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너 이리 와! 빨리 안 대?! 어딜 도망가!”
“안 피웠어요……!”
“말이 되는 변명을 해!”
유연의 앙칼진 목소리와 나빛의 울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상호는 나로의 방구석에 처박힌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X바, 정신 나갈 것 같네…….’
문밖에서 살 때리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침대에 앉아 있는 나로가 한숨을 쉬었다.
“에휴, 어떻게 나빛이가…….”
밖에서 유연의 추궁이 계속되었다.
“네가 이걸 샀을 리가 없잖아! 똑바로 말해. 누가 줬어? 말 안 해?!”
“흑, 흐윽…….”
“담임이야? 강 선생이 사줬어?!”
“아니에요……!”
나빛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로가 상호를 흘끗했다.
“진짜 아냐?”
“나빛이는 거짓말 안 해.”
“말만 들으면 네가 가족 같네.”
나로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밖에서 들리는 매질 소리와 비명이 더욱 커졌다. 듣다 못한 상호는 벌떡 일어나서 거실로 향했다.
“야, 야. 상호! 넌 어머니 못 말려. 그냥 아버지 올 때까지 기다리…….”
뒤에서 나로가 뭐라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거실에 가 보니 유연이 나빛을 세워놓고 종아리를 때리고 있었다. 회초리가 닿을 때마다 하얀 종아리에 붉은 줄이 생겼다.
상호는 내공을 뻗어서 타이밍을 맞춰 회초리를 꺾었다. 때리다가 부러진 것처럼 보이도록.
우두둑
하지만 유연은 회초리가 부서지자마자 집어던져 버리고 손바닥으로 나빛의 다리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나빛이 울음을 터트렸다.
“진짜 안 피웠다구요……!”
“아직도 거짓말을 해?!”
상호는 황급히 다가가 유연과 나빛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유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나와요!”
“어머님, 나빛이 진짜로 핀 적 없습니다. 제 모가지 걸고 맹세합니다.”
“강 선생 모가지고 뭐고! 집안일에 끼어들지 말고 나오라고요!”
“제발…….”
비키란다고 비켰다가는 나빛이 또 맞을 것이다. 상호는 나빛을 품에 안고 항변했다.
나빛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흐응, 흑, 으헝헝…….”
“담배를 들고 있다고 담배를 핀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예요?”
“제가 압니다. 제가 진짜 압니다. 나빛이 담배 안 핍니다. 나빛이가 담배를 한 개라도 폈으면 제가 혀 깨물고 죽겠습니다.”
하지만 유연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나빛을 상호에게서 떼어내 안방으로 데려갔다.
“흐윽, 흑…….”
“뭘 잘했다고 울어!”
닫히는 문 안에서 다시 매질과 흐느낌이 이어졌다.
안방에 들어갈 수는 없다. 상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해하는데, 방에서 나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들어와.”
“야, 너도 좀 말려 봐. 동생이 저렇게 맞는데…….”
“딸 생일에 담배를 봤는데 누구 말이 귀에 들어오시겠어. 그냥 우리끼리 놀자. 너 게임은 하냐?”
“하아…….”
참 속 편한 놈이다.
상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로의 방으로 들어갔다.
123. 남매와 함께
나로가 게임기와 모니터를 연결하며 물었다.
“평소에도 게임 해?”
“아니.”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양복 차림이 아니라 나로가 준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스웨터에 트레이닝복 바지.
오늘부터 크리스마스까지 휴가를 냈으니 그동안 머무르면서 좀 같이 놀아 달라나. 남매가 죽이 척척 맞았다.
“초등학생 때만 조금. 그 후로는 한 적 없어.”
“바빠서? 헌터 일 때문에?”
“그런 셈이지.”
중간에 백수로 지낸 세월이 있지만, 그때도 의욕이 안 나서 게임도 못 하고 시체처럼 지냈다.
상호는 나로가 건넨 게임패드를 받아 침대에 앉았다.
“어쨌든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지?”
“그렇지.”
“잘됐다. 나빛이는 게임 엄청 못하거든.”
