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상호는 화장실로 향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볼일을 마치고 손을 씻는데, 거울에 나로가 화장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로는 그가 있는 세면대 쪽을 향해 다가왔다.
“상호.”
상호는 거울로 눈을 마주쳐서 대답을 대신했다. 나로가 말을 이었다.
“너 나빛이 좋아해?”
“아니.”
상호는 거울을 보며 딱 잘라 대답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그럼 그냥 동생?”
“제자지. 동생도 아니고.”
“그래?”
나로가 옆 세면대로 와 손을 씻으며 말했다.
“진지하게 생각중이면 툭 터놓고 말해. 언제든.”
툭 터놓고라.
상호는 거울에서 눈을 떼고 나로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나로.”
“응?”
“나빛이가 많이 아파.”
나로가 멍한 표정으로 굳었다.
“……뭐?”
“상태가 심각해. 치료도 어렵고…… 이대로 가다간, 네 동생.”
상호는 나직하게 말을 맺었다.
“죽을지도 몰라.”
나로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오랜 침묵 후에야 그 입이 열렸다.
“무슨 소리야? 그걸…… 어떻게 알아?”
“똑같은 병에 걸렸던 사람을 알아.”
“그 병이 뭔데?”
“죽을병이지.”
상호는 손을 털고 나로를 돌아보았다.
“나빛이가 가족들한테 말 안 하는 덴 다 이유가 있어. 그러니까 동생 앞에서 티내지 말고, 모른 척해.”
“뭔데? 그럼 그 병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냥…… 나빛이 하고 싶은 거 하게 도와주면 돼.”
효은도 그랬고, 나빛도 그렇다.
목숨으로 사람을 협박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에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항상 괜찮다며. 바라는 것 없는 척 늘 웃는다.
그러다 죽으면 책임이고 뭐고 없다. 혼자 죽을 뿐.
상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로를 똑바로 꿰뚫었다.
“삐뚤어지고 말고는 나빛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애초에 그러지도 않을 거고.”
“기숙사 이야기야?”
“네가 좀 도와줘.”
그 말에 나로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나빛이는 괜찮아? 위험하진 않아?”
“아직은 괜찮아.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너랑 네 부모님께 달렸지.”
집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스스로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 수 있다. 효은처럼 무언가에 중독이라도 되어 볼 수 있는 것이고.
백날천날 남의 선택에 휘둘렸다가는 아무것도 못 한다.
“너도 알고 있잖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노력할 맛이 난다는 거. 이미 그러고 있을 거고. 네가 사업에 진심인 것처럼…… 나빛이도 학교에 진심이라는 걸 알아줬음 좋겠다.”
상호는 그 말을 끝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그의 뒤에서는 나로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 * *
“뭐 더 하고 싶은 것 없어?”
상호는 나빛의 뺨을 집으며 물었다. 방금 막 영화관 건물을 나온 참이었다.
나빛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멀리 있는 대형마트를 가리켰다.
“밥할 거 사러 가요.”
“밥? 네가 차리려고?”
“네.”
옆에서 나로가 물었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집에서 다 같이? 다섯 명 먹을 거?”
“응.”
“그래. 그럼 집에 말해둘게.”
셋은 마트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에 오르니 식료품을 파는 곳이 보였다. 상호는 카트를 꺼내는 나빛에게 물었다.
“뭐 만들려고?”
“음…….”
나빛이 고민하다가 빙긋 웃었다.
“선생님이 잘 만드는 거요.”
“같이 만들까?”
“네.”
“그럼 김치찌개나 할까. 돼지고기 넣어서……. 괜찮지?”
“네.”
셋은 카트를 끌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 * *
재료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다섯 시.
봉진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유연만이 안방에서 나와 얼굴을 한 번 비추고 다시 들어갔다. 상호는 봉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나로와 나빛이 따라 들어왔다. 상호는 나로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얘는 또 왜 따라오는지.
“너도 요리하게?”
“어.”
“할 줄 알아?”
“하면 되지. 뭐 별것 없잖아?”
나로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 남매의 요리 실력에 영 신뢰가 가질 않았지만,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료를 꺼냈다.
“김치부터 꺼내 봐.”
“김치?”
나로가 냉장고에서 작은 밀폐용기를 가져왔다. 상호는 그걸 보고 난색을 지었다.
“그건 소분하신 거잖아. 찌개에 넣을 건데 큰 통 없어?”
“큰 거?”
나로는 냉장고를 뒤지다가 문을 닫고는 눈을 끔뻑였다.
“없어!”
“……김치냉장고는 없나?”
“김치냉장고? 있지.”
상호의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김치냉장고와 김치통의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한다니.
“거기 열어 봐.”
“아, 있네. 배추김치면 되지?”
“어.”
상호는 도마와 식칼을 꺼내며 나빛에게 소곤거렸다.
“네 오빠 머리 좋다고 하지 않았나?”
