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상호는 눈을 떴다.
‘와, 씨. 어떻게 잘 들어왔네.’
아침의 햇살 너머로 그의 방의 천장이 보였다.
미진의 끝없는 매도 때문에 상호도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고, 결국은 고주망태가 되어서 쓰러졌었다. 거기까진 기억이 났다.
아마 술을 안 먹고 있던 설미가 데려다준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마신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우와, 필름이 진짜로 끊겼네.’
상호는 몸을 일으키다가 혹시나 싶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에휴…… 실수 안 했겠지?’
안부는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일어나 있었는지 금방 연결이 되었다.
[네, 선배님.]
“아, 미진 씨. 잘 들어갔어요?”
[네. 별일 없습니다.]
“다행이네.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쉬어요.”
[네.]
통화는 짧게 끝났다. 그다음엔 설미.
이번에도 연결은 금방 되었는데, 어째 목소리가 어두웠다.
[응, 상호야…….]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왜 그래요, 누나. 뭔 일 있어요?”
[아니, 난 괜찮아…….]
“그럼 뭐 다행이고…… 저 데려다준 게 누나예요?”
[응…….]
“미안해요, 많이 무거웠을 텐데…… 근데 왜 그렇게 목소리가 안 좋아요?”
[그게…….]
설미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술을 안 마셨잖아.]
“네.”
[그래서…… 상호 네가 말하는 걸 들어 가지고…….]
상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저 뭐 실수했어요?”
[그게…… 미진이한테, 막…… 막……, 에휴, 말을 못 하겠어…….]
“욕……했어요?”
[욕? 응. 욕이지.]
“많이 했어요?”
[많이만 했으면 다행이게?]
더 심한 걸 했다는 뜻일까. 상호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럼……?”
[부모님 욕에…… 몸 관련한 욕도 하구……. 상호야, 나는 살면서 그런 말들은 처음 들어 봤어…….]
“혹……시…… 하나만 말해 줄 수 있어요?”
[미안해……. 입에 담기도 무서운 말들이라……. 상호야, 학교 선생님이 그런 말을 쓰면 안 돼…….]
“죄송해요…….”
그래도 아까 미진의 반응을 보면 아마 미진도 필름이 끊긴 듯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저 근데…… 누나한테는 실수 안 했죠? 욕?”
[응. 나한텐 안 했어.]
“다행이네요.”
[근데 교장선생님께는 하더라…….]
“……네?”
상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파도 파도 끝이 없다.
“뭐라고…… 했는데요?”
[노망난 할망구 술 좀 작작 드시라고…….]
“…….”
큰일 났다.
상호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해련이 웃고 있었다.
귀신처럼 거꾸로 붙어서 백발을 늘어뜨리며.
‘오줌 쌀 뻔했네…….’
상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내공을 뻗어 커튼을 쳤다. 그리고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그거 말고는 없는 거죠?”
[응. 다른 사람들은 다 취해 있었으니까…… 미진이도 많이 취했었고, 아마 다들 기억 못 할 것 같아. 나는 다 들었지만…….]
“죄송해요…….”
[아, 근데…… 술 안 마신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어.]
“누군데요?”
[이사장님.]
상호는 침대에 얼굴을 박았다.
‘돌겠네…….’
“알았어요……. 쉬세요, 누나.”
[응, 상호도 잘 쉬어…….]
통화가 끊겼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몰라 시바. 잠이나 자자. 잠이나…….’
창문에서 퉁퉁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주먹으로 두드리는 듯이. 하지만 그는 무시하고 잠을 청했다.
꼭 감은 눈에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술이…… 술이 싫다…….’
130. 종 친 날
12월 31일.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
상호는 침대에 누워 TV를 보는 중이었다. 화면에는 연말 시상식이나 송년 특집이 방영되고 있었다.
‘저 아저씨는 가수였던 것 같은데 배우가 됐네…….’
현관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뒤를 세희의 목소리가 이었다.
“선생님. 세희예요.”
그는 내공을 뻗어 문을 열어주었다.
방학에는 교사 숙소가 거의 비다시피 했다. 대부분이 기혼자라서 집에 가족을 만나러 간 탓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들도 자기 집 정도는 있었고, 숙소가 아무리 시설이 좋아 봤자 자기들 집보다 편하지는 않을 게 뻔했다. 덕분에 남교사 숙소에 남은 건 상호 혼자뿐이었고, 세희와 태화는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그의 방에 드나들었다.
상호가 남은 이유는 당연히 그 둘 때문이었다.
“저 왔어요.”
“어, 세희야.”
상호는 침대에 누워 머리를 괸 채로 대답했다.
세희는 외투를 벗어 소파 팔걸이에 걸쳤다. 부드러운 회색 면바지에 품이 넓은 고동색 긴팔 옷을 입고 있었다.
