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버지가요?”
“예.”
상호는 커피를 홀짝였다.
그와 해련은 휴게소 한쪽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해련이 주차장 쪽을 흘끗했다.
“사이가 많이 안 좋았나 봐요? 저렇게 태연한 걸 보니까.”
“남남보다 더 먼 사이죠. 아비란 작자가 술독에 빠져 살았대요.”
“아하.”
해련은 상호의 손에서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만난 적 있어요?”
“예. 몇 번.”
“어떤 사람이었어요? 강 선생이 보기엔.”
“다른 사람 인생에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커피가 쓰다.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일단 아버지다운 사람은 아니었어요.”
“아버지답다라면?”
해련이 나직하게 물었다.
상호의 머릿속에 그간 봐왔던 아버지들의 눈이 떠올랐다. 성철의 눈, 봉진의 눈, 그리고 중선의 눈.
상호는 성철과 지윤을 동시에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저 딸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데도 눈에 깃드는 따뜻함으로, 성철이 지윤을 볼 때 어떤 눈빛을 지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봉진은 엄한 척 하지만 실상은 딸바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고.
하지만 중선은.
딸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상호는 그 무정하고 무감각한 눈빛을 아직까지 잊지 못했다.
“자식을 사랑하느냐……겠죠. 그거 말곤 없을 것 같아요. 부모답다라는 말을 정의하려면.”
“자식을 사랑하지 않던가요?”
“제가 보기에는.”
그의 대답에 해련이 슬픈 눈빛을 지었다.
“참 세상이 왜 이럴까요? 아버지가 술에 취해 아이를 때리고, 어머니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버리고…… 이해 못 하는 내가 늙은 걸까요, 아니면 곱게 살아온 걸까요?”
“옳으신 거죠.”
상호는 커피를 쭉 비웠다.
“저도 이해 못 해요.”
예쁘고, 착하고, 밝고, 재미있는 딸로 만족을 못 한다면, 대체 무슨 인생을 바라고 살아온 건지.
해련이 그를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그런가. 그래서 장례는 어떻게 할 거래요?”
“이미 장례 중인가 봐요. 장례식장에서 연락이 왔어요.”
“상주가 따로 있는 건가?”
“그렇……겠죠?”
“그나마 다행이네요. 상주를 맡아줄 사람은 있어서.”
“글쎄요.”
딱히 슬프지도 않을 이가 상주를 맡고 있을지도 모르니. 직접 가 봐야 알 일이다.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맞다, 교장선생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응?”
“태화는 장례식에 안 가려는 것 같아서, 제가 대신 가려고 하는데…… 그동안 태화 좀 지켜봐 주시겠어요? 돌봐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혹시 모르니까…….”
사실은 66부 때문이지만, 상호는 그렇게만 말해두었다.
해련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편히 갔다 와요.”
“순간이동을 쓰는 애라서, 잘 좀 부탁드릴게요.”
“응, 곁에 꼭 붙어 있을게.”
해련이 씩 웃었다.
상호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고 장례식장에 찾아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가죠, 이제.”
“그럴까?”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로 향했다.
* * *
교문으로 들어서자 일단의 학생들이 차를 에워쌌다. 온통 하얀 소녀, 탄탄하게 근육이 붙은 구릿빛 소녀, 머리를 굵게 땋은 검사 소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흡사 할렘가 갱스터를 연상케 했다.
핸들을 잡은 해련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그 기습 수업의 연장이야?”
“……비슷하죠.”
그런 셈 치고 싶었다.
“먼저 가세요. 차키는 이따가 받아 갈게요.”
상호는 그 말을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 명이 달라붙었다. 지윤은 멀어지는 자동차를 흘끗하고는 상호의 가슴팍에 가슴팍을 맞부딪쳤다. 깡패가 행인을 겁박하듯이.
“배짱도 좋심더. 예?”
상호는 흐린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놀기 좋은 날이 아니었다.
“얘들아, 할 이야기가 있는데…….”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마세요.”
세희가 그의 검을 뺏어들었다.
이어서 나빛이 그를 뒤에서 안았다.
“사흘 동안 즐거우셨죠?”
“이제 사흘 동안 아무데도 못 갑니더.”
“우리끼리 방구석으로 여행 가요, 헤헤…….”
감금을 시킬 생각인가 보다. 상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살살 밀어냈다.
