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501)

* * *

“세희 울지 마…….”

 나빛이 코를 훌쩍이며 세희의 등을 다독였다. 세희는 아직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세희, 태화, 지윤, 그리고 집에 갔다 온 나빛과 함께 고깃집을 온 참이었다. 상호는 말없이 쌈을 싸서 세희의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는 턱 아래에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나빛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해하며 세희를 달랬다.

“울지 마, 응? 내가 아빠 카드 훔쳐서 긁을게…….”

 그러자 지윤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아마 상호의 성격상 세희의 일이 어떻게든 해결되었으리라고 짐작한 눈치였다.

“야, 나빛아. 아부지께서 그래 돈이 많으시나. 무슨 일 하시는데?”

“몰라.”

“그기 무신 소리고?”

 지윤과 나빛이 떠드는 동안에도 세희는 계속 울었고, 상호는 더 달래주지 않고 식사만 했다.

둘의 눈치를 살피던 태화가 상호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해결했어요?”

“응.”

“근데 왜 울어요?”

“모르지.”

 그러자 태화가 세희의 등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옷 속으로 쑥 집어넣었다가 다시 순식간에 뺐다.

 그러자 세희가 몸을 움찔했다.

“우움!”

 입에 든 쌈 때문에 말은 하지 못했지만,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게 물들고 있었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뭔진 몰라도 효과 좋네.’

 쌈을 다 삼킨 세희가 급히 등 뒤로 손을 가져가며 태화를 째려보았다.

“맞을래?”

“니가 계속 그러고 있으니까 그러지. 밥상머리 앞에서 왜 울어, 재수없게.”

 태화는 콧방귀를 뀌며 쌈을 세희의 입에 들이댔다.

“울지만 말고 좀 처먹어. 너 땜에 쌤이 내 칭찬을 안 하잖아.”

 세희는 잠시 그 쌈을 바라보다가 받아먹고 우물거렸다. 그런데 어째 표정이 점점 썩어갔다.

상호는 세희가 태화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태화야, 쌈에 뭐 넣었어?”

“별거 안 넣었는뎅.”

“그래서 뭐를?”

“마늘이랑 청양고추 섞은 거.”

“……섞은 거?”

“내가.”

 태화가 스스로의 입을 가리키며 실쭉 웃었다.

 그 말을 들은 세희가 쌈을 휴지에 퉤 뱉더니 태화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미친년아!”

“응~ 니보단 안 미쳤어~.”

“더럽게 진짜, 으으……!”

“이게 허초라는 거야. 줫밥 약골련아.”

 투닥거리는 둘의 입가에 은근히 웃음기가 돌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흐뭇해했다. 꼭 자매 같아서.

딸 둘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라, 썩 나쁘지 않았다.

 119. 술 좀 작작 마셔요

“태화 1등 했어.”

 상호는 민정의 유리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그래서 사주는 거야.”

“어머.”

 민정이 씩 웃으며 잔을 살짝 돌렸다.

“고마워. 이렇게 좋은 곳은 어떻게 알았니?”

“그냥. 어쩌다가.”

 둘의 옆으로는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전에 효은과 함께 왔던 곳이었다.

상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들썩이고 자신의 잔을 들어 민정의 잔에 부딪쳤다.

“먹고 싶은 만큼 먹어.”

“비싸지 않아?”

“나도 이제 돈 있어.”

 사실은 아니었다. 차도 박살나서 새로 샀고, 애들 네 명 옷에 밥에, 이제는 세희 학비까지 내야 했다.

백수로 살아온 상호에게는 금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다. 수틀리면 돈 뜯어낼 곳이야 많았지만.

상호는 포크로 음식을 집으며 말했다.

“그런데 누나.”

“응?”

“나이든 여자를 대접하려면 어딜 가야 해?”

 그러자 민정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누나가 많이 늙었니?”

“응?”

“그래도 상호랑 그렇게 차이 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하긴, 누나는 이제 30대 아줌마니까…….”

 뭔가 착각한 모양이었다. 상호는 당황하며 민정을 달랬다.

“30대가 왜 아줌마야? 아니야, 누나 말하는 거 아니야.”

“그럼?”

“주말에 아는 어르신을 만나야 해서. 어디를 갈지 고민 중이라.”

“언제 만나는데? 점심? 저녁?”

“저녁. 아마 술까지.”

“나이는?”

“……일단 60은 넘을걸. 거의 70일 텐데.”

“어머. 많네.”

 민정은 와인을 홀짝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곧 입술에서 잔을 떼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연세가 많으시면 한식집이 무난하지? 한옥에. 백반 잘하고. 전이랑 술이랑.”

“그런가. 혹시 어디 아는 데 있어?”

“나는 잘 몰라. 그런 건 도현 오빠가 잘 알지 싶은데. 사람들 많이 만나잖아.”

“그래도 누나가 여자니까.”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한식집을 검색하다가, 그중 하나의 사진을 민정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곳이면 되나?”

“응. 좋아 보이는데.”

 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약은 이따가 해야겠다. 상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잔을 들었다.

“자, 누나. 짠.”

 * * *

 그래서 금요일 저녁.

상호는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교장선생님.”

“아, 강 선생!”

