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섯은 한 상을 두고 둘러앉았다.
제일 웃어른인 해련이 술병을 잡았다. 이미 거나하게 취해서는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녀는 제일 먼저 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거…… 항상 고생하는 우리 이사장! 앞으로도 고생하고.”
“……예.”
다음은 도현.
“저승부대 총각은 슬슬 결혼하고.”
“……예에.”
다음은 나로.
“아가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돈 많이 벌어서 부모님한테 효도하고.”
“네.”
나로가 그 말을 듣고 쓰게 웃었다.
나로는 돈으로는 효도를 할 수가 없다. 그걸 아는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해련에게 양손으로 잔을 내밀었다.
해련이 활짝 웃었다.
“강 선생은 애들한테 손 좀 그만 대고!”
상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바로 옆에 학부형이 계시다고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입술이 딱 붙어 버려서 말하지 못했다.
딱 한 마디가 간신히 새어 나올 뿐이었다.
“……예?”
“미진 양이 맨날 그래~. 막 덥석덥석 껴안고 다닌대. 그러다 덜컥 사고가 나는 거란 말이야. 조심해. 애들이 먼저 안겨들어도 밀어내고…….”
해련의 말이 계속 이어져도 상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눈동자는 술잔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시야의 한쪽 끝에 있는 혁의 얼굴에 집중하고 있었다.
상호는 봉진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봉진이 나빛의 일로 학교에 찾아왔던 날.
그때 교장실에는 봉진과 해련, 그리고 혁이 앉아 있었다.
‘분명…….’
혁은 나빛이 상호의 반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빛의 아버지는 봉진이고.
봉진의 아들은 나로.
‘작별이다. 나빛아.’
상호는 별주를 쭉 들이켰다.
그나저나 이 셋이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바로 옆에 앉은 나로와 눈을 마주쳤다.
나로는 눈을 끔뻑이다가 씩 웃었다.
“진짜로 또 만났네.”
“……이런 식일 줄은 몰랐어.”
상호는 해련과 혁이 대화하는 틈을 타서 물었다.
“나로, 이사장님하고 안 지 오래됐어?”
“그럭저럭. 1년쯤 됐지. 근데 상호 너 선생님이야?”
“응?”
“강 선생이라고 하셨잖아.”
나로는 해련을 흘끗했다.
“예현여고 교장선생님이시지? 너도 예현여고 선생님이야?”
“……어.”
“신기하네. 내 동생이 거기 다니거든.”
걔 담임이 나야. 그 말은 상호의 목 안쪽에서 맴돌기만 했다. 방금 해련이 말한 것 때문에.
지금 밝혀버렸다가는 남의 여동생을 막 끌어안고 다니는 쓰레기 새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돌겠네…….’
상호는 가만히 눈치를 살피며 술을 홀짝였다.
혁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로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대충 파악이 끝났지만, 혁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도통 가늠이 되질 않았다.
‘미치겠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친구라고 했다. 혁은 잔을 기울이며 눈앞의 네 명을 흘끗했다.
저승부대 출신 부협회장, 도현의 친구.
나로가 말한 S급 이상의 절름발이 외눈 검사.
해련의 이상할 정도의 호의.
그밖에도 의심스러운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예의주시해야겠군.’
혁의 날카로운 눈빛이 상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 * *
술을 마시는 건 주로 상호와 도현, 해련이었다.
그런데 도현과 해련은 접점이 깊지 않았고, 둘 다 상호와 제일 사이가 좋았다. 덕분에 상호의 잔은 술이 비질 않았다.
눈이 핑핑 돌았다.
‘염병, 운기할 시간도 안 주네…….’
해련이 또 말을 걸었다. 그녀의 손은 이제 상호의 다리를 주무르는 게 아니라, 상호의 손을 잡아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게 만들고 있었다.
“강 선생~.”
“예.”
“강 선생~?”
“예.”
“강 선생~!”
해련이 헬렐레한 채로 웃었다.
술벌레 고주망태가 됐구나.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나로가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그럼 저도.”
혁이 그를 따라 일어났다.
술 안 마시는 둘이 일어나면 어떤 꼴이 벌어질지 눈에 선했다. 상호는 당황하며 둘을 붙잡으려 했다.
“조, 조금만 더 드셨다 가시지…… 나로 너도 좀 더 있다 가.”
“난 내일 아침부터 약속이 있어.”
“나도 약속 때문에. 미안, 나중에 보자, 상호.”
둘은 그렇게 내빼 버렸다.
그런데 도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외투를 챙겼다.
“에이, 나도 가야겠다.”
“형도 가게?”
“가야지. 먹을 만큼 먹었으니.”
도현이 상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심해라, 임마. 효은이한텐 말 안 할게.”
그제서야 상호는 도현이 뭔가를 거하게 착각해서 자리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도현의 바짓가랑이를 덥석 붙잡았다.
“아니 형, 나는 진짜…….”
“알아 인마. 니 나이에 좀 흔들릴 수도 있지. 그래도…… 실망하기 전에 알아서 정리해라.”
“아니……!”
