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501)

* * *

다음 날.

“강 선생.”

“예.”

 상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곳은 이사장실.

“요즘 성추행 신고가 많이 들어오던데.”

 류혁은 뒷짐을 진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X급이라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그럼 신고가 잘못 들어온 건가?”

“그건 아니지만, 성추행도 아닙니다.”

“그래? 음주는 했는데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그런 비범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X급만큼 강해질 수 있나?”

“다 사연이 있습니다.”

“흐음.”

 혁이 고개를 돌려 상호를 흘끗했다.

“죄는 짓지 말자고. 영웅이라고 해서 면죄부가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당연하죠.”

 상호의 눈길이 먼 곳을 향했다.

영웅이라고 해서 면죄부가 있는 건 아니다.

“전 아직 지은 죄가 없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럼 다행이고.”

 혁은 이제 완전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전국평가는 준비 잘 되어 가나?”

“따로 준비할 것 없이 항상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중간평가 1등이던데.”

 다혜를 말하는 것이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혁이 말을 이었다.

“2등이 강 선생 반이던가?”

“예.”

“그럼 그 아이가 없었다면 강 선생 학생이 1등인가?”

“그랬겠죠.”

 다혜가 없었다면 세희, 은율, 태화, 셋 중 한 명이 1등이었을 것이다.

 그 대답에 혁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주 선생한테 말해놨어. 그 아이도 전국평가 내보내라고.”

“다혜요?”

“다혜. 송다혜였나? 여튼.”

 상호는 혁이 말하려는 바를 알 것 같았다.

“또 내기입니까?”

“뭐 그런 셈이지.”

 혁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종이. 아니, 사진.

혁은 그 사진을 팔랑이며 말했다.

“이 정도면 X급 헌터에게도 협상거리가 되겠지?”

 저게 대체 뭔데 그럴까.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그게 뭔데요?”

“봐.”

 한 장이 아니었다. 사진들이 상호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상호는 사진을 잡고 확인하다가 움찔했다.

“이건…….”

 아리를 껴안은 사진. 엎드린 미진의 등을 뒤에서 누르는 사진.

그밖에도 그동안 지어온 죄들이, 혹은 죄는 아니지만 죄에 한없이 가까운 일들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다 찍고 있었냐!’

 상호의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혁이 입꼬리를 삐뚤게 올렸다.

“잘 즐기고 있더구만 그래.”

“…….”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니요.”

 상호는 재빨리 사진에 내공을 불어넣어 태워버렸다. 그래도 혁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파일로 받은 거라서. 원한다면 더 뽑아 주지.”

“……1등을 못 하면 경찰에 넘기겠다 이겁니까?”

“아니. 자네 반 아이들한테 넘길 거야.”

 상호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저 사진들이 세희, 태화, 나빛, 지윤의 손에 들어간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주 믿음직스럽군.”

 혁은 그렇게 깐죽대며 검지로 상호를 가리켰다.

“아마 8월 초쯤일 거야. 준비 잘 해서 이겨 보라고. 1년 꿇은 아이가 1등해 버리면 애도 나도 귀찮아지니까.”

“예.”

 상호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었다.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는 명백했다.

가은.

 하지만 그동안 어떻게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항상 문을 벌컥 열어서 놀라게 하는 것도 그렇고.

보통은 발소리가 들릴 텐데.

 물론 매번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던 상황이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가은이 성적이 이상하게 좋았지.’

 수업 중에는 평범해서 특출난 점을 못 느꼈는데, 중간평가에서는 예선 10승을 찍고 본선 7등을 찍는 등. 석연찮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 생각보다 강할지도.’

 고민에 빠진 상호의 귀에 혁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뭘 그렇게 멍하니 고민하고 있어? 가 봐.”

“아, 예.”

 상호는 고개를 까닥이고 이사장실을 나왔다.

문을 닫고 돌아서는 그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교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미진 씨가 찍어놓은 경기 좀 봐야겠다.’

 189. 반장 선거

“……으음.”

 상호는 모니터를 보며 침음했다.

화면에는 한 소녀가 다른 소녀를 순식간에 쓰러트리고 경기장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짧은 검을 역수로 쥔, 눈이 무서운 소녀.

‘신기한…… 무술을 쓰네.’

 급소만 집요하게 노리는 검법.

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보법.

검에만 의존하지 않는 체술.

더 특이한 것은, 그 무술이 딱 사람 키만 한 상대를 기준으로, 그리고 사람과 같은 체형의 상대를 기준으로 짜여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몬스터를 상대할 경우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듯이.

