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상호는 한가롭게 교정을 돌아다니다가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여섯 시.
세희가 한창 알바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밥은 잘 챙겨 먹나……?’
그는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걸어서 10분쯤이면 도착하는 거리. 다리를 절어도 15분이면 갈 수 있었다.
‘여기인데…….’
그는 모퉁이에 놓인 편의점을 들여다보다가 멈칫했다.
계산대에 서 있는 건 세희가 맞는데, 그 앞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 여인 옆에는 패딩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딱 보니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였다.
아마 모자 관계일 것이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년이 싸가지가 없이! 네가 우리 아들한테 욕했다며!”
“아닌데요.”
“어디 어른한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고 대들어?! 니가 여기 점장이라도 돼?”
“아닌…… 아.”
세희의 눈동자가 잠시 상호를 향했다가 다시 여인을 노려보았다.
상호는 일단 모르는 척하고 진열대에서 물건을 고르기 시작했다. 세희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고 싶어서.
곧 세희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아들이 담배를 사려고 했다구요.”
“어디서 거짓말을 지어내? 우리 아들이 그런 애로 보여?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상호는 여인의 아들을 흘끗했다. 딱 봐도 필 만한 관상이었다.
‘주변에 남자 다니는 고등학교가 없는데…… 안 뚫려서 멀리까지 원정 왔구만.’
꼴을 보아하니 어제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굳이 다시 찾아올 이유가 있었을까. 왜 하필 이곳일까.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거절을 당했을 텐데.
필시 이유가 있을 터.
‘세희가 만만해 보이는 건가.’
아마 그런 것 같았다. 꼬투리를 잡아서 담배 셔틀로 쓰려는 게 저 남학생의 계획인 듯했다.
그리고 여인은 착실하게 그 계획에 이용당하고 있었다.
“여기 점장 어딨어? 점장하고 이야기할게. 너처럼 알바나 하는 년하고는 말이 안 통해. 점장 불러.”
“점장님은 바쁘세요. 그리고…… 다른 손님들한테 방해되니까, 이만 나가주세요.”
“나가? 손님한테 나가라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구나? 아니, 아예 집에서부터 못 배워먹은 건가? 하, 참나…….”
여인이 세희를 노려보았다.
“넌 뭘 믿고 그렇게 뻔뻔한 거야? 네가 잘못해 놓고 어디 뺀질뺀질한 쌍판을 들이미냐고.”
“더 할 말 없어요. 아주머니 아들이 담배 사려고 했고, 난 못 판다고 말한 것뿐이에요. 정 의심스러우면 증거를 찾아서 경찰에 넘기시든가 하시고. 지금은 나가 주세요.”
“이년이 끝까지!”
여인이 세희의 땋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세희는 그 손에 이끌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몸이 가벼워서 더욱 그랬다.
검을 짚은 상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몇 살이야? 어느 학교 다녀?”
“아주머니는 어느 학교 나오셨는데요.”
“야, 너 남의 엄마한테 말이 왜 그따구야?”
이제는 아들 쪽까지 가세한다. 그래도 세희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러게 어머니를 왜 데려오시는데요. 어제는 성인이라고 그렇게 우기셨으면서, 오늘은 완전 어린애시네요.”
“내가 뭘 우겨? 계속 우길래? 내가 담배 달라고 언제 그랬는데? 증거 있어?”
“너 부모 번호 내놔. 네 엄마는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
“없어요.”
“없어? 아~하~. 그래서 그랬구만, 교육을 어떻게 받았나 했더니…….”
세희는 툭 내뱉듯 대꾸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으로.
“당신 같은 부모는 개도 안 가지겠는데요.”
그 말에 여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목이 시뻘겋게 붉어져서는 비명처럼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미쳤나!”
상호는 높이 치켜든 여인의 손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사립학교+교사=준공무원=어쨌든 공무원 아님=세금 안 받음.
+다른 학교 학생+학부모.
=남.
마침 눈앞에 적당한 물건이 보였다. 알이 실한 건빵 봉지. 상호는 그걸 덥석 집고는 욕을 걸쭉하게 내뱉었다.
“야, X벌련아.”
건빵 봉지가 허공을 날았다.
135. 충돌과 가속
빠악
건빵 봉지가 여인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과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충격이었다. 여인은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고 뒤를 홱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빛은 곧 사그라졌다.
“윽…….”
안대를 쓴 사내가 칼을 잡은 채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 있었어도 그 앞에서는 분노조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 예요, 당신.”
