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둘은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다시 차에 탔다. 상호가 운전하는 동안 나빛은 쪽잠을 잤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놀이공원이었다. 나라에서 제일 큰 테마파크.
상호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 개장까지는 두 시간이 남았다.
‘더 재워도 되겠다.’
그는 나빛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왔다. 때마침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꺼내어 보니 효은이었다.
“여보세요.”
[야! 남의 차를 훔쳐가냐!]
“뭐 어때. 니꺼가 내꺼고 내꺼가 내꺼지.”
전화 너머에서 봉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선생, 자네가 나빛이 데려갔어?]
“아, 예. 죄송합니다.”
[아니 대체……, 이……, 도둑놈아!]
“죄송합니다~.”
이미 훔쳐 온 것을 어쩌랴. 상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기왕 이리된 거…… 어머님이랑 아드님이랑 단란한 시간 보내십쇼.”
[내 딸 돌려내! 이 나쁜 놈……, 응? 뭐? 왜? 하지만…….]
유연이 뭐라 말하는 것 같았다.
봉진의 목소리는 곧 수그러들더니 이윽고 개미 목소리만큼 작아졌다.
[……잘 놀다 오라고.]
“감사합니다.”
[저녁 전까지는 올 거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나빛이랑 야경도 보고 갈 것 같아요.”
[야경? 어디길래?]
“그건 비밀입니다.”
[도둑놈…….]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집에만 처박혀 있다가 바깥에 나오니 공기가 선선한 게 썩 마음에 들었다. 그는 차에 기대어 바람을 쐬며 개장 시간을 기다렸다.
* * *
사진을 많이 찍었다.
회전목마에서 몇 장. 동물원에서 수십 장. 전부 나빛을 찍거나, 나빛과 상호가 같이 찍은 것들이었다.
사진을 찍기 힘든 놀이기구는 타지 않았다.
‘……찍다가 배터리 다 쓰겠네.’
밤에 또 찍을 것이니 슬슬 아껴야 할 것 같았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길에 크리스마스 퍼레이드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의 앞에서 나빛이 헤실헤실 웃으며 그 행렬의 사진을 찍었다.
상호는 그녀를 불렀다. 공연과 인파가 왁자해서 목소리를 키워야 했다.
“나빛아.”
“아, 네. 선생님.”
“많이 좋아 보이네.”
“네. 헤헤…….”
나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사진을 몇 장 더 찍다가 입을 열었다.
“더 어른 되기 전에 와보고 싶었어요.”
“그래?”
“네. 이제 이런 일들은 못 즐기잖아요.”
“벌써? 아직은 어리잖아.”
“저도 곧 어른이에요.”
그러고 보면 며칠 후에 18살인가. 상호는 그 사실을 떠올리고 살짝 놀랐다. 17살과 18살은 왜 이렇게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지.
‘나야 뭐 23에서 24 되는 거니까 별 생각 없다만…….’
1년 후면 19살이 될 거고. 또 1년 후면 20살이 될 거고.
아직 꼬마들일 뿐인데, 2년 뒤면 어른이 된다. 그 사실이 피부로 와 닿지를 않았다.
나빛이 씩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 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요.”
그 말에 상호의 가슴이 아려왔다. 꼭 다른 의미로 들려서.
그는 나빛을 뒤에서 끌어안고 귓가에 입을 바싹 붙였다.
“나빛아.”
아주 작은 속삭임.
목의 성대에서 올라오는 소리보다 입에서 나는 소리가 더 클 정도로. 입술, 혀, 이빨이 부딪히며 나는 파찰음이 나빛의 귀를 간지럽혔다.
나빛이 핸드폰을 살짝 내리고 그의 품에 등을 기댔다.
“네.”
그냥 대답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안 들릴지도 모른다. 상호는 더욱더 작게, 낮게 속삭였다. 퍼레이드의 소음 속에서.
“나빛아, 들려?”
“네.”
“정말?”
“네.”
“네라고만 하지 말고.”
“네.”
같은 대답이 이어질수록, 상호는 나빛을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목이 메어서는 속삭임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버티기 힘들면…… 언제든 말해.”