나로가 게임기를 켰다.
“어디 실력 한번 볼까?”
* * *
상호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아오…….”
“이야~, 상호 너…….”
나로가 낄낄거리며 상호의 등을 두드렸다.
“게임 엄청 못하네!”
“끙…….”
반박할 수가 없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쓰러진 게임 캐릭터를 쳐다보았다. 종목은 격투 게임.
프레임과 도트 하나하나가 눈에 다 들어오는데, 정작 버튼을 못 외워서 쩔쩔매는 중이었다.
‘에이씨, 필살기 커맨드가 뭐 이따구야…….’
게임 못하는 게 죄는 아니나, 맘대로 안 되니 열불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결국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에이! 안 해.”
“푸하하하!”
나로가 왁자하게 웃어젖혔다.
“야, 상호야. 딴 거 할래? 퍼즐 같은 거 좋아하냐?”
“좀 쉬운 거 없냐?”
“협동겜이야. 한번 해 보자. 사놓고 안 하고 있었는데…….”
그때 문이 열렸다. 상호와 나로는 동시에 문을 돌아보았다.
나빛이 코를 훌쩍이며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아……. 선생니임…….”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침대로 다가왔다. 나로가 게임패드를 내려놓고 나빛을 다독거렸다.
“그러게 왜 담배 같은 걸 넣고 다니냐, 응?”
“몰라……. 안 피웠단 말이야…….”
“아버지 오면 잘 말해 봐.”
“으응…….”
나빛은 나로의 품에서 빠져나오더니 이번엔 상호의 품에 안겨들었다. 상호는 나로의 눈치를 살피며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빛아, 그만 울고…… 게임, 게임 같이 하자.”
“네…….”
나빛이 상호와 나로 사이에 끼어 앉았다.
* * *
“오빠아~ 나도, 나도 할래…….”
“안 돼. 난 휴가잖아. 넌 앞으로도 계속 방학이고.”
“선생님은 내가 데려왔단 말야! 내가 선생님이랑 할 거야.”
“억울하면 네 돈으로 게임기 사.”
“선생님!”
남매가 쌍으로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상호는 한숨을 쉬며 게임패드를 나빛에게 건넸다.
“둘이 해.”
“야, 안 돼. 얘 게임 너무 못한단 말이야.”
“오빠는 하나도 안 봐준단 말이에요! 선생님이 오빠 좀 혼내주세요……!”
“내가 네 오빠를 어떻게 혼내니…….”
나빛이 기를 쓰고 안 받으려 밀어냈지만, 상호는 억지로 나빛의 손에 게임패드를 쥐여 주었다.
그러자 나빛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상호의 다리 위에 앉았다.
“……나빛아?”
“오빠. 나 그 캐릭터 줘.”
“이게 쎌 것 같아? 그래, 해봐.”
나로는 게임패드를 만지작거리다가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상호는 다리에 앉은 나빛의 무게를 느끼며 진땀을 흘렸다.
가볍고 부드러웠지만, 무거웠다. 무겁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그의 귀에 나로가 속삭였다.
“야, 상호.”
“왜.”
“조심해라.”
“……응.”
“울 어머니 할머니 만들지 말고.”
“당연하지…….”
상호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나빛의 방석 노릇을 했다.
나빛은 오빠와는 활기차게 잘 놀았다. 학교에서도 밝기야 했지만, 나로의 앞에서는 좀 더 어린아이처럼 노는 감이 있었다.
“아잇! 오빠 야비해~!”
“야, 이건 기본이야. 니가 못하는 거라니까.”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마 봉진이리라. 하지만 남매는 게임에 푹 빠져서 못 들은 듯했다.
“나빛아, 일어나야 될 것 같은데…….”
“오빠! 타임! 타임!”
“안 돼~.”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얘들아, 아빠 왔……. 음?”
봉진은 환하게 웃으며 들어서다가, 나빛을 안고 앉아있는 상호를 보고는 그대로 돌이 되어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빛과 나로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셨어요~.”
“오셨어요, 아버지.”