꼭 제집처럼 편한 차림이었고, 행동도 그랬다.
“뭐 보고 계세요?”
“그냥 틀어 놨어.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봐.”
“괜찮아요.”
세희는 방을 둘러보더니 창문에 쳐진 커튼으로 다가갔다. 상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왜, 창문 열려고 그래?”
“아니요, 그냥 햇빛 비치는 게 좋아서…… 일부러 치신 거예요?”
“열어 봐.”
세희는 커튼을 걷었다가, 창밖에서 웃고 있는 해련을 보고는 조용히 다시금 커튼을 쳤다.
“……귀신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치? 이리 와.”
상호가 침대 위를 두드리자 세희가 거기로 와 앉았다. 세희는 그에게 몸을 살짝 기대며 속삭였다.
“왜 저기 계세요?”
“모르겠다.”
상호는 능청을 떨며 세희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꼭 붙어서 함께 TV를 보았다. 가족처럼.
한참 보고 있는데 세희가 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응?”
“옛날이야기 해 주세요.”
“아.”
상호는 눈동자를 굴렸다.
“어디까지 했더라?”
“거기, 중심부 산맥 오르는 이야기까지 하셨어요.”
“아, 맞다. 그럼 오늘이 끝이네.”
“벌써 끝이에요?”
“벌써인가? 많이 말해 줬는데.”
그의 손이 세희의 볼을 쓰다듬었다.
“저번에 열한 명이서 산 올라갔다고 했지? 지윤이네 아버지 빼고 열한 명.”
“네.”
아르게스 한가운데에는 산맥이 있다. 높고, 추운. 혹독한 설산의 줄기가.
그 줄기는 둥그렇게 이어져서 마치 성벽처럼 어떤 땅을 지키고 있었다.
“그 산 너머엔 불타는 땅이 있었어.”
“불타는 땅이요? 숲이 타는 거예요?”
“아니, 흙이. 말 그대로 온통 불타는 땅이었어.”
수많은 폭격이 시도되기도 전부터. 위성사진에 보일 정도로 넓은 지역의 땅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연료도 없이.
군, 특히 미군에서는 그 지역을 그라운드 제로라고 불렀다.
“그 땅 한가운데에…… 우리가 찾던 놈이 있었지.”
“그게 그…….”
세희의 손이 상호의 왼쪽 다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였어.”
괴물들의 왕. 몬스터들의 신.
군세를 일으켜 전쟁을 시작한 장본인.
“처음부터 거기 악마가 있다는 걸 알고 찾아가신 거예요?”
“존재는 알았지. 몬스터들을 생포해서 고문했었거든. 군에서.”
대부분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이었지만, 텔레파시 마법을 쓰거나 언어와 암호에 능통한 학자들의 연구로 어떻게든 정보를 뜯어낼 수 있었다.
“그럼 왜 열한 명만 갔어요? 더 많이 갔으면…….”
“그렇게 떼거지로 몰려가면 우리가 어딨는지 다 드러나잖아. 그럼 그놈도 병력을 싹 끌어모았을 거고. 그런 전면전은 피해야 했어. 우리는 일종의 암살조였던 거지.”
“악마는…… 어떻게 생겼었어요?”
그 말에 상호는 바지를 살짝 걷어 왼쪽 발목을 드러냈다.
번개 맞은 고목처럼 새까맣게 탄, 그을린 나무껍질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은, 그 아래로 붉게 빛나는 피가 용암처럼 흐르는.
“대충 이런 피부였어. 생김새는…… 설명하기 힘드네. 계속 바뀌어 가지고.”
“바뀌어요?”
“응. 뭐…… 만화……는 안 보지? 세희.”
“많이 보진 않았어요.”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만화를 봤으면 설명이 쉬운데.
“그, 만화를 보다 보면 악당들 중에 변신하는 놈들이 있거든?”
“싸우다가요?”
“응. 한창 싸우다가 변신해. 그러면 전보다 더 강해져.”
“그러면 처음부터 변신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글쎄…… 아마 힘을 끌어내는 데 시간이 걸리나 보지?”
그 말에 세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말을 이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처음엔 비쩍 마른 거인이었어. 한 2미터쯤 됐나. 달걀귀신처럼 얼굴이 없고, 온몸이 뼈에 거죽만 덮은 것처럼 앙상했어.”
악마는 그렇게 약해 보이는 상태에서도 저승부대원들 개개인보다 훨씬 강했다.
“싸울수록 점점 더 강해졌어. 근육이 붙고, 눈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머리에 뿔이 돋은 게 꼭 왕관처럼 생겼었어. 날개도 생기고, 꼬리도 생기고.”
반면에 저승부대원들은 싸울수록 지쳐갔다.