“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네가 아닌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가만히 고민하던 상호는 마침내 세 글자를 골라 속삭였다.
그러자 나빛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네?”
상호는 그녀의 귓가에서 입을 떼고 허리를 폈다. 나빛이 당황하며 상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서, 선생님. 방금 뭐라고……?”
들리는구나.
상호는 안심하며 씩 웃었다.
“못 들었으면 됐어.”
“아뇨, 아니, 들은 것…… 같은데…….”
나빛이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한 번만 더 말해주세요…….”
“나중에.”
“제발요, 저 담배 꺼낼 거예요…….”
“안 돼~.”
상호는 키득거리며 나빛을 와락 품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나빛도 곧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따라 미소가 밝았다.
129. 술이 웬수
‘사진 잘 나왔네…….’
상호는 교정의 벤치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화면에는 밤의 놀이공원에서 나빛을 찍은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형형색색의 불빛이 연회색 머리카락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되게 예쁘게 나왔네. 아니지. 나빛이는 원래 예쁘니까…… 내가 잘 찍은 건가? 흠.’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진을 찍은 건 어젯밤. 그 후엔 나빛을 집에 데려다준 다음 세희와 태화와 효은을 데리고 학교로 돌아왔고, 효은은 1월 초에 본가에 함께 간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 가면 또 뭐 할 게 있다고 귀찮게……. 그래도 장인어른 한번 뵙긴 해야 하나.’
그런데 옆에 누군가가 털썩 앉았다. 아니, 누군가들이.
“상호 뭐해?”
설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상호는 기겁하며 핸드폰을 뒤집었다.
“아, 서, 설미 선생님.”
제자 사진을 넋 놓고 바라봤다는 걸 들켰다가는 사달이 날 터였다. 상호는 핸드폰을 곧바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옆에 앉은 설미와 미진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애 같았는데…….”
설미의 말에 미진이 범죄자 보듯 상호를 꼬나보았다. 늘 그런 눈빛이긴 했지만.
상호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요. 뭐 하고 계셨어요?”
“그냥. 둘이 산책했지. 맞다, 상호 너 그거 봤어?”
“뭘요?”
“이거.”
설미가 그의 앞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일정표였다.
12월 29일이 송년회식.
1월 2일이 신년회식.
그 후로 금요일마다 회식, 회식, 회식…….
“…….”
“교장선생님이 회식 늘리시겠대.”
설미는 싱글벙글 웃었고,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이 할머니가 노망이 났나…….’
“설미 선생님은 회식이 좋아요?”
“응? 나는 그냥 그런데, 뭐…… 상호랑 같이 먹으면 재밌으니까.”
“전 힘들어요…….”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안 가도 되겠죠? 요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데…….”
“그래도 미진이 첫 회식이잖아.”
설미가 미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듬직한 선배가 가서 지켜줘야지.”
“뭘 지키고 자시고가 있어요. 그럴만한 놈은 진작에 잡혀갔잖아요.”
“에이, 그래도 에스코트 해주고, 챙겨주고 해야지.”
“난 그런 거 못 받았는데. 오히려 제가 설미 선생님 챙겼죠.”
“그럼 이번엔 미진이한테 해!”
설미가 장난스럽게 명령했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미진을 흘끗했다. 미진은 뚱한 표정으로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미진 씨는 술 잘 마셔요?”
“별로 즐기진 않습니다.”
“잘됐다. 그러면 올 때 운전 좀…….”
설미가 상호의 입을 틀어막고 미진을 향해 웃었다.
“그래도 처음이니까 좀 마셔 봐. 다음부턴 안 마시더라도. 운전은 내가 할게.”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럼 회식 때 같이 모여서 가자.”
“네.”
미진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그 옆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번뇌에 휩싸였다.
‘보나마나 또 교장선생님이 귀찮게 할 텐데…….’
그렇지만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또 응보가 있을 것이다. 그는 양 손바닥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세상 모든 술을 마셔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 * *
“자.”
해련이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 한 해 수고했고! 내년에도 애들 안 다치게. 에…… 건배사는 예현으로 할까? 류혁으로 할까?”
