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리는…….”
상호의 시선이 아리의 노란 눈동자를 향했다.
“외모 이야기 하는 거, 싫어해, 아니면 상관없어?”
“어…….”
아리는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아래로 내렸다.
의자 옆으로 불편하게 놓인 굵은 꼬리가, 아리의 복잡한 마음을 대변하듯 천천히 꿈틀거렸다.
“좋아하진…… 않아요.”
“그래.”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안 할게. 근데…… 만약에 누가 그런 거 가지고 놀리거나 하면 언제든지 말해. 선생님은 그런 거 안 봐주니까.”
아리의 눈이 상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중학교 때 외모 때문에 따돌림을 당했던 아이다. 상호는 아리의 앞에서 말할 때가 제일 조심스러웠다.
어쨌든 새 학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본인 스스로 새 출발을 해보도록 놔두는 것이 좋을 터.
“그럼 그건 됐고. 부모님은 무슨 일 하셔?”
“직장 다니셔요. 엄마는 주부…….”
“집에는 별일 없고?”
“네.”
“음…….”
상호는 그 말들을 기록부에 받아 적다가 아리를 흘끗했다.
“아리야.”
“네.”
“선생님이 무예가인 건 알지?”
“네.”
“혹시 선생님 반으로 온 이유가 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아리가 우물쭈물해했다.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작았다. 행동도, 목소리도.
“마법사 1등 선배가, 선생님 반에 있다고…….”
“소문을 들었어?”
“네.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부모님이…….”
“으음…….”
상호는 잠시 고민하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아리야. 선생님은 사실 마법을 못 가르치거든?”
“……네.”
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혹여나 기대를 걸었는데, 역시나 아니었다는 투였다.
상호는 말을 이었다.
“태화. 태화 누군지 알지? 뿔 달린 선배.”
“네.”
“걔는 선생님 친구한테 과외를 받았어. 전투는 선생님한테, 마법은 선생님 친구한테. 너도 그렇게 받아 볼래?”
“친구분이 어떤 분이세요?”
“마법학회 사람인데…… 강해. 우리 학교 선생님들보다도 훨씬 강해. 그래서 태화가 1등을 할 수 있었던 거야. 어때, 한번 배워 볼래? 하다가 안 맞으면 물러도 되니까.”
짧은 침묵 후, 아리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해 볼게요.”
* * *
“……그렇게 됐으니까, 주말에 학회 좀 같이 가자.”
“주말에?”
태화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수업 끝나고 데이트도 해줄 거야?”
“데이트는 뭔 얼어 죽을 놈의 데이트야. 공부하고 후딱 돌아오는 거지……. 아리도 있는데.”
“학교에 떨궈주고 가면 되잖아!”
“시끄러.”
상호는 일축하고 밥을 떴다.
학교 급식소에서의 저녁 식사. 그의 앞에는 태화와 나빛이 앉아 있었다. 다른 2학년 아이들 다섯은 수련하는 중.
나빛은 밥을 먹으면서도 자꾸 벙긋벙긋 웃었다.
“헤헤.”
“나빛이 뭐 좋은 일 있어?”
“그냥, 선생님이랑 학교에서 저녁 먹어서요. 헤헤…….”
기숙사에 온 게 그렇게 좋을까. 요사이 나빛의 표정은 햇살처럼 밝기만 했다.
그런 나빛에게 태화가 퉁명스럽게 핀잔을 날렸다.
“좋냐?”
“응.”
“진작 오지 그랬어? 작년엔 진짜 재밌게 놀았는데.”
그 말에 나빛의 얼굴이 우중충해졌다.
“……그래? 어떻게 놀았어?”
“뭘 어떻게 놀아, 신나게 놀았지. 작년 이맘때엔 쌤 집에서 치킨이랑 놀고 쌤도 먹고…… 아 반대네. 어쨌든 다 했지 그냥.”
태화가 깐죽거리며 꼬리를 나빛의 코앞에서 흔들었다.
“나빛이 니는 차암~ 불쌍하다. 좋을 때 못 놀고 다 지나서야 오네. 으이구~.”
“진짜예요?”
나빛이 눈시울을 붉히며 상호를 바라보았다.
큰일 났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그 눈빛을 피하다가 태화를 째려보았다.
“너…… 나빛이 신경 긁지 마.”
“내가 틀린 말 했어? 다 진짜잖아!”
“작년 이맘때에 쌤이 뭘 신나게 놀았어, 임마. 그때는 나빛이 집에 가고 너 놀고 지윤이 없고 세희만 가르쳤을 땐데…….”