“얘들아.”
“뭐예.”
“할 말이 있어. 중요한 이야기야.”
“중요한 이야기요?”
아이들이 눈을 끔뻑였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들의 등을 밀었다.
“조용한 곳에서 말해줄게. 어디 보자……, 교실이 좋겠다.”
* * *
“……그렇게 됐으니까, 태화가 조금 평소랑 다르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모른 척 해.”
“모른 척이요……?”
나빛이 젖은 눈을 깜작였다.
“아는 척하면 안 돼요? 위로는요……?”
“그런 건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본인이 슬퍼하고 싶으면 슬프게 두는 거고, 평소처럼 지내고 싶으면 평소처럼 대해주는 거야. 태화는 아마 평소처럼 지내려고 할 거니까…… 너희도 평소처럼, 웃고 떠들면서 지내면 돼.”
“태화가 슬퍼하면요?”
“그러진 않을 거야. 근데 만약에 태화가 우울해하면…… 그땐 혼자 있게 해줘.”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고 지윤을 돌아보았다.
지윤에겐 남 일이 아닐 터였다. 예상대로 지윤은 착잡한 눈빛으로 교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희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창문 밖 먼 곳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상호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애들도 알아요? 단비랑, 하솔이랑…….”
“아니, 걔들은 몰라. 나랑 태화하고 교장선생님, 그리고 너희만 알고 있어.”
상호는 검지를 들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한텐 이야기하지 마. 애들한테도 티내지 말고. 그냥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평소처럼 지내줘.”
“네.”
세희와 나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지윤은 고개를 옆으로 기웃거렸다.
“모른 척이라믄…… 장례식도 가지 말란 말입니꺼?”
“태화는 안 가. 나만 갈 거야.”
상호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녁에 갔다 올 테니까, 태화랑 잘 지내고 있어. 알았지?”
“예.”
“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코를 훌쩍이는 나빛을 조금 더 다독여 주고, 셋을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교실을 잠시 서성이다가 물칠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방에 검은색 넥타이가 있던가?’
슬슬 준비해야겠다. 그도 곧 교실을 나와 남교사 숙소로 향했다.
* * *
‘……여긴가.’
상호는 건물을 쓱 훑어보았다.
회색의 각지고 밋밋한 건물. 문자에 적혀있던 그 건물이 맞았다.
‘2층……이라고 했지.’
그는 검을 짚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는 한적했다. 이상하게 한적했다. 중선 말고는 장례를 하는 사람이 없는 걸까. 그러고 보면 주차장도 한산해서 차를 대기 쉬웠다.
‘조문객이 나밖에 없는 건 아니겠지?’
품속에 넣어둔 돈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이 조의금을 내면 그 돈은 어디로 갈까.
‘태화한테 한 푼이라도 오긴 하려나?’
상호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중선의 빈소로 향했다.
입구로 들어서는데 어째 사람이 많았다. 딸까지 버린 아비치고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목소리들이 작은데도 왁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상호는 개의치 않고 영좌로 걸어갔다.
접객실과 빈소가 붙어 있어서, 얼큰한 육개장 냄새가 코로 흘러들었다.
‘저녁도 안 먹었는데. 한 그릇 하고 갈까…….’
상주는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어차피 서로 모르는 사이라, 간단히 목례만 한 후 부의록을 쓰고 영좌 앞에 섰다.
하얀 꽃더미 아래에 중선이 누워 있을 터.
상호는 향을 향로에 꽂고 뒤로 물러나 두 손을 모았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태화를 태어나게 해 준 사람이니까.’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첫 번째 절을 했다.
이제 두 번째 절을 해야 할 차례.
‘……하지만.’
이상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스으으……
엎드린 상호의 몸에서 한 자락 내공이 흘러나왔다.
은밀하게 뻗어나간 내공은 꽃더미 속 관으로 들어가 중선의 주검을 살피기 시작했다. 얼굴을, 몸을, 그 안의 상태를.
상호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갔다.
‘역시…….’
내장이 곤죽이 되어 있었다.
장의사의 손길이 아니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터트린 것.
그것도 살아있을 당시에.
‘……그렇군.’
고문의 흔적.
이상하게 많은 조문객.
상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다.
“66부.”
그릇 긁는 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상호는 중선의 영전에 무릎을 꿇은 채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가 찾는 사람이 바로 나다.”
