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굶주린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상호는 침대에 누운 채로 민정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민정이 그의 품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키득거렸다.
“상호 너는 꼭 뒤에서 안더라.”
“앞에서 안기는 불편하니까.”
“네가 뒤에서 안기는 건 싫어?”
“돌아누우면 등짝을 뒤지게 후려갈기더라고.”
“효은이가?”
“응. 지는 등 돌리고 앉아서 담배 뻑뻑 피워대면서…….”
“푸훗!”
민정이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웃음은 점차 잦아들다가 곧 흐려져 사라졌다. 상호는 그 이유를 알았다.
“아직도 신경이 쓰여?”
“……응.”
민정이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네. 미안해.”
“그걸 누나가 왜 미안해해.”
“집중 못 해서…….”
“집중 못 시킨 내 잘못이지, 뭐.”
상호는 민정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한 번, 두 번. 안 좋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계속.
하지만 민정은 웃다가도 이따금씩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그가 몸을 더 가까이 붙여도 반응하지 않고, 생각에 잠기기만 했다.
상호의 입에서 엷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누나.”
“응?”
“왜 누나가 그걸로 고생해야 해?”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상호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누나한테 뭐라 할 자격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어. 누나. 그 일을 누나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는 거잖아.”
민정이 그를 돌아보았다.
“너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나 보구나.”
“응.”
상호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세상이고 뭐고 상관없이 예경이 누나 따라갔던 거니까.”
세상을 지켜야 했다느니, 누군가는 해야 했다느니, 소방관 같은 거라느니. 세희에게는 그렇게 번드르르하게 이야기해 놨지만, 실상은 달랐다.
상호는 그런 인간이 못 되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아마 지금도.
“내 말이 틀려? 누나가 책임질 이유는 없잖아. 내가 누나보고 그걸 때려치라고는 못하겠어. 그런데, 누나가 그 일을 해결 못한다고 해서 자괴감에 빠질 이유가 있어? 누나가 잘못한 게 뭔데? 세상 어느 누가 누나한테 잘못을 따질 수 있는데?”
“……갑자기 기억나네. 너한테 대장님이랑 예경이가 잔소리하던 게.”
민정이 쓰게 웃었다.
“나도 알아, 상호야. 너한텐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거…….”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
“그러니? 그래도…… 누나는 그렇게 생각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불 속에 갇힌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내 잘잘못을 떠나서 자책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그거랑 이건 달라, 누나.”
상호는 민정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랑은 다르다고. 이 빌어처먹을 악마놈은 봉인이 계속되든 풀리든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죽일 거고, 누나랑 형이 이 일을 잘 해내든 못 해내든, 숨기든 알리든 상관없이 세상은 누나랑 형을 욕하고 책임을 물을 거라고.”
“그래도 괜찮아.”
민정은 그저 웃었다.
“후회 안 해.”
“……알아서 해. 누나는 나보다 똑똑하니까.”
상호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도 민정은 자기가 한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는 있지만, 그저 투정일 뿐이었다.
‘그래도 짜증 나네.’
“누나.”
“응?”
“약속 하나만 해.”
“무슨 약속?”
“일단 하겠다고 해.”
“뭐야, 그게…….”
민정이 키득거리며 뒤통수로 그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래, 할게. 약속할게. 뭔데?”
“약속했어.”
상호는 민정의 앞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새끼손가락 하나만 세워서.
“나랑 있을 땐 그 고민 하지 마.”
그와 함께 있을 때도 이런데, 혼자 있을 때는 얼마나 속으로 앓을지 안 봐도 뻔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구렁텅이에서 못 빠져나오게 될 터. 스스로 빠져나올 생각조차 없고, 누가 도와줘도 빠져나올 힘이 남지 않은 채로, 아래로 밑으로 잠겨 들기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놔두진 않는다.
“자주 찾아올게. 같이 고민해줄게.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지 않을 때는, 누나도 그 생각 하지 말고 치워버려.”
“그게 쉽니…….”
“이미 약속했잖아. 지켜야지.”
그 억지에 민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애가 참…… 이기적이야.”
상호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누나한텐 그런 사람이 필요해.”