“……예현으로 하시죠.”
해련의 옆에 앉은 류혁이 혀를 찼다.
해련은 피식 웃으며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자. 예쁘고, 현명하게. 예쁘고!”
“현명하게!”
다른 선생들이 구호를 외쳤다.
상호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의 옆에서는 미진이 똑같은 모양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미진이 잔을 내려놓고 그를 흘끗했다.
“선배님은 왜 건배사 안 하십니까?”
“미진 씨도 안 했잖아요.”
“저는 잠시 사레가 들려서.”
“우연이네요. 나돈데.”
상호는 말을 마치고 잔을 쭉 비웠다.
꽤 비싸 보이는 음식점이었다. 길쭉한 테이블엔 식탁보가 깔려 있고, 그 위로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송년회라고 좀 신경을 쓴 듯했다.
해련은 멀리 앞쪽에 류혁과 함께 앉았고, 상호와 미진은 반대편 끄트머리 말석에 앉았다.
덕분에 오늘은 상호의 다리를 주무르는 사람이 없었다.
“미진 씨.”
“네.”
“교원 생활은 적응 다 했죠? 굳이 물어볼 필요 없죠?”
“네.”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투였다. 정확히는 ‘너보다 내가 더 적응 잘했을 거다’라는 투.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혀끝에 남은 술을 음미했다.
“뭐 불편한 것도 없고요?”
“네.”
“내가 제일 불편한 것 같네.”
“아닙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상호는 잔을 내려놓으며 툭 내뱉듯이 말했다.
“미진 씨. 솔직하게 하나만 말할게요.”
“네.”
“제가 미진 씨 마음에 들거든요?”
“……네?”
미진이 경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상호를 노려보았다.
“실례지만 저는 애인이 있습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미진 씨 일하는 거 마음에 든다고요. 그런데…….”
상호는 미진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같이 일하는데 아직도 이렇게 안 친한 거.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가 잔을 들어도 미진은 잔을 들지 않았다. 상호는 쓰게 웃으며 홀로 잔을 기울였다.
“아직 서로 심법 이름도 모르잖아요. 그 정도는 말해 볼 법 하지 않나 싶은데.”
미진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운무궁곡기공입니다.”
“뜻은?”
“안개 골짜기…… 라는 뜻이죠. 뜻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이름엔 당연히 의미가 있죠.”
상호는 자작을 하며 씩 웃었다.
“처음 만든 사람의 의도가 담겨 있으니까. 운기조식의 심상에도 도움이 되고…… 그래서 그 운무궁곡기공은 고유 심법이에요, 공개 심법이에요?”
“고유입니다.”
“나돈데.”
미진은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한번 물어봐 준다는 투로 물었다.
“심법 이름이 뭔데요?”
“천색창염강기공.”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여섯밖에 없다. 저승부대 다섯 명과 세희. 아마 태화 정도는 스치듯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만, 성격상 딱히 기억해놓지는 않았을 터였다.
미진이 물었다.
“천색창염강?”
“천색창염까지죠. 뒤는 강기공이고.”
“기공이 아니라 강기공……?”
미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되게 잘난 척하는 사람 같네요.”
“……하하.”
상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가 있겠죠.”
“뜻은 뭔데요?”
“하늘색 푸른 불꽃이란 뜻이에요.”
미진은 그에게는 관심이 없어도 무공에는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그를 돌아보았다.
“B급이면 강기 못 만들지 않아요?”
“만들 수 있죠.”
“보여줘 봐요.”
상호는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 끝에서 검푸른 불꽃이 한 번 확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미진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끔벅였다.
자기가 뭘 봤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는 듯했다.
“그…… 방금 그거. 강기 맞아요?”
초강기는 처음 봤을 터.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기죠.”
“많이…… 신기하게 생겼네요. 혹시 특이한 성질이 있어요?”
“있죠.”
“어떤 거요?”
“세상 모든 강기를 다 부술 수 있어요.”
상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농담으로 들렸을까. 미진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못 믿으면 어쩔 수 없고. 그런데 미진 씨.”
“예.”
“나한테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엄청 많을 것 같은데.”
