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501)

* * *

이제는 직장 내에서도 추행을 서슴지 않는구나. 미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선배인지, 벌레인지…….’

 상호는 이제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열심인 척을 하지만, 실상은 10분이면 끝날 일을 또 한 시간씩 질질 끌고 있을 터였다.

미진은 한숨을 쉬고 상호의 자리로 다가갔다.

“뭐 하십니까?”

“아, 미진 씨.”

 상호가 그녀를 돌아보며 손사래를 쳤다.

“그냥, 면담 기록 타이핑이요. 안 도와줘도 돼요.”

“나오세요. 타자도 느리시면서.”

 미진은 작은 목소리로 면박을 주었다.

“다 해 놓을 테니까 옆에서 월급도둑질이나 하고 계세요.”

“에이, 괜찮대도…….”

“나와요.”

 상호는 결국 등쌀에 못 이겨 자리를 내주었다. 미진은 상호에게 면담 기록을 넘겨받고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있던 설미가 일어섰다.

“상호 씨. 미진 씨. 나 먼저 퇴근할게.”

“아, 네. 내일 봐요.”

“들어가세요.”

 다른 선생들은 이미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미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고, 교무실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미진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일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이상한 게 있었다.

“강 선생님.”

“네?”

“이 0.5니 1.2니 하는 것들은 뭐예요?”

“아, 그건 그냥…….”

 상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내공 표시해 둔 거예요.”

“내공이요?”

“네. 대충 얼마나 되는지.”

“누가 기준인데요?”

“세희요.”

 대답에 거침이 없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믿기 힘들었다.

타인의 내공을 그렇게 상세하게 알 수 있을까. 알 수 있다 해도 겨우 B급 무예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터.

‘……B급이 아니라면.’

 미진은 얼마 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주말. 학교 부지의 외진 곳을 걷다가 우연히 상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검강.

 그리고 허공에 홀로 떠다니는 검 모양의 강기.

‘강기……일까?’

 평범한 것과는 달랐다. 불꽃 모양의 이질적인 기운. 모르고 봤다면 강기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미진은 이미 회식 때 상호의 강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불꽃 모양의 강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B급이 그렇게 긴 검강을 뽑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S급에게도 불가능할 정도다.

‘마법이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목각인형과 곰인형을 움직이는 것도 허공섭물이 아니라 마법일 게 분명했다. 입으로는 순수 무예가라고 하지만, 이미 마법사를 가르치고 있고, 말은 지어내면 되는 것이니.

미진은 상호가 마법을 쓰는 무예가라고 생각했다.

‘그게 설마 강기겠어. B급은 B급인 이유가 있겠지…….’

 그런 상념에 잠기면서 기계처럼 타자를 치던 와중에, 상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진 씨도 어깨 주물러 줘요?”

 미진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떨었다.

미친 게 아닐까. 선배도 손대고 후배도 손대고, 위아래로 다 치근덕거린다. 미진의 표독한 눈빛이 상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필요 없어요.”

“한번 받아 봐요. 시원할 텐데.”

“손이나 떼세요.”

“아니, 필요 없…….”

 다니까, 라고 말을 하려는데 상호가 어깨를 살짝 주물렀다.

미진의 몸이 움찔했다.

“……흐윽!”

“거봐요. 시원하죠?”

 상호가 씩 웃으며 안마를 시작했다.

 그 말대로였다. 뭉친 근육을 귀신같이 찾아내서는 조금 힘을 주어 누르는데 닿는 곳마다 사르르 풀어졌다.

타자를 치던 손은 이미 멈춘 지 오래였다. 미진은 녹아내릴 것만 같은 머릿속을 붙잡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윽! 어떻게…….”

“혈을 알고 있으니까.”

 상호의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미진은 본능적으로 내공을 뻗어 그 기운을 막았다.

 하지만 상호의 기운은 미진의 내공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자리를 잡았다.