느낀 바를 말할 따름이었다.
그러자 민정은 한숨을 폭 내쉬더니, 그의 품에 더욱 기대어 오며, 얼굴을 침대에 깊숙이 묻고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잘 모르겠어. 그래도 아마…… 상호 네 말이 맞겠지.”
“그렇다고 생각 자체를 포기하진 말고…….”
“몰라. 히히…….”
그녀는 그제야 웃었다.
상호는 민정을 끌어안고 귀에 속삭였다.
“배 안 고파? 밥 먹을래?”
“으응, 너 배고프면 같이 먹구.”
“그럼 그냥 잘까?”
“그래. 아, 맞다.”
민정이 갑자기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이 이야기는 해야겠어.”
표정이 진지했다.
상호는 그녀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뭔가 중요한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무슨 이야기?”
“그게…….”
민정은 머뭇거리며 쉬이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내 상호와 눈을 마주치며 운을 떼었다.
“태화 말인데…….”
“……태화?”
상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49. 최강의 제자
일요일 아침.
교정에는 아이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멀리에는 수련을 하는 아이들도 이따금씩 보였다.
상호는 구석에 놓인 벤치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협회가 태화를 노릴지도 모른다.’
어젯밤에 민정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태화의 피를 검사한 결과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봉인체.
그걸 알아낸 인물은, 악마 봉인 전담 부서 ‘66부’의 연구소장. 공리주.
‘그 여자인가.’
상호는 지난번에 만났던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얀 가운을 입고 일그러진 웃음을 짓던.
그렇지만 민정이 이미 하지 말라고 경고해 놓았고, 아직까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악마의 영혼을 옮기는 절차 또한 알고 있으니 중간에 저지할 수도 있었다.
일단은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연구하고 있는 사람이니.
‘좀 두고 봐야겠군.’
낌새가 보이면 도현에게 말하면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애들이나 가르쳐야겠다.’
* * *
“강기가 길수록 좋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지?”
상호가 검을 까딱이자 검푸른 강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족히 10m는 되어 보였다.
“긴 게 필요하면 늘리면 되고, 짧은 게 필요하면 줄이면 되니까. 내공은 많을수록 좋고, 강기는 길수록 좋지.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보다 단단하다는 전제하에.”
그는 강기를 거두고 칼집에 검을 넣었다.
“그러니까 운기조식 거르지 말고 열심히 해. 하루에 한 번씩. 서로 옆에서 지켜주면서.”
아이들이 서로를 둘러보았다.
출석한 아이는 총 7명. 태화를 뺀 2학년 전원과 미래까지. 미래는 데이터를 수집하겠다며 초소형 캠코더로 녹화를 하고 있었다.
나빛이 손을 들었다.
“그건 이기어검…… 창도 해당되는 건가요?”
“이기어검은 경우가 다르지. 한번 보여 줄까?”
상호는 나빛에게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저기 서 봐.”
나빛이 그곳에 가서 섰다.
“천천히 해보자.”
상호의 주변에 검푸른 검들이 생겨났다.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허공에 솟아난 강기들.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상호는 그런 아이들을 흘끗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건 나빛이한테만 해당되는 수업이야. 너희가 이 정도 수준이 되면 내 가르침이 필요가 없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느끼기만 해. 너희한텐 아직 너무 이른 내용이니까. 자, 나빛아. 간다.”
“네.”
나빛이 마른침을 삼키고 성창을 만들었다.
열 개 남짓한 성창이 나빛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상호는 그 성창들을 쳐다보다가 강기의 검을 쏘았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검들이 성창들에 부딪혔다.
카각
원래라면 닿기만 해도 성창이 부서져야 했지만, 지금은 상호가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상호는 손가락으로 강기와 성창을 가리켰다.
“봐봐. 크기가 크니까 서로 막기가 쉽지?”
“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작다면 어떻게 될까?”
“……아.”
나빛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의 목 앞에 새끼손가락만한 강기의 검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못 막아요.”
“훨씬 막기가 힘들지. 보기도 힘들고. 이처럼 이기어검은 작을수록 유리해져. 단, 어디까지나 공격에 한해서만.”
상호는 강기를 거뒀다.
