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점심때가 되자 세상은 꽤나 희어졌다.
여전히 내리는 함박눈이 온 교정에 소복이 쌓여갔다. 상호와 아이들은 깨끗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급식소로 향했다.
나빛이 운동장을 돌아보더니 상호를 향해 웃었다.
“선생님, 눈사람 만들어요.”
“눈사람?”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그래. 밥 먹고 만들자.”
“지금 만들고 가요!”
“꼭 그래야 돼……?”
“네. 헤헤.”
태화와 지윤도 거들었다.
“이따 나오면 눈 다 뺏기고 없을걸요.”
“운동하고 밥 먹으면 좋지예.”
“……그래, 그럼.”
상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잔뜩 신난 발걸음으로.
그는 스탠드에 앉아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좋을 때다.’
밝은 얼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전쟁이고 희생이고 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가 되곤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상호는 그 작은 손과 약한 힘에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아.”
혜소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털실로 짠 회색 외투와 회색 비니에 눈이 그득하게 묻은 게 보였다. 상호는 손을 들어 혜소의 어깨와 머리를 털었다.
“꼭 날이 험할 때 오는구나.”
혜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호는 혜소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쏟아진 밥을 고사리손으로 주워 담던 모습.
그의 양손이 혜소의 손을 감쌌다.
“무슨 일로 왔어?”
혜소의 눈이 상호의 손목을 향했다.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매를 걷어 염주를 보여주었다.
“잘 차고 있어. 그날 이후로…….”
그러자 혜소는 바로 뒤돌아섰다. 등에 매몰찬 기색이 역력했다.
상호는 당황하며 혜소의 손을 움켜잡았다.
“잠깐만, 겨우 이거 확인하려고 온 거야?”
“…….”
“아니 대체…… 혜소야, 아저씨 전화번호라도 적어 가. 아니다, 점심 같이 먹자. 응?”
“…….”
그래도 혜소는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 손을 빼려 할 뿐.
상호는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며 혜소의 뒤를 따랐다.
“혜소야, 아저씨가 미안해, 응? 저번에는 내가 심했고…….”
“…….”
“점심은 먹고 가. 아니면 식당으로 갈래? 차로 태워다 줄게.”
그러자 혜소가 어린 목소리로 쌀쌀맞게 대꾸했다.
“또 몰래 쫓아와서 또 밥상 엎을 거잖아요.”
“아니야, 안 그래.”
“밥 안 먹어요. 나 없으면 거사님 밥 굶어요.”
“그럼…….”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가서 차려줄게.”
* * *
상호는 짐을 양손에 들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방과 따로 떨어져 있는, 문도 없는 옛날 부엌이었다. 작은 아궁이와 솥이 놓인.
“냉장고는 없어?”
“네.”
혜소가 솥을 열어보며 대답했다.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밥 지을게요. 알아서 준비하세요.”
“응.”
버너를 가져오길 잘했다. 상호는 도구를 꺼내 식사를 준비했다.
찌개를 끓이려는데 부엌에 수도가 어딨는지 보이질 않았다.
“물은?”
“이거 쓰세요.”
혜소가 한쪽 구석의 나무로 된 물동이를 가리켰다.
“아침에 길어온 거예요.”
“수도는 없어?”
“네.”
“씻는 물도 이거야?”
“네.”
“안 차가워?”
“좀 데워서 섞죠.”
상호는 물을 떠서 끓이며 물었다.
“그것까지 주술이야?”
혜소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요.”
상호는 더 묻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준비했다.
영주의 목적은 뭔지. 혜소의 목적은 뭔지. 그 둘에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상호는 혜소를 믿었다.
식사 준비는 금방 끝났다.
그는 앉은뱅이 탁자를 펴고 상을 차려서 마루에 놓았다.
“조심히 들고 가. 맛있게 먹어. 맛이 있을진 모르겠다만.”
상호의 말에 혜소가 주저하다가 물었다.
“같이 안 드세요?”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을 나섰다.
“같이 먹는 건 좀 어렵네.”