“헤헤. 저도 몰랐어요.”
이 뜨거운 효자효녀들 같으니.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나빛아. 냄비에 기름 좀 발라 줘.”
“네!”
“됐다. 그거 불 올리고…… 아니, 이거 냄새가 왜 이래?”
“올리브 기름이에요.”
“……다른 냄비 꺼내서 식용유로 해. 그리고 이렇게 많이 넣을 필요 없어. 한 방울만 떨어뜨려서 잘 발라. ……나로 너는 뭐하냐?”
“응? 김치 썰면 안 돼?”
“아니, 써는데…… 왜 그렇게 잘게…….”
“아, 이게 아닌가? 아버지는 늘 이렇게 자르길래.”
“그건 볶음밥이고……. 너 발명은 어떻게 하냐?”
“흐흐, 요리를 해봤어야 알지.”
나로가 킥킥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흐려져 사라졌다.
아마 영화관에서 했던 말 때문이리라. 동생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
상호는 냄비에 고기를 넣고 살짝 구우며 나빛에게 말했다.
“나빛아.”
“네.”
“나로 어릴 땐 어땠어? 뭐 사고 친 거 없어?”
“야…….”
나로가 당황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상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빛이 고개를 기웃하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짝 치며 웃었다.
“아, 있어요.”
“뭔데?”
“어릴 때, 오빠가 장난감 사려고 아빠 골프채 훔쳐다가 철물점에…….”
“야!”
나로가 식칼을 내려놓고 나빛의 볼따구니를 잡아당겼다. 볼에 김칫국물이 묻어나자 나빛이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으응! 김치, 김치!”
“그거 아니라니까! 아버지가 괜히 오버해서 말하시는 거라고.”
“아니야! 엄마도 그랬어!”
“네가 뭘 알아, 넌 그때 세 살이었잖아!”
“우이이익.”
남매는 서로의 볼을 잡고 쭉 당겼다. 상호는 둘의 꼴을 보고 낄낄 웃었다.
“그래서, 진실은 뭔데?”
“몰라도 돼.”
나로가 얼굴을 붉히며 혀를 찼다.
한바탕 장난을 치고 나니 표정이 확 살아났다. 나빛도, 나로도. 상호는 남매들을 보다가 씩 웃고 요리를 계속했다.
* * *
“…….”
유연이 말없이 냄비를 바라보았다.
냄비에는 청국장 냄새가 나는 김치찌개가 담겨져 있었다. 새우와 돼지고기도 둥둥 떠다녀서는 대체 어느 세상 음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잠깐 한눈판 사이에 자녀분들이…….”
“……됐어요.”
유연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녀는 한 입 맛을 보더니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호는 이를 갈며 팔꿈치로 나로의 옆구리를 쳤다.
그리고 유연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청국장을 왜 넣어, 임마!”
“아니, 조금 넣으면 맛있대서 넣었지…….”
“그 조금이 한 숟갈을 퍼넣는 게 아니야!”
옆에서 나빛도 울상을 지었다.
“맛없으신가 봐요…….”
“그러게 새우 넣지 말라고 했잖아. 왜 넣었어?”
“풍성해 보이라고…….”
“맛이 너무 풍성해지면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 거야…….”
다행히 상호가 혼자서 만든 음식들이 여럿 있었다. 유연도 그 음식들은 맛이 좋았는지 제법 여러 번 젓가락질을 했다.
그런데 돌연 그녀의 손이 멈췄다.
“나로야.”
“네.”
“이 접시 어디서 꺼냈니?”
검은 바탕에 하얀 꽃이 그려진 접시였다.
비싸 보이긴 했지만 그건 다른 접시들도 그랬다. 허나 그 접시를 따로 묻는 것을 보니 뭔가 특별한 물건인 모양이었다.
나로가 고개를 기웃했다.
“찬장 위에서요. 왜요?”
“……아니야. 그냥.”
유연은 식사를 계속했다.
표정을 원체 잘 숨겨서 감정을 읽기 힘들었다. 상호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찌개를 먹었다.
‘나라도 비워야지, 에휴…….’
말을 않고 먹으니 식사가 금방 끝났다.
봉진이 아직 집에 오지 않은 터라 음식이 조금 남았다. 상호는 남은 음식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멋대로 만들어놓고 남기면 유연이 싫어할 것 같아서.
그렇게 최대한 뱃속에 욱여넣고 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뇨, 제가 할게요.”
나빛이 접시를 정리하며 말했다.
상호는 유연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평소라면 절대 안 된다며 기어코 그가 설거지를 했겠지만, 오늘은 나빛에게 맡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예쁨받으려는 것이니까.
상호는 식기의 정리를 도와 나빛에게 건네주었다.
“자, 조심해서 들고 가.”
“네.”
“……설거지는 할 줄 알지?”
“그럼요. 저번에 세희한테 배웠어요.”