“이기어검은 크다고 좋지도 않고, 작다고 좋지도 않아. 내 검이 크면 상대가 막기 쉬워지고, 내 검이 작으면 내가 상대를 막기 힘들어져. 그래서 적당한 크기에서 타협해야 해.”
“네.”
나빛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살짝 웃고 다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아까 했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강기의 길이는 자유로울수록 좋아. 너희도 좀 있으면 강기를 쓰는 전투를 하게 되겠지. 무기가 갑자기 길어지고 짧아지는 그런 전투 말이야.”
그의 손가락이 은율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그 수업을 할 거야. 은율이. 강기 최대한 길게 뽑아 봐.”
“네.”
은율이 검을 뽑았다.
곧 푸른 강기가 물결치듯 일렁이며 솟아났다. 길이는 칼끝에서부터 5cm 남짓.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예현여고 내의 18살 무예가 아이들 중에서 가장 긴 검강.
“잘했어. 거둬도 돼. 다음, 세희.”
세희도 검을 뽑아 강기를 둘렀다.
내공이 그리 많지 않아 칼끝에서 거의 1cm밖에 솟지 못했다. 하지만 은율의 것보다는 훨씬 단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것도 18살 학생들 중에서 가장 단단한 검강.
‘하지만 2학년에서 최고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상호는 지윤과 이츠키, 나디아를 둘러보았다. 지윤은 주먹을 쓰고, 이츠키는 내공이 부족하고, 나디아는 실력 자체가 부족하니. 더 확인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은율이가 고생 좀 해줘야겠다. 세희랑 지윤이가 교대로 은율이랑 대련하고, 나빛이랑 사카시타, 나디아가 나한테 와. 은율이는 내공 소모가 심하다 싶으면 쉬면서…….”
그는 말하다 말고 멀리에 있는 나무를 쳐다보았다.
제법 새잎이 돋아난 나무의 굵은 가지 위. 다혜가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다혜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상호를 향했다.
‘심심한가?’
그가 손을 흔들자 다혜는 훌쩍 뛰어 착지하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상호의 앞에 도착했다. 지나온 길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윽…….”
경공의 수준 차이를 느꼈을까. 무예가 아이들이 모두 움찔했다.
상호는 아이들을 흘끗하고 다혜와 눈을 마주쳤다.
“다혜야. 검강 한 번 보여줄래?”
그 말에 다혜가 소리 없이 벙긋 웃었다. 상호는 그 웃음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이 상황이. 자신의 말이. 다혜가 검을 들어 올리는 자세가. 어디서 본 것처럼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곧 다혜의 검에서 붉은 강기가 피어올랐다.
‘……아.’
상호는 그 색깔을 보고 다혜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검기를 보여 달라고 그랬었지. 맞다.’
그 검기를 보고 호송을 나가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판단했고, 오랫동안 후회하게 되었다. 뭐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결과적으로는 맞은 셈이지만.
그때와 색은 같지만, 강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상호는 붉은 강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최대한 길게 만들어 볼래?”
다혜는 씩 웃고는 그 말대로 했다. 칼끝에서 붉은 강기가 하늘로 뻗어 나갔다.
검보다 길게. 사람 키보다 길게.
‘이미 선생들만큼 강하겠는데.’
내공만 보면 A급 최상위권. 나이를 생각하면 사실상 S급.
심지어 1년을 꽉 채워 쌓은 실전 경험도 있으니. 건흠이 가르친다고 해도 같은 수준에서의 조언이 될 터였다.
붉은 검강의 길이는 약 2m.
‘일단은…… 용혈의 부작용은 없는 것 같고.’
상호는 아이들을 곁눈질하다가 흠칫했다. 세희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다혜를 쏘아보고 있어서.
반면에 다혜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약골들아~.’
꼭 그렇게 말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손뼉을 쳐서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됐다, 다혜야. 강기 집어넣고. 혹시 괜찮다면 대련 한 번 괜찮을까?”
다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옆에 놓인 목각인형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목각인형을 본 다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혼자서 걷고 움직이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다혜는 곧 상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손짓 발짓으로 뜻을 전했다.
“으아……으…….”
“가르쳐 달라고?”
