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렇게 세희는 2등이 됐다.
“다들 잘했다.”
상호는 스탠드에 앉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하솔은 3등, 가은은 7등을 했다. 다른 다섯 명의 1학년이 64강에 못 들긴 했지만, 두 아이의 성적이 워낙 좋아서 반평균을 내면 무난하게 상위권에 들 성싶었다.
비교적 부족한 아이들을 끌어올리는 게 문제였지만, 그건 이제부터 차차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고.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딱 한 명만 빼고.
“이태화. 너 다음에도 또 그래 봐. 애들 밥 사줄 때 너만 뺄 거야.”
“아, 알았어! 나도 알어, 담부턴 안 할게…….”
태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미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언니 몇 등이야? 몇 등 했어?”
“헹, 나야 당연히 1등이지.”
그 말을 들은 세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1등은 1등이네. 뒤에서 1등.”
“뭐? 야, 내가 너보다 백배는 오래 버텼어, 한 방에 깨진 년이 무슨…….”
“난 한 방은 먹였어. 넌 한 방도 못 먹였잖아.”
“흥!”
“할 말 없으니깐 흥이나 하지.”
“그만, 그만.”
상호는 박수를 짝 쳤다.
“싸우지 말고. 수고했다. 내일은 수업 조금만 하고 쉴 거고…… 다음 주에 수학여행인 거 알고 있지?”
“네!”
“그래. 좀 있으면 재밌게 놀 거니까, 성적이 맘에 안 들어도 너무 꽁해 있지 말고.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그치?”
“네~.”
“내일 보자. 들어가.”
“네!”
아이들이 스탠드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호는 기숙사로 향하는 아이들 중에서 세희를 주시했다. 아직 승부욕을 떨쳐내지 못했을까 싶어서.
하지만 아니었다.
의외로 표정이 밝았다.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상호는 씩 웃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 * *
“이야~.”
리주는 씩 웃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찾았네요. 중선 씨.”
중선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가린 호흡기 때문에.
있는 곳은 병실. 누운 곳은 병상. 누가 봐도 죽을병에 걸린 병자의 몰골로 힘겹게 눈만 뜨고 있었다. 눈동자조차 천장에 고정된 채로.
리주와 그녀의 부하들이 중선의 병상을 둥글게 둘러쌌다.
“이름을 아는데도 사람 찾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거의 한 달이 걸렸네. 그렇게 고생해서 찾아온 만큼…… 우리를 실망시키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리주는 실그러지게 웃으며 손을 비볐다.
“이태화 양 아버님 되시죠?”
중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흰 헌터 협회 소속이에요.”
리주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연구 자료를 태화 양이 들고 가버렸거든요.”
중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화 양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은데. 혹시 뭔가 아시는 게 있을까요? 따님에 대해 뭔가 아시는 게 있지 않나요? 하다못해 우편물이라도 하나 왔을 것 같은데. 아주 작은 단서라도 괜찮아요.”
중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주는 피식 웃고는 중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걸 말을 안 했네. 당연히 오고가는 게 있죠. 우리가 태화 양을 찾는 걸 도와주시면…… 협회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버님을 치료해 드릴게요.”
중선의 눈동자가 리주를 향해 움직였다.
리주는 이때다 싶어 결정타를 날렸다.
“악마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악마의 암은 일반인보다 더욱 치료하기 힘들다. 성력이 안 통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항암치료도 거의 듣지를 않았다. 암세포의 생명력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하지만 때로는 거짓말도 용납되는 법이다. 사람의 목숨이 걸린 거짓말이라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태화 양한테 위해를 가하는 건 아니니까, 부담 없이 말씀하시면 돼요. 뭐 태화 양의 친구나, 학교 선생님이나……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진 않나요? ……응?”
중선의 검지가 까딱였다. 좀 더 가까이 오라는 듯이.
리주는 그 모습을 보고 희열을 삼키며 중선에게 바싹 다가섰다.
호흡기 속에서 중선의 입이 떠듬떠듬 열렸다.
잘 들리지가 않았다.
리주는 중선의 호흡기에 귀를 바싹 붙였다.
“뭐라고 하시는지 잘…….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X까.”
리주의 얼굴이 굳었다.
중선이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살고 싶었으면 이러질 않았지, X팔……. 니들이 딸년을 왜 찾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니들 X되는 거나 저승길 구경거리로 삼을란다. 낄낄낄…….”
