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수고하셨습니다.”
“아, 수고했어요.”
상호는 미진을 향해 씩 웃었다. 방과 직후의 교실에는 단둘만 남아 있었다.
“미진 씨가 도와줘서 작년보다 훨씬 편하네요.”
“고마우면 평소에 일이나 좀 잘 하세요.”
미진이 톡 쏘아붙였다.
“오늘도. 하솔이 아버님 안 오는 거 왜 말 안 했어요? 어머님만 오셔서 초란이 어머님인 줄 알았잖아요.”
“아, 그거…….”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솔의 아버지는 급한 일이 생겨서 학교에 오지 못했다. 그 소식을 문자로 받은 게 아침 일곱 시.
일찍 확인했음에도 깜빡하고 미진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솔직히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뭐 별일 없었잖아요.”
“제가 실수를 해서 학교 이미지가 깎였다는 게 중요하죠.”
“에이, 무슨 대기업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그렇게 설렁설렁 하지 마시라고요.”
미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니까 매사에 실수가 생기는 거예요. 전투를 가르치는 사람이 왜 그렇게 해이하세요?”
“미안해요. 내가 꼼꼼한 성격은 아니라서…….”
상호는 멋쩍게 웃고 미진의 뒤로 슬쩍 다가서서 어깨를 잡았다.
“대신 이런 건 잘 해주잖아요.”
“앗! 이, 이게 지금 무슨……!”
“앉아 봐요. 안마 받기 싫어요?”
미진의 몸이 덜덜 떨렸다.
이 남자의 추잡한 생각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 경험한 안마의 맛은 몸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상호의 손길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콧김이 살짝 거칠었다.
“빨리…… 빨리 끝내 주세요.”
“에이, 누구 오는 사람도 없는데 느긋하게……. 아니다, 책상에 엎드려 봐요. 등도 좀 눌러 줄게.”
“으…….”
미진은 상호가 시키는 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상호는 그녀에게 다가서며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었다.
“표정 풀어요. 좋아하잖아요, 사실은.”
그때 교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둘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가은이 문가에 서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
“…….”
“…….”
상호는 재킷을 벗다 말은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은의 표정도 점차 썩어갔다. 마치 시체에 들끓는 구더기를 본 것처럼,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 눈빛으로.
책상에 엎드린 미진의 뒤에 선 상호를, 짓밟아 죽이고 싶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너무 큰 오해를 산 것 같다. 상호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가은아, 그러니까……. 이건 그런 게 아니고…….”
“죽어요.”
가은은 그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문도 닫지 않은 채.
상호는 멍하니 서 있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진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진 씨.”
“으…….”
“저어, 안마, 계속할까요……?”
그 말에 미진이 따귀를 날리며 빽 소리쳤다.
“죽어, 이 짐승 새끼야!”
쫘악
“켁!”
187. 거꾸로 수업
미진에게 좌우 연타로 따귀를 얻어맞은 게 월요일. 13일.
오늘은 수요일.
5월 15일.
‘분명히 무슨 일이 터질 거야.’
상호는 양치를 하며 생각에 잠겼다.
스승의 날. 분명히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세희도, 태화도, 나빛도, 지윤도. 다른 모든 아이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그는 눈에 힘을 주고 칫솔을 부지런히 놀렸다.
* * *
‘뭔가가 있을 거다.’
상호는 교실 문을 노려보았다.
이제 조례를 하러 들어가야 했지만,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 뒤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서.
그의 몸에서 내공이 한 자락 흘러나왔다.
‘……문 주변에는 없고.’
교탁 주변에 사람이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뿔이 있고 꼬리가 얇은 걸 보니 아마 태화. 또 무언가 장난을 꾸미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마음의 대비를 해야…….’
상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엣헴!”
교탁 앞에 선 태화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지각이다, 강상호! 벌로 사죄의 복근자랑 30초!”
“나와. 아니, 잠깐. 너 그 양복은 뭐야?”
태화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제법 고급지고 단정한 물건으로.
빳빳한 치마 아래로 내려온 꼬리가 살랑거렸다.
“교장쌤이 빌려줬쪄.”
“그걸 왜 빌리……, 아니, 됐다. 빨리 들어가, 수업하게.”
상호가 손을 내젓자 태화가 눈을 깜작였다.
“교장쌤이 시킨 건뎅.”
“뭐?”
상호도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뭐를?”
“이름하여!”
태화는 물백묵을 집어 들고 칠판에 휘둘렀다.
촤좌좍
칠판에 개발새발로 글씨가 그려졌다.
“……개구리 두루치기?”
“때애애앵! 거꾸로 가르치기!”
태화가 양팔을 머리 위로 쫙 벌렸다.
“쌤이 학생이 되는 거야.”
“……뭘 배우는데?”
“그건 우리가 알아서 다 준비해 놨지. 어쨌든! 들어가서 앉아, 지각생!”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하며 태화의 자리로 향했다.
의자에 앉자 옆자리에 있는 세희와 나빛이 웃었다.
“선생님, 저랑 딴짓해요.”
“안돼요, 이쪽 보세요. 헤헷…….”
상호는 칠판을 직시한 채로 굳어 버렸다. 돌부처처럼.
태화가 헛기침을 하고는 칠판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으흠! 1교시는 성교육이다. 거기 교보재, 신속히 탈의 실시!”
“……너 나와.”
“실시이이이!”
“나오라고!”
* * *
“학생! 듣고 있습니까!”
“……응?”
딴생각에 빠져 있던 상호는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쌍심지를 켠 미래가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집중하세요! 이렇게 똑똑한 선생님이 수업하고 있는데!”
“어……, 미안, 미안해.”
“제가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응? 어, 그게……. 마력대각의 초상함수는 매끄러워서 미분을 하면…….”