혜소 먹으라고 차린 것이지 영주 먹으라고 차린 게 아니었다. 혜소만 없었다면 그냥 집에 불을 질러 버렸을 터였다.
어쨌든 이로써 사과는 했다. 마음이 전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뒤에서 혜소가 탁자를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를 볼 생각은 없다.
그는 차를 향해 걸어가며 혀를 찼다.
‘후배님한테 또 한 소리 듣겠구만. 말도 없이 수업 쨌다고…….’
* * *
분명 미진이 싫은 소리를 할 것이다. 상호는 마음 단단히 먹고 교실 문을 열었다.
눈사람이 눈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
헛것이 보이나. 상호는 눈을 비비고 다시 안을 둘러보았다.
칠판 앞에는 조악한 종이 안대를 쓴 눈사람.
아이들 자리에도 각각 하나의 눈사람. 특히 태화 자리의 눈사람은 머리에 빨간 펜이 두 개 꽂혀 있었다.
상호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어떻게 맞춰 주지?’
그런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눈사람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X바! 깜짝야…….’
전혀 예상 못 했던 터라 상호도 깜짝 놀랐다. 그는 몸을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꺄하하하! 쌤 쫄았다! 쫄았다!”
“아핫학학!”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아이들이 나빛의 방어막 위에 서 있었다.
“뭐해, 빨리 들어와.”
“쌤, 놀랐지예? 놀랐지예?”
“그래, 놀랐다. 에휴…….”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오자 상호가 아이들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이들은 꺅꺅 소리 지르며 그의 손을 피했다.
“꺅! 꺄하하하…….”
“너희 근데 너희들끼리만 있었어? 미진 선생님은……?”
상호는 그렇게 물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교탁이 살짝 들썩인 것을 목격했다.
보나마나다.
그는 교탁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미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뭐해요?”
“선배님 담력 확인차.”
“그래서 결과는요?”
“등급다우시네요.”
B급인가. 그는 한숨을 쉬며 미진을 일으켜 세웠다.
“고생했어요. 대신 수업하느라.”
“별말씀을.”
미진은 도도한 걸음으로 교실을 나갔다.
상호는 교실에 놓인 눈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내공으로 들어서 한데 합치고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안돼! 강상호 2호기이이!”
“수업이나 하자. 보일러는 또 어떻게 끈 거야?”
첫눈 오는 날.
그들은 평소처럼 수업하며 하루를 보냈다.
122. 상견례
날이 더 흘러 이제는 종업식.
일찍 끝나는 날이라 종례도 오전 11시였다. 상호는 교탁에 서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1년 끝났네.”
아이들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뭐 반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년에도 나랑 만날 거지만……. 그리고 방학에도 아마 계속 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1년 동안 수고했다.”
“선생님도요.”
“울지마!”
태화가 난데없이 소리쳤다. 상호는 당황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뭐가 임마. 내가 뭘 했다고…….”
“울! 지! 마! 울! 지! 마!”
“하지 마 임마.”
그래도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에이씨, 내가 감동 같은 거 먹는 인간이 아닌데…….’
그래도 당장 내일 또 볼 애들인데 눈물을 쏟기에는 쪽이 너무 팔렸다. 상호는 코만 한 번 훌쩍이고 말을 이었다.
“고생했다. 고생했고…… 겨울방학에는 따로 수업 안 할 거야. 너희가 알아서 수련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대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지?”
“네.”
“태화랑 세희는 매일 볼 거고…… 지윤이는 집 갈 거지?”
“예.”
“그러면 지윤이랑 나빛이는 나중에 보자.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하고, 문자 하고.”
“예.”
“선생님…….”
나빛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를 불렀다. 상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나빛이 왜?”
“저, 오늘 집에 같이 가주실 수 있으세요?”
“집?”
무슨 일이 있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응, 뭐 갈 수는 있는데…… 왜?”
“그게…….”
나빛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저 평가 성적으로 어머니한테 내년에 기숙사 가도 되냐고 여쭤봤는데…….”