고통 때문에 정신이 나갔나. 아니면 술 때문에 치매가 왔나. 리주는 속이 뒤틀렸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시 잘 생각해 보세요. 건강하게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어요. 치료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례도 충분히…….”
“새 삶? 그런 건 없어. 과거를 바꿀 수 있냐? 내가 원하는 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돈으로도 못 사지. 새 삶을 살아 봤자…… 똑같은 고통에 갇혀 지내는 거야. 감옥처럼…….”
중선은 기침을 하며 힘겹게 말을 맺었다.
“지금 바라는 건 하나야. 그냥…… 그냥 빨리 뒈지는 거. 이 고통이 1초라도 빨리 끝나는 거…… 그것뿐이다, 개새끼들아. 끅끅끅…….”
“……그런가요.”
리주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녀는 옆에 선 부하를 돌아보았다.
“시작하죠.”
“네.”
주변의 공기가 한 번 일렁였다.
리주의 다른 부하가 중선의 팔목을 붙잡았다. 손길이 병자를 대하는 것 답지 않게 거칠었다. 꼭 범죄자나, 전쟁 포로, 혹은 그 이하의 무언가를 다루는 듯했다.
중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리주는 중선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리 부서는 정신과 영혼의 한계를 연구해요.”
그리고 뒷짐을 진 채로 중선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이런 일은 우리에겐…… 아주, 아주 익숙하고 능숙한 일이에요. 당신은 내가 본 몇 번째가 될지 궁금하네요. 날 실망시키지 말아요. 당신이 날 어떻게 X으로 만든다는 건지 상당히 흥미가 있으니까…….”
중선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듣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붙잡힌 손목에서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흘러들고 있었다.
리주의 실그러진 눈가와 입가가 더욱더 환하게 구부러졌다.
“췌장부터 터트려.”
180. 운수 나쁜 날
“아~ 좁아~. X부레~.”
뒤에서 태화가 찡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핸들을 돌리며 백미러로 태화를 흘끗했다.
“좀만 참아. 금방 간다.”
“두 시간씩 걸렸었잖아! 그게 금방이야?!”
“인생에 비하면 금방이지. 풍경이나 봐라. 야~ 기찻길이 있네.”
“좁아요…….”
“좁습니더.”
다른 아이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좁을 만도 했다. 11인승 승합차에 15명이 가방까지 들고 타 있었으니까.
맘 같아선 내공으로 차를 들어서 날아가고 싶었지만, 신문 1면에 나올까봐 차마 그러진 못했다.
‘하필 사고가 나냐, 에휴…….’
상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은 수학여행 출발하는 날. 원래대로라면 이 시간에 버스 앞자리에 앉아서 한가하게 경치나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과 발은 쉴 새 없이 페달을 밟고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버스들이 사고가 나는 바람에.
한 대도 아니고 두 대가 사고가 나서는 학교에 오지를 못했고, 어떻게든 남은 버스에 학생을 쑤셔 넣었지만, 그러고도 자리가 부족해서 상호의 반은 상호의 차를 타게 되었다.
덕분에 차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휴게소에서 좀 쉬다 갈까?”
“네…….”
“나 만쥬 사줘.”
“알았어, 알았어.”
상호의 차가 휴게소로 들어섰다.
아직 휴가철이 아니라서 꽤나 한산했다. 다른 버스들과 따로 와서 예현여고 사람들도 없었다. 덕분에 널찍한 주차장에 대충 차를 댈 수 있었다.
그가 운전석에서 내리자 아이들도 따라서 내렸다.
상호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세희에게 내밀었다.
“따로 다니지 말고 뭉쳐 다녀. 괜히 잃어버리지 말고. 일단 화장실부터 다 같이 가. 그다음에 사 먹어.”
“네.”
“야, 휴게소 사자, 휴게소.”
카드를 받은 아이들은 신나게 휴게소로 달려갔다.
* * *
지윤이 통감자를 내밀었다.
“쌤도 드이소.”
“난 됐어.”
상호는 손을 저으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먹을 것을 한아름씩 든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먹고 가면 늦겠네. 가면서 먹어야겠다. 근데 좁다면서 차에서 먹을 수 있겠어?”
“응.”
“가능합니더.”
