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크네.’
태화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법학회보다는 낮지만 옆으로는 훨씬 더 넓었다. 초고층 건물인데도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확한 직사각형으로 비석처럼 세워진 건물.
이곳이 바로 한국 헌터들의 총본산.
‘쌤도 한 번쯤은 여기 왔겠지?’
태화는 건물을 한 번 쓱 훑어보고 입구로 향했다.
주변 허공에 무언가 기척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흐릿한 정령들이 건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주술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검색대 같은 건가. 삼엄하네.’
안으로 들어서자 널찍한 공간을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다. 대부분이 무기를 찬 헌터들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어디 있을까.
‘66층이랬지. 순간이동 20번? 30번? 그쯤이면 가려나. ……어라?’
마법이 써지질 않았다.
태화는 흠칫하다가 자신이 결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어떤 결계인진 모르겠으나, 아마도 마법을 막는 결계.
마법이 없으니 살짝 불안했지만, 그래도 여긴 헌터 협회다.
‘엘리베이터나 찾자.’
건물이 넓어서 그런지 잘 보이질 않았지만,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66층을 누르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 기다렸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뿔로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곧 문이 열리고, 태화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여긴가.’
융합체의료연구소.
온통 하얀 곳이었다. 병원보다는 정신병원이 연상될 만큼.
태화는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다란 복도를 걸어갔다.
‘어디로 가야 되는 거야?’
복도 양옆으로 문이 여럿 있지만, 전부 닫혀 있었다.
끝까지 걸어가도 카운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병원이 아니라 연구소라서 그럴까.
태화는 결국 문을 하나 골라서 두드렸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이었다.
“계세요?”
잠시 후에 대답이 들려왔다.
여자 목소리.
“누구시죠?”
“저어, 그……, 앱에서 광고 보고 왔는데요.”
“아, 잠시만요.”
곧 문이 열리고 여인이 걸어 나왔다.
꽤 나이가 들었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동그랗게 묶은 머리는 푸석푸석했고, 그 아래로 기묘할 정도로 실그러진 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꼭 하회탈처럼 구부러진 눈웃음.
그 사이로 눈동자가 반짝였다. 태화의 머리 위를 향해서.
“잘 왔어요. 채혈하러 왔죠?”
“네.”
“따라와요.”
여인은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태화를 지나쳐 복도를 걸어갔다. 태화는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방에는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되게 휑한 방이다, 태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인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팔 걷고 내밀어요.”
그 말대로 하자 여인이 라텍스 장갑을 낀 후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 태화의 팔에 문질렀다. 그리곤 책상 서랍에서 텅 빈 채혈용 주사기를 꺼냈다.
태화는 팔에 꽂히는 주사기를 보며 물었다.
“뭐에 써요? 실험이에요?”
“그냥 연구예요. 악마 융합체랑 보통 사람이랑 얼마나 다른지.”
“돈은 언제 줘요?”
“일주일 다 하고 나면.”
피를 뽑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겨우 10ml라서.
여인은 피를 머금은 주사기를 뽑고 태화의 팔에 거즈를 눌렀다.
“멎을 때까지 눌러요.”
“끝이에요? 가도 돼요?”
“응. 내일 또 와요.”
정말 별거 없다. 의심할 것조차도 없이.
태화는 눈을 끔뻑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요.”
여인은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 주사기를 챙겼다.
태화는 방을 나와 머리를 긁적였다.
‘뭐, 나야 개꿀이지.’
돈이나 똑바로 주면 상관없다.
그녀는 휘적휘적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 *
다음 날. 태화는 다시 연구소로 찾아왔다.
방문을 두드리자 여인이 물었다.
“누구세요.”
“어제 피 뽑았는데요.”
“아.”
바삐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어제 본 여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분위기가 어째 좀 달라져 있었다.
살짝, 희열에 찬 느낌.
“들어와요, 들어와.”
“피는요?”
“뽑아야죠. 그 전에. 어제 깜빡하고 안 한 게 있더라고.”
여인은 태화를 책상 앞에 앉히고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태화는 그 종이를 읽었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 계좌.
일하고 돈을 받는 입장에서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일이라고 하기도 민망했지만.
