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강연 어땠어요? 들을 만 했어요?”
“예.”
상호는 트렁크 가방을 뒤적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뒤에서는 해련이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하루종일 강연만 들으니까 지겹죠?”
수학여행 첫 날은 강연밖에 없다. 그 말대로 상호도 좀 지루하긴 했지만, 하루 종일 평원을 기어서 주파하거나 동굴에 은신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딱히요.”
“찌뿌둥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몸을 좀 쓰고 싶다든가.”
“괜찮아요.”
“어허~. 그러지 말구.”
상호의 앞으로 종이컵이 둥실 날아왔다.
“차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해요.”
상호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아홉 시.
잠들기 전에는 점심에 걷었던 핸드폰을 돌려주기로 했다. 아이들은 이제 씻기 시작했을 테니, 아직은 시간이 좀 있었다.
그는 종이컵을 잡으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요?”
“맨날 내가 꺼내야 하나? 강 선생은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대체 정확히 몇 살이에요?”
“영원한 이팔청춘이지, 흐흥.”
“양심이 있으세요?”
해련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이가 중요한가? 몸이 중요하지.”
“몸이 뭐가 중요해요, 마음이 중요하지……. 공감대가 잘 맞는 사람하고 사랑을 해야죠. 그게 대부분은 또래끼리인 거고.”
“그럼 궁합을 좀 볼까?”
“궁합이요?”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속궁합이라고 하는 건 아닐까.
해련이 차를 홀짝이며 눈웃음을 쳤다.
“강 선생은 차가 좋아, 커피가 좋아?”
“……차요.”
“밥이 좋아, 빵이 좋아?”
“밥이요.”
“연상이 좋아, 연하가 좋아?”
“……연상이요.”
“나도!”
해련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상호는 뒤로 물러나며 해련의 뺨을 밀어냈다.
“거짓말 하지 마요! 교장선생님한테 연상이 어디 있어요!”
“영감이 연상이었어.”
“그럼 가서 연상이나 찾으세요!”
“액면가로 보면 내가 연하야~.”
해련은 이제 20대 초중반의 외모였다. 거기에다 잡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하고 탱탱한 피부까지. 20대 중반에 들어선 상호보다 더 어려 보일 정도였다.
안 그래도 동안보다는 노안에 가까운 상호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도 직장 상사는 좀…… 아니,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이미 두 명씩이나 있는데…….’
이성으로 볼 겨를이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상호는 종이컵에 든 차를 목구멍에 홀랑 털어 넣고 핸드폰들이 든 가방을 챙겼다.
“애들 보러 갈 거예요. 따라오지 마세요.”
“언제 오는데?”
“엄청 오래 걸리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씻고 기다릴게~.”
해련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기 전엔 안 잘 거야~.”
“……자요. 빨리.”
상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 * *
“얘들아, 선생님 왔다.”
“아빠~!”
문을 열자 태화가 신나게 달려왔다.
“선물 사 왔어? 먹을 거? 입을 거? 아니면…… 안아줄 꺼?!”
“핸드폰.”
“우왓! 비싼 거!”
상호는 태화에게 핸드폰 가방을 건네주고 방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다.
“다 씻었어?”
“이서만 빼고.”
그러고 보면 화장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나고 있었다. 자리를 좀 피해줘야 할 듯했다.
상호는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머리 잘 말리고 자.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안쪽에서 나빛이 울상을 지었다.
“같이 안 노세요?”
“내일 있잖아, 내일.”
“내일은 또 캠프파이어 때문에 놀 시간 없잖아요…….”
나빛의 말에 이츠키가 은율을 돌아보았다.
“스포당했습니다.”
“으응…….”
은율이 눈을 깜짝였다.
나빛의 말대로 내일 밤엔 캠프파이어가 있을 예정이었다. 밤늦은 시간까지. 하지만 상호는 난색을 표했다.
“대신 셋째날 하는 거 없으니까. 저번에도 둘째날 늦게까지 놀게 해 줬잖아. 선생님은 내일 올게. 응?”
“오늘도 같이 놀아요……. 수학여행 아니면 다같이 못 놀잖아요…….”
나빛이 상호의 손을 잡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상호의 눈에는 나빛의 머리가 실시간으로 하얗게 세어가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구나, 너한테는.’
상호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래, 그래. 놀자. 놀러 왔으니까 놀아야지…….”
“헤헤헤……. 옆방 애들 불러올게요.”
나빛은 활짝 웃으며 방을 나갔다.
* * *
“열두 시 전에 자는 거야.”
