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야, 야, 지윤. 이거 봐봐.”
태화가 은율의 흉부를 손으로 받치며 낄낄거렸다. 터질 듯한 교복 아래에는 방금 산 빵이 들어 있었다.
“개빵빵해.”
“이야, 이게 뽕이고 빵이고?”
“뽕뽕빵빵~.”
“그만해.”
세희는 빨대에서 입을 떼며 핀잔을 날렸다.
쉬는 시간의 매점. 주변에는 다른 반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몰려드는 시선만큼 은율의 얼굴도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은율은 태화와 지윤의 제일 좋은 장난감이었다.
“태화 넌 진짜…… 선생님한테 언제 한번 제대로 혼날 거야.”
“안 걸리면 되지. 헹~.”
“장난을 칠 거면 네 몸에다 해. 왜 맨날 남한테 그러는데?”
“난 이미 빵빵해서 안 들어가.”
태화는 은율의 옷에서 빵을 빼고는 세희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면 너도 가슴 펴고 다닐 수 있어. 어디서나 당당하게…….”
“꺼져.”
세희는 혀를 차고 돌아섰다.
그때 매점 한구석에 다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다혜는 이미 다 팔리고 딱 하나 남은 크림빵 앞에 오도카니 서서 우물쭈물해하고 있었다. 손에 든 지갑을 흘끔거리며.
꼭 지갑에게 호통을 듣는 듯이, 지갑의 눈치를 보는 듯이.
“아으…….”
그래도 배가 고픈 건 못 참았을까. 다혜는 고민 끝에 빵을 집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빵을 낚아채 갔다.
“계산이요.”
그 빵을 빼앗은 학생은 뻔뻔한 표정으로 계산대에 빵을 올려놓았다.
옆에 친구로 보이는 학생이 다혜를 힐끔거렸다.
“야, 이거 맞냐?”
“뭐 어때. 글도 못 쓰는 벙어린데.”
빵을 뺏은 학생이 코웃음을 쳤다.
“주쌤한테 이르지도 못할걸. 애초에 지네 반에서도 왕따야.”
“그래? 하긴 뭐, 그렇게 생겼네.”
계산을 마친 학생들은 유유히 매점을 나갔다.
얼굴이 익숙하지만 시험 때는 본 적이 없다. 세희는 그 학생들이 3학년일 거라고 생각했다.
‘쓰레기들이네…….’
세희의 시선이 다혜를 향했다.
다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텅 빈 진열대를 쳐다보다가, 아까 상호의 반을 떠날 때보다 더 힘없는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매점을 나갔다.
세희는 그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157. 답답한 가슴
“염주.”
이츠키가 눈을 감았다.
상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목에 염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미안.”
“괜찮습니다. 제가 이상한 거니까.”
“아니, 말했는데 못 지키는 놈이 멍청한 거지.”
그가 소매 안으로 염주를 집어넣자 이츠키가 다시 눈을 떴다.
웃음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표정한 눈.
반대로 고양이처럼 실그러지게 올라간 입꼬리.
웃는 듯 보이면서도 전혀 웃는 것 같지 않은, 그런 기묘한 인상의 아이.
상호는 면담기록부를 펴며 물었다.
“사카시타도 헌터가 꿈인 거지?”
“그렇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가서 헌터가 되려는 거야?”
“일단은 그렇습니다.”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이란 말이 약간 신경 쓰였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상호는 계속 단순한, 그러나 필요한 질문들을 던졌다.
“주술을 더 배우고 싶지는 않아?”
“주술 쪽으로는 자신이 있어서, 딱히 더 배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여기 와서 힘든 건 없었어?”
“없었습니다. 세희가 잘 챙겨줘서.”
“뭔가…… 문화가 다르니까 힘든 게 있었을 거 아냐.”
“그런 건 선생님이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해결도 못하잖습니까.”
“그런……가?”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뭐…… 털어놓으면 편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재미도 있고…… 그렇지 않을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하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양이 저한테 쪽바리라고 했습니다.”
“……뭐?”
상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네 앞에서? 너한테?”
“농담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하아…….”
순간 속아 넘어가 버렸다. 태화라면 진짜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제자를 의심하는 못난 스승이라. 상호는 붉어지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태화한테 말하지 마.”
“그 말을 들으니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제발…….”
“농담입니다.”
이츠키의 입꼬리 한쪽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세희한테는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끄응, 알아서 해……. 어쨌든 사카시타.”