“안녕하세요, 아버님.”
마지막으로 상호까지 인사를 마쳤다.
봉진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강 선생? 자네가 왜…… 여기 있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잡아놨어요. 같이 놀려고.”
나로가 게임패드를 엄지로 두드리며 말했다.
봉진은 상호를 흘끗하더니 나로에게 한마디 했다.
“너는 나이 먹고 게임이나 하고 있냐. 차라리 사람을 만나지.”
“에이~ 제 나이에 게임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그리고 사람도 만나고 있잖아요, 지금.”
“임마, 놀지 말라는 게 아니라 친구를 만나라고. 그럼 나중에라도 도움이 되는 거야. 좋은 친구를 만나면 평생에 도움이 되고…….”
“옆에 상호 있잖아요. 얘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데.”
그 말에 봉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 선생? 네가 강 선생을 알아?”
“잘은 모르지만 일단 아버지보단 많이 알죠. 친군데.”
“언제 봤다고 친구야?”
“강원도 출장 갔을 때 봤어요. 되게 세던데. 우리 직원들도 막 놀라고.”
“……그래?”
“예. 그리고 저번에 같이 술 마셨는데, 그 서 부협회장님 있잖아요.”
“알지.”
“부협회장님 친구래요.”
“강 선생이?”
“예.”
“그래……?”
봉진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목소리는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서 뭐…… 눌러산다고?”
“휴가 동안만요. 크리스마스 때까지.”
“……일단 알겠다.”
봉진은 나빛과 상호를, 정확히는 나빛을 무릎에 앉힌 상호를 못마땅해하는 눈으로 흘끗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나로가 중얼거렸다.
“나빛아.”
“응.”
“아직 모르시나 본데.”
“……응.”
나빛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궜다. 나로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내일까진 숨기시려나 봐. 내일 일어나면 아버지한테 말해. 아침 일찍. 어머니보다 먼저.”
“으응…….”
나빛은 힘없이 게임패드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둘의 눈치를 살피며 생각했다. 그래도 딸 생일이니까 아직 안 말하는 걸까. 알리려면 전화로 충분히 알릴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어김없이 칼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5일을 더 보내야 하나…….’
그가 푹 내쉰 한숨에 나빛의 회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 * *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나빛이~ 생일 축하합니다~.”
봉진이 제일 크게 불렀고, 나로가 제일 열심히 박수를 쳤다. 나빛은 어색하게 웃었고, 유연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상호는 모두의 눈치를 살피며 소리 없이 손뼉을 쳤다.
‘도망치고 싶다…….’
나빛이 입김을 불어 케이크 위의 촛불을 꺼트렸다.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가 담배를 연상케 했다.
봉진이 먼저 선물을 꺼냈다.
“자, 나빛이. 선물.”
“감사합니다…….”
나빛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선물을 받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로도 작은 상자를 꺼내 건넸다.
“자. 선물. 학교 잘 다니고. 선생님 말 잘 듣고.”
“응.”
나빛은 선물을 받아들고 유연의 눈치를 살폈다.
유연은 선물을 주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바라볼 뿐.
나로가 팔꿈치로 상호를 툭 쳤다.
“야, 상호야. 너는 안 주냐?”
“청탁금지법.”
“에이, 농담이지. 제자 선물까지 사는 선생이 어딨냐.”
있다.
상호는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열심히 밥을 먹었다. 아주 열심히. 유연의 화를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서.
“야, 나로야.”
“응?”
“니네 어머님 반찬 진짜 잘한다.”
“음, 뭐. 그렇긴 하지?”
나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했다.
나빛도 열심히 밥을 먹었다.
생일인데도, 축하 잔치인데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밥을 깨작이고 있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자 걱정이 되었다.
‘내일은 또 혼나게 될 텐데.’
유연이 봉진에게 담배 건을 말하면 당연히 점심때의 다툼이 다시 시작될 터.
놀아 달라고 선생님까지 불렀는데 혼만 나게 생겼으니, 풀이 죽을 만도 했다.
‘나라도 잘해야지.’
