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
상호는 소파에 누워 한숨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속으로 묵혀서 짙디짙어진 한숨을.
머리맡에서 해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나던데. 괜찮은 거죠?”
“아, 미래요……. 괜찮아요, 고무탄이에요.”
“아니, 또 무슨 잘못을 했길래 애들이 그러냐고.”
“수업이에요, 수업…….”
그는 팔로 눈을 가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교무실까지 쫓아와서 총을 쏘질 않나, 교과서 귀퉁이에 부적을 숨겨놓질 않나. 뒤에서 냅다 달려와서 칼빵을 놓는 건 예사고, 앞에서 방긋 웃다가 갑자기 정강이를 걷어차는 건 애교에 불과했다.
그래서 결국은 추적을 피해 남자 화장실 창문에서 뛰어내렸고.
교장실 창문으로 기어들어 와 이렇게 소파에 누운 참이었다.
“힘드네요, 교사란 거…….”
“강 선생은 고생을 사서 하는 스타일이잖아? 아닌가?”
“근데 또 이런 방식이 확실히 도움은 되니까…….”
“그러니까 1등반인 거겠죠.”
해련이 키득거리며 상호의 머리를 쓸었다.
“안마라도 해 줄까요? 임 선생이 그러던데. 강 선생 안마 엄청 잘한다고. 서로 해주기 어때요?”
“안마요?”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살짝 솔깃한 이야기였다. 요즘 피곤하고, 누구한테 받을 기회도 없다시피 하고.
“그럼 잠깐만 해 주세요.”
“웃옷 벗고 돌아누워 봐요.”
상호는 그 말대로 했다.
해련도 재킷을 벗더니 상호의 등에 올라탔다. 엉덩이가 등허리를 누르자 상호의 입에서 당황성이 튀어나왔다.
“이 자세로 하시게요? 누가 오기라도 하면…….”
“그럼 어떡해. 머리 쪽에 앉을까? 아니면 다시 돌아누울래요?”
“……아뇨. 감사합니다.”
그는 포기하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작은 손이 야무지게 등을 꾹꾹 눌렀다. 절정에 달한 무예가다 보니 근육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평범한 안마보다 훨씬 시원했다.
상호는 해련이 누르기 쉽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조금만 하고 일어나세요. 저도 해 드릴 테니까.”
“응, 좀 더 하고.”
해련의 손에서 내공이 흘러들어왔다.
이형의 성질을 가진 내공. 해련이 마음만 먹으면 상호에게 극심한 내상을 입힐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리란 걸 상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체내로 해련의 내공이 흘러들어도 막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깊은 곳까지 허락해도 괜찮겠어요?”
해련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더 들어가면 큰일날 것 같은데.”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그러지 못할 것이다. 상호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눈을 감았다.
해련은 키득거리며 상호의 혈도를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됐다. 슬슬 교대할까요?”
“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이번엔 해련이 소파에 드러누웠다. 상호는 별생각 없이 해련의 등에 올라타려다가 흠칫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앉으셔야죠.”
“삼.”
“네?”
“이.”
“……실례하겠습니다.”
상호는 해련의 등에 올라탔다.
좁은 등에 엉덩이를 얹자 해련이 몸을 꿈틀거렸다.
“어우, 안마 받다가 허리 부러지겠네. 밑으로 좀 내려가요.”
“네? 밑은…….”
“일.”
“아니, 일이고 자시고가 아니라! 엉덩이잖아요!”
“뭐 어때. 옷 다 입고 있는데. 일일이 신경쓰지 마요.”
“하…….”
결국 상호는 해련의 엉덩이에 앉았다.
자세가 민망했다. 신체적 특징 때문에. 그래도 해련의 말대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답이었다.
그가 어깨에 손을 올리자 해련이 몸을 꾸물거렸다.
“아이고~ 시원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응? 엉덩이 쪽에 누르고 있는 거 아냐?”
“……절대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난 또, 묵직~한 게 누르고 있길래 뭔가 했지.”
“핸드폰이겠죠.”
상호는 딱 잘라 일축하고 안마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잔근육이 적고 부드러웠다. 여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애먼 곳에 군살이 붙기 마련인데, 해련의 몸은 가늘어야 할 곳은 가늘고 쪄야 할 곳은 쪄 있었다.
다만 상호에게는 그런 요소들이 매력으로서 다가오는 게 아니라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몸이 더 젊어지신 것 같은데요.”
“그렇지? 슬슬 혼기가 찼지?”