“힘주지 마요.”

“뭘…… 뭘 넣는 거예요, 뭘 하려고…….”

“속에 있는 근육 좀 풀어주려고요. 기분 좋을 테니까 힘 좀 빼 봐요.”

 상호의 기운이 미진의 어깨 근육 사이사이에 흘렀다.

미진은 자꾸 나른해지는 몸을 추스르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기분 나쁘게도.

자꾸 기분이 좋아지려 했다.

“됐…… 됐어요……, 이제 그만…….”

“좋지 않아요? 아프진 않아 보이는데. 몸에 좋으니까 좀 더 받아 봐요.”

“빼요……!”

“알았어요, 알았어.”

 결국은 그녀의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미진은 몸에 힘이 다 빠진 채로 책상에 엎어졌다.

“으…….”

“또 받고 싶으면 말해요.”

 상호가 웃었다.

미진은 흐릿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두 번 다시 받지 말아야겠다고. 이런 기분 나쁜 일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하지만, 기운이 빠져나갈 때. 아쉬움이란 감정이 느껴진 것 같아서.

‘아니야…….’

 이성적,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미진은 방금 자신의 몸에 밀려들어 왔던 기운을 떠올렸다.

고작 B급의 내공이 그렇게 강할 리 없다.

뜨거우면서도 부드러운 기운.

‘마법이겠지…….’

 마법처럼 기분이 좋았다.

분명 최면 마법이라든가 그런 것일 테다. 미진은 다시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몸을 일으켜 키보드를 잡았다.

어깨가 훨씬 가벼웠다.

‘……효과는 좋네.’

 어쩌면 가끔씩은 괜찮을지도.

미진은 그런 생각을 무심코 했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냐, 아냐. 이런 인간한테 몸을 내주다니…….’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미진의 이빨이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호는 뒤에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평소처럼 별생각 없는 표정으로.

미진은 모니터에 비치는 상호의 얼굴을 보며 이를 갈았다.

‘벌레야, 벌레. 기술만 좋은 벌레…….’

 그리곤 어깨에 남은 손길을 잊으려 애쓰며, 다시금 타이핑을 시작했다.

 152. 보이는 여학생

“이거 놔!”

“싫습니다.”

 버스 앞에서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태화와 이츠키가 세희의 양팔을 하나씩 붙잡고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태화가 오른쪽, 이츠키가 왼쪽.

태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찐따같이 왜 이래! 친구 없어? 다른 애랑 앉아!”

“찐따 맞고 친구 없습니다. 인싸인 이양이 오양이랑 앉는 겁니다.”

“우씨……. 놔!”

 둘은 더욱 강하게 세희의 팔을 잡아당겼다. 졸지에 거열형을 당하게 된 세희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일단 세희는 놓고 말해라, 얘들아.”

“야, 천세희! 너 누구랑 앉을 거야?! 나야, 이년이야!”

“세희. 전 세희 아니면 한 시간 동안 창밖만 보면서 가야 합니다.”

 들은 척도 안 한다.

무슨 수학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왜 저렇게 치열하게 싸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계전추모관까지 몇 시간씩 걸리는 것도 아닌데.

세희의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이 태화와 이츠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으…….”

 결정을 내렸을까. 세희가 입을 여는 바로 그때.

어느새 다가온 은율이 세희의 양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나도.”

 그 말에 세희는 다시 갈등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상호는 보다못해 엄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불렀다. 이미 버스 안에서 설미의 반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2학년.”

 2학년 아이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1학년.”

 1학년 아이들도.

상호는 두 무리를 검지로 번갈아 가리켰다.

“같이 앉아. 한 명씩 짝지어서.”

 * * *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상호 씨 반은 엄청 조용하네.”

 설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애들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데. 애들을 아주 꽉 잡나 봐.”

