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날이 지나 2월.
상호는 미진과 함께 교무실에 출근해 있었다. 내일 있을 입학설명회를 준비해야 했기에.
그는 자리에 앉은 채로 미진을 돌아보았다.
“떨리거나 하진 않죠?”
“네.”
“그럴 줄 알았어요. 준비는 알아서 다 했고?”
“네.”
미진이 쌀쌀맞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자리에서 설미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상호 씨, 상호 씨.”
“아, 네. 설미 선생님.”
“이번엔 안 그럴 거지?”
“……아.”
작년 입학설명회 때 일을 말하는 것이다. 상호는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겠죠.”
“하지 마.”
설미가 눈을 치떴다.
“상호 씨 이제 그런 사고 안 친다고 사람들한테 말해 놨단 말이야. 그때 그거 이후로 나한테 엄청 혼났다고. 안 그런다고 약속했다고. 무슨 말인지 알지?”
“알죠.”
미진이 눈을 끔뻑였다.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응? 있었지. 상호 씨가 아주 그냥 강당을 뒤집어 놨었지.”
“……그 이야기는 그만 해요.”
상호는 설미의 말을 끊고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안 그럴 테니까.”
“그럼 다행이고……. 정말 안 그럴 거지? 미진 씨도 있는데 선배로서 잘 좀 해봐.”
“그럴게요.”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 번째 보는 풍경이었다.
상호는 단상에 동료 교사들과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생기발랄한 아이들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부모들을.
빼곡하게 줄지은 의자에 앉아서, 기대와 불안을 적당히 섞어 담은 눈동자.
상호는 그 눈동자들을 살폈다.
‘누가 우리 반에 오려나…….’
“……이어서, 본교의 교직원들을 소개드리겠습니다.”
단 앞쪽에 서 있던 해련이 뒤로 물러났다.
이어서 교사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서서 본인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이번에도 상호의 차례는 설미 다음이었다.
“……안전하게 가르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설미가 정령들을 돌려보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상호에게 다가와 마이크를 건넸다. 그녀의 눈빛이 제법 날카로워졌다. 포근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잘해.”
“예.”
상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이미 한 번 해본 일이지만, 청중 앞에 나서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마이크를 입에 가져갔다.
“어…… 크흠. 본교에 2년차 재직 중인 B급 헌터 강상호입니다.”
객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호는 안대와 검에 몰려드는 시선을 느끼고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 뭔가 목소리의 분위기가 달랐다.
“저 선생이야? 1학년 1등 반이?”
“마법사랑 신앙인도 가르친대요.”
“엄청 무서워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여보, 어때요?”
“근데 B급이야? 허어…… 신기하네.”
내용도 사뭇 달랐다.
상호는 단상 뒤쪽에 서 있는 설미를 곁눈질했다. 설미는 그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똑바로 해, 라는 듯이.
‘그래도 그 말은 해놔야 하는데…….’
약속했으니 어쩌랴. 상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특기는 무예고, 무기는 검이고……, 음, 하여튼간에.”
말하다 보니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상호는 품어왔던 말을 꺼냈다.
“처맞을 학생만…….”
“상호씨이이이이!”
* * *
각오가 된 학생만 받는다. 그 기조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설명회는 이제 어제의 일이 되었고, 오늘부터는 신청서가 들어올 터였다. 상호는 교무실 책상에 놓인 두 장의 신청서를 내려다보았다.
하나는 이츠키.
하나는 은율.
‘이미 정해놨다는 듯이…….’
아침부터 학교에 투척하고 갔다.
그는 신청서를 쓱 훑었다. 특별한 문제가 생기진 않았나 싶어서. 다행히 그런 것은 없었고, 그는 신청서를 보관하기 위해 책상 서랍을 열었다.
맨 위에 놓인 세희의 신청서가 눈에 띄었다.
‘아.’
상호는 그 종이를 보고 흠칫했다.
세희의 생일. 2월 17일.
‘얼마 안 남았네.’
뭘 사줘야 할까. 상호는 서랍을 닫으며 고민했다.
‘내공이나 줄까? 너무 날로 먹나? ……아.’
그러고 보면 세희 방에는 찾아간 적이 없었다.
직접 가서 뭔가 필요한 것이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 기숙사로 향했다.
* * *
작년엔 이화관이 1학년, 백합관이 2학년, 목련관이 3학년 기숙사였다.
이제는 1년이 지나 목련관이 1학년, 이화관이 2학년, 백합관이 3학년. 목련관은 새로 들어오는 1학년 때문에 꽤나 소란했다.
상호는 이화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태화 때문에 자주 드나들어서 이제는 거리낌이 없었다.
‘세희 방이…… 태화 옆방.’
그는 세희의 방문을 두드렸다.
“세희야. 선생님.”
그러자 안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벌컥 열리고 세희가 나왔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서, 선생님? 웬일로…….”
“그냥, 어떻게 지내나 보려고. 들어가도 돼?”