“그렇게 싸우다가 한 명씩 당했어. 명욱이 형, 진구 형, 태현이 형, 경준이 형, 재훈이 형. 다 죽고…… 남은 사람들 중에 도현이 형, 민정이 누나, 효은도 쓰러지고. 나랑 스승님만 남았지.”
이야기를 듣던 세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 분 더 있지 않아요? 그 주술사 분…….”
“그 인간은…….”
상호는 세희를 살짝 끌어안았다. 세희가 몸을 눕혀 그의 품에 들어왔다.
“쓰러져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쓰러진 척을 했던 것 같았다. 기회를 노리면서.
“어쨌든 그렇게 나랑 스승님만 남았고…… 둘이서 놈이랑 싸웠어. 죽도록 싸웠지. 근데 참 이상한 게 있었어.”
“이상한 거요?”
세희가 눈을 깜박였다.
상호는 고개를 기웃하며 답했다.
“그게…… 그때는 나랑 스승님이랑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그 악마는 스승님의 검을 무서워했었어.”
“무서워했다. 막은 게 아니라 피했다……는 뜻이에요?”
“그렇지.”
돌이켜 생각해봐도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과 예경의 강기에는 차이가 없었는데.
“하지만 그런 스승님도 그놈을 쓰러트리진 못했어. 나랑 스승님도 결국 쓰러졌고…… 그놈도 그때쯤에는 지쳐서 쓰러졌지. 모두 다 쓰러져 있었어.”
예경이 먼저 일어나냐, 악마가 먼저 일어나냐의 싸움.
먼저 일어난 것은 악마였다.
“그때 아까 네가 말한 주술사가 주술을 썼지.”
세희를 안은 상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악마의 몸과 영혼을 찢어놓는 주술이었어.”
하지만 몸과 영혼이 찢긴 것은 악마뿐만이 아니었다.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술로…… 그런 것도 가능해요?”
“그런 모양이지.”
증거는 방금 보여줬다.
“어떻게 됐는지 알겠지?”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의 왼쪽 다리를 바라보며.
“몸은 선생님께 왔고, 영혼은…….”
“스승님께 갔어.”
처음엔 다행이라 여겼다. 악마가 사라졌으니까. 그저 그의 다리만 못 쓰게 된 것뿐이라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경이 쓰러지긴 했지만, 겉보기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곧 깨어나서 멀쩡히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그저 모든 것이 잘 끝난 줄 알았다. 살아남은 이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딱 한 명의 주술사를 제외하고.
“우리는 다 함께 우리나라 땅으로 돌아왔고…… 진실을 알게 됐지.”
예경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날보다 의식을 잃은 날이 더 많아졌고, 결국은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상호는 그때서야 영주에게 주술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악마의 몸은 내공으로 막을 수 있지만…… 악마의 영혼은 인간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져도, 아무리 강한 스승님이라도…….”
예경은 한 달 가까이 버텼다.
“중간에, 한 번 깨어나셨었어. 그때 남은 내공을 전부 넘겨주시고, 검을 주시고……. 나는, 조금만 버텨 달라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전쟁도 끝났으니까 이제 제발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고…… 했지만.”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셨어.”
그 후로 예경만큼 오래 버틴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게 내 이야기의 끝이야.”
상호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세희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까만 눈동자는 곧 촉촉이 젖어 들어 구슬처럼 반짝였다.
“울지 마세요.”
세희의 손이 상호의 뺨을 쓸었다. 상호는 그제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미안.”
“왜 사과하세요. 잘못하신 게 아닌데…….”
“그냥, 괜히 이런 분위기 만들기 싫었는데.”
상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세희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조그맣게 쪽 소리가 나도록.
그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세희야?”
“선생님도 하셨잖아요.”
세희가 뻔뻔하게 웃었다.
“저는 하면 안 돼요?”
“안 되지…….”
“괜찮아요. 아무도 못 봤으니까.”
“아니…….”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얘가 원래 이런 애였나.
세희가 그의 머리를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슬픈 생각은 하지 말아줘요.”
상호는 눈을 감았다.
“……그래.”
그때 TV 쪽에서 펑 소리가 들렸다.
“쌤! 나 귀신 봤어! 머리가 완전 하얗고…… X바, 둘이 뭐해!”
상호는 식겁하며 세희의 품에서 고개를 빼냈다. 태화가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고 있었다.
“미쳤지?! 돌았지?! 정신나갔지?!”
“아니, 잠깐, 잠깐……. 그냥 잠깐 졸은 거야! 잠깐…….”
“이리 와! 안겨! 나한테도 안겨! 빨리이!”
“나가!”
* * *
뎅~ 뎅~
제야의 종이 울렸다.
상호와 세희, 태화는 나란히 침대에 앉아서 TV를 바라보았다. 태화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그를 불렀다.