“그래, 흘리지 말고……, 차에 타.”
아이들이 꽉꽉 들어찬 가방 사이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아이씨, 좁아 죽겠네. 유초란! 너 한번 짜고 들어와.”
“미친 소리 허지 말고 퍼뜩 드가라, 가스나야.”
“다 탔어? 출발할까?”
“네.”
상호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조수석을 차지한 것은 은율이었다. 은율은 들고 있던 봉투에서 호두과자를 하나 꺼내 상호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드세요.”
“응. 땡큐.”
“앗, 지가 드린 감자는 안 드시더니…….”
“은율이 꼭 선생님 아내 같애~ 헤헤.”
나빛의 말에 상호와 은율의 볼이 붉어졌다.
그때 제일 뒤쪽에 있는 줄이 소란스러워졌다.
“앗…….”
“선생님, 휴지 있으세요?”
“휴지?”
“음식이 떨어져서…… 꺅!”
별안간 세희가 비명을 질렀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아이인데. 상호는 당황하며 백미러를 확인했다.
“뭐야. 왜 그래?”
“그, 그게…….”
흐려지는 세희의 목소리를 뚫고 단비가 천연덕스레 말했다.
“언니 떨어진 거 못 먹어?”
상호는 사태를 파악하고 할 말을 잃었다.
“맛있다, 멍. 언니도 먹을래?”
“아니, 난 됐어…….”
“아리는? 이서는?”
“괜찮아…….”
“배불러.”
“이상하다, 맛있는데……. 멍.”
약간 조용해진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 * *
“으음…….”
태화가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수련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피비린내가 나네.”
“엑, 냄새 나?”
“그거 말고, 멍청아.”
“헤헤…….”
나빛이 멋쩍게 웃었다.
팔짱을 끼고 분위기를 잡는 태화의 곁에 세희와 지윤이 다가섰다. 그 둘도 마찬가지로 팔짱을 끼고 무거운 표정으로 수련원을 쳐다보았다.
“그땐 죽을 뻔했지.”
“윽수로 고생했제. 잠도 못 자고…….”
상호는 그 말을 듣고 진땀을 흘렸다. 잠을 못 잔 건 자기들이 노느라 그랬던 거면서.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1학년과 유학생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우리 못 놀아?”
“빡세?”
“수련회가 장난이야? 놀러온 줄 알아? 앙?!”
태화가 양 허리에 손을 얹고 호통을 쳤다.
“다 가방 까! 어쭈, 옷을 들고 와? 옷 갈아입을 시간이 있을 것 같아?! 다 벗어! 읍!”
“조용히 하고 들어가. 늦었다.”
상호는 아이들을 입구로 몰아붙였다.
중간중간 자주 쉬면서 온 탓에 다른 반보다 많이 늦었다. 강당에 들어가 보니 짐 검사가 끝나가는 참이었다.
아이들은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뭐 이상한 거 가져오진 않았지?”
상호의 물음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사하고 소개하고 일정 알려주고. 곧 아이들이 짐을 풀러 갈 시간이 되었다.
그는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방 정해 준 대로 가. 괜히 또 섞지 말고.”
일부러 2학년과 1학년을 섞어 놨다. 한쪽만 조용하거나 시끄러워지지 않도록.
첫 번째 방은 세희, 지윤, 나디아, 가은, 단비, 초란, 아리.
두 번째 방은 태화, 나빛, 은율, 이츠키, 이서, 하솔, 미래.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리하고 밥 먹으러 갈 거야. 방에서 쉬고 있어. 선생님이 데리러 갈 테니까.”
“네.”
아이들은 그렇게 대답한 후 강당을 나섰고, 상호도 짐을 풀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주 선생님이랑 같은 방인가?’
위계 따위 따지지 않는 사람이라 좋은데. 상호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엥?’
배치도가 안 왔다.
누군가가 실수로 빠뜨린 걸까. 귀찮게 방까지 가서 일일이 확인해야 하나. 상호는 한숨을 쉬며 복도를 걸었다.
방마다 멈춰 서서 확인해도 도통 자신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짜증이 나서 머리를 벅벅 긁는데, 복도를 지나던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강 선생?”
뒤를 돌아보니 건흠이 서 있었다.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주 선생님.”
“교장선생님이 찾던데, 갔다 왔나?”
“네? 교장선생님이요?”