“…….”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기는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상호는 입에 쓴맛이 도는 것을 느끼고 버스 앞쪽의 거울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그의 말대로 학년별로 한 명씩 짝을 지어 앉았다. 세희와 가은, 태화와 아리, 은율과 초란, 이츠키와 하솔.

그나마 말이 많은 짝은 지윤과 단비였고, 그다음이 나디아와 미래. 나머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침묵 속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조합이 있었으니.

“과자 먹을래?”

 나빛이 방긋 웃었다.

옆자리에 앉은 것은 이서였다. 아무래도 1학년 아이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두 명, 이서와 가은을 각각 세희와 나빛이 부담한 모양이었다.

상호는 거울로 나빛과 이서를 주시했다.

“먹어도 돼. 많이 있어.”

“아니요.”

 이서는 나빛이 내민 과자를 밀어냈다. 귀찮다는 듯, 쌀쌀맞은 표정으로.

 하지만 나빛은 늘 그렇듯 밝게 웃으며 가방을 뒤적였다.

“이건 별로야? 잠시만, 다른 거 꺼내 줄게…….”

 툭.

가벼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상호는 이서의 얼굴이 삽시간에 해쓱해지는 것을 보았다.

“앗…….”

 나빛이 당황하며 허둥지둥 그 물건을 주웠다.

 그리고는 이서와 눈을 마주치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여전히 순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미, 미안. 이거 말고……, 헤헤.”

“…….”

“혹시 봤어?”

 이서는 얼음처럼 굳어버린 몸으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대다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네.”

“에헤~ 봤구나~.”

 나빛의 웃음이 더욱 환해졌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알았지?”

“네……, 넵.”

“약속!”

“네, 약속…….”

“고마워~, 헤헤헤……. 과자 먹을래?”

“넵.”

 이서는 평소답지 않게 빠릿빠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조금 특별한 과자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구름과자.

상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걸 왜 아직도 가방에…….’

 유연에게 압수당한 줄 알았는데.

 아니, 아마 압수당한 게 맞을 것이다. 돌려줬을 리도 없고.

아마 처음부터 여러 개였거나, 그 후로 또 받았거나.

‘에휴, 애한테 왜 그딴 걸 줘 가지고…….’

 골머리가 아프다. 상호는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뭐, 이서가 나빛이를 무시하지는 않게 된 것 같으니…… 다행이네.’

 그렇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옆에서 설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 * *

“……전쟁은 2년 191일 동안 계속되어 6년 전에 끝이 났어요.”

 1년 전과 같은 안내원이 같은 설명을 했다. 햇수에 1만 더해서.

상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안내원 쪽을 쳐다보았다. 이서가 핸드폰을 하며 딴청을 부리는 것이 보였다.

‘하루아침에 바뀌길 바라긴 무리인가.’

 다른 1학년 아이들은 대체로 잘 집중하고 있었지만, 2학년은 대체로 집중하지 않았다.

 이미 작년에 왔었기 때문인지, 태화는 물론이고 세희와 은율, 나빛까지 자기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나마 이츠키와 나디아가 안내원의 설명에 이따금씩 관심을 보일 뿐.

 다만 한 명.

설명도 듣지 않고, 수다도 떨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귀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한 소녀.

 그 짧은 머리에 갈색 피부를 가진 소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하염없이 어딘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저 멀리 놓인 저승부대의 사진을.

1년 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망은 다 없어졌을까.’

 상호는 조용히 지윤을 지켜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지윤은 살짝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다가 상호를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괜찮다는 듯이.

상호도 마주 웃어 주었다.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곧 안내원이 아이들을 다음 구역으로 데려갔다. 지윤은 조금 더 저승부대의 사진을 보다가, 거리가 멀어진 일행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상호도 아이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 했다.

‘……응?’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츠키가 안내원을 따라가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 또한 지윤처럼 어딘가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상호는 이츠키에게 다가갔다.

“사카시타?”