“……교장선생님은 혼기가 비어가시는 거죠.”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손에 내공을 집중시켰다.
“넣을게요.”
그 말을 하자마자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상호는 그 즉시 손을 멈추고 사방에 귀를 기울였다.
교장실 문 너머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나 본데요.”
“에이, 지나가는 거겠지. 계속해요.”
“그럼…… 들어갑니다.”
상호는 해련의 체내에 내공을 흘려보냈다.
해련도 그의 내공을 막지 않았다.
“아이구…… 좋다……. 더 깊이 넣어 봐요.”
“더요? 아플 텐데요.”
“원래 그런 건데 뭐 어때요. 좀 아파도 참는 거지.”
안마는 원래 아픈 게 맞긴 하다. 상호의 내공이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해련의 허리가 뒤로 확 휘었다.
“으……!”
상호는 깜짝 놀라 내공을 거뒀다.
“괜찮아요? 그러게 아프다니까요!”
“아이, 괜찮다니까……. 다시 넣어 봐요.”
“에휴…….”
늙은이 고집이 쇠심줄처럼 질기다. 상호가 다시 내공을 넣자 해련이 흐흐 웃었다.
“들락날락하니까 기분 묘하네. 좀 더 움직여 봐요.”
“네? 뭔 소리예요. 방금도 다칠까봐 엄청 살살 했던 건데……, 안 돼요.”
“괜찮으니까 넣었다 뺐다 해 봐요.”
“아오……, 알았어요. 긴장 푸세…….”
그때 교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상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
하솔이 문가에 오도카니 서서 그와 해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벼락을 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상호는 황급히 해련의 등에서 일어났다.
“하, 하솔아……?”
여기로 도망쳤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민망한 꼴을 보여 버렸다. 상호의 얼굴에 진땀이 폭포처럼 흘렀다.
“교장선생님 방엔 노크하고 들어와야지…….”
하솔은 굳어버린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교장의 등에 올라타 안마를 하는 것이 부끄럽긴 해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닌데.
무언가 더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하솔아?”
상호가 이름을 부르자 하솔은 몸을 흠칫 떨더니, 황망히 복도로 뛰쳐나가 문을 부서져라 닫아 버렸다.
상호는 닫힌 문을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왜 저렇게 유난한 반응이 나오는 건지.
그런 그의 귀에 해련의 신음이 들려왔다.
“으…….”
상호는 깜짝 놀라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해련이 울먹이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강 선생…….”
“뭐예요, 괜찮아요? 왜 그래요?”
“혈을 다쳤나 봐…….”
“네?”
그는 깜짝 놀라 해련의 블라우스 옷깃 뒤를 잡아당겼다. 예의니 체면이니 하는 것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얀 등에 울긋불긋하게 피멍이 올라온 게 보였다.
‘조졌다…….’
상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163. 책임져
“죄송합니다…….”
상호는 얼음주머니를 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곳은 교장실에 붙어 있는 해련의 개인 방. 상호의 앞에는 해련이 웃통을 벗은 채로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온몸에 불그죽죽하던 멍이 슬슬 푸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해련의 입에서 한숨이 푹푹 쏟아졌다.
“큰일났네. 일이 쌓여 있는데…….”
“죄송합니다…….”
용서를 비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상호는 얼음주머니로 해련의 등을 눌렀다.
해련이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야야……. 너무 아픈데, 이거…….”
“신앙인 데려올까요?”
“혈도는 못 고치잖아요. 데려와 봤자인걸.”
암도 고치는 신앙인이지만 내공이 흐르는 혈은 못 고친다. 스스로의 내공으로 다스리며 자연히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단전까지 다치지는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래도 멍은 좀 고칠 수 있잖아요.”
“데려오면 뭐라고 하게. 강 선생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까? 됐고 속옷이나 끌러 봐요.”
“속옷은 또 왜요?”
“조여서 아파.”
그 정도인가. 하긴 온몸의 혈도가 작살날 뻔했으니 가만히 있어도 아플 것이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해련의 속옷을 끌렀다.
매끈하지만 멍이 든 등이 드러났다.
‘아이고…….’
고운 피부에 시퍼런 멍. 미려한 곡선 사이의 그 흠이 절로 안타까운 마음을 들게 했다.
“죄송합니다…….”
“됐다니까. 나도 잘못했지 뭐. 일으켜 줘요.”
상호는 해련의 어깨를 살살 잡아 일으켰다.
해련은 침대에 걸터앉아 블라우스를 입으려 했지만, 소매에 팔을 넣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아야야…….”