태화는 이름을 적은 후 주소 칸으로 펜을 옮기다가 멈칫했다.
‘……귀찮은 우편이나 오겠지. 그냥 떠넘기자.’
빈칸에 중선의 주소가 적혔다.
전화번호와 계좌는 자신의 것을 적었다. 태화는 작성을 마치고 종이를 내밀었다.
여인이 종이를 책상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피 뽑으러 가요. 오늘은 좀 많이 뽑을 거야.”
“……얼마나요?”
“50미리.”
딱히 많지는 않은 양 같았다. 그래도 태화는 싫은 척을 했다.
“그러면 네 번 더 하는 거 아니에요? 돈 그만큼 줘요?”
“물론. 80만원 더 줄게요.”
여인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태화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피 좀 뽑고 280. 그것도 더 늘어날 수도 있고.
‘와…… 뭔데 이렇게 많이 줘?’
연구소에 돈이 많나 보다. 아니면 악마 융합체는 희귀하니까, 당연한 값일 수도 있다.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가요.”
* * *
뿔 달린 소녀가 방을 나갔다.
기묘할 정도로 웃는 여인, 공리주는 손에 든 주사기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그 열렬한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거야, 이거라고…… 이 아이라면 가능해.’
리주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달려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더벅머리 청년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콜록! 소장님……?”
“빨리 시험관 꺼내고 이거 보관하고 라벨 붙이고 10미리 빼고 인자충돌 테스트 준비해요.”
리주가 기관총처럼 말해도 청년은 척척 이행했다.
“라벨 이름은요?”
“이태화.”
“테스트 상대는요?”
“김준호부터.”
청년은 샬레에 태화의 피를 붓고 책상 옆에 놓인 냉장고에서 다른 시험관을 꺼내왔다. 그 시험관 또한 피가 담겨 있었다.
곧 샬레 위에서 두 명의 피가 만났다.
그러자 맞닿은 경계가 용암처럼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좀 격렬하네요.”
“한쪽이 압도적인 거지.”
리주는 어제 마법공학 현미경으로 보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악마의 인자가 많았다.
예상대로 반응이 끝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제 찍은 거랑 대조해 봐요.”
리주의 말에 청년은 현미경과 연결된 컴퓨터를 켜서 사진 파일을 찾았다. 태화의 피를 관찰하며 찍었던 악마 인자의 사진을.
찾고 나서는 샬레에 있는 피를 현미경에 올리고 대조해 보았다.
“……이태화가 이겼네요. 깔끔하게.”
“역시.”
리주는 윗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조일민 꺼내요.”
“예? 바로 거기까지 넘어가요?”
“잔말 말고.”
청년은 더 따지지 않고 두 번째 샬레를 꺼내 같은 작업을 했다. 상대하는 피만 다르게 해서.
먼젓번 것보다 훨씬 강한 악마 인자 보유 혈액이었다.
치이이익……
이번엔 반응은 느렸으나, 진한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청년은 그 연기를 보며 당황했다.
“아예 태워버리네요.”
어째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청년은 리주를 돌아보며 눈을 끔뻑였다.
“……소장님?”
리주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끓어오르는 피보다 뜨겁게. 타오르는 연기보다 맹렬하게.
평소보다 더 실그러지게 웃으며, 희열에 찬 숨결을 할딱일 뿐이었다.
134. 아무리 적어도 세상에 한 명은
그 후로 사흘을 더 갔다.
웃는 여인은 갈 때마다 더 많은 피를 요구했다. 그저께는 70ml, 어제는 100ml, 오늘은 200ml.
좀 많아진다 싶었지만, 헌혈은 원래 300에서 400 사이로 뽑는다고 하는데다가, 수액도 맞춰주고 돈도 그만큼 더 준다니까. 괜찮겠다 싶었다. 피 좀 빼고 960만 원이라면.
그래도 살짝 어지러웠다.
태화는 상호의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엎드린 그녀의 귀에 상호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닿았다.
“너 요즘 뭐해?”
“……알바.”
“무슨 알바길래 그렇게 힘들어해.”
“그냥, 편의점이야…….”
태화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일인지 말하면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상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쉬면서 해.”