“잘 안 됐어?”
“네.”
상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빛이 열심히 했으니까. 같이 가서 말씀드려 볼게.”
그런데 정작 나빛은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나빛아?”
“쌤예. 나빛이 오늘 생일입니더.”
답은 지윤이 알려주었다.
상호는 전력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아하! 오늘이 20일이구나!”
“쌤 연기 졸라 못해.”
“도망치지 마이소. 오늘이 종업식인데 날짜를 기억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됩니꺼.”
태화와 지윤의 핀잔이 상호의 가슴팍에 박혔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나빛아…….”
제자 생일을 일일이 외우고 다니는 게 정상적인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교탁에 대가리를 박고 빌었다. 몰랐다고 말 못 하고 아는 척을 해버린 게 더 잘못이었다.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오늘 오신댔으니까.”
나빛의 따뜻한 목소리에 상호는 안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빛의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를 보고는 다시 고개를 처박고 말았다.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근디 나빛아. 우리도 같이 가믄 안 되나?”
“안 돼.”
“섭하게 와 그라노. 방학에 자주 못 본다 아이가.”
“오늘은 안 돼. 헤헤…….”
나빛이 의미심장하게 웃었지만, 상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 * *
상호는 차창 밖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옆에 앉은 나빛을 흘끗했다. 둘은 나빛의 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선물 못 샀는데…….’
차는 나빛의 수행원이 운전 중이었다.
세워 달라고 하고 사 올까. 하지만 너무 뻔하고, 밥을 늦게 먹이기도 싫었다.
‘그냥 선물은 나중에 주던가 하고……. 오늘은 부모님 설득이나 제대로 해 줘야겠다.’
상호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곧 차가 나빛의 집 앞에 도착했다.
이미 와 본 집이라 별 감흥 없이 집 안까지 들어갔다. 나빛이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상호는 나빛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오늘은 종업식, 지금은 평일의 정오. 나로는 사업하느라 바쁘니까 분명 집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분가를 했을지도 몰랐고.
그런데 부엌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머니! 이렇게 많이 차릴 필요 없다니까요. 대충 해요.”
“사업을 한다는 놈이 손님을 그렇게 대하냐? 집에 찾아왔으면 그게 비렁뱅이든 무지렁이든 정성껏 대접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넌 머리가 그게 뭐냐. 빨리 가서 감아.”
“에이, 뭐 얼마나 대단한 양반이 온다고…….”
투덜대는 나로의 목소리.
상호의 눈동자가 빠르게 이리저리 굴렀다.
‘곤란한데…….’
바쁠 것 같은 녀석이 왜 여기 있을까. 학생을 덥석덥석 껴안는다던 해련의 말을 기억할까.
별안간 나빛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빛아?”
“헤헤, 저희 오빠 있나 봐요.”
그 말을 왜 손을 잡으면서 하냐. 상호는 당황하며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나빛은 방긋 웃으며 그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선생님.”
“으, 응?”
“저 선물로 선생님 가질래요.”
“……응?”
“저번에 한 약속은 기억나세요?”
“약속……?”
“또 잊으셨네요.”
나빛은 그를 옆에서 살포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크리스마스 때 저랑 같이 놀기로 했잖아요.”
“……아.”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나빛을 밀어냈다.
“그랬지.”
“그러니까 저 오늘부터 그때까지만 선생님 가질래요.”
나빛이 그를 더욱더 강하게 안았다.
그때 부엌에서 다시 나로와 유연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빛이 왔나 본데. 선생님이랑 같이 온댔죠?”
“어. 가서 데려와.”
“나빛이 선생님이면 신앙인인가? 어머닌 보신 적 있죠?”
“무예가야.”
“예? 무예가요? 왜 그렇게 됐대요? 남자? 여자? 몇 살이에요?”
“잔말 말고 가서 데려와.”
“우씨, 어머니는 나한테만…….”
나로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부엌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상호는 나빛을 떼어내려다가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에휴……, 모르겠다.’
