데.”

 상호의 손이 세희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내가 널 얼마나 봐왔는데. 이젠 표정만 봐도 알지.”

“……아으?”

 다혜가 상호를 향해 눈을 치떴다.

“느아으으으…… 아으?”

“응? 다혜 왜?”

“므아아아.”

 상호는 이글거리는 다혜의 눈을 보며 진땀을 흘렸다.

“미안해, 뭐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어…….”

“얼마나 봤길래 그러냬요.”

 세희는 무심하게 말했다.

“1년 365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봐 왔다고 답해주세요.”

“……응. 대충 그래.”

“느아아악!”

 상호의 말에 다혜가 빽 소리쳤다. 상호는 당황하며 세희를 돌아보았다.

“이건 무슨 뜻이야?”

“저는 표정만 봐도 알면서 왜 자기 말은 못 알아듣냬요.”

“그거야 다혜 너는 오랫동안 못 봤으니까…….”

“느우웅!”

“반년이면 알 만도 하지 않냐는데요.”

“노력……. 노력해볼게.”

 그제서야 다혜는 빙긋 웃으며 빵을 조금씩 떼어 상호와 세희에게 내밀었다.

둘은 동시에 눈을 끔뻑이다가 그 빵 쪼가리를 받아먹었다.

“맛있네. 무슨 빵이야?”

“효모 통밀빵이요.”

“인기 많나? 다른 애들도 이거 많이 먹어?”

“아뇨, 나이든 선생님들만 가끔…….”

“이야, 다혜가 빵을 잘 고르네.”

“느후훙…….”

“……듣고 계세요?”

 셋은 그렇게 교무실 구석에서 도란거리며 빵을 먹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