“네.”
“부모님은 어떤 일 하셔?”
“두 분 다 헌터 일 하십니다.”
일본은 아르게스에게 관통당해서 몬스터의 습격도 잦았고, 헌터의 비율도 높았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시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다행이네. 걱정할 필요 없어서.”
걱정이 없다는 건 알겠고. 다음은 전투에 관해서 물을 차례.
입학한 지는 한 달도 안 됐지만, 학년은 1학년이 아니다. 이츠키는 2학년과 경쟁해야 했고, 상호도 이츠키가 싸우는 방법에 대한 이해도를 그만큼 끌어올려야 했다. 그가 세희, 태화, 나빛, 지윤을 이해하는 만큼.
“사카시타. 부적을 쓰지?”
“네.”
“부적을 쓰는 이유가 있어? 평범한 주술사들은 안 쓰는 것 같은데…….”
이츠키가 검을 뽑았다.
검에는 붉은 글씨가 적힌 노란 부적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주술은 어려울수록 강해집니다.”
“그건 알지.”
“즉 어렵게 부적을 만들고, 굳이 부적을 던져서, 힘들게 상대를 맞출수록 주술의 효과는 강해집니다. 이미 정해놓은 주술만 쓸 수 있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이츠키는 부적 하나를 떼어 흔들었다.
“그래도 부적 없이 주술을 쓰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강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싸우는 도중에도 마음이 쉽게 흐트러집니다. 그러면 또 주술이 약해지는 겁니다.”
“으음…….”
상호는 그 부적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요는 맞추기 어려워서 강하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이상하게 들린다는 건 저도 압니다만.”
“그럼 네가 부적을 잘 맞추게 될수록…… 주술도 약해진다는 뜻이야?”
“그렇게 될 겁니다.”
“어렵네.”
부적을 잘 맞추게 되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소리다. 상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검술을 배우려고 하는가 보구나.”
“그렇습니다.”
“일본에도 심법 있지? 심법 이름이 뭐야?”
“히텐카미…… 근데 말해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중요하지 않더라도 알고 싶어서 그래. 하루이틀 볼 사이가 아니잖아.”
“저에 대해서 알고 싶으시다는 겁니까?”
“그러려고 면담하는 거지…….”
“그럼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츠키가 그의 이마에 부적을 착 붙였다.
‘……으음.’
상호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근육은 움직일 수 없어도 내공은 운용할 수 있는 상태. 허공섭물을 쓰면 이마에 붙은 부적을 떼어낼 수 있겠지만, 상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이츠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선생님만 저를 아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게 뭔 소리냐고 입을 열어 묻고 싶지만, 말은 내공으로 지어낼 수가 없었다.
“저도 선생님을 좀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이츠키가 상호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다하다 이젠 제자에게까지 추행을 당하는구나. 상호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성진국이라더니 이게 문화 차이인가.
“농담입니다만.”
이츠키는 단추에서 손을 거두고 상호의 안대를 들어 올렸다.
세로로 긴 흉터와 혼탁한 눈동자.
“이게 조금 궁금했을 뿐입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꺼풀을 쓸었다. 상호는 옴짝달싹도 못 하고 그 손길에 눈을 맡겼다.
‘손끝이 차네…….’
손은 조금 더 흉터를 어루만지더니 얼마 안 가 떨어졌다.
돌연 이츠키가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
“다리도 좀 보겠습니다.”
다리는 안 되는데. 상호는 당황해서 내공을 뻗으려 했다.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끼익……
상호와 가은의 눈이 마주쳤다.
유독 흰자위가 많아 무서워 보이는 가은의 눈이 상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내쏘며.
“지금 뭐 하시는…….”
상호는 눈동자만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릎을 꿇은 이츠키가 그의 구두를 벗기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변명거리가 없다. 애초에 말을 못 하는 상태지만.
가은은 경멸이 가득한 시선으로 상호를 꼬나보더니.
“신고할게요.”
그 말을 남기고 쌩하니 나가 버렸다.
이츠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잘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가은의 뒤를 따랐다.
상호는 여전히 이마에 붙어 있는 부적을 올려다보며 진땀을 흘렸다.
‘이건 안 떼주는 거야……?’
그 이후로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츠키는 돌아오지 않았다.
* * *
이쯤 되면 고의다.
한두 번도 아니고 면담 때마다 찾아와서 오해받기 딱 좋은 순간을 포착한다.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했다.