도현은 그를 버려두고 방을 나갔다.
다시 해련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상호는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강 선생~.”
“…….”
“강 선생~!”
“……네.”
“강 선생~. 흐흐.”
해련이 비틀거리며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나 드디어 취했는데에~.”
“예.”
“운전 못하겟찌~?”
“아니요.”
“방 잡으러 가까~? 응?”
술에 취했는데도, 아니 술에 취해서 그런지 힘이 우악스러웠다.
어쩔 수 없다. 상호는 속으로 결심하고 뒤돌아서 해련을 마주 안았다.
해련이 그의 품에서 키득거렸다.
“어머? 조금씩 올라오나 봐?”
상호는 말없이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그럴수록 해련의 숨결은 열기를 품었다.
“강 선생…….”
“여보세요?”
“응?”
해련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상호의 손에는 그녀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이해련 여사님 아드님 되시죠?”
[예, 맞습니다.]
“어머님이 술이 많이 취하셔서요. 택시 태워드려서 귀댁으로 보낼게요.”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받으시는 분은……?]
“저 그냥 부하 직원…….”
“영찬아~ 니 새아빠다~!”
해련이 빽 소리쳤다.
상호는 기겁하며 해련의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해련은 숟가락으로 상호의 손을 쳐내며 말을 이었다.
“식 잡으면 꼭 와~ 양가 부모 다 없는데 너희라도 와야지.”
[네, 엄마.]
상호는 다급히 수습하려 했다.
“아니, 아드님. 어머님께서 너무 많이 취하셔서 정신이 훼까닥하시거든요?”
[예, 아버지.]
‘?’
이 집안은 대체 어떻게 돼먹은 곳인가. 상호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어머님이 이미 결혼을 하셨잖아요! 그래서 아드님이 있고…….”
[결혼을 한 번 하란 법은 없지요.]
“……사람이 지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는 인생을 두 번째 살고 계시니까.]
“거 아무리 그래도…….”
[전 괜찮습니다.]
“아니…….”
넋이 나간 상호의 귀에 해련의 아들의 목소리가 박혔다.
[언제 한 번 찾아오세요. 대접 한 번 하겠습니다.]
“……예.”
맥이 빠진 상호는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옆에선 해련이 또 치근거리고 있었다.
“서방~.”
“조용히 하세요.”
“아이, 서바앙~.”
“하…….”
이 꼬라지를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데. 나이 먹을 대로 먹어놓고 애들 소꿉장난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상호는 해련의 입을 닫기 위해 술병을 들었다.
“술이나 드세요…….”
“히히.”
해련은 상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잔을 내밀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상호의 뺨에 닿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무더기의 술병이 쌓여갔다.
121. 첫눈
“자네 상태가 왜 그래?”
건흠이 눈을 끔뻑였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며 병상 옆의 의자에 앉았다. 양복이 마구 구겨져 있었다.
밤 동안 해련과 옷을 입은 채로 엎치락뒤치락한 탓이었다.
“그냥…… 그냥 일이 있었어요.”
“그래?”
건흠은 더 묻지 않았다.
상호의 시선이 병상에 누운 다혜를 향했다. 환자복 소매에서 드러나는 앙상한 손목이 눈에 띄었다.
“요즘 어떻대요?”
“가끔 일어난대.”
이불에 반사된 햇살이 건흠의 얼굴을 밝혔다.
“잠깐 일어나서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그러고 다시 잔대. 스무 시간 넘게.”
“이야기는 해 보셨어요?”
“보긴 했지. 근데 이야기는 못 했어.”
“네?”
“말을 못 하게 된 것 같아.”
상호도 할 말을 잃었다.
‘벙어리라…….’
그래도 사지 멀쩡하니까. 그거면 됐다. 하지만 상호에게는 장애라는 것의 무게가 더욱 절절하게 느껴졌다.
‘많이 답답할 텐데…….’
그는 다혜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요?”
“응. 그냥 심리적인 문제인가 봐. 혼자 있으면 불안해하고 그러더라고.”
상호의 눈이 멍청히 끔뻑였다. 분명 발견했을 당시엔 광기에 찬 눈빛으로 오우거들을 사냥하고 있었는데.
건흠이 말을 이었다.
“그거 말고도 몸이 좀 이상해.”
“다쳤어요?”
“직접 확인해봐.”
상호는 건흠이 턱짓하는 것을 보고 다혜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단전에 내공이 아주 많았다.
마나가 풍부한 곳에서 몬스터를 죽이고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상호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단전 밖의 혈맥, 특히 세맥에도 내공이 많아서였다.
‘의식이 없는데도…….’
아마 체외에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마나를 흡수한 것 같았다. 피부라든가.
혈맥에 기름때처럼 덕지덕지 낀, 정순하면서도 배타적인 마나.
그는 다혜를 발견했을 때 그녀가 피를 뒤집어쓰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용혈이네요.”
상호가 중얼거리자 건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용?”
“예. 드래곤의 마나가 몸 여기저기 쌓여 있어요.”
“그게 그거였나.”
건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문제가…… 되는 건가?”