“손님이다.”
상호는 내공을 뻗어 세희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채 꺼내지 못하고 있던 말을 마저 이었다.
“X벌연놈들아.”
“그, 그쪽은 뭔데 참견을…….”
“계산을 해야 할 거 아냐, 가게에 사람이 들어온 게 안 보여?”
그는 내공으로 세희를 돌려세우고 검으로 진열대를 후려쳤다.
안 그래도 어제 뚜껑이 열릴 뻔했는데, 오늘 말도 안 되는 꼴을 보고 있으니 복장이 터져서 속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내가 시바 옆에서 보니까 말이 안 통하드만. 그래서 나도 말을 안 해야겠어. 그만 짖고, 꺼져. 개새끼들아.”
상호의 검지가 여인과 남학생을 차례로 가리켰다.
“오늘 이후로…… 둘 중에 하나라도 이 동네에서 보이면. 다른 한쪽 눈앞에서 회쳐버릴 거니까 그리 알아. 아니, 이 편의점에 그 어떤 보복이라도 했다가는…….”
상호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지랄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네.”
그러자 여인과 남학생의 몸이 확 접혔다.
마음 같아서는 뒤로 접어버리고 싶었지만, 예경이 생전에 부탁했던 것 때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여인과 남학생은 허리를 숙인 채로 진땀을 흘렸다.
“읍…….”
내공이 입을 막고 있었다.
상호는 둘의 주변을 천천히 거닐었다.
“말이 안 돼. 말이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둘 다 증거가 없는데. 먼저 손찌검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돼. 왜 그랬던 거야? 당신 아들 말이 진리야? 아니면 그냥 화가 나서 그런 거야? 화가 나서 그랬다면, 저 알바가 화가 나서 당신을 때려도 받아들였을 거야?”
둘은 그저 허리를 숙이고 몸을 덜덜 떨었다. 맞설 수 없는 힘 앞에 굴복할 뿐이었다.
상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건빵 봉지를 집어 들었다.
“나도 지금 화가 많이 났는데, 한 번 때려볼까? 이 건빵으로? 아님 칼로? 한번 말해 봐.”
입을 막은 내공이 사라졌지만, 두 사람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상호는 혀를 차며 건빵을 계산대 위에 던졌다.
“당신이 저 여자애 때리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 지랄 안 났어. 조용히 꺼져. 칼로 때리기 전에.”
그리고 둘을 묶은 내공을 풀었다.
여인과 남학생은 부리나케 편의점 밖으로 도망쳤다. 문에 달린 종이 시끄럽게 짤랑거렸다.
상호는 지갑을 꺼내고 세희에게서 내공을 거뒀다.
“세희야. 끝났어.”
“……아.”
세희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고는, 행패를 부리던 모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입가에 살짝 웃음이 걸렸다.
“감사합니다.”
“잘 됐는지 모르겠다.”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또라이들은 하지 말라면 더 하니까. 또 찾아올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되면 선생님한테 말해. 꼭.”
“네.”
세희가 빙긋 웃었다.
“되도록이면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꼭 말해. 그게 선생님 편하게 만드는 거야.”
상호는 계산을 마치고 건빵을 들었다.
“갈게. 오늘도 잘하고 와.”
“네.”
그는 손을 흔드는 세희를 뒤로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그렇게 걸어서 학교로 돌아가려는데, 도로 저편에서 경찰차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뭔 일이 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가던 길을 가는데, 그 경찰차가 그의 옆 갓길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경찰들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헌터님!”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예?”
* * *
‘아니 영장도 없이…….’
상호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방을 둘러보았다. 잡혀온 곳은 헌터 관리국 소속의 경찰서.
그의 앞에는 머리를 짧게 깎은 다부진 체격의 여경이 앉아 있었다.
“폭행 및 협박으로 신고당하셨습니다.”
“거 건빵 좀 던졌다고 폭행입니까?”
“신고가 그렇게 들어왔다는 거예요. 따지는 건 나중에 하시고.”
여경이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일단 헌터증부터 주시겠어요?”
상호는 군말 없이 헌터증을 꺼내 내밀었다.
“강상호 씨, B급…….”
여경은 다시 키보드를 짧게 두드리고 말을 이었다.
“언제 있었던 일인지 아세요?”
“오늘 아녜요?”
“예. 맞아요. 어떤 일인지 아시겠네요. 설명해 주세요.”
“제가 교육자라서.”