 이츠키는 그를 올려다보더니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끌었다. 상호는 이츠키에게 끌려가면서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선생님.”

 이츠키가 그를 이끈 곳은 저승부대의 사진 앞이었다.

“여기 선생님이 있습니까?”

 그 물음에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얘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

일단은 모르는 척을 해 보았다.

“나? 갑자기 왜?”

“저한테는 보입니다.”

 이츠키의 눈동자가 상호와 사진 사이 어딘가에 초점을 맞췄다. 그 모습을 보자 상호의 머릿속에 이츠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술? 주술이 보인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이츠키가 상호와 사진을 양 검지로 가리켰다가, 그 사이 허공에서 검지의 끝을 부딪쳤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것들이 빛나는 선으로 보이게 됩니다. 선생님과 이 사진의 연결은…… 특히 빛이 납니다.”

“……그래?”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 중에 하나가 나야.”

“이 소년 같은데…… 맞습니까? 얼굴이 가려진.”

“응.”

 이츠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되게 귀엽게 생겼습니다.”

“응? 보여?”

“느낌이 그렇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키가 커서 그럴지도.”

“그땐 어렸으니까.”

 16살의 소년은 24살이 되어 사진 앞에 섰다.

묵묵히 회상에 잠긴 상호에게 이츠키가 물었다.

“선생님이 저승부대입니까?”

“응.”

“한국에서 가장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응.”

“선생님도입니까?”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츠키가 눈을 감고 눈꺼풀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역시. 유학 오길 잘했습니다.”

“눈은 왜 그래. 아픈 거야?”

“여긴 다 빛이 납니다. 이 장소의 모든 것들이…….”

 전쟁을 겪어온 물건들이 즐비한 곳이니, 하나하나에 주술적으로 큰 힘이 담겨 있을 터였다. 상호는 손을 뻗어 이츠키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엄지로 이츠키의 눈꺼풀을 문질렀다.

 그의 내공이 이츠키의 눈으로 흘러들었다.

“이러면 좀 나아져?”

“조금 좋습니다.”

 이츠키는 계속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건물 밖도 너무 밝아서 힘들었습니다.”

“밖?”

 상호는 고개를 기웃했다. 추모관 밖에 특별한 곳이라면.

“무덤 때문인가? 바깥에 국립묘지가 있거든.”

“묘지가 정확히 어디입니까?”

“추모관이랑 붙어 있어. 바로 뒤편이야.”

“그럼 아닙니다. 제가 본 건 산 너머였습니다.”

“산 너머?”

 어리둥절해하던 상호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눈부시게 빛이 납니다. 태양이 땅에 내려온 것처럼…….”

 이츠키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두 개인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분명했다.

상호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리며, 엄지로 이츠키의 눈을 지그시 눌렀다가 떼었다.

이츠키가 눈을 뜨자 그는 일부러 씩 웃어 보였다.

“괜찮아졌어?”

“네.”

 하지만 이츠키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눈부신 건 그대로라…… 같이 걸어 주시겠습니까?”

“같이?”

 되묻는 상호의 손을 이츠키가 붙잡았다.

상호는 그 뜻을 깨닫고 뺨을 붉히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꼴을 남한테 보이면 오해 사기 딱 좋을 텐데.

 그래도 별수 없다. 애가 눈이 아프다는데 달리 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이츠키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가자.”

“부탁드리겠습니다.”

 둘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이미 멀리 가버린 아이들을 쫓아서.

‘장님과 앉은뱅이……가 아니라 장님과 절름발이구만.’

 다리는 멀쩡하지만 눈을 못 뜨는 소녀. 다리도 눈도 하나씩 다친 청년.

걷는 속도는 같았다.

‘애들이 어디로 갔나…….’

 그새 멀리 갔나 보다. 상호는 앞쪽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손을 당기자 이츠키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습니까?”

“응?”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시면 곤란합니다.”

“……아니야.”

“혼인 비자는 선생님이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아니라고…….”