“네, 네. 들어오세요.”
상호는 쩔쩔매는 세희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보다는 작은 방. 부엌이라고 부를 곳은 없고, 침대, 책상, 옷장. 그리고 에어컨, 냉장고. 빨랫대.
전체적으로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뭘 더 놓을 것도 없고, 바꿀 만한 것도 없었다.
‘어떡하지?’
상호는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을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세희야, 뭐 필요한 건 없어?”
“필요한 거요?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세희가 그의 옆에 앉으며 눈을 깜작였다.
더 캐물었다가는 생일선물 때문인 걸 들키겠다. 상호는 그쪽으로는 더 묻지 않았다.
“은율이 우리 반 오더라. 들었어?”
“네.”
“이츠키도 왔고. 이제 검술 연습할 친구가 늘겠네.”
“네.”
세희는 살짝 웃었다.
상호는 초조해하며 몸을 꿈지럭거렸다. 세희가 뭘 원하는지, 뭘 필요로 하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꺼낼 말이 많지 않았다.
“태화랑은 잘 지내고?”
“늘 똑같죠. 근데 이츠키가 오고 나니까…… 자주 삐지는 것 같아요.”
“그래?”
“네. 이츠키랑 둘만 있으면 자기 안 불렀다고 삐지고…… 뭐, 평소에도 그랬던 것 같긴 해요.”
“그렇구나.”
상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희는 그를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응?”
“저는 생일 신경 안 써요.”
들켰다.
상호는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선물 받으면 좋잖아.”
“진짜 생일은 아니니까요.”
혈육 하나 없는 천애고아. 진짜 생일을 알 방법은 없다.
세희가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어차피 많이 받았으니까요.”
“그래도 생일이 있긴 있어야지.”
상호는 세희의 뺨을 살며시 꼬집었다.
“그래야 태어난 걸 축하할 거 아냐. 다른 사람들도 1년에 한 번씩 다 하는데.”
“굳이 고르라면…….”
세희가 빙긋 웃었다.
“선생님 만나는 날이 생일이에요. 하루하루가…….”
“그럼 매일 선물 사줘야 되겠네?”
상호도 따라 웃었다.
그의 말에 세희가 잠시 스스로의 입과 코에 손을 얹었다.
“선생님.”
“응?”
“저 받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눈 감아 보세요.”
상호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선물을 주고받는 입장이 뒤바뀐 것 같기도 했다.
세희가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잘 감고 계세요.”
“응.”
“손은 저한테 주시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그의 손을 감쌌다.
대체 뭘 해달라는 걸까. 상호는 눈을 감은 채로 기다렸다.
순간, 그의 입술에 바람이 닿았다.
따뜻하고 촉촉한 숨결이.
‘……어?’
상호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하지만 때는 늦어서, 이미 세희의 입술이 그의 입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세희가 입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됐어요. 받았어요.”
총알보다 빠르게 들이박혔다. 상호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세희를 바라보았다.
망치로 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했다.
“……세희야, 이거…… 안 돼…….”
“괜찮아요.”
“너무 빨라…….”
“저 빠른 거 좋아하잖아요.”
쾌검에 미친 아이.
세희는 멍하게 굳어 있는 상호의 손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처음이라…… 잘 됐는지 모르겠어요.”
“……응?”
“내년엔 더 잘해볼게요.”
“아니…….”
상호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푹푹 배어 나왔다. 대체 어쩌다가 입까지 맞추게 된 건지. 입술에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문이 벌컥 열렸다.
“세희, 아르바이트 가기 전에 식사 같이…….”
이츠키는 방으로 들어서다가, 침대에 꼭 붙어 앉은 상호와 세희를 보고 멈칫했다.
그녀의 눈이 끔뻑거렸다.
“……이래서 같이 사는 거였습니까?”
상호는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이거는, 오해야…….”
“아, 그럼 이양도 그렇고 그런……. 이해했습니다. 제 수강신청서는 꼭 찢어 주시는 겁니다.”
“아니라고…….”
“저는 돌아가는 비행기나 찾아보겠습니다.”
이츠키는 눈은 매섭고 입은 웃는, 묘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혀를 쏙 내밀고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세희야, 올해부터는 진짜 이러면 안 돼……. 새로 온 애들이 보면 큰일 나…….”
“걔들한테 뺏기기 전에 제가 가질 거예요.”
세희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걱정 마세요. 제가 전교에서 제일 빠르니까.”
“그래서 걱정이야…….”
상호는 한숨을 푹 쉬며 세희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 사달이 나도 밀어내질 못하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애들한텐 말하지 마. 선생님 죽는다.”
“제가 지켜드릴게요.”
“아니, 지킬 수 있어도 절대 말하지 마…….”
“그러면…….”
세희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이 제 말 잘 들으셔야겠네요?”
“끄응…….”
상호는 침음하며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그렇게 착하던 세희가 어느새 이렇게 약아졌는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139. 낯선 아이들
책상에 신청서가 쌓여갔다.