상호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는 10.
“그 이후로는 안 돼. 방도 섞어 자지 말고 배치대로 자.”
“네~.”
“그래서 뭐 하고 놀게?”
상호의 물음에 나빛이 미래를 돌아보았다.
“미래야, 보드게임 가져왔댔지?”
“응. 잠시만…… 어라?”
짐을 뒤지던 미래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아……. 차에 놓고 왔나 봐. 선생님 차 키 있으세요?”
“아냐, 내가 갔다 올게.”
이 늦은 시간에 애들을 보낼 순 없는 노릇이니.
그래서 직접 가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빛이 방긋 웃고 있었다.
“내일 저희가 갈게요.”
“응? 그럼…… 오늘은 뭐 하게?”
“같이 생각해 봐요. 음……, 뭐가 좋을까?”
나빛이 다른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미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진실게임!”
“그건 작년에 했는데…….”
“우린 안 했어! 나도 쌤한테 물어볼 거 많아.”
상호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진실게임 안 돼. 다른 거 해.”
“네? 왜요! 언니들이랑은 했다면서요!”
“언니들이 재미없잖아. 다른 거 하자. 응?”
그 말에 이츠키와 나디아가 손을 들었다.
“저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네!”
“저도…….”
은율까지.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다. 상호는 원군을 바라는 마음으로 세희와 지윤을 돌아보았다.
“하지예.”
“하지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구나. 상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알았어……. 근데 어떻게 하게? 한 명 한 명 물어보기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많아도 괜찮아요.”
“응? 시간이 너무 오래…….”
“두 시간이나 있잖아요!”
“……응?”
상호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 * *
“눈은 왜 다쳤어요?”
“다리는 왜 그러세요?”
“여친 있어요?”
“첫사랑 이름이 뭐예요?”
“이상형이 뭐예요?”
“외모는요? 연예인으로 예를 들면?”
“저희 중에 누가 제일 예뻐요?”
대답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침묵으로 일관할 때마다 소원권을 하나씩 뜯겼다. 결국은 반 전체가 소원권을 십수 개씩 얻었다.
상호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아주 날 잡고 뜯으려고 했구나…….’
두 시간째 끊임이 없는 질문의 폭격. 이쯤 되면 보드게임을 놓고 왔다는 것도 고의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부조리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손가락 접기 게임을 하는데도.
“남자 접어요.”
“강씨 접으소.”
“안대 쓴 사람 접으세요.”
“다리 아픈 사람.”
“키 제일 큰 사람 접어요, 멍.”
“월급 받는 사람 접어.”
“운전할 줄 아는 사람 접어요, 헤헤…….”
다구리를 맞았다.
더욱 서러운 것은, 나디아가 그를 향해 웃으며 한 말.
“네!”
그 한 단어에 상호는 눈치껏 손가락을 접어야 했다.
그래도 시간은 금방 지나서, 어느새 잘 시간이 되었다. 이제 시침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주무시고 계시겠지?’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상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이제 그만 놀고 자자.”
그 말에 아이들이 아양을 떨었다.
“에이, 더 놀아요~.”
“걍 자고 가면 안 돼?”
“뭔 소리야, 임마! 애들 듣는데…….”
그는 1학년들, 특히 이서와 가은, 하솔의 눈치를 살폈다. 이서는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가은과 하솔은 낯빛이 어두웠다.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늦었어. 빨리 자. 세희랑 지윤이랑은 옆방으로 돌아가고…….”
“더 놀자~ 놀자~ 놀자아아!”
“잠은 다섯 시간만 자도 돼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어요!”
“아까 강연 들을 때 많이 잤어요! 멍!”
“자랑이 아니다, 단비야……. 어쨌든 얼른 자. 선생님은 간다.”
그가 검을 짚으며 현관으로 향하는 때.
“얘들아, 안 자니?”
문 앞에서 해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헉!’
상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이 시간이 되도록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면 크게 혼이 날 게 뻔했다. 교사가 학생을 재우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놀아주고 있다니.
‘튀자!’
……는 불가능하고.
‘숨자!’
숨을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바닥에 깔린 이불. 상호는 재빨리 그 아래로 몸을 숨겼다.
이불 밖에서 아이들이 의아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얘들아, 난 여기 없는 거야…….”
“네?”
“부탁해…….”
해련이 문을 똑똑 두드렸다.
“얘들아~. 안 자는 거 알아~. 혼 안 내니까 잠깐만 열어 볼래?”
세희가 그의 귀에 대고 물었다.