66부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지금부터 셋을 셀 거다.”
중선이 끝끝내 태화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다는 뜻.
“셋을 센 뒤에도 이곳에 남아 있다면.”
그리고 그 아버지라는 이름의 남자를 죽인 자들은.
“죽여도 죄 묻지 않겠단 뜻으로 간주하겠다.”
고요한 살기가 상호의 뒷모습에서 흘러나왔다.
잔잔하게 흐르는 그 살기는 밤의 바다처럼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아서, 언제라도 폭풍이 될 수 있다는 듯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숨통을 옥죄어 갔다.
“하나.”
이제 빈소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조문객들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의록 앞에 앉아 있던 상주도, 육개장 그릇을 나르던 이들도.
모두 무기를 꺼내들었다.
“둘.”
상호는 등 뒤로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의 무릎 위에서는 예경의 검이 서서히 그 시퍼런 칼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와 둘 사이보다 약간 더 긴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그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셋.”
칼들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185. 도살자
“……쿨럭.”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사내는 구석에 찌그러진 채로 빈소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이야…….”
그곳에는 안대를 쓴 절름발이 청년이 태연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장 좋은 데 잡았네.”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뚝배기에 담긴 육개장에 밥을 말았다.
쓰러진 사내의 주변에는 동료들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팔다리가 꺾이고, 코피가 터지고.
하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대충 다 S급인가?”
누구에게 묻는 걸까. 사내는 기침을 두어 번 더 했다.
별안간 물컵이 사내의 이마를 강타했다.
“끅……!”
“묻잖아, 새끼야. 너희 무슨 등급이야.”
“S……급.”
“그렇지?”
청년은 깍두기를 우적거렸다.
S급 헌터를 수십 명을 때려눕히고도 태연자약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니. 사내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자는 누구인가.
“그럼 내가 누군지도 알겠구만.”
몰랐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장례식장에 찾아온 이들의 신원을 확보하라는 것뿐.
이런 괴물을 상대하란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알 수밖에 없었다.
급이 다른 강자.
“돌아가서 너희 소장하고 부협회장한테 전해. 내 제자한테 손끝 하나 댔다가는…….”
청년은 육개장을 쭉 들이켰다. 방울 하나 남지 않도록.
그리고 뚝배기를 내려놓으며 말을 맺었다.
“직접 찾아가서 전부 죽인다고.”
쓰러진 사내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벽과 식탁이 부서지도록 사람을 던져댄 탓에 톱밥과 돌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밥도 다 먹었으니, 이제 갈 만도 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인사는 끝내야지.’
상호는 중선의 영전으로 걸어갔다.
부러진 칼날과 깨진 그릇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쓰러진 사내들의 기준으로는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겠지만, 상호에게는 칼 몇 번 맞대고 사람 좀 쥐어박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수준이었다.
상호의 내공이 바닥을 깨끗하게 쓸었다.
좌르륵
그렇게 쓰레기를 한곳으로 몰고, 흐트러진 조화를 정갈하게 가다듬고, 삐뚤어진 향을 반듯하게 바로 세운 후.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이 무슨 뜻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에서야 딸을 사랑한 건지.
아니면 그저,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사랑을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던 건지.
이도저도 아니면 저승 가는 길 마지막 심술인지.
이제 와서 알 도리는 없지만, 한 가지만은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다웠습니다.’
상호는 두 번째 절을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서, 품속의 봉투를 꺼내 함에 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자리를 떴다.
그가 나간 빈소에 신음소리만이 맥없이 떠돌았다.
* * *
“공 소장!”
벽력같은 굉음이 66층을 울렸다.
리주는 자신의 방에서 연구 결과를 읽다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퍼뜩 들었다.
성난 발소리가 복도를 달려왔다.
‘……들켰나.’
리주는 딱히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곧 문이 벌컥 열리고, 얼굴이 시뻘게진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도현이었다.
“공 소장, 당신……!”
“왜 그러세요?”
리주가 천연덕스럽게 묻자 도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노리는 게 내 동생 제자라고는 말 안 했잖아!”
“네? 동생이요?”
리주는 모른 척을 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동생분 제자인지 아닌지를.”
“지랄하지 마! 몰랐다고?!”