‘애초에 오해받을 짓을 안 하면 되겠지만…….’
또 한숨이 나온다. 상호는 교무실 책상에 기록부를 던지듯 올려놓았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남은 2학년 면담 때마다 가은의 매서운 눈빛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아마 손을 잡을 일도 많아질 텐데.
‘면담을 몰래 할까? 좀 한적한 곳에서…….’
그러다가 들키면 더 위험해진다는 것을 모른 채, 상호는 중독 치료에 관한 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환자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서 잊게 만드는 것이 좋다……, 외로움에 빠질 때가 제일 취약……. 갑자기 끊을 경우 금단증상이 심해져 환자의 치료 의지가 꺾일 수 있으므로 시간과 양을 정해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는 과정이 필요…….’
그때 교무실 문이 열리고 미진이 들어왔다.
상호는 재빠르게 책을 덮고 책상 위 책꽂이에 꽂았다. 미진이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고 있어요?”
“그냥, 면담 기록 읽는 중이요.”
“책상에 이상한 책 있던데. 그거 읽고 있던 거 아니에요?”
“…….”
알고 있었구나. 상호는 말없이 면담기록부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딴짓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주세요.”
“……알았어요.”
“메모는 보셨어요?”
“네?”
그가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자 미진이 혀를 찼다.
“2학년에서 선도부원 뽑으라고 하셨어요, 교장선생님이.”
“선도부요?”
뭔지는 알지만 이 학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상호는 당황하며 물었다.
“애들 그런 거 할 시간 없는데……. 꼭 뽑으래요?”
“희망자 모집하고 심사해서 열 명만 뽑아요. 그래도 반마다 한 명씩은 무조건 보내라고 하셨어요.”
“지도교사…… 학생주임? 그거는 누가 해요?”
“글쎄요, 교장선생님이 직접 하신다는 말이 있던데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해련의 뜻이라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영 내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 애들인데.
“그거 왜 만든대요? 혹시 들었어요?”
“요즘 학교폭력이 자주 보인다고 하시던데요. 주술사 선생님들도 정령한테 들었다고 하시고. 그걸 학생들끼리 해결하는 걸 보고 싶으신가 봐요.”
자정을 기대하는 걸까.
그래도 2학년 아이들 중에는 선도부 같은 활동을 할 만한 아이가 없는데. 상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내일 애들한테 물어볼게요.”
* * *
“……그렇게 됐는데.”
상호는 손을 비비며 씁 하고 입맛을 다셨다.
“하고 싶은 사람?”
역시나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태화가 양옆을 둘러보고는 상호에게 물었다.
“그거 하면 뭐 줘요?”
“아니.”
“그럼 왜 해요?”
“대가가 없어도 하려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니까.”
상호는 다시 한번 아이들을 둘러보았지만, 이번에도 자원하는 아이는 없었다.
‘시키기는 싫은데…….’
그래도 다른 반은 한 명씩 정할 텐데, 그의 반만 빠질 수는 없었다.
“한번 생각해 봐. 시간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후, 나가서 수업하자고 하려 했는데.
세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응?”
상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희가 하게?”
“아니요, 저…… 면담 있잖아요. 오늘 해도 될까요?”
“오늘?”
원래는 나디아와 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지만, 어차피 다 하게 되어 있으니 순서를 좀 바꾼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하자.”
* * *
방과 후.
나빛이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서며 상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세희 저녁에 봐~.”
“응.”
상호와 세희도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자 세희가 옆자리의 의자를 집어 자기 자리 앞에 놓으려 했다. 상호는 면담기록부를 챙기다가 그 모습을 보고 세희를 불렀다.
“의자 필요 없어.”
“네?”
“밖에서 면담할 거야. 괜찮지?”
세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도 금방 빙긋 웃어 보였다.
“저는 좋아요.”
상호도 마주 웃고 교실 문을 눈짓했다.
“가자.”
둘은 함께 복도로 나왔다.
계단을 오를 때는 세희가 그를 부축해 주었다. 상호는 이렇게 아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몸을 빼지는 않았다.
옥상에 도착하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상호는 담벼락으로 걸어가 등을 기댔다.
“바람 좋네. 그치?”
“네.”
세희가 옆에 다가와 담벼락 위에 팔짱을 얹었다.
“여기 자주 오세요?”
“가끔?”