“응…….”
태화는 그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손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그녀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야. 너 이거 뭐야.”
상호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태화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았다.
상호의 외눈이 그녀의 팔에 난 주사 자국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아니야, 이상한 거 아니야…….”
태화는 당황하며 팔을 빼려 했지만, 상호가 단단히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거 그냥, 그냥 물건 옮기다가 찔려서 그래…….”
“뭘 옮겼는데?”
“그런 거 있잖아, 핫바 같은 거, 모서리 뾰족한 포장 있잖아…….”
믿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상호는 태화의 팔에 난 주사 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지워 버리려는 듯이.
“믿을게.”
태화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응.”
거짓말을 해 버렸다. 선생님은 이렇게 믿어주는데.
눈꺼풀 속에 차오른 눈물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흘러내리려 하고 있었다.
* * *
다음날,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어서 오세……앗, 선생님.”
계산대 뒤에 선 알바생이 눈을 깜작였다. 상호는 편의점으로 들어서다가 알바생의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아, 세희구나.”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으로 찾아왔는데, 세희가 가게를 보고 있었다.
상호가 진열대로 향하자 세희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사러 오셨어요?”
“그냥. 잠깐 볼 게 있어서.”
상호는 냉장 진열대를 쓱 훑었다. 어제 태화가 말했던 포장들이 보였다. 핫바. 막대 모양 치즈.
그중에서 핫바를 하나 들어, 모서리를 팔에 대고 꾹 눌렀다.
‘내 피부는 너무 두껍네.’
흠집 하나 없다. 상호는 세희를 흘깃했다.
“세희 뭐 먹을래?”
“저는 군것질 잘 안 해요.”
그건 알고 있다.
그래도 상호는 핫바를 챙기고, 과자도 잔뜩 집어 한쪽 팔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이거는 먹어? 어떤 맛 좋아해?”
“저, 저는…… 별로 안 먹어요…….”
“그럼 종류별로 다 살게.”
그는 그 말대로 했다.
계산대에 과자가 산더미처럼 쌓이자 세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는…… 잘 안 먹는데…….”
“찬장에 놓을 테니까 알아서 꺼내 먹어.”
“네…….”
세희는 우물쭈물하며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상호는 뒷짐을 지고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예현여고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
“편의점 일 힘들지 않아?”
“꽤 편해요. 점장님이 저희 학교 학생들한텐 잘해주셔서……. 다른 곳 알바보다는 여기가 훨씬 쉬워요.”
“그래? 막 진상 손님은 안 와?”
“낮에는 거의 없어요.”
세희가 씩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니까 딱히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세희야.”
“네.”
“누가 말도 안 되게 진상을 부리면, 당하고만 있지는 마.”
상호는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치료비가 들든 깽값이 들든…… 다 내줄 테니까. 바보처럼 당하라고 무공 가르쳐준 거 아니야.”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카드를 내밀어 계산하고 과자를 들었다. 들기 힘들 정도로 많아서 내공을 약간 뽑아 과자를 한데 모았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있었다.
“세희야. 잠깐만 팔 좀 내밀어 봐. 소매 걷고.”
세희는 눈을 깜작이며 의아해했지만, 군말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상호는 핫바의 뾰족한 포장으로 세희의 팔을 눌렀다. 아플 텐데도 세희는 눈동자 한 번 꿈쩍이지 않았다.
그는 곧 핫바를 뗐다.
‘다르네.’
긁힌 것처럼 자국은 생기지만, 동그랗게 뚫리지는 않았다. 태화의 팔에 남은 자국은 분명 정확하게 동그란 모양이었는데.
상호는 핫바를 거두고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부드러운 피부가 필요해서.”
“어떤 일이에요?”
“그냥 개인적인 일이야.”
그는 세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돌아섰다.
“갈게. 잘하고 와.”
“네, 저녁에 뵈어요.”
세희가 생긋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의심을 없애려 왔는데 오히려 늘었다. 상호는 학교로 향하며 주머니의 차 키를 만지작거렸다.
진실을 확인했으니, 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 * *
“저…….”
태화는 주사기를 꺼내는 여인에게 떠듬떠듬 말했다.