나빛이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유연이 몸을 일으켰고, 나로도 따라 일어났다. 나로는 상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자, 이제 방에 가서 아까 하던 이야기나 좀 자세…….”
쨍그랑
“히…….”
나로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상호의 몸도 돌처럼 굳어 버렸다.
하지만 유연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걸어갔다. 발소리도 없이. 상호는 그게 무서웠다.
무표정한 얼굴은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했다.
상호와 나로는 눈을 마주쳤다. 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빨리 가서 무마시키자.’
둘은 유연을 앞질러 주방으로 향했다.
역시나 바닥에 접시가 깨져 있고, 나빛이 그 앞에 주저앉은 채였다. 상호는 굴러다니는 접시 조각의 색을 확인했다.
검은색.
‘아이고…….’
상호의 눈앞도 캄캄해져 갔다.
126. 바보라서
나빛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산이 깨어진 검은 조각들.
그녀는 그 조각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턱
지팡이가 손을 가로막았다.
“맨손으로 만지지 마.”
상호는 나빛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회색 눈동자에 눈물이 찰랑찰랑 고이고 있었다.
“저, 저는 그냥, 잠깐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미끄러져서…….”
“알아, 알아. 당연히 실수겠지.”
그가 내공을 뻗자 접시 조각이 저 혼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나로, 그리고 유연이 보았다.
접시의 색을 확인한 유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하나빛.”
“네, 네…….”
나빛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유연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됐다.”
돌아서는 유연의 표정에는 한심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았을까. 나빛은 끝내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흑, 흐윽…….”
“나빛아. 일어나. 방에 가 있어.”
상호는 나빛을 나로에게 맡기고 소매를 걷었다.
“데려가. 설거지는 내가 할게.”
* * *
그날 밤.
나빛은 저녁부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은 없고, 그저 훌쩍거리는 소리만 작게 들릴 뿐이었다.
상호는 나로의 방바닥에 이불을 깔며 말했다.
“나빛이 자주 저러냐?”
“그런 편이지.”
나로는 손깍지를 껴 뒤통수를 받친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도 많고. 그러니까 어머니도 기숙사 보내기 무서워하시는 거지.”
“왜 그러시는지는 알겠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래도…… 애가 이것저것 해 봐야 실수가 줄어드는 거지. 요리를 안 했는데 요리가 늘겠냐.”
“내 딸은 아니니까.”
“네 동생이야.”
교육은 부모가 하는 거라며 묵과하기에는,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않다.
상호의 말에 나로가 중얼거렸다.
“알아.”
상호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알면 좀 도와줘라. 난 나빛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그리고 방을 나섰다.
지팡이를 살살 짚으며 나빛의 방으로 다가가니 아직도 훌쩍이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상호는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나빛아.”
대답 대신 조용히 문이 열렸다.
그는 어둠을 더듬어 나빛의 침대 옆에 다가가 앉았다. 희미한 은빛이 침대 위에 풀어헤쳐져 있었다.
“왜 아직도 울어.”
상호는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들어선 순간부터 코 먹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빛의 몸은 가늘게 떨리며 이따금씩 움찔거리고 있었다.
“말을 해봐, 응?”
“선생님…….”
나빛이 울먹였다.
“저는 왜 이래요……?”
상호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저는 그냥, 항상 웃고 지내고 싶은 것뿐인데…….”
나빛이 그의 소매를 꼭 쥐었다.
“계속 실수만 하고…… 혼나고…… 저는 왜 이래요? 저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학교에선 잘하고 있잖아.”
상호는 나빛의 손을 꼭 쥐었다.
“넌 그냥 잘할 기회를 못 얻은 거야. 아예 못 하게 하는데 어떻게 다 잘하냐. 미숙해서 실수하는 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항상 중요할 때 그래요…….”
“계속 생각하지 마. 깨진 걸 붙이는 마법은 없어.”
이미 일어난 일을 곱씹어봤자 답이 나오진 않는다. 자책만 하는 것은 더더욱 쓸모없는 일이고.
상호는 이불을 나빛의 목까지 끌어올리고 배 쪽을 토닥였다.
“자야지, 이제. 오늘은 그냥 잊어. 내일은 또 다른 날이잖아.”
“저는, 저는…….”
“쉿.”
손을 토닥일수록 나빛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방문 너머에 누군가 왔다는 것을 이미 알았지만, 상호는 나빛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쿠울…….”
이윽고 나빛이 잠에 들었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서 고개를 돌려 유연과 눈을 마주쳤다.
“…….”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향해 다가갔다. 유연이 살짝 물러나서 그가 나올 수 있도록 비켜주었다.
상호가 문을 닫자 유연이 물었다.
“남의 딸 방에 잘도 들어가네요.”
“죄송합니다.”
별로 죄송한 눈빛이 아니었다. 유연도 그걸 알았는지 입술을 살짝 힘주어 다물었다.
곧 그 입술이 열렸다.
“……이야기 좀 할까요.”
기다리고 있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