“아으!”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다혜 넌 내공이 많으니까 되겠다. 나중에 가르쳐 줄게.”
“으흐~.”
다혜가 방긋 웃으며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목각인형은 아무런 신호 없이 검을 휘둘러 들어갔다. 평소처럼. 하지만 상호의 반 아이들에게는 익숙할지 몰라도 다혜에겐 처음이었다.
그러나 다혜는 몸을 숙여 여유롭게 검을 피했고.
퍽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발차기를 날려 목각인형의 복부를 가격했다.
목각인형의 손이 다혜의 발목을 잡으려 했지만, 다혜는 걷어찬 반동을 이용해서 뒤로 빠르게 굴렀다.
나무로 이뤄진 손이 허공을 갈랐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행동이 몸에 배어 있다.’
생사경을 여럿 드나든 이들만이 터득할 수 있는 습관. 목각인형 따위에게 두들겨 맞는 정도로는 따라갈 수 없는 차이가 아이들과 다혜 사이에 존재했다.
‘슬슬 시작해 볼까.’
목각인형의 검에서 검푸른 강기가 피어올랐다.
대련의 목적은, 아이들에게 강기의 길이 조절이 전투의 양상에 어떤 변화를 불러오는지를 눈으로 보여 주는 것.
상호는 목각인형이 검을 휘두르게 했다. 평소라면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슉
강기가 갑자기 길어지며 다혜의 어깨를 노렸다.
다혜는 예상했다는 듯 칼날을 비스듬히 기울여 목각인형의 검을 흘려 냈다.
‘빠르다.’
상호는 재차 검을 휘두르게 했다.
목각인형의 두 번째 공격도 다혜는 여유롭게 피해냈다. 그는 다혜가 목각인형의 움직임을 읽으며 한발 앞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훨씬 빠르게 해도 되겠네.’
목각인형이 검을 역수로 고쳐 잡았다.
그리곤 단 한 걸음에 코앞까지 짓쳐 들더니, 다혜의 턱을 향해 손잡이 끝을 찔러넣었다.
움직임이 한눈에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의 속공.
다혜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턱을 검 손잡이에 내려찍었다.
빠각
뒤이어 날아드는 목각인형의 칼날을 검으로 막아내고, 목각인형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다리를 위로 걷어찬 만큼 몸통 쪽이 아래로 내려갔고, 그녀는 그 힘을 이용하는 동시에 몸을 한껏 웅크려서 목각인형의 다리 사이를 쏙 통과했다. 가볍고, 유연하고, 빠르게.
그 광경을 본 상호의 표정이 굳었다.
‘잘못 생각했다.’
전투 감각은 교사 이상. 실력을 따진다면 명백한 S급.
훨씬 수준을 높게 맞춰줬어야 했다.
‘……늦었지. 이젠.’
이미 다혜가 목각인형의 등을 베고 있었다.
썩둑
단칼에, 토막이 났다.
아이들은 땅을 구르는 목각인형의 상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특히 세희의 눈빛이 텅 비어 있었다. 보면 안 될 것을 봤다는 듯이.
다혜가 검을 집어넣었다.
“에헷.”
그리곤 세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 웃음을 마주한 세희는 얼이 빠진 표정을 짓다가, 곧 차가운 눈으로 다혜를 노려보았다.
상호는 당황하며 목각인형을 옆으로 치웠다.
“잘했다, 다혜야. 가서 쉬어.”
“아으……아.”
다혜는 가벼운 걸음으로 폴짝폴짝 뛰며 멀리 떠나갔다.
다혜가 자리를 뜬 후에도 아이들은 충격의 도가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평소에 아무리 날고 기어도 쓰러트릴 수 없던 목각인형을, 딱히 힘들이지 않고 단번에 베어 넘겨 버렸다. 다친 구석 하나 없이.
사정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수준이,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온 수련이 하잘것없이 느껴졌을 터였다.
‘좀 자극이 됐으려나.’
상호는 손가락을 튕겨 아이들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자, 자. 수업 계속하자. 은율이. 아까 말한 대로 세희랑 지윤이랑 대련해. 나빛이, 사카시타, 나디아는 내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