경한, 해련, 건흠. 맨날 선생들하고 오다가 제자를 데려오니 느낌이 새로웠다.
초봄의 찬 공기가 옷깃 사이로 스미어 들어왔다. 지는 노을은 간신히 얼굴을 덥힐 정도만의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아직 춥네.”
상호는 양복 재킷을 벗어 세희의 어깨에 둘렀다.
세희가 늘 그렇듯 괜찮다며 재킷을 돌려주려 했지만, 그는 세희의 어깨를 감싸서 그러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더 거절하지 못하도록 재빨리 말을 붙였다.
“요즘 뭐 힘든 거 있어?”
“아니요.”
세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뭐 때문에 면담 일정을 당겼을까. 상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했다.
“그럼 검 때문이야? 뭔가 더 배우고 싶어?”
“그건 늘 그렇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세희가 땅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은 듯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상호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세희가 스스로 이야기할 때까지.
이윽고 세희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선생님.”
“응.”
“선생님 첫 제자 있잖아요.”
“응.”
“말을 못 하던데…… 글도 못 써요?”
“그렇더라.”
“원래 그랬어요?”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원래는 멀쩡했는데…… 실종됐다가 돌아온 후에 그렇게 됐어. 왜, 다혜가 너한테 뭔가 말하고 싶어해?”
“……아니요.”
세희는 뭔가를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언니는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한테 전해요? 사고가 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혼자 묵히는 거예요?”
“그렇겠지. 가슴에 품고 살겠지. 답답함을…….”
상호의 속도 답답해져 왔다.
“실종됐다가 돌아왔더니 친구들하고도 멀어져서……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고, 통하는 사람도 없고. 계속 겉돈대. 거기에 조난당했을 때 얻은 고질병까지…… 미칠 노릇이지. 보는 사람도 힘든데 본인은 오죽하겠어.”
“……그런가요.”
세희는 먼 산에 떨어지는 노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응.”
“결심했어요.”
“응?”
뭘 결심했다는 걸까.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세희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 선도부 할래요.”
158. 선도
금요일 아침. 세희는 교장실에 모인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얼굴들. 아마 평가 때 싸워봤을 것이다. 일곱 명은 무예가. 두 명은 마법사 혹은 주술사. 세희 자신까지 포함해 총 열 명이 모였다.
자리에 앉은 교장이 손뼉을 가볍게 쳤다.
“긴장하지 말고. 앉아요, 앉아.”
열 명이 소파에 앉자 해련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설명은 들었나? 다들 알고 왔어요?”
아홉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명, 세희만은 그러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해련과 눈을 마주쳤다.
해련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 선생은 모르는가 보네.”
“제가, 안 물어봐서…….”
“괜찮아. 모인 김에 한 번 더 설명하면 되지.”
해련이 책상에 놓인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열 개의 완장.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선도’라고 적혀 있었다.
“딱히 어려울 건 없어요. 따로 시킬 것도 없고. 딱 하나, 그냥 돌아다니다가 교칙을 어기는 학생을 만나면 잡아주면 돼요. ……뭐,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완장이 허공에 둥실 떠올라서 아이들에게 날아갔다.
“그냥 명분인 거지요. 참견할 수 있는 명분. 의무는 없고.”
학생들 중 한 명이 그 완장을 받아들며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따로 받는 것도 없는 거예요?”
“응? 설명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냥 궁금해서…….”
아무래도 내심 보상을 바라고 있던 모양이었다. 해련은 피식 웃고는 소파 주변을 둥글게 서성였다.
“음……, 어떤 대가를 줄까? 성적 관련해서는 안 되고. 금전적인 보상을 줄 수도 없어. 생기부에 칭찬을 해줄 순 있겠지만, 헌터 지망생에게는 딱히 끌리는 제안이 아니겠지.”
다들 긍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선도부는 낮에 활동하는 데 시간이 드니까, 밤에 통금시간을 좀 늦춰주는 걸로. 한 열한 시쯤으로. 어때요?”
세희의 눈이 반짝였다.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 늘어난다. 그것도 다른 아이들은 기숙사에 들어가 있을 때. 그 말은 그 한 시간을 고스란히 상호와 단둘이서 수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세희의 말에 다른 아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딱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한 아이가 맞장구를 쳤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럼 그걸로 할까.”
해련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아가도 돼요. 완장은 학교에서는 항상 달아주고. 필요할 때는 방송으로 부를 테니 알아두고.”
“네.”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