“네, 몰랐어요. 저는 그 융합체를 본 거지 부협회장님의 동생분을 본 게 아니라서. 근데 부협회장님 동생도 있으셨어요?”
그렇게 능청을 떨어도 도현은 리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윽고 도현이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이 일에서 손 떼.”
“어머.”
리주도 도현을 쏘아보았다.
“동생 제자는 죽이면 안 돼요?”
“떼라고.”
도현의 손에 누런 기운이 휘몰아쳤다.
“명령이다, 공 소장. 다른 융합체를 찾아. 아니면 포기하고, 지금까지처럼 일반인을 바칠 거다.”
“부협회장님.”
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현의 앞으로 다가섰다.
팔짱을 낀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질문 딱 세 개만 하지요.”
“해 봐.”
“더 나은 봉인체를 찾을 수 있나요?”
도현의 눈 밑이 꿈틀했다.
“그건 내가 모르는 일이지.”
“봉인이 지금보다 더 짧아지면 감당할 수 있나요?”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
“그럼 마지막 질문. 노숙자를 봉인체로 쓰는 이유가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고아야말로 제일 적합한 봉인체가 아닐까요? 고아와 노숙자의 차이는 대체 뭔가요?”
“…….”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 같은 인간이 제일 역겨워.”
리주의 차가운 눈빛이 그를 향했다.
“남은 죽어도 되고, 내 주변 사람은 털끝 하나 다치면 안 되지. 그것도 영웅의 특권으로 말이야.”
“……닥쳐.”
도현의 손에서 누런 강기가 창의 형태를 갖췄다. 리주는 그 창을 보고도 눈썹 한 번 까딱이지 않았다.
“날 죽일 셈이야? 아니, 아까우니 봉인체로 삼을 건가? 그럼 그렇게 해. 영웅께는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리가 있잖아?”
“닥치라고!”
도현은 창을 벽에 집어던지고 리주의 멱살을 잡았다. 잔뜩 격앙된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니가 뭘 알아. 니가 사람을 죽여 봤어? 사람을 잡아서, 도살장에 밀어넣고……, 그 눈빛을, 본 적이 있냐고.”
“많죠. 동업자인데.”
리주는 자신의 멱살을 잡은 도현의 손에 손을 얹었다.
“날 바칠 거면 바쳐요. 목숨은 모두 똑같으니. 세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멱살을 잡은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문가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어쨌든, 그 계획은 일단 접어놔요.”
“기어코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죽일 건가요?”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도현은 리주의 방을 나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리주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건 당신 같은데요.’
답을 알려줘도 받아들이질 않으니.
살인자를 넘어 학살자가 되어가도 구해 줄 방법이 없다. 리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한껏 늘어지게 앉았다.
‘또 한 명이 죽겠네.’
* * *
손수건은 뒷주머니에.
마취약은 바지 주머니에.
밧줄은 재킷 오른쪽 안주머니에.
자루는 돌돌 말아서, 왼쪽 안주머니에 넣었다.
‘물건은 다 챙겼고.’
도현은 통유리창 옆 구석에 달린 창문을 열었다. 고층의 거센 바람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눈이 말라서 점차 따가워졌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고 고요히 밤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같은 곳은 위험하겠지.’
어제와는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도현은 생각을 정리하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내공으로 창문을 다시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파앙
공중에서의 도약. 등 뒤로 협회 건물이 쏜살같이 멀어져 갔다.
거의 1km쯤 떨어진 골목길 위에 다다랐을 때.
도현은 경공을 멈추고 그대로 뚝 떨어져 내렸다.
탁……
가벼운 발소리. 10초 넘게 낙하하고 있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희생양은 이미 점찍어 뒀다.
도현은 골목길 안에 누워 있는 노숙자를 내려다보았다.
“커어어…….”
다 해진 담요를 덮은 채로 잠을 자는 중년인.
데려가기는 편하겠다. 그냥 손수건에 마취약 묻혀서 얼굴에 턱 붙이고, 자루에 쏙 넣으면 그걸로 끝.
손수건을 꺼내려 뒷주머니로 손을 가져가는데, 손끝에 지갑이 닿았다.
‘……아.’
반대편이다. 도현은 살짝 당황하고 반대편 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수건을 꺼내진 않았다. 잠시 어떤 생각에 잠겨서.
고민하던 그는 손수건 대신 지갑을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