“쌤.”
“응.”
“우리 내년엔 저거 보러 가요.”
“굳이?”
“한번 가보고 싶어서요.”
“그럼 너희 3학년 때 가자. 다섯이서. 그땐 의미도 있고 괜찮겠네.”
“엥, 그땐 안 되는데.”
“……왜?”
“2년 뒤 이맘때엔 쌤이 침대에 묶여 있을걸?”
태화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돌아보았다.
“디데이까지 730일이네.”
상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법 지켜라.”
“사랑에 법이 어딨어. 들이박고 보는 거지.”
“너는 제발…… 범죄만 저지르지 마.”
“내가 안 해도 쟤가 할걸요?”
태화가 세희 쪽을 턱짓했다.
“그치? 어차피 니도 쌤 묶을 거잖아.”
“아니, 난 안 그럴 건데.”
세희가 새침하게 대답하자 태화는 코웃음을 쳤다.
“지랄~. 낮에도 껴안고 뒹굴었으면서 무슨…….”
“굳이 그럴 필요가 없잖아.”
세희는 여유롭게 씩 웃었다.
“내가 안 해도 선생님이 나한테 해 주실 테니까.”
그 말에 태화는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상호를 홱 돌아보았다.
“쌤! 나 쌤 안 묶을래요.”
“그래. 잘 생각했어.”
“그니까 쌤이 날 묶어!”
“……머리가 그렇게밖에 안 굴러가냐?”
상호는 둘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아야! 왜 때려!”
“맞을 만하니까 맞지. 빨리 돌아가. 자야 될 거 아냐.”
“통금 시간 지났는뎅.”
“……아.”
상호는 당황했지만 곧 검을 짚고 일어났다.
“쌤이 가서 말하면 되지. ……윽!”
“안 돼~.”
태화와 세희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 침대에 넘어뜨렸다.
둘은 그의 양팔에 머리를 누이고 키득거렸다.
“히히, 못 가.”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너희 갈아입을 옷도 없잖아.”
“쌤 거 입으면 되지. 나 쌤 나빛이네 갔을 때 쌤 빤쓰 입었는뎅.”
“아, 맞다……, 너 임마! 어디 제자가 선생님 속옷을 갖다가……!”
“여자는 사각빤쓰 입으면 안 돼?”
“네가 사서 입으라고!”
“돈 아깝잖아! 있는 거 입어야지! 가족인데 뭐 어때!”
“가족 아냐!”
“가족 맞아!”
태화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상호는 착잡한 눈빛으로 태화와 세희를 내려다보았다. 이 애들이 생각하는 가족이 그가 생각하는 가족과 같은 의미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가족이지만…….”
진짜 가족은 아니잖아. 그런 말을 하고 싶은데,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 고민을 알았을까.
세희가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가족이에요.”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씻고 와. 같이 자자…….”
“아싸~!”
태화가 벌떡 일어나 욕실을 향해 달려갔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가족이다. 상호는 포기하고 침대에 축 늘어졌다.
‘에이, 내가 애들한테 당할 리는 없으니까. 나만 정신 차리고 딸로 대하면 되는 거겠지…….’
아니, 어쩌면.
정신을 차리기엔 이미 늦었는지도 몰랐다.
너무 많이.
‘에휴…… 모르겠다.’
그는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131. 진짜 불효녀
“어디 가요?”
상호는 양치를 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린 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칫솔을 입에 넣어 불명확한 발음으로.
“여자친구 집 갑니다.”
“우리 집? 태워다 줄까요?”
열린 문 사이로 해련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됐습니다.”
그리고 양치를 계속했다.
해련은 이제 그의 방에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었다. 세희와 태화가 드나드는 것을 본 탓일까. 상호에게는 말도 안 하고 들어와서는 침대에 누워있기 일쑤였다.
아무리 날고 기는 상호라도 해련만큼은 어떻게 제압할 수가 없는 터라, 그냥 무시하고 살고 있었다.
상호는 양치를 마치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해련이 침대에 전기장판을 깔고 누워 있었다.
“어유, 뜨끈~하다.”
할머니 같은 소리를 하며.
저 전기장판은 언제 들고 왔을까. 상호는 외투를 챙기며 내공으로 리모컨을 들어 침대에 던졌다.
“심심하면 티비나 보세요. 저 갔다 올게요.”
“옹야~.”
“아마 내일 올 것 같아요. 기다리지 말고 저녁 드세요.”
“옹야~.”
“……다녀오겠습니다.”
“아이구, 강 선생은 참 예의도 발라~.”
상호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해련이 빙긋 웃었다.
“노망난 할망구한테 어쩜 저리 예쁘게 말할까~.”
“…….”
제대로 찍혔구나.
상호는 말없이 돌아서서 현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