“또 편애야?!”
“네가 놀았었잖아!”
뒷목이 땡긴다. 상호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나빛의 기분이 상할 때마다 그의 수명도 함께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제명에 못 죽어, 내가…….’
한숨을 그치고 밥을 먹으려는데, 태화가 그의 볼을 쿡쿡 찔렀다.
“쌤.”
“뭐.”
“애들 면담은 끝났어?”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이제 네 명 했어.”
“누구누구 했는데?”
“이서, 미래, 단비, 아리.”
“어땠어?”
“응?”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어땠냐니?”
“우리보다 착해? 우리보다 예뻐?”
태화가 얼굴을 가까이로 들이밀었다.
뭔 소릴 하나 했다. 상호는 혀를 쯧 차고 고개를 저었다.
“뭘 누구보다 이쁘고 자시고야. 다 똑같지. 그래도…… 너랑 세희보다 어려운 애는 없어. 다들 부모님이 학비 내 주는 집안이야.”
1학년 중에는 장학금이 절실한 아이가 없다.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서 상호가 집중하는 쪽은 여전히 2학년, 세희와 태화였다. 거기에 목숨이 달린 나빛까지.
“너희랑 이야기 자주 못 한다고 관심 끊은 거 아니니까, 그냥 열심히 수련하고 있어. 1학년 애들 파악 끝나면 너희도 같이 볼 거니까.”
“응.”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애들이랑 면담하다 뭐 재밌는 이야기 들은 거 없어?”
“없어. 있어도 너한테 말 못 하지, 당연히.”
“단비는 둘만 있어도 막 짖어?”
“……맞다, 너.”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상호의 손이 태화의 뺨을 집었다.
“너 단비랑 아리 놀리지 마.”
“안 놀렸는데!”
“조심하란 말이야. 2학년 중에 너만 조심하면 돼. 만약 단비나 아리 입에서 네가 놀렸다는 말 나오면…… 진짜 혼나.”
“내가 뭐! 아직 뭐 하지도 않았는데!”
태화가 심통 난 표정으로 항변했다.
억울하긴 할 터였다. 아직 단비나 아리를 놀리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엄연히 평소 행실이 있으니.
“너 방금도 나빛이 놀렸잖아.”
상호는 눈을 부라렸다.
“오늘만 그랬어? 평소에도 삐순이 삐순이 거리고. 이츠키도 이름 가지고 놀렸고. 세희도…… 놀리고. 자주 그랬잖아. 아냐?”
세희와 관련된 내용은 민망해서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화에겐 그런 브레이크가 존재하지 않았다.
태화가 온 식당에 들리도록 빽 소리쳤다.
“걔 빨래판인 건 팩트잖아!”
“야이씨…….”
상호는 황급히 태화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 쌤 짜를라고 그래? 다 듣잖아, 임마!”
“우웁! 천새히에이껍절벅빵래팡!”
“너 그거 세희가 들으면 어떡할라고 그…….”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상호는 고개를 들어 급식소 입구를 확인했다.
도끼눈을 뜬 세희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교실.
“언니 눈이 왜 그래요?”
“응? 이거? 스모키 화장이지.”
태화가 밤탱이가 된 눈을 문지르며 웃었다.
태화의 바로 뒤에는 단비가 앉아 있었다. 단비는 꼬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촐싹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언니 화장품 어디서 사요?”
“나? 난 그냥 가까운 가게 가서 사는데. 저기 상가 가면 있어. 나중에 같이 갈까?”
“네! 멍!”
“야, 단비야. 손.”
“멍!”
태화가 손을 내밀자 단비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꼭 강아지처럼.
세희는 태화를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너 그거 선생님한테 안 들키게 조심해.”
그러자 태화가 귀를 후비며 깐죽거렸다.
“가슴으로 말하나? 너무 작아서 안들리는뒈~.”
세희의 이마에 혈관이 돋았다.
입술 사이로 살기를 흠뻑 품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네? 뭐라구요?”
태화가 세희의 품에 귀를 붙였다. 머리에 난 뿔이 세희의 턱을 쳤다.
“응? 응애? 아~ 아기 때부터 못 자랐구나~. 엄마 젖을 못 먹어서 못 컸어? 아유~.”
“미친 가스나…….”
지켜보던 지윤이 한마디 했다.
“그라니께 니가 만날 쳐맞제. 나였으면 눈까리 하나로 안 끝났다카이. 세희가 보살인기라.”