‘헌터보다는…… 헌터 경찰들이 쓸 것 같은 무술인데.’

 어디서 이런 무술을 배웠을까. 왜 배웠을까. 상호는 그런 의문을 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물어볼 수는 없고…….’

 수업할 때마다 살짝살짝 물어봐야겠다. 드러나지 않도록 넌지시.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 * *

다음 날, 수업 시간.

가은과 하솔이 대련을 마치고 스탠드로 돌아왔다.

결과는 하솔의 승리. 하지만 가은은 평가 때의 무술을 전혀 쓰지 않았다.

상호는 둘을 향해 말했다.

“하솔이는 칼끝을 더 확실히 의식했으면 좋겠다. 닿을 거리인데도 공격을 거둘 때가 있네. 이따 세희가 싸우는 거 잘 보고. 그리고 가은이는…….”

 상호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너무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뭔가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처럼.”

 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째려볼 뿐.

역시나 대화하기가 힘들다.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상호는 쓰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방금 막 끝내서 지쳤겠지만…… 잠깐만 나와 볼래?”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말대로 운동장에 나와 주긴 했다.

거리는 약 3m.

상호는 가은의 손을 가리켰다.

“검, 그렇게 잡는 거 불편하지 않아?”

“네?”

“거꾸로 잡는 게 더 편해 보여서. 너한텐.”

“…….”

 가은은 탐탁잖은 표정으로 검을 돌려 잡았다.

“그렇게 잡으면 거리가 먼 것도 불편하지?”

“…….”

“가까이 와.”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상호는 검을 한 번 까딱이며 말했다.

“천천히 해줄 테니까, 시작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은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상호의 검이 가은을 향해 천천히 내리쳐졌다. 가은은 그 공격을 역수로 쥔 검으로 막더니, 상호의 멱살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역시.’

 체술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역수의 장점은 단 하나. 걸리적거리지 않는다는 것.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할 때 이점을 얻는 방식이었다. 좁은 골목이나, 건물의 계단, 극단적으로는 자동차 안처럼.

 다만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단점만 수두룩하게 남는, 어렵고 제한적인 무술이었다.

‘그래도 잘 배운 것 같네.’

 어디까지나 인간을 상대로 할 때 말이지만.

헌터를 가르치는 상호의 입장에서는 이 무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이유가 없었다.

 탁

 상호의 칼 뒷면이 가은의 손목을 쳤다.

“……윽!”

 가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검을 놓쳤다. 내뻗은 왼손도 상호의 손에 간단히 가로막혔다.

 그 짧은 경합으로 상호는 가은의 진짜 수준을 알아낼 수 있었다.

“수련 많이 했네.”

 그 말에 가은은 검을 집으며 상호를 째려보았다. 몸을 수그리느라 눈을 치뜨는 정도가 평소보다 더욱 심했다.

상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무기술이든 무공이든 목적에 맞는 형태가 있는 법이니까,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네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겠지. 근데 내가 그걸 도와주려면 가은이 네 목적을 알아야 해. 그래서 말인데…….”

“필요 없어요.”

“이야기 좀…… 응?”

 상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은이 매몰차게 대꾸했다.

“필요 없다고요. 나는 내 방식이 있으니까.”

“……그래.”

 상호는 그저 웃었다.

 이미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알았어. 가은이 넌 혼자서도 잘하고 있으니까……. 대신 도와줄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기다리고 있을게.”

“흥…….”

 가은은 콧방귀를 뀌고 스탠드로 걸어갔다.

상호는 그런 가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다음, 사카시타. 은율이.”

 * * *

역시나 친해지기 힘들다. 보통 아이도 아니고 남자를 싫어하는 아이니까.

아무래도 조력자가 한 명 필요할 듯했다.

 그래서 다음 날. 조례 시간.

“반장 한 명 뽑자.”

 상호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멍한 눈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반장…… 이요?”

“응.”

“1학기만?”

“아니, 1년. 근데 뭐 특별한 일을 시키진 않을 거라서. 1년이라고 해도 딱히 힘들진 않을 거야.”

 그 말에 아이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어서 나빛이 손을 번쩍 들었다.

“소원권 주세요?”

“소원권이라기보다는…… 이것저것 편의를 봐줄 수는 있지. 뭐가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럼 저 할래요!”

“저도요.”

 나빛과 세희가 손을 들었다.

상호는 일단 손을 저었다.

“설명은 다 들어야지. 특별히 힘든 일은 시키지 않겠지만…… 방과 후에 나랑 단둘이 이야기하거나, 쉬는 시간에 가끔 불러낼 수도 있어.”