앞으로 많이 놀아줘야겠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불편한 식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 * *
이 집에서 살아본 건 아니다.
하지만 어째 평소보다 조용한 것만 같았다. 근거는 없지만. 그런 침묵이 주변에 흐르고 있었다.
상호가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옷을 벗고 따뜻한 물을 몸에 끼얹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작은 느낌.
나빛이었다.
‘뭐지?’
상호는 밖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검을 집는 소리가 들렸다.
‘나빛이가 장난을 치려는 건가……?’
하지만 저 검은.
상호는 다급히 나빛을 불렀다.
“나빛이니?”
나빛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소리는 곧 쪼르르 사라지기 시작했다. 상호는 내공으로 청각을 끌어 올렸다. 나빛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나빛은 그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나빛이가 내 물건을 막 다룰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에겐 목숨만큼 중요한 물건이었다. 상호는 내공을 가라앉히지 않고 계속 귀에 집중했다.
나빛은 검을 방에 두더니, 곧 무언가를 들고 와 욕실 앞에 내려놓았다. 아마 긴 막대기 같았다.
‘도망치지 말라는 건가…….’
그래도 말은 해두어야겠다. 상호는 문을 향해 소리쳤다.
“나빛아, 선생님 칼 소중한 거야.”
“네.”
나빛이 작게 속삭이고 총총 떠나갔다.
샤워를 마치고 밖에 나와보니 지팡이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상호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그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지.’
나빛의 장난은 다 받아줄 생각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으며 나로의 방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예상대로 거실에서 폭음이 터졌다.
“뭐라고?! 똑바로 말해 봐!”
“아니에요……!”
“담배? 나빛이 네가, 담배?!”
전쟁 초기에 들었던 박격포 소리가 생각났다. 상호는 바닥에 깐 이불에 누운 채로 귀를 막았다.
아직 나빛이 맞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그저 아비가 딸을 말로 혼낼 뿐인데 거기에 참견하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니까. 매질이 시작되면 그때 밖으로 튀어 나갈 심산이었다.
옆에선 침대에 누운 나로가 한숨을 쉬었다.
“에휴, 귀중한 내 휴가가…….”
“가서 좀 말려 봐.”
“나빛이가 내 딸은 아니니까. 게임이나 할래?”
“너는 참…….”
상호는 나로가 던진 게임패드를 잡아들며 혀를 찼다.
그런데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봉진이 들이닥쳤다. 퍼질러 누워 있던 상호는 급히 일어나 앉았다.
“강 선생!”
“예, 아버님.”
“나빛이, 나빛이 담배가 무슨 말이야! 알고 있었어?!”
“그게…….”
봉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따지고 보면 그의 잘못은 없다. 효은이 맘대로 준 거고, 그걸 안 버린 건 엄연히 나빛의 잘못이었다.
나빛도 그걸 알고 말을 안 하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불똥을 튀기기도 싫었을 것이고. 하지만 더 이상 나빛이 혼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터라, 어떻게든 거짓말을 지어내었다.
“주웠을 겁니다.”
“주워? 담배를 나빛이가 왜 주워?!”
“그, 교생으로 온 사람이 골초라서…… 반에 놓고 갔던 걸 주웠을 겁니다. 아마 돌려주려다가 깜빡한 게 아닐까요?”
“……그래?”
봉진은 그걸 믿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봉진의 뒤에서 유연이 눈을 부라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걸 왜 집에 들고 와요? 그것도 종업식이 어제였는데? 이제 학교 갈 일도 없는데?”
“그…… 그게…….”
말이 안 된다. 상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대체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나빛이가 담배를 필 리 없잖아요. 저 애가 담배를 계속 샀을 리는 없잖습니까. 저 얼굴로.”
“그렇지.”
봉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유연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유연이 상호를 째려보았다.
“그럼 담배는 도대체 왜 갖고 있는 건데요?”
“어쩌다 하나 주워서…… 애들이랑 가지고 놀려고 챙겼겠죠. 아시지 않습니까. 나빛이가 그런 쪽으로 둔한 거…….”