상호의 말에 미진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있긴 있죠.”
“있을 수밖에 없죠. 몸이 이런데.”
“아뇨, 선배님 개인한테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러면?”
“반에 마법사랑 신앙인은 왜 있는 거예요?”
그쪽인가. 확실히 사담과는 꽤 거리가 있는 질문이었다.
상호는 술을 쭉 들이켜고 답했다.
“그건 실수.”
“실……수요?”
“가르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애들이 특별한 거더라구요. 다른 마법사랑 신앙인은…… 못 가르치는 게 맞죠.”
“그러면 내년엔 무예가만 받을 거예요?”
“그래야죠. 뭐 특이한 애들이 있다면 상황 봐서 받을 수도 있지만.”
미진이 혀를 찼다.
“참 무책임하시네요. 가르칠 수 있을 줄 알았다는 이유로…….”
“그래도 1등 시켰잖아요. 다른 애도 성적 좋고.”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미진이 중얼거렸다.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믿고 도와줘요. 뭐 미진 씨는 이미 잘 하고 있지만…… 그래도 좀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서. 그편이 미진 씨도 편하잖아요.”
그가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내년에 신입생이 몇 명씩 들어오고 나면 혼이 쏙 빠질 텐데. 혼자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정신없어서 돌아버릴 지경이고.
좀 친해지면 같이 일하기 편해질 것이다. 그게 상호의 계산이었다.
미진은 눈을 끔뻑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알겠지만 친해지는 건 좀 고려해 보겠다는 건가. 그래도 이쯤이면 충분한 성과였다.
상호는 잔을 들어 미진을 향해 내밀었다.
“그런 의미에서 짠이나 한번 하죠.”
미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호는 순간 여기서 또 엎어지나 싶었지만, 다행히 미진은 고민 끝에 잔을 들어 올렸다.
둘의 잔이 맞부딪혔다.
* * *
“아이, X부랄 선배님.”
“…….”
“나 꼬……시려고 이 지랄 하는 거 맞잖어요. 선배님.”
“아닌데요…….”
상호는 잔을 든 채로 덜덜 떨었다. 미진이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뺨이 붉은 게 이미 알딸딸하게 취한 모양이었다.
“아니 내가 남친이 있다는데도 몇 번을 작업을 거세요.”
“아니라고요…….”
“선배님 진짜 븜…… 범…… 범죄자야? 처음 봤을 때 무슨 깡팬 줄 알았다니까. 사실은 나 꼬실 생각밖에 없죠?”
“아니라고…….”
“나 진짜 선배님 볼때마다 무서워 죽겠어. 심장이 막…… 막…… 무섭다니까. 근데 어짜피 선배님 나보다 약하자나.”
“맞습니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엘리트 차도녀인 줄 알았더니 하는 짓이 완전 개차반 일진녀. 어쩌면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엘리트 개차반 차가운 도시 일진녀.
그는 속으로 눈물을 철철 흘리며 술을 들이켰다.
‘내가 시바 남한테 잡혀 사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옛날 같았으면 욕 한 사발 시원하게 쏟으면서 뒤통수 후려갈기고 내가 니 친구냐 소리쳤겠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었고 여기는 직장이었다.
그래도 미진이 그보다 동생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차라리 귀엽게 보이기라도 하니.
그런데 별안간 미진이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선배니임.”
“콜록! 왜, 왜.”
“나는 선배님 같은 쓰레기가 도~대체. 도대체 으떻게 선생이 됐는지…… 이이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응? 왜 선배님이 정담임이고 내가 부담임이야?”
“많이 취했어요, 미진 씨…….”
“존댓말 하지 마요. 존댓말도 이상해. 선배님 그렇게 착한 인간이 아니자나요. 응? 착한 척 하지 말어라고.”
“알았…… 알았어, 미진 씨.”
“어따대고 반말이세요, 어? 우리가 그렇게 친해요? 어? 선배님, 우리는 그냥 공적인 사이라고. 자꾸 사적인 감정 담지 말라고. 알았어요?”
“네…….”
상호는 입을 닫고 잔을 기울였다. 세상 모든 술을 다 마셔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