“어떡해요, 선생님?”
“열어드려. 나는 없다 하고…….”
세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어왔다.
“강 선생 반이구나. 이 시간까지 안 자면 어떡하니.”
“죄송합니다…….”
“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서 자렴. 그런데 담임선생님 못 봤니?”
“선생님이요? 아까 열시쯤에 뵙고 못 봤어요.”
잘한다. 상호는 주먹을 움켜쥐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현관에서 신발 벗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강 선생 냄새가 나는데…… 정말 없니?”
“네, 네? 냄새요?”
“흐으음…….”
해련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문가에서라면 모르고 지나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 거리에서는 백 퍼센트 들켰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해련의 수준에서는.
하지만 해련의 발은 그의 옆을 지나쳐 갔다.
“없나 보네. 숨을 곳도 없고……. 흠. 그래서 뭐 하고 놀고 있었니?”
“저희 그, 손접어 게임이라고…….”
“아아, 손가락 접는 그거?”
“아세요?”
“그럼~. 내가 얼마나 유행에 민감한데~. 마음만은 신세대라구~. 요즘 젊은이들이 만든 게임이잖아~.”
“네? 나온 지 20년은 넘은 게임인데…….”
“으흠.”
해련은 헛기침을 하고는 이불에 앉았다. 정확히 상호의 얼굴 위에.
‘켁!’
가랑이가 정확히 코에 박혔다.
“어머? 여기 뭐가 있나?”
“그, 저희 작은 가방들을 모아 놔서…….”
“아하, 난 또 사람이 있는 줄 알았네.”
해련의 다리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보들보들한 맨발이 상호의 입가를 스쳐갔다. 악취는 나지 않고 오히려 좋은 향기가 났지만, 상호는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 알면서 일부러…….’
“다 접으면 이기는 건가?”
“아니요, 다 접으면 지는 거고…….”
“교장 접어!”
“그러면 자폭이에요…….”
아주 눌러앉아서 아이들이랑 놀려는 듯했다. 그가 항복하고 이불 밖으로 나올 때까지.
하지만 쉽게 져줄 상호가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잡혔다간 방으로 끌려가서 밤새도록 희롱이나 당할 터.
버텨야 했다.
‘누가 이기나 해 봐, X바…….’
상호는 아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182. 젊게 살면
“쿠우웅…….”
“크아…….”
상호는 아이들 코 고는 소리에 잠을 깼다.
평소 같았으면 인기척이나 떠드는 소리를 듣고 진즉에 일어났을 텐데, 작정하고 잠을 자니까 아주 푹 곯아떨어져 버렸다.
이불 속이지만 밖이 어둡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밤이구나.’
아이들 깨기 전에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다리에 팔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한가득이었다.
‘뭐지?’
상호는 이불을 걷고 몸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발은 지윤의 배 위에 올라가 있고, 오른쪽 다리는 나빛이 끌어안고 자는 중이었다. 배를 베고 누운 것은 태화, 오른쪽 팔을 베고 누운 것은 세희.
어째 머리에도 물컹한 것이 닿았다.
‘뭐야, ……켁!’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잠옷 차림의 해련이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가 몸을 움찔하자 오른쪽 팔에 얹힌 세희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우…… 아윽!”
“앗, 미안, 미안해, 세희야…….”
“으……? 으으?”
“미안해, 다시 자, 다시 자…….”
“……으음.”
세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작은 소란이 일자 아이들이 조금씩 뒤척였다. 상호는 내공을 뻗어 아이들을 몸에서 살살 밀어냈다.
‘빨리 나가야지, 아침까지 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몸을 일으키다가 해련에 생각이 미쳤다. 그는 뒤에서 곤히 자고 있는 해련을 바라보았다.
‘데려가야겠지?’
아침에 바쁠지도 모르고 무슨 스케줄이 더 있을지 모르니. 애들도 편히 잘 수 있도록 데려가는 게 좋을 듯했다.
‘잠옷은 또 언제 갈아입은 건지, 참…….’
놀다가 옷을 갈아입고 온 건지, 여기서 갈아입은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 꼴로 왔던 건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어쨌든 상호는 해련을 안아서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앗…….”
1학년 아이들이 뭉쳐 자고 있는 곳이었다.
아마 잠꼬대일 것이다. 상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어깨에서 해련이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 선생이…… 들락날락, 우와아…….”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해련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좀 하세요.”
“읍읍……, 흐읍…….”
뒤쪽에서 황급히 이불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잠꼬대일 것이다. 상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와 해련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