“……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교육하는 병이 있습니다.”
상호의 말에 여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장난치지 말고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그 아줌마가 알바생을 때리려고 하길래. 막다가 좀 다툼이 생긴 것뿐이에요.”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여경은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상호를 뜯어보다가, 엷은 한숨을 쉬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래도 헌터 아닙니까. 칼 차고 민간인한테 힘을 쓰다뇨.”
“막은 거라니까요. 강한 사람이 막는 게 당연한 거죠. 그게 위협이 됐든 뭐가 됐든 간에.”
“검찰에 송치할 거예요.”
“에이, 한 번 봐줘요.”
봐달라고는 하지만 상호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있었다. 여경도 그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기웃했다.
“……어쨌든, 조서나 쓰세요.”
* * *
“조사 다 끝났어요.”
여경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상호는 소파에 누워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깍지로 머리를 받친 채로 자는 척을 할 뿐.
참다못한 여경이 빽 소리쳤다.
“아저씨! 가시라고!”
“아이, 좀 기다려 봐요. 기다리면 알아.”
상호는 빈둥거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러자 때마침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섰다.
경찰 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와 도현이었다. 도현은 상호를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어휴…….”
한숨만 쉴 뿐.
도현을 알아본 헌터 관리국의 경찰들이 벌떡 일어났다. 잔뜩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서, 서도현 헌터님.”
“아, 예. 수고하십니다.”
도현은 경찰관들을 바라보며 상호를 가리켰다.
“이 헌터는 저희가 데려가서 조사할 테니까, 검찰 송치하지 말고, 기록도 다 파기하세요. 싹 다.”
“아…… 네.”
여경은 도현과 함께 들어온 중년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상호를 째려보았다.
“갑시다.”
상호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부협회장님.”
“뭐요.”
“부탁 하나만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뭔데.”
상호의 손에서 종이 한 장이 팔랑거렸다.
“이거, 그 신고자들한테 좀 부쳐 줘.”
* * *
상호는 도현과 함께 경찰서를 나왔다. 일곱 시에 잡혀 와서 두 시간쯤 눌러앉다 보니, 어느새 하늘에 훤한 달이 떠 있었다.
도현이 상호를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얌마, 내가 사람 때렸다고 너도 사람 때리냐.”
“안 때렸어. 그냥 좀 겁만 준 거야.”
“편지엔 뭐라고 썼어?”
“주소 알고 있으니까 또 만나면 죽인다고.”
“미친 새끼…….”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난 내 제자 지키려는 것뿐이야.”
“제자? 애들 때문이었어? 정확히 무슨 일인데.”
“우리 애가 알바하는 곳에서 진상을 부리더라고. 아줌마랑 아들이었는데…… 그 아들놈이 어제 담배를 사려고 왔나 봐. 그래서 우리 애가 안 주니까 엄마 데리고 오늘 찾아왔더라고.”
상호는 킬킬 웃었다.
“아마 꼬투리 잡고 두고두고 담배 팔아줄 호구로 만들려고 했겠지. 그것만 해도 빡치는데…… 그 아줌마가 우리 애 때리려고까지 해서. 손 좀 봐줬어.”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냐. 그럼 어쩔 수 없지. 밥은 먹었냐?”
“아니.”
“먹으러 가자.”
둘은 도현의 차로 향했다.
* * *
째앵
잔이 부딪혔다.
상호는 술을 홀짝이고 식탁에 내려놓았다. 식탁 가운데에서는 고기가 지글거리며 기름을 흘리고 있었다.
도현이 고기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너 나로 사장하고는 자주 만나냐?”
“자주는 아니지. 형누나들 보는 만큼 보지.”
“그래? 민정이는?”
“그저께도 만났어.”
“효은이랑은 계속 괜찮고?”
“잘 지내지.”
“다행이네.”
도현은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상호는 그걸 알아차리고 물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밥도 안 먹고.”
“상호야.”
도현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다가 말을 이었다.
“너밖에 물어볼 사람이 없다.”
“뭔데?”
“너 다리 요즘 괜찮냐?”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다리는 왜 묻는 걸까.
“딱히? 뭐 별다를 건 없었는데.”
“그래……?”
도현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상호는 고기를 뒤집으며 물었다.
“뭔데 그러는데? 속시원히 말을 해 봐.”
“속도가 좀 빨라졌어.”
“……속도?”
속도라면 하나밖에 없다. 상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몇 명 짼데?”