“얼씨구, 지어내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선생이 남의 수업을 들을 때 딴청을 피다니.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래가 칠판을 탕 쳤다.
“어쨌든! 이게 변의 개수가 소수인 도형을 외곽으로 하는 마법진의 균등분할법이에요. 고차마법진을 만들 때 필수로 알아야 하는 요소죠. 이걸 응용하면……. 잠깐만, 학생들, 듣고 있나?!”
“쿠우울…….”
아이들은 다 자고 있었다. 딱 한 명, 아리만이 진땀을 흘리며 미래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 배우려는 학생이 하나 있구만. 거기 학생! 균등분할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봐.”
“몰라요…….”
“몰라?! 그러고도 마법학도야?!”
“죄송해요…….”
아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순간 코를 골던 태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균등분할을 하면 면적이 균등해지기 때문에.”
“그렇지! 정답! 아리 학생, 그것도 몰라?!”
“어……. 음…….”
아리는 얼이 빠졌는지 한참 동안 말을 잃은 채로 멍하니 있었다.
할 말이 없는 것은 상호도 마찬가지라, 그저 눈만 끔뻑이며 미래의 수업을 계속 들었다.
듣기만 했다.
듣기만 하는데도 이마에 진땀이 줄줄 흘렀다.
‘한 사람당 10분씩이라고 하지 않았나…….’
시계의 분침이 3에서 3으로 돌아와도, 미래의 수업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 * *
미래의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음 수업은 누구일까. 상호는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해서 전전긍긍해했다. 누가 무슨 수업을 하게 될지 알 수가 없어서.
“난가? 헤헤…….”
다음으로 일어난 사람은 나빛이었다.
나빛은 칠판 앞으로 걸어가 뒷짐을 지고 방긋 웃었다.
“제가 수업할 과목은요~.”
그리고 빙글 돌아서 물백묵을 들고 칠판에 한자를 썼다.
姜.
“굳셀 강에~.”
상호는 나빛이 뭘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다음 한자는 常.
“항상 상~.”
다음은 護.
“지킬 호.”
나빛이 다시 그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강상호 선생님이에요~.”
“선생님 한자 그거 아닌데.”
“……응?”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딴지를 건 것은 세희였다.
“선생님 자기 이름 한자 몰라. 저거는 전쟁 때 아는 누나분께서 지어주신 거야. 자기 이름 한자 모른다고 하셔서…….”
그 말대로 상호는 자신의 이름이 한자로 뭔지 몰랐다. 항상 상에 지킬 호는 예경이 마음대로 지어준 것.
세희의 말에 나빛이 당황했다.
“으음, 그래……? 몰랐어…….”
“어쨌든 그래. 계속해 봐.”
“응…….”
나빛은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키가 커요~. 185…….”
“쌤 키 183인데?”
이번엔 태화였다.
나빛은 태화의 말을 씹고 계속 이어나갔다.
“몸무게는 81…….”
“83이디. 근육이 더 뿔어 가꼬.”
“아니야, 선생님 81키로야…….”
지윤이 말하자 나빛이 소심하게 항변을 했다.
하지만 지윤은 확신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는 쌤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몸무게 잰디. 체단실에 체중계 있다 아이가.”
“어…….”
태화가 코웃음을 쳤다.
“제대로 아는 게 없구만?”
“……아니야!”
나빛이 발을 한 번 구르며 소리쳤다.
“나도 아는 거 많아! 선생님 여친은 수녀님이고…….”
“어? 진짜? 수녀님이랑 사귄다고?”
“그래도 돼? 멍!”
미래와 단비가 깜짝 놀라 상호를 돌아보았다. 그 둘의 너머로 가은이 또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상호는 전력으로 부정했다.
“수녀님 아냐.”
“……네?”
“수녀 아냐. 코스프레야 그거. 나빛이 네가 잘못 아는 거야.”
“네? 수녀님이잖아요……!”
제발 교사의 사회적 위치를 지키게 해 다오. 상호는 그렇게 빌며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나빛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마음이 착하고…….”
“그걸 누가 모르냐?”
“엄청 강하고…….”
“나빛이 너는 잘 모를걸?”
“멋지고…….”
“눈까리가 달맀으면 모를 수가 업제.”
아이들이 한마디씩 날렸다.
결국 참다못한 나빛이 주먹을 꼭 쥐고 빽 소리쳤다.
“선생님 나랑 단둘이 있을 때 뒤에서 껴안고 사랑한다 하셨어!”
“……뭐?”
그 말에 교실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을씨년스럽다. 상호는 눈을 감고, 입꼬리를 올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앉은 채로 입적한 노승처럼.
“이야~, 그건 몰랐네?”
태화가 혀로 윗입술을 핥았다.
“수업이 참 유익하네. 재밌어. 선생님이 좋은 거 가르치네. 안 그래, 상호 오빠?”
“…….”
구라라고 말하면 나빛이 승천해버릴 것이다. 상호는 그저 웃었다.
침묵이 금이라 했다.
“오빠, 말을 해 봐. 나빛이랑은 진도를 많~이 뺐나 봐?”
“…….”
“좀 귀여운 상이 취향인가? 살~짝 범죄 냄새가 난다, 응? 상당히 실망스러워.”
“…….”
“근데 끝까지 부정은 못하네? 진짜 있었던 일인가봐?”
태화의 뒤를 이어 세희가 속삭였다.
“선생님, 대답 좀 해보세요.”
“…….”
“선생님?”
그때 구원의 종소리가 울렸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상호는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태화가 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끅!”
“어딜 가?”
“화……장실…….”
“바닥에 싸.”
“대답하기 전엔 못 가요.”
둘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상호는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나빛을 바라보았다.
나빛은 세상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하트를 만들고 있었다.
“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