“몰랐어? 엄청 찾으시던데.”
전혀 몰랐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시고요?”
“응. 꽤 급하신 것 같아. 일단 짐 풀기 전에 먼저 가 봐.”
“예, 감사합니다.”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해련이 묵는 방을 향했다.
머잖아 문 앞의 종이에 해련이라고 적힌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 강상호입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글자를 잘못 읽었나. 상호는 고개를 기웃하며 종이를 다시 읽었다.
“……뭐여, X벌.”
이해련.
강상호.
종이에는 그 두 단어가 함께 적혀 있었다.
‘제정신인가?’
그럴 리가 없다. 상호는 고민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하! 노망이 났구나!’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상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사람이 살다 보면 노망이 날 수도 있는 거지 뭐. 주 선생님 방이나 가야겠…….’
복도에 해련이 서 있었다.
“……콜록!”
“어디 가요?”
해련이 화사하게 웃었다.
“강 선생 방은 여긴데.”
“아니…….”
상호는 사레 든 가슴을 두드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진짜로 여기서 같이 자자고요?”
“안될 거 있나? 아들뻘이잖아~.”
“손자뻘이겠죠……. 아무리 그래도, 애들이 돌아다니는 곳인데……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
“어머? 문 열고 지낼 거야?”
“그걸 보여준다는 게 아니라!”
상호가 뒷목을 잡자 해련이 쿡쿡 웃으며 그의 가방을 잡았다.
“괜찮아~. 종이는 갈아끼우면 돼.”
“제가 들락날락하는 걸 애들이 보잖아요!”
“어머? 들락날락하는 걸 애들이 왜 봐? 밤에 문 닫고 할 건데.”
“아니…… 이사장님! 이사장님 어디 있어요!”
“이사장은 저녁에 잠깐 들렀다 갈 거야~.”
“하아…….”
상호는 방으로 질질 끌려들어가며 마음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 * *
“얘들아, 밥 먹으러 가자…….”
“꺄하하…… 앗! 선생님 오셨다! 선생님! ……어라?”
현관에 선 미래가 눈을 깜작였다. 손에는 베개를 들고 있었다.
“몬스터 잡고 오셨어요?”
“아니. 그냥 조금…… 실랑이를 조금 했지.”
실랑이라기보다는 드잡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상호는 다 구겨진 양복을 손으로 털었다. 해련에게 붙잡혀 이불을 굴러다닌 탓에 완전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짐 다 풀었지? 밥 먹으러 가자.”
“네. 얘들아, 언니~.”
미래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옆방 아이들도 불러야겠다. 상호는 구겨진 양복을 억지로 펴며 현관을 나섰다.
* * *
점심을 먹은 후에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강당에 모였다.
상호는 강당의 단상을 바라보며 작년의 기억을 떠올렸다. 효은이 수많은 성창을 만들며 했던 강연.
평범한 헌터는 필요 없으니, 향상심을 가져라.
악마가 깨어날 그 날을 위해서.
‘아이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기다렸다. 오늘은 어떤 강사가 어떤 강연을 할까.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강사가 올라오질 않았다.
‘뭐지?’
아이들도 술렁이기 시작하던 때, 단상으로 해련이 훌쩍 뛰어올라왔다.
옆에서 1학년 아이들이 소곤거렸다.
“교장선생님이 강연하시려나 봐.”
“왕년에는 한 가닥 하셨대.”
“지금은 저렇게 인자해 보여도 옛날에는 엄청 근엄하셨다던데……. 아, 나도 교장선생님처럼 되고 싶다…….”
상호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그러면 안 된다, 얘들아…….’
단상에 선 해련은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아아, 으흠. 여러분, 오늘 오기로 한 강사분이 급한 사정이 생겨서 오시지 못하게 됐어요.”
또 사고인가. 버스도 그러더니 강사까지.
상호는 잠자코 해련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선생님들 중 한 분을 뽑아서 강연을 시키기로 했어요. 공평하게 제비로. 그래서 나온 결과가…….”
전혀 공평하지 않을 것 같다. 상호는 불안한 눈으로 해련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에……, 보자. 강…… 강…… 강상호? 강 선생! 나오세요~.”
“앗, 우리 쌤이다!”
“선생님!”
아이들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까라면 까야지 어쩌랴. 상호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꺅! 강쌤!”