“247명.”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반년도 안 됐는데 50명 가까이 늘었다. 상호는 조용히 그 숫자를 곱씹다가 중얼거렸다.
“그 정도는 우연일 수도 있잖아.”
“글쎄, 우연일까? 물론 확신은 할 수 없지.”
도현은 답답한지 술을 쭉 들이켰다.
“그래도……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사소하게 넘길 문제가 아니니까. 만약 평소랑 다른 게 느껴지면 바로 말해.”
“알았어, 더 신경 써 볼게.”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광경이 있었다.
가부좌를 튼 사내의 뒷모습과, 그 앞 제단에 놓인 수백 개의 촛불들.
“……형.”
“응?”
“그 주술. 더 이상 그 인간이랑은 상관이 없는 거지?”
도현이 살짝 당황했다.
“영주…… 말이지? 그렇다고 들었는데. 자기는 더 이상 상관이 없고, 그 악마 놈이랑 그 사람의 영혼에 달린 거라고…… 했었지.”
“……그런가.”
“그건 왜?”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 인간이 다른 주술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 건 아닌가, 싶어서.”
“그건 아닐 거야. 아마도.”
“확신은 못 하잖아.”
“……그렇지.”
도현은 잔을 들었다.
“그저 바라는 수밖에 없지. 그런데…… 상호야.”
“응?”
눈을 끔뻑이는 상호에게 도현이 말했다.
“나는…… 그런 불확실한 바람이 아니라, 만약에. 희생자를 단 한 명이라도 줄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수단 따위 가리지 않고…… 그 방법을 택할 거다.”
“그렇겠지.”
많이 힘든가 보다. 상호는 그렇게 여기고 잔을 마주 들었다.
“그 방법…… 꼭 찾아.”
어차피 도현과 자신의 뜻이 갈릴 일은 없을 테니까.
곧 두 사람의 잔이 부딪혔다.
* * *
거하게 마시고 돌아오니 세희와 태화가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집이 되어 버렸다.
상호는 건빵을 오도독거리며 외투를 벗었다.
‘학기 시작하고도 이러진 않겠지?’
그리고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애들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세희와 태화의 사이에 몸을 뉘었다. 꼭 거기 누우라는 듯 자리가 비어 있었기에.
그가 이불에 들어가자 태화가 웅얼거렸다.
“아빠 술 먹었어?”
상호는 당황하며 작게 속삭였다.
“아빠 아냐.”
“강태화 아빠 아냐?”
“…….”
옆에서 세희가 살며시 눈을 떴다.
“강세희예요.”
“……그래.”
상호는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그가 세희를 향해 돌아눕자마자 태화가 등짝을 후려쳤다.
쫘악
“편애 금지!”
“얌마, 잠도 제대로 못 자냐…….”
“이쪽 보고 자.”
“그래…….”
그래서 몸을 반대로 돌렸더니, 이번엔 세희의 손이 등에 살며시 얹혔다.
“저 일하느라 힘들었어요.”
“……응.”
“위로해주세요.”
“응…….”
상호는 똑바로 누우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딸이라는 것들이 아버지를 굴려 먹고 있으니.
아니, 아버지든 선생이든, 오빠든 연인이든. 이렇게 구르기만 했다가는 서러워서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았다.
“너희는 언제 어른되냐…….”
“우리가 어른되면 쌤 못 버틸걸?”
태화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밤마다 울게 만들어줄게.”
“…….”
상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136. 엎치락뒤치락
[우째 문자를 한 달 내내 씹습니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귀를 꿰뚫었다.
핸드폰이 폭발하기라도 한 줄 알았다. 상호는 덜덜 떨며 간신히 대답을 지어냈다.
“미안해, 지윤아……. 내일, 내일 선물 많이 들고 갈게…….”
[찾아오지 마이소! 꼴도 보기 싫심더. 오면 궁디를 발로 차뿌릴 텡게 그리 알아예!]
“차도 되니까…… 내일 갈게…….”
[아들이 말 안 했습니꺼?]
“응. 아무도 말 안 해줬어…….”
[이 썩을 가시나들을 그냥!]
화가 많이 났을까. 만나면 진짜로 한 대 때릴 기세였다.
상호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내일 보자, 지윤아…….”
[각오하이소.]
전화가 뚝 끊겼다.
대체 뭘 사 가야 지윤의 화가 풀릴까. 고기일까, 과일일까, 통조림일까.
‘……그냥 다 사자.’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