 걷다 보니 안내원과 아이들이 보였다.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상호의 반 2학년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츠키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상호와 이츠키를 발견했다.

“아, 이츠키 저기 있다. 선생님이랑 얘기했나 봐.”

 나빛이 상호와 이츠키를 가리켰다.

상호는 어리둥절해하는 세희에게 다가가 이츠키의 손을 넘겨주었다.

“사카시타가 눈이 아프대.”

“눈이요?”

“응. 학교 갈 때까지는 못 뜰 것 같아. 잘 데리고 다녀줘.”

“네.”

 세희가 이츠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태화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손을 떨어뜨렸다.

“뭔…….”

 세희가 황당해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태화는 세희의 입을 검지로 막고 이츠키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이츠키가 나직하게 핀잔을 날렸다.

“이양, 세상에는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오! X! 팔!”

 상호는 발을 동동 구르는 태화를 외면하고 슬쩍 물러났다. 그런 와중에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다혜.

아까 지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반과 살짝 거리를 두고 있었다.

‘동갑 친구들은 학교에 있을 테니…….’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상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혜를 주시했다.

다혜는 초점이 풀린 눈동자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벌린 입에서 침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뭐지?’

 어딘가 아픈 걸까.

남들이 보면 머리가 아픈 줄로 오해하겠다. 그렇잖아도 말을 못 하는데.

상호는 다혜에게 다가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다혜야, 어디 아파?”

“……씁!”

 다혜는 화들짝 놀라 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다시 반짝이는 눈빛을 지으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상호는 걱정을 거두지 않았다.

“이미 와본 곳이라 재미없지? 같이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쐴까?”

 당연히 승낙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다혜는 고개를 저었다.

상호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괜찮겠어?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상호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전시관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다혜는 다시 초점 풀린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희생양을 찾은 짐승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153. 돌아올 수 없는

전시관 견학이 끝난 후, 학생들은 국립묘지에 참배를 갔다.

저번과 별다를 것은 없었다. 의미 없이 무리 지어 거니는 아이들, 끼리끼리 사진을 찍는 아이들.

세희는 이츠키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었고, 은율이 그 뒤를 따랐다. 나디아는 이름 모를 군인의 묘비에 헌화를 했고, 나빛은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지윤은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호도 하늘을 보았다.

‘날 좋네.’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하늘이 참 푸르렀다.

잠시 그 풍광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다시 내려보니, 태화가 지윤의 옆을 알짱거리며 뭐라고 몇 마디를 하고 있었다.

지윤이 반응하지 않자 태화는 콧방귀를 뀌고 상호에게 순간이동을 했다.

“우씨, 혼자 있길래 신경써 줬더니 드라마 찍고 있네. 쌤, 놀자.”

“세희랑 놀아.”

“어차피 쌤도 할 거 없잖아! 노라조노라조노라조오오!”

“하…….”

 한숨을 쉬는 상호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가 빙긋 웃는 해련과 눈을 마주치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아, 교장선생님.”

“오셨슴까, 보스!”

 태화가 팔을 우스꽝스럽게 벌리고 허리를 푹 숙였다.

이제는 교장선생님한테까지 장난을 치는구나. 상호는 태화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려 했다.

해련이 그의 손을 막고 귀에 속삭였다.

“가서 일 봐요. 애들은 내가 볼 테니까.”

 상호는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실례하겠습니다.”

“어머, 이젠 빼는 척도 안 하네.”

“좀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그냥 애들 데리고 학교 가주세요.”

“더 있으면 명령도 하겠어, 아주.”

 해련이 실쭉 웃었다.

“부담없이 명령해요. 밤엔 혼자 있으니까.”

 상호는 못 들은 척하고 지윤에게 걸어갔다.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던 지윤은 상호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내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준비됐어?”

 그의 물음에 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까?”

“네.”

“그러자.”

 상호는 지윤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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