유연은 말이 없었다. 상호는 이때다 싶어 밀어붙였다.
“나빛이 착한 앱니다. 아시잖습니까. 1년 동안 성적도 잘 받고 이번에 연말평가에서 9등도 했습니다. 담임 말 안 들은 적 한 번 없고 항상 다른 사람 걱정부터 합니다. 그런 애가 담배를 왜 피겠어요.”
“……일단 알았어요.”
유연이 돌아섰다. 알았다고 말은 했지만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유연과 봉진은 취조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갔다. 상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닌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그런 그의 귀에 나로의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상호야. 컴퓨터 게임은 하냐?”
“딱히 안 하는데.”
“아 그래? 벌써 주문했는데. 기왕 시킨 김에 하자. 못하는 거 아니잖아?”
“너는 참…… 에휴, 그래. 알았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124. 설득
나빛이 상호의 다리에 앉아 코를 훌쩍였다. 상호는 게임패드를 놓고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또 울어.”
“안 울어요…….”
방금 막 봉진과 유연에게서 벗어나 나로의 방에 들어온 참이었다. 품에 쏙 들어온 두꺼운 스웨터가 폭신폭신했다.
상호는 옆에 놓인 과일을 집어 나빛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렇게 느긋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친구 방의 바닥에 앉아 친구와 게임이나 깔짝이면서 친구의 여동생을 무릎에 앉혀놓고 친구네 어머니가 깎아준 과일을 먹는 것은.
‘……느긋한 게 아니라 생각이 없는 건가?’
당장 탈출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검은 나빛의 방에 있다. 상호는 바닥에 놓인 지팡이를 흘끗했다.
‘한번 몰래 확인해봐야겠다.’
“나빛아, 선생님 잠깐만 일어날게.”
“아, 네.”
나빛은 군말 없이 그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딱히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상호는 지팡이를 짚으며 화장실로 가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방향을 틀어 나빛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에 손을 올리며 주변을 쓱 훑었다.
‘아무도 없지?’
귀를 기울여도 주변에 사람은 없다. 상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별것 없네.’
뭔가 부잣집 딸내미 집에는 하나씩 있을 것 같은 피아노 하나. 옷장, 책상, 책장, 연분홍색 침대.
다 평범한 것들보다 좀 더 넓었다. 가구는 물론이고 방 자체도.
‘칼이 어디 있을까…….’
쓱 둘러봤는데 숨길 만한 곳이 침대와 옷장뿐이었다.
상호는 쪼그려 앉아서 침대 밑을 살피며 내공으로 그 위를 꾹꾹 눌러 보았다. 매트리스, 이불 안.
‘여긴 없고.’
그럼 남은 곳은 옷장이다. 상호는 옷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
검이 있다.
검이 있는데.
웬 하얀 천 쪼가리가 검과 검집을 묶어놓고 있었다.
‘뭐지? ……아!’
상호는 검을 향해 손을 뻗다가 그 하얀 천이 뭔지 깨닫고 흠칫했다.
대체 이런 건 또 누구한테 배운 건지.
‘아오, 이걸 어떻게…….’
그냥 빨리 풀어서 가져가자.
상호가 그렇게 결심하고 검을 꺼내는데, 뭔가 불길한 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도. 귀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단련된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켁!’
문틈 사이로 나빛이 웃고 있었다.
한껏 실그러진 눈초리와 휘영청 밝은 미소. 꼭 계획대로 되었다는 듯이 방긋방긋 웃는 중이었다.
상호는 살며시 검을 내려놓고 옷장 문도 닫았다.
다시 뒤돌아보니 문은 닫혀 있었다.
‘어떻게 발소리 없이……. 아, 보호막으로 둥둥 떠 왔구나.’
상호는 옷을 팔락이며 진땀을 식혔다.
문을 나서니 나빛은 보이지 않았다. 나로의 방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나빛의 방문을 닫았다.
‘그래도 웃었으니 다행이지…….’
웃어주기만 한다면야 얼마든지 장난에 어울려 줄 수 있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로의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