상호는 다혜의 이마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운기조식만 열심히 하면 다 녹아날 거예요. 놔둔다고 병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대신 다 녹이기 전에는 무공을 펼칠 때 뭔가 이상이 생길 겁니다.”
“어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내공이 막혀서 안 나갈 거고……. 엉뚱한 곳으로 내공이 튀어 나갈 수도 있고.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가.”
건흠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다혜의 손이 꿈틀했다. 상호와 건흠 둘 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팟
눈 깜짝할 사이였다.
다혜는 눈을 뜨자마자 몸을 튕겨 병상 끄트머리의 기둥에 엄지발가락으로만 균형을 잡고 섰다.
입술 사이에서 아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으…….”
야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입에서 새어 나오던 소리는 곧 짤막한 당황으로 바뀌었다.
“아.”
상호는 다혜의 양손이 그녀의 왼쪽 허리 부근에 놓인 것을 발견했다. 검을 찾는 동작이었다.
아직 조난 당시의 버릇을 못 뗀 모양이었다.
“아으, 으…….”
다혜는 병상으로 뛰어들어 허둥지둥 이불을 뒤집어썼다. 건흠이 피식 웃으며 이불을 토닥였다.
“다혜야, 밥 가져다 줄까?”
“우으…….”
이불 아래에서 머리가 도리도리 흔들렸다.
다혜는 곧 이불 밖으로 얼굴만 쏙 내밀어 건흠과 상호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상호는 손을 흔들었다.
“안녕.”
그러자 다혜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밖으로 내밀어 건흠의 손을 잡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뭐, 그렇게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니까.’
아직 데면데면한 사이. 저번엔 너무 반가워서 서로 무심코 안아 버렸지만, 따지고 보면 모르는 아저씨와 남의 반 학생이었다.
다혜는 아직 그가 교사라는 것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한번 봤으니 됐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돌아섰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려고?”
“예. 저희 애들 밥 사주기로 해서.”
“아, 맞다. 강 선생, 축하해.”
건흠이 씩 웃었다. 상호는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그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다혜가 눈을 빼꼼 내밀고 동그랗게 떴다. 상호는 그녀를 향해 웃었다.
“학교에서 보자, 다혜야.”
다혜의 눈이 더욱 커졌다.
상호는 마지막으로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 돌아서서 병실을 나갔다.
* * *
별다른 일 없는 나날이 지나갔다.
날은 점점 추워졌고, 아이들은 스타킹을 타이츠로 바꿨다. 목에는 목도리를 둘렀고, 손에는 벙어리장갑을 끼었다.
출근길에 태화가 양팔을 쫙 벌리고 달려들었다.
“쌤! 쌤!”
“왜 임마.”
“한번 안아봐요!”
“또 뭔데…….”
상호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태화는 기어코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닿았다.
“앗 뜨거! 뭐야.”
“히히, 내 마음이징.”
태화가 옷 안에서 손난로를 꺼내며 씩 웃었다.
“근데 쌤. 학교 밖에 붕어빵 트럭 온 거 알아요?”
“그래? 넌 그걸 언제 봤냐?”
“어제 다른 반 애들한테 들었어요.”
“먹고 싶어?”
“넹.”
태화는 그렇게 대답하며 상호의 안주머니에 태연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상호는 눈을 부라렸다.
“얌마, 이젠 지갑을 그냥…….”
“엥, 없네. 어딨어요?”
“없어.”
“엉덩이에 있구나.”
기어코 지갑을 가져가고는 만 원을 빼간다. 태화는 지폐를 살랑이며 교문으로 날아갔다.
“갔다올게용~.”
“넉넉하게 사. 애들 것까지.”
“넹~.”
상호는 얕은 한숨을 쉬며 본관으로 향했다.
* * *
태화가 교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품에 안은 종이봉투엔 붕어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쌤! X바 사기당했어요!”
“또 뭔데.”
“붕어빵에 붕어가 없어!”
“먹지 마, 그럼.”
“근데 맛있다? 신기하지? 신기하지!”
정신이 없다. 상호는 내공을 뻗어 태화를 자리로 밀어붙였다.
“좀 앉아, 인마. 애들한테 나눠 줘.”
“넹. 야, 가져가.”
“니가 샀나? 웬일이고.”
“헹, 앞으로 잘해.”
“고마워~ 잘 먹을게~.”
나빛이 방실거리면서 붕어빵을 오물거렸다.
세희도 하나를 받아서 조금씩 뜯어먹으며 창밖을 보다가,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응?”
“눈 와요.”
상호는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말대로였다.
하얀 눈송이가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나빛이 벌떡 일어나서 창가를 향해 달려갔다.
“우와! 우와!”
“뭘 그리 놀래? 눈 처음 보냐?”
“반가워서 그러지, 헤헤.”
태화가 핀잔을 날려도 나빛은 배시시 웃었다.
상호는 잠시 동안 눈을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 교탁에 교과서를 펼쳤다.
“수업하자.”
“엥~ 첫눈 오는데~.”
“그럼 첫눈 오니까 밥도 먹지 마.”
“엥~.”
그들은 수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