“오늘은 10미리만 뽑을래요.”
그러자 여인이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태화를 바라보았다. 꼭 기계 같은 움직임으로.
늘 웃는 눈과 입이 더욱 구부러졌다.
“어제 많이 어지러웠어요? 수액도 맞았는데.”
“네. 좀…… 그랬어요.”
“흐음.”
여인은 턱을 손으로 받치고 고민했다.
“괜찮을 텐데. 아직 헌혈 수준이에요. 더 뽑아도 그렇게 큰 지장은 없을 거고……. 수액도 맞았고. 일주일 동안 천천히 뽑았고. 혈압도 정상 범위인걸.”
“그래도…….”
“태화 양한테 무리가 가는 건 우리도 절대 원하지 않아요. 딱 100미리만 뽑죠. 오늘치는 두 배로 쳐줄 테니까.”
두 배면 360만을 추가로 준다는 뜻.
태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내밀었다.
“오늘까지만이에요. 내일은 10미리.”
여인이 빙긋 웃으며 태화의 팔을 잡았다.
“잘 생각했어요.”
그렇게 주사 자국이 하나 더 늘어갔다.
* * *
저녁. 상호가 방으로 돌아오니 또 침대에 태화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멀쩡한 자기 방 놔두고 왜 꼭 여기 와서 자는 걸까. 상호는 그런 의문을 품으며 태화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과자를 찬장에 넣었다.
그리고 태화를 돌아보았다.
‘뭔 일을 하길래 저렇게 피곤해하냐…….’
일단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드러났으니, 편의점은 아닐 것이다.
아마 말하기 싫은 일. 말할 수 없는 일.
상호는 의심을 품으며 태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 * *
태화는 잠에서 깨어도 눈을 뜨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기척이 느껴져서.
‘……쌤 왔네.’
약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들키진 않았겠지.’
들키면 안 된다.
쌓인 돈은 1320만 원. 당초 예상보다 여섯 배를 훌쩍 넘겼다. 이제 딱 하루만 더 가면 된다.
태화는 기운을 끌어모아 벌떡 일어났다. 양팔을 위로 쭉 뻗으며.
“이태화! 출격 준비 완료!”
“넌 혼자 있을 때도 그래?”
상호의 핀잔이 날아왔다. 태화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었다.
“헤헤…… 응? 이게 뭐야?”
“마셔.”
상호가 그녀의 앞에 컵을 들이밀었다. 안에는 붉은 죽 같은 게 담겨 있었다. 토마토나 당근 따위를 간 듯이.
“야채 갈은 거야. 먹고 힘내.”
무심하게 말하지만, 그런 남자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태화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마시려다가 멈칫했다.
“앗.”
“뭐.”
“안에 이상한 거 들었지?”
“아니.”
“수면제 같은 거 들은 거 아니야? 막 이렇게저렇게 할려구?”
“아니라고.”
“상관없긴 해. 오히려 좋아.”
태화는 컵에 든 것을 홀랑 마셨다.
평소엔 이런 것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오늘따라 맛이 좋았다. 그렇게 컵을 싹 비우고 난 뒤 싱크대를 향해 던졌다.
“투척!”
“얌마. 위험하게…….”
상호가 내공을 뻗어 컵을 싱크대 안으로 정확하게 안착시켰다.
그렇게 될 줄 알고 한 것이다. 태화는 배시시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놀아죵.”
“시간 좀 봐라. 쌤은 이제 잘 거야.”
“요새 같이 못 놀았잖아. 놀아줘어~.”
“패턴 바뀌면 더 피곤해진다. 잠 안 와도 누워서 조용히 쉬어.”
상호의 손이 태화의 양 뺨을 감쌌다.
“너 얼굴 되게 창백해 보여, 지금.”
“그래? 그렇게 하얘? 관리가 잘 됐나?”
“농담하지 말고.”
상호가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돼서 안 되겠다. 쌤 자는 동안 옆에 누워 있어. 티비를 보든 핸드폰을 하든 괜찮으니까.”
태화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생각보다 많이 쓰렸다.
그래도 걱정을 받는 것이 만만찮게 좋아서.
씩 웃어 보이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그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