“보살이면 뭐해. 우유통이 작은…… 응?”
뺨에 떨어지는 뜨거운 액체.
무심코 고개를 든 태화의 입에서 어리벙벙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
세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태화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교실 문이 열리며 상호가 들어왔다. 검 짚는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야, 임마! 동생들 놀리지 말랬더니 친구를 놀리고 있냐!”
“아니, 아니 나는…….”
태화는 당황하며 세희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세희는 특유의 빠른 움직임으로 태화의 손을 쳐냈다.
그러고는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홱 돌렸다.
“……윽.”
그 모습을 본 상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태화. 교무실로 따라와.”
146. 얘가 왜 이래
“아니 울 줄 몰랐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작 울먹이는 것은 태화였다.
“평소에도 애미없네 애비없네 했어! 쟤가 오늘 이상한 거야!”
“조용히 해.”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둘은 교무실 구석에 놓인 책상에 마주 앉은 채였다. 이미 1교시가 시작된 시간이라 교무실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몇 명은 남아서 이쪽의 소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미진이.
“네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 그걸 몰라?”
“몰라! 이거 다 몰카지?! 저번처럼!”
“아니야. ……아마도.”
상호는 혀를 차고 머리를 긁적였다. 안 그래도 1학년 때문에 바쁜데 2학년에서 사고가 나다니.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그 말에 태화가 교무실을 둘러보았다.
“말해도 돼?”
“귓속말로 해 봐.”
태화가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상호는 그 내용을 듣자마자 태화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야!”
“얌마, 말을 해도 꼭……, 어떻게 패드립하고 몸 놀리는 걸 동시에 하냐?”
“끄응…….”
태화는 이마를 부여잡고 신음하다가 몸을 숙여 책상에 푹 퍼질러졌다.
그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울리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겠지.”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울렸으니까 사과해야지.”
“또 내가 사과하네.”
“이번엔 너만 잘못한 거 맞잖아.”
“……그렇긴 하지.”
태화는 팔에 볼을 대고 엎드려 있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퍼뜩 들어 상호를 바라보았다.
“쌤. 세희 생일 언제야?”
“말 안 해줬어?”
“응. 난 뭐 일이월인가 했더니 그냥 지나가서, 삼월인가 보다, 작년엔 학기 초라서 말 안 했었구나, 했는데…… 아직까지 말이 없드라.”
“그래……?”
상호는 고개를 기웃했다. 친구들한테 말을 안 했었다니. 여태 애들끼리 알아서 잘 챙겨준 줄로만 알았다.
“뭐…… 진짜 생일이 아니니까. 말하기 싫었나 보지.”
“아, 진짜 생일이 아냐?”
“그렇더라.”
천애고아라고 모두 진짜 생일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세희와 다혜의 생일이 같고, 다혜가 세희를 아는 것을 보면, 세희의 생일은 진짜 생일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갑자기 생일은 왜?”
“지났어? 올해 생일도?”
“지나긴 했어.”
“그럼 쌤은 세희 생일 챙겨줬어?”
“……어.”
정확히는 그가 챙겨준 게 아니라 세희가 알아서 챙겨간 거지만.
상호는 말해주면서도 불안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너 설마…… 세희 진짜 생일 모른다고 놀리려는 거 아니지?”
“아니야! 날 뭘로 보는 거야.”
태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그냥 넘어갈 순 없잖아. 뭐라도 해줘야지.”
“뭐라도 해준다는 게 설마 몰카는 아니지?”
“맞는데?”
상호의 머리가 아뜩해졌다.
“……세희 울리지 마.”
“안 울려. 내가 걔 같은 줄 알아?”
“생일을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아. 괜히 이상한 짓 했다가 사이 더 틀어지지 말고.”
그 말에 태화가 상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호는 그 꿰뚫는 듯한 눈빛에 살짝 당황했다.
“뭐, 왜.”
“쌤도 그래서 안 알려주는 거야?”
“대충 그렇지.”
그의 생일은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애초에 쌤 생일은 쌤 친구들도 몰라.”
“민정 쌤도? 수녀 쌤도?”
“모르지.”
직접 알려준 사람은 딱 한 명. 하지만 지금은 이 세상에 없다.
물론 극비사항 같은 것은 아니라서, 학교 인사 관련 업무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의 생일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마 해련은 알고 있을 터.
태화의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고정된 채였다.
“저번에 쌤 집에서 본 사진 있잖아. 그 언니는 알고 있었어?”