“입혀 드릴까요?”
“그래야겠네. 팔이 너무 아파…….”
그는 해련의 뒤에 앉아 블라우스를 입히기 시작했다.
단추를 잠글 때 언뜻언뜻 속이 들여다보였지만, 상호는 딱히 시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환자를 다루는 것은 헌터에겐 아주 흔한 일이었기에.
옷을 입히자 해련이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이구야…… 아파라…….”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난색을 지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누워서 쉬는 게 낫지 않아요?”
“일은 해야지 뭐 어떡해.”
해련은 손을 휘휘 내젓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가벼운 손짓마저도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강 선생도 수업해야죠. 가서 일 봐요.”
그 말이 맞았다. 아직 일과가 끝나지 않았다.
상호는 문가로 걸어가서 문고리를 잡고 해련을 돌아보았다.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 마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입은 웃지만 눈썹은 역팔자로 휘어져 있었다.
“그리고 방과 후에는 교장실로 와요.”
“……넵.”
상호는 감히 따질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 * *
“무슨 고민 있으세요?”
세희가 그의 곁에 다가서며 물었다.
상호는 등허리에 찔러 들어오는 검을 톡 쳐내며 한숨을 쉬었다.
‘고민은 항상 많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별거 아냐.”
“방금도 한숨 쉬셨잖아요.”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시간이…….”
둘은 대련 중인 아이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보니 뒤에서 태화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야, 천세희. 네가 비켜야 우리가 공격할 거 아냐.”
“공격 중이야.”
“X랄마! 빨리 나와.”
“공격하는 중이라고. 네가 무예가의 보이지 않는 수싸움을 알아?”
세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상호는 알 수 있었다. 세희는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 중이라는 걸.
다른 아이들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자기 차례라고 우기며 기회를 엿보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너밖에 없다…….’
상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세희야.”
“네?”
“고마워…….”
그 말에 세희가 빙긋 웃었다.
“저도요.”
그리고 상호의 복부를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켁!’
상호는 질겁하며 손으로 검의 옆면을 쳐냈다. 설마 기습을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하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슈슉!”
누군가가 상호의 등에 칼을 휘둘렀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쌍칼.
공격이 이상하게 느렸다. 그래서 여유롭게 피하기는 했지만, 워낙 놀란 와중에 이런 허접한 공격을 받으니 오히려 더 정신이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얼이 빠져 버렸다.
“……뭐 하냐?”
“슉!”
태화가 쌍칼을 휘둘렀다. 입으로 효과음을 내며.
“슉! 슈슉! ……에이, 안 먹히네. 좀 꼬아서 하면 먹힐까 싶었더니만…….”
“꼬아도 임마. 칼 한번 써본 적 없으면서 그거를 갖다가…….”
“슉! 슈슉! 슉!”
“에휴…….”
상호는 한숨을 쉬며 태화의 쌍검을 막았다.
* * *
“……은율이.”
상호는 책상 앞에 앉아 면담기록부를 뒤적였다.
“만난진 오래됐는데, 아는 건 별로 없네.”
은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가은을 피해 옥상에서 면담을 했겠지만, 오늘은 빨리 교장실에 가봐야 해서 교실에 남았다. 상호는 은율과 눈을 마주쳤다.
세희와 비슷한 분위기. 세희에게서 특유의 독기를 빼면 이렇게 될 것 같았다.
세희에게 부모가 있었다면 꼭 이렇게 자라지 않았을까.
“은율이는 집에서 검술 배운 거지?”
“네.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어요.”
“그럼 은율이 넌 이미 검으로 정해져 있었던 거네? 마법이나 주술 같은 건 고려해 본 적도 없겠네?”
그 질문에 은율이 당황했다.
“네. 그래도…… 전 검이 좋아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너한테 확신이 있는지 궁금해서……. 그러면 검이 왜 좋은 거야? 그냥 잘 다뤄서?”
“그것뿐이면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
상호는 옛일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선생님도 그냥 스승님 따라서 검 쓴 거였거든. 그땐 스승을 찾는 거 자체가 힘들어서…… 스승이 칼 쓰면 따라서 칼 쓰고. 창 쓰면 따라서 창 쓰고. 그런 식이었지.”
은율의 눈이 반짝였다.
“선생님 스승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묻는 것도 어쩜 이리 똑같은지.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지금 말하기는 좀 그렇고……. 어쨌든 간에.”
이 질문은 안 할 수가 없다. 상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잘 지내?”