복도를 걷는 나로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빛아~!”
팔을 쫙 뻗고 환하게 웃으며 모퉁이를 돌던 나로는, 곧 상호와 상호를 껴안은 나빛을 보고 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 버렸다.
상호는 모르는 척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
“나빛이 담임입니다.”
“…….”
나빛이 헤실헤실 웃으며 상호를 안은 채로 폴짝폴짝 뛰었다.
“오빠~ 우리 선생님~.”
“…….”
“오빠랑 동갑이야!”
“…….”
“헌터신데, 엄청 강하셔! 성함은…….”
“……상호.”
나로가 중얼거리자 나빛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 * *
“오빠 우리 선생님 알아?”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상호와 나로는 조용히 한 번 눈을 마주치고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나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숟가락으로 밥을 떴다.
“응. 친구지.”
“언제부터 알았어?”
“얼마 안 됐어. 한 달 좀 넘었지? 상호.”
“그렇지.”
상호는 김치를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는 봉진은 없고 그와 나빛, 나로, 그리고 유연까지 네 명이었다. 유연도 나로가 상호를 안다는 것에 살짝 놀란 눈치였다.
나빛이 밥을 삼키고 씩 웃었다.
“그럼 오빠 친구니까 나한테도 오빠네?”
상호는 유연의 눈치를 살피고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지, 나빛아. 나로가 나한테 학부형이신 거지.”
“갑자기 뭔 학부형이야, 친구지. 그냥 편하게 상호 오빠라고 불러.”
나로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두고 볼 수 없었을까. 유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매와 상호를 둘러보았다.
“나빛이 너 선생님한테 예의 차려. 나로 넌 나빛이한테 바람 넣지 마.”
“에이, 뭐 어때요. 친구 동생이고 오빠 친구인데.”
나로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유연이 서늘한 눈으로 나로를 노려보았다. 나로는 꼭 봉진처럼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머니는 참…… 크흠.”
“어른한테 예의를 지켜야지. 학교 선생님이면 어른이지. 어디 버릇없이 선생님을 오빠라고 부르려고 해?”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닐 터였다.
도둑놈이 딸을 채갈까 봐 거리를 두게 하려는 것이다. 상호는 빨리 도망치기 위해서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님. 저는 이만…….”
“선생님.”
나빛이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멈칫했다.
‘아, 맞다.’
학교에서 말해놓고 깜빡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저…….”
유연이 똑바로 눈을 마주쳐왔다.
어떻게 하면 유연을 설득할 수 있을까. 상호의 목에서 연신 꿀꺽 소리가 났다.
‘본론을 바로 꺼내지 말고…… 조심스럽게…….’
기숙사라는 단어를 처음부터 꺼내지 말고. 상호는 머리를 굴리다가 말을 꺼냈다.
“제가 나빛이 좀 데려가도 될까요?”
“응?”
“네?”
나로와 나빛이 눈을 끔뻑였다.
말을 잘못했다. 상호는 스스로가 한 말에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학교에 데려가서 제가 돌보겠다는…….”
유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졌다.
차라리 당당하게 밀어붙이자. 상호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적반하장으로 뻔뻔하게 굴었다.
“아니 어머님. 제가 뭐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기숙사 데려가겠다는 말을 한 건데 그렇게 못할 말을 했다는 듯이 보시면…….”
“야, 강상호!”
나로가 벌컥 소리쳤다. 상호는 괜스레 말을 더듬었다.
“왜, 왜.”
“너 이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친구 동생을 임마!”
“아니라고…….”
참 이상하게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청력에 꼭 문제가 있다. 아니면 자신의 입에 문제가 있는 것이거나.
상호가 억울해서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는데, 나빛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우리 선생님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럼?”
“선생님은 제자로서 좋아하시는 거야!”
상호는 그 말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나빛이 너는 알아주는구나…….’
그런데 그때 나빛의 교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식탁 위로.
하얗고 작은 종이 상자.
……담뱃갑.
“……아.”
모두가 돌처럼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