상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태화도 예경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알았지, 그 사람은.”
“그럼 쌤 생일을 알아내면 쌤 애인이 될 수 있는 거야?”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집합과 명제는 배우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 텐데. 상호는 멍하니 눈만 끔뻑거렸다.
태화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딱 기다려. 내가 알아낼 테니까.”
“……그래. 알아서 잘해 봐.”
시간이 많이 지났다. 상호는 시계를 흘끗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세희한테 사과하고. 몰카를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하고. 친구 사이에도 선이 있는 거야.”
“선은 걔도 많이 넘었는데.”
“그만큼 너도 넘었어, 임마. 너 몰카 뭘로 할 거야? 설마 그대로 되돌려주려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그거 해봤자 속지도 않고 재미없잖아.”
“그럼?”
상호의 물음에 태화가 씩 웃었다.
“다 생각이 있어.”
* * *
“미안해.”
별로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태화는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다리를 건들거렸다. 1년 전 정확히 그 위치에서.
“너 기분 나쁘라고 한 말 아니었어.”
세희는 가만히 복도의 창문만 쳐다보았다.
저렇게 사과하면 기분이 더 나빠진다는 걸 모르는 걸까. 성의도 없고, 진심인지도 모르겠고.
계속 싸우기는 싫지만, 버릇을 고쳐주겠다는 마음이 더욱 강했다.
“그러시겠지.”
그래서 퉁명스러웠다.
“넌 항상 그렇잖아. 조용히 있으면 더 짜증나게 굴고. 화를 내면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 떤다며 이상한 애 취급하고. 그런 식이지.”
늘 그래왔다.
“사과해도 똑같아, 넌. 이젠 안 믿어.”
세희는 그렇게 말하며 태화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벽에 기대고 있던 태화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래?”
빨간 눈동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너.”
코앞까지 다가와서도 태화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세희는 물러서려 하지 않았지만, 태화가 몸을 부딪치며 밀어붙이는 통에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다.
곧 등에 벽이 닿았다.
태화의 손이 세희의 얼굴 바로 옆의 벽을 세차게 후려쳤다.
짜악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 거리가 어찌나 가까운지, 눈동자에 비친 눈동자가 다시 비칠 정도로, 뜨겁게 달군 숨이 서로의 입속에서 섞일 정도로.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태화가 속삭였다.
“너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아, 몰라?”
세희의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아니, 이 말을 하는 저의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내가 좋아하는 걸 모르겠냐고.”
태화의 입술은 말을 끝내도 살짝 벌어져 있었다.
좋아한다. 그 말의 뜻을 세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전적 정의는 알고 있지만.
그게 대체 왜 이 상황에서 나오는지.
세희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붉은빛이 일렁였다.
“……너 뭐 잘못 먹었어?”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태화는 늘 그렇듯 뻔뻔스럽게 또렷한 붉은 눈동자로, 그 속에 검은 그림자를 번득이며, 세희를 벽으로 더욱 밀어붙였다.
이젠 아주 온몸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내가 이상해 보여?”
태화가 세희의 귀를 핥으며 속삭였다.
“니가 이상하게 만든 건데?”
그러고는 부드러운 뺨을 문지르며 뜨거운 숨을 귀에 쏟아냈다.
“니가 꼬셔 놓고, 왜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평소에 그렇게 맘대로 만져 놓고, 왜 내가 달아오르니까 미친년 취급해?”
세희의 등골에 소름이 쫙 올랐다.
“……!”
퍽
태화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세희는 태화를 밀쳐낸 자세 그대로 숨을 몰아쉬었다.
“……미쳤지?”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진짜…… 싸우자는 거야? 사과한다면서, 또 장난을 쳐?”
“남의 진심을 장난이라고 하네.”
태화가 뒤돌아섰다.
“계속 그렇게 살아~. 장난치면 울고, 사과하면 화내고, 고백하면 밀치고. 차암 편해 보이네.”
그 말을 끝으로 태화는 교실에 들어갔다.
남겨진 세희는 황망히 귀에 남은 타액을 닦아 냈다. 손끝에 묻은 미지근한 액체가 퍽 징글맞았다.
‘쟤가 왜 저러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에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긴 했지만. 방도 같이 쓰고, 잠도 같이 자고. 옷까지 나눠 입고. 꼬리도 만지고.
하지만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거짓말이겠지.’
놀리는 것이다. 항상 그래왔듯.
세희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교실로 뒤따라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