그 질문의 속뜻을 알아차렸을까. 은율의 눈빛이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1년 동안.”
고운 입술에서 말이 토막토막 힘겹게 잘려 나왔다.
“……심장이 가만히 있던 날이 없어요. 항상, 항상…… 그 일이 끝난 후에도. 그…… 그 사람이 다시 올까 봐. 교실 문이 열릴 때마다. 남자가 걷는 것만 봐도…… 심장이 아팠어요.”
상호는 당황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 말은 자신이 교실에 들어올 때마다 힘들었다는 이야기일까.
은율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금도, 교실에, 남는 게…… 무서워요.”
“으음…….”
상호는 침음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은율에게는 피하고 싶을 상황일 터였다. 방과 후 교실에 남선생과 단둘이 남는 건.
“은율아.”
“……네.”
“면담은…… 내일 점심시간에 할까? 그게 낫겠지?”
“아니요.”
은율이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은 괜찮아요.”
“……그래?”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럼 면담…… 계속할게.”
“네.”
은율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옛 기억을 떠올려서 힘들어져도, 스스로 감정을 잘 제어할 수 있는 듯했다.
상호는 은율의 말을 잠시 곱씹다가 물었다.
“남자를 보면 무서운 거야?”
“네.”
“아무 남자나? 나이나 체형 같은 거 상관없이?”
“네, 전부……요.”
“……으음. 근데 선생님은 괜찮다 이거지?”
“네.”
“다행인…… 건가?”
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다행이네.”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며 웃지만, 머릿속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다행인 거…… 맞나?’
왜 이렇게 불안한 느낌이 드는지.
상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은율의 눈빛이 세희와 닮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러면, 선생님이랑…… 잘 지내보자.”
“네.”
웃는 모습은, 조금 더 은은하고 여렸다.
* * *
“늦었네요.”
해련이 빙긋 웃었다.
“도망치려다 포기했나 봐요?”
“면담하느라 늦었습니다.”
“아하.”
해련은 자리에 정자세로 앉아 꿈쩍도 못 하고 있었다.
상호가 곁으로 다가가자 고개는 그대로고 눈동자만이 따라왔다. 목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강 선생이랑 면담을 좀 해야겠는데.”
“죄송합니다…….”
“그걸 따지려는 건 아니고. 현실적인 문제를 좀 해결해야지.”
해련이 로봇처럼 상체를 가만히 둔 채로 일어났다.
“당분간 수발을 좀 들어야겠는데, 강 선생.”
“……네.”
다치게 만들었는데 어쩌랴. 하는 수밖에.
상호는 해련의 책상을 정리하고 해련에게 양복 재킷을 입혀 주었다.
“집까지 모셔다드릴까요?”
“응? 아니. 내 방으로 가야지. 여교사 숙소에.”
“네? 가족분들한테 병간호…… 받으셔야…….”
“강 선생이 벌인 일을 왜 우리 아들이 책임져?”
“그 말이 맞긴 한데……, 아니, 네? 그럼 제가 책임져요?”
“그럼 어쩌려고?”
해련이 상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호는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등을 부딪혔다.
해련의 무릎이 상호의 왼쪽 허벅다리를 문질렀다.
“책임 안 지게? 일 벌려놓고 나몰라라 도망칠 거야?”
“아니 그렇다고…… 지금 옷도 혼자 못 갈아입으시잖아요.”
“그렇지.”
“그걸 저보고 하라고요?”
“그럼 어떡해? 잘못 없는 사람을 고생시켜?”
해련이 눈을 치켜떴다.
“씻기도 해야 하는데, 아들보고 씻겨달라 할 수도 없고. 며느리한테 시킬까? 낼모레 할머니가 되는 며느리한테? 아니면 손녀한테?”
“그렇다고 제가 할 수는…….”
“왜 이래, 군인끼리.”
상호의 얼굴에 해련의 숨결이 닿았다.
“군인이 도망치면 돼, 안 돼?”
“……안 되죠.”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말대로 도망칠 수 없었다.
군인이라서가 아니라 절름발이라서였지만.
“그렇다고 제가 씻겨 드릴 수는…….”
“손이 없어?”
“체면은 있으세요?”
“어머? 지금 말대꾸하는 거야?”
해련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웃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아니, 낮에는 서로 잘못한 거라고 하시지 않았…….”
“그땐 그때고.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 앉아 있으니까 너~무 아프더라고.”
“……알았어요.”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해련의 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가요. 교장선생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