“우! 윳! 빛! 깔! 상! 호! 쌤!”
얼굴이 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았다.
상호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수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일시에 환성을 질렀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보니 해련이 웃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미안. 밤에 갚을게.”
“안 갚는 게 갚는 거예요.”
“그래도 못할 짓을 시키는 건 아니잖아? 강 선생은 자격이 있으니까. 자, 받아요.”
상호는 해련이 내민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아, 아.”
“꺄아아악!”
마이크에 시험 삼아 소리를 내자 아이들이 자지러졌다.
“노래해! 노래해!”
“여보오오오!”
그냥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으흠…….”
그래도 헛기침을 두어 번 하니 조용해지긴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본교에 2년차 재직 중인 교사 강상홉니다.”
“선생님~.”
아이들 사이에서 나빛이 손을 흔들었다.
“……음. 다들 알다시피 나는 B급이고, 교직에도 오래 있어보지 않아서 여러분 모두에게 해줄 말은 없어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고.”
“거짓말! 맨날 잔소리만 하잖아!”
“대신에 선생으로서 해줄 말은 있어요. 교사가 아니라 인생 선배로서.”
상호는 안대를 들췄다.
“여러분은 다치면 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죠.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고질병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요.”
정확히는 눈이 아니라 다리가 그렇지만, 다리의 상태를 보여줄 순 없으니.
아이들은 조용히 들었다. 간혹 수다를 떨던 아이들도 그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이것처럼 세상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과거를 바꿀 순 없고…… 아무리 원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허다해요. 돈이 있어도, 힘이 있어도. 그 어떤 권력이 있어도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순 없어요.”
그는 예경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살다 보면 세상이 희생을 강요하는 때가 옵니다. 가족과 직장의 충돌이든, 건강과 일의 충돌이든……. 때로는 나를 제외한 세상 모두가, 오직 나한테만 부당한 희생을 강요할 때도 있어요. 그리고 그 희생은 대부분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죠.”
다리가 조금씩 욱신거렸다.
“만약 그런 일에 부딪혔을 땐…… 이걸 기억하세요. 강요하는 자들을 위해서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거.”
미련한 짓이다.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낫다.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해야 하는 운명이라면.
만약 알고 있었다면, 분명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을 것이다.
“헌터는 희생정신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나도 여러분도, 헌터이기 이전에 한 개인일 뿐이죠. 세상에 너무 잡혀 살지 마세요. 결국 여러분 스스로의 삶이니까.”
상호는 마이크를 든 손을 내리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이들이 말없이 박수를 쳤다.
그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해련이 뒤를 따르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강 선생, 헌터답지 않네.”
“헌터다운 게 뭔데요?”
“사람을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거?”
“그럼 지금은 헌터가 아닌 거죠. 한낱 교사일 뿐이죠.”
“흐흠.”
해련은 피식 웃고 상호의 등을 두드렸다.
“어쨌든 고생했어요. 갑자기 시켜서 놀랐을 텐데. 역시 밤에 상을 줘야겠는걸. 들락날락 시켜 줄까? 응?”
“미친 소리 하지 마세요. 방음도 안 되는 방에서…….”
“에이, 강 선생도 들락날락하고 싶잖아?”
“그런 놈 아닙니다.”
“그래? 흐음……. 뭐 밤에 보면 알겠지.”
“에휴…….”
상호는 한숨을 쉬고 터덜터덜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181. 누가 이기나 해 봐
“밤에 같이 노실 거죠?”
나빛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지으며 물었다.
숟가락을 든 상호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
“아니.”
“어, 왜요? 같이 놀려고 보드게임도 가져왔는데…….”
“1학년 애들 있잖아…….”
“저희도 그때 1학년이었는데요?”
“대신 그때는 나도 한 살 젊었지.”
“에이~.”
나빛이 방긋 웃었다.
“와서 같이 놀아주세요. 헤헤…….”
고작 한 살 더 먹었다고 애들이랑 놀기가 힘들다. 상호는 밥을 우물거리며 나빛의 눈길을 피했다.
“……상황 봐서.”
수련원의 밥은 그럭저럭 맛은 좋았지만 양이 적었다. 어느새 밥을 다 먹은 지윤이 주변 아이들의 식판을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다.
상호도 밥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쉬고 시간 맞춰서 강당 가.”
“네.”
수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식당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