“제대로 확인은 하고 계세요?”
미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상호는 두터운 종이 뭉치를 흘겨보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다른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짬날 때마다 하죠.”
“그런 것치고는 줄어드는 것 같지가 않은데요.”
그 말이 맞았다.
신청서가 백 부가 넘게 왔다. 1등 반이라고, 그것도 특기 상관없이 고루고루 받는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난 모양이었다.
일단 도저히 가르칠 방법이 없는 주술과 신앙 지망은 싹 쳐내고, 마법사도 특이한 몇 명을 제외하면 전부 퇴짜를 놓았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남은 것이 50명.
‘기준을 뭘로 잡아야 하나.’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상호는 이마를 짚고 고민에 빠졌다.
작년엔 꼴랑 세 명이 와서 쳐내고 자시고가 없었는데, 이렇게 신청자가 많아지니 반드시 솎아내기는 해야겠는데 어떤 기준으로 아이들을 선별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다른 반은 어떻게 하지?’
상호는 몸을 뒤로 쭉 빼서 설미를 돌아보았다. 설미가 기척을 알아채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왜? 상호 씨.”
“설미 선생님은 학생 뽑는 기준이 뭐예요?”
“나? 나는 뭐…… 일단 성적 좋은 애들 뽑고. 그다음엔 선착순이려나. 일찍 신청한 애들은 나를 잘 따라올 테니까.”
설미가 상호의 신청서 더미를 흘끗했다.
“근데 보통…… 상호 씨처럼 몰릴 일은 없지. 보통은 열 장 안팎이니까. 적당히 뽑고 다른 선생님들이랑 조정하고 하면 되는데…… 모르겠네. 상호 씨 같은 경우는.”
“그런가요.”
상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미도 딱히 묘안이 있지는 않은 듯했다.
마침 건흠이 교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미진 씨. 잠깐 일 좀 봐줘요.”
미진은 말없이 그의 자리에 앉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호가 다가가자 건흠이 고개를 들었다.
“아, 강 선생.”
“다혜는 괜찮아요?”
“어, 잘 지내. 여전히 말은 못 하지만…….”
“학년은 어떻게 됐어요?”
“유급했어. 2학년.”
상호는 생각에 잠겼다. 2학년. 아이들과 같은 학년.
다혜의 단전에 쌓인 엄청난 내공과, 세맥에 쌓인 더 강대한 용혈. 그리고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실전 경험.
아직 붙여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못 이긴다. 절대로.’
이사장과의 내기는 끝났으니 반드시 1등을 할 필요는 없지만, 연말평가 때 아이들에게 말했던 대로 10등 안에 들려면 누구를 상대로든 이길 실력이 있어야 한다.
다혜를 16강전에서 만나든 64강전에서 만나든, 때에 상관없이 이길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노력해야지, 뭐. 별수 있나.’
상호는 생각을 정리하고 건흠에게 물었다.
“주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응? 뭔데.”
“주 선생님은 신입생 뽑을 때 어떤 기준으로 뽑으세요?”
건흠은 고개를 기웃했다.
“신입생? 뭐, 나는…… 역시 선착순이지. 어차피 신청서만으로 사람을 알 수는 없고…… 또 맘에 드는 학생만 골라 받는 것도 선생으로서 옳은 일은 아니니까.”
“역시 그렇죠?”
“응. 어지간하면 가려 받지 않는 것이 좋지.”
“하긴…….”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선착순이 제일 공정한 걸까.
그런데 건흠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그래도 강 선생은 실력에 자신이 있을 거 아니야?”
“그렇죠.”
건흠에게는 실력의 편린을 보여 줬다. 실제 성적도 상호의 반이 1등이고.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건흠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 기준은 어때?”
건흠이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상호는 모니터를 보았다.
모니터에는 다혜의 인적사항이 띄워져 있었다.
‘부’라고 적힌 칸은 공란.
‘모’라고 적힌 칸도 공란.
상호는 그 여백을 보며 깨달았다.
“자네를 더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건흠이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다혜 같은 경우가 더 생기지 않도록.
더 필요하고, 더 간절한 순서대로.
“감사합니다, 해결됐습…….”
상호는 고개를 숙이다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건흠이 의아해했다.
“뭐야, 왜 그래.”
“……아니요.”
2월 17일.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아무튼 감사합니다.”
“말 몇 마디 한 게 전부인데 뭐. 도움이 됐으면 다행이고.”
건흠이 손을 흔들었다. 상호는 돌아서며 생각에 잠겼다.
나이가 다르니 쌍둥이일 수는 없다.
둘 다 고아인 것을 미루어 보면.
‘같은 보육원 출신인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서로 얼굴을 알지도 모른다.
상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자 미진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일 다 끝내놨습니다.”
“아, 고마워요.”
“오래 걸릴 일이 아니던데요.”
“미진 씨가 유능한 거죠.”
상호는 가볍게 흘려 넘기고 자리에 앉아 신청서를 분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