 그 말에 2학년 아이들이 단체로 손을 들었다.

“나 할래.”

“지도예.”

“해보고 싶습니다.”

“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뭐 지원자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 물백묵으로 칠판에 글씨를 썼다.

반장 선거.

“근데 세희는 안 돼. 선도부잖아.”

“아…….”

 세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쉽겠지만 어쩔 수 없다. 상호는 교탁에서 물러나 의자를 들고 아이들의 곁에 앉았다.

“자, 한 명씩 나가서 왜 자기가 반장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 봐. 순서대로. 태화부터.”

“오키.”

 태화가 교탁 앞에 뿅 하고 나타났다.

 그러더니 한쪽 손은 옆구리에 올리고, 한쪽 손은 아이들을 향해 쫙 펼쳤다.

“내가 반장이 된다면! 에~. 뭘 할까. 아, 그래.”

 태화의 중지와 엄지가 딱 소리를 냈다.

“여러분! 우리가 맨날 귀찮아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너?”

“환복, 븅딱아!”

 그 말에 세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넌 갈아입지도 않잖아.”

“물론 그렇지. 하지만 반장으로서! 반의 편의를 위해서! 획기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겠다, 이 말씀이야.”

 상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전투복 등교라도 시키려고 그러나.

아이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획기적 시스템?”

“그게 뭔데?”

 태화는 진지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검지를 치켜들었다.

“수업시간에 느긋하게 갈아입는 거야!”

“……나와, 임마.”

“아니, 내 말 들어 봐! 쌤은 눈이 하나잖아. 그니까 하나만 살짜쿵 가리고 갈아입으면 돼! 그럼 앞에서 웃통을 벗든 치마를 벗든…….”

“나오라고!”

 상호는 염력으로 태화를 질질 끌고 왔다.

다음은 나빛.

나빛이 교탁 앞에 서서 쑥스러운 듯 웃었다.

“음……, 헤헤……. 제가 반장이 된다면, 음…….”

“피자!”

“치킨!”

 태화와 지윤이 차례로 소리쳤다. 상호는 둘의 볼을 잡아당겼다.

“그런 거 하지 마.”

“아야야…….”

“끄응.”

“으흠, 제가 반장이 된다면…….”

 나빛이 재차 웃었다.

“어……. 최선을 다해서……. 항상 선생님 곁에 붙어서, 뭐든지 함께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태화와 지윤이 차례로 말했다.

“탈락.”

“나가리.”

“어, 왜? 나 잘할 거야…….”

“뭐가 문젠지를 모르는구만. 다음. 은율이.”

 태화가 멋대로 진행을 하자 나빛이 울상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다음은 지윤.

“에~. 지가 반장이 되믄…….”

 지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에……. 음……. 에……. 이태화가 헛소리할 때마다 꼬리로 로프 트레이닝을 하겠심더.”

“뭐? 그게 뭔데?”

“니는 몰라도 된디.”

 다음은 은율.

은율은 아이들을 쓱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제가 반장이 된다면 항상 선생님 곁에 붙어서 지켜보겠습니다.”

 태화와 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문제가 뭔지를 아는구마.”

“어? 나랑 뭐가 다른 거야……?”

“은율이가 니랑 같냐? 은율이는 딱 봐도 믿음직스럽잖아.”

“엥…….”

 나빛이 시무룩해 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은율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왔고, 다음은 이츠키.

이츠키는 은율을 흘끗하고는.

“후보 사퇴하겠습니다.”

 다음은 나디아.

“네!”

 나디아는 그 한마디와 함께 미소를 남기고 자리로 돌아왔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 사이에서 반장이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투표 종이 만들어 올게.”

 * * *

결과는 뻔했다.

태화가 1표. 지윤이 3표. 은율이 10표.

상호는 은율의 이름 옆에 마지막 작대기를 그으며 말했다.

“은율이가 반장이네.”

“크아아악!”

“니는 니한테 투표했나. 쪽팔린 줄 알래이.”

“뭐? 너도 너한테 했잖아!”

 투표에서 패한 두 명이 투닥거렸다.

 어쨌든 한 쪽이 압도적. 은율을 반장으로 낙점하는 데엔 아무도 이견이 없을 듯했다.

상호는 칠판을 지우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자, 수업해야지. 옷 갈아입고 나가자.”

 태화가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눈 감아.”

“……나 나가면 갈아입으라고. 그리고 넌 갈아입지도 않잖아.”

“야, 다 벗어!”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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