 해련의 밝은 목소리가 문을 뚫고 나왔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해련이 하얀 양복 재킷을 입고 있었다. 상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흘끗했다.

“지금까지 일하셨어요?”

“응. 조금. 딱히 오늘 할 필요는 없는 거였지만.”

 해련은 외투를 다 입고는 상호에게 팔짱을 끼었다.

“일 때문에 가는 척을 해야 의심을 덜 받으니까. 자, 가자.”

“지금 팔짱 끼고 계신데요.”

 찰싹 달라붙고 있으면서 무슨 의심 타령인가. 상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팔을 떼어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요.”

“어머, 그 말은 강 선생은 상관없다는 말인가?”

“저는 뭐, 교장선생님이 그냥 손자 보듯 귀여워하시는 것뿐이라는 걸 아니까…….”

 그러자 해련이 그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네, 강 선생.”

“……어떤 착각이요?”

“아니야. 오늘 가보면 알겠지. 그래서 어디로 가요, 우리?”

“가보시면 알아요.”

 상호는 해련과 함께 자신의 차로 가서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그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상호가 운전석에 올라타자 해련이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차를 가지고 간다는 건 거기서 자고 온다는 거죠?”

 술 이야기다. 상호는 난색을 지었다.

“저희는…… 운기 한번 돌리면 괜찮아지잖아요.”

“음주운전을 하겠다는 건가요? 교사가?”

“그럼 저는 안 마실게요.”

“나랑 술 마시기 싫다고?”

“대리 부를게요…….”

“교사가 취한 채로 학교에 오겠다고?”

“죄송합니다…….”

 해련이 빙긋 웃었다.

“마시고 자고 오는 거예요. 알았죠?”

“네…….”

 이길 수가 없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핸들을 잡았다.

* * *

한옥 앞에 차가 섰다.

요정이라고 부르던가. 과거에는 높으신 분들이 지저분한 향락을 즐기러 오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고즈넉한 곳에서 좋은 요리를 대접하는 한식집이 되었다.

해련이 차창 밖의 한옥을 보고는 실쭉 웃었다.

“어머, 좋은 곳으로 골랐네.”

“마음에 드세요?”

“응. 이런 곳은 방이 따로 있잖아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둘만 마실 수 있으니까.”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단둘이라. 차 문을 여는 상호의 손에 진땀이 흘렀다.

‘장소를 잘못 고른 것 같은데…….’

 그래도 왔으니 어쩔 수 없다.

비싼 가게답게 주차장에 외제차들이 즐비했다. 상호는 해련과 함께 차들을 지나 한옥의 대문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쪼르르 달려와 그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강상호입니다.”

“아, 이쪽으로.”

 예약은 이미 해 두었다. 둘은 직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가니 직원이 방문을 열고 안쪽으로 팔을 뻗었다. 상호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쓸데없이 넓은 방에 방석 두 개와 상이 놓여 있었다. 안을 둘러보던 해련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아이, 이게 좀 아쉽네.”

“뭐가요?”

“저거.”

 해련이 가리킨 것은 방을 나누는 접이식 칸막이 가벽이었다. 아마 평소에는 나눠 쓰다가 인원이 많으면 방을 합쳐 쓰려고 저렇게 만들어 둔 것 같았다.

근데 아쉽다는 건 뭘까.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저게 왜요?”

“소리가 들리잖아요.”

 해련이 씩 웃었다.

“나는 소리를 잘 못 참거든.”

“…….”

 아직 안 늦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닐까. 상호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손을 뻗어 해련에게 안쪽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아니. 강 선생이 안에 앉아요.”

 해련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야. 상호는 안쪽에 놓인 방석에 앉았다. 그런데 해련이 다른 방석을 집고 그의 옆에 털썩 내려놓았다.

상호는 당황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교장선생님?”

“뭐.”

 해련이 그의 옆에 딱 붙어 앉으며 눈을 치켜떴다.

“옆에 있으면 안 돼요?”

“……아뇨.”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앞으로 어떤 짓을 당할지 뻔해서.

곧 종업원들이 찾아와 상에 음식을 올렸다. 정갈한 백반. 그리고 청주.

해련이 도자기로 된 잔을 들었다.

“자. 따라 봐요.”

 밥그릇도 아직 안 열었는데 술부터 마시게 생겼다. 상호는 병을 들어 공손히 술을 따랐다.

잔을 다 채우자 해련도 술을 따라주며 덕담을 했다.

“1년 동안 수고했고. 내년에도 힘내고.”

“감사합니다.”

 둘은 잔을 부딪치고 쭉 들이켰다.

해련은 한 잔을 마시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상호도 젓가락을 들었다.

돌연 그의 입가에 무언가가 다가왔다.

“아~.”

 해련이 입을 벌리라는 시늉을 하며 젓가락으로 육전을 들이밀었다.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곱게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 그러자 해련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구, 잘 먹네.”

 살다살다 아기 취급을 다 받는다. 상호는 그 후로도 해련이 주는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그래도 계속 먹다 보니, 정작 해련이 밥을 못 먹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해련의 젓가락을 밀어냈다.

“저 배 터지겠어요. 이제 그만 교장선생님 드세요.”

“사석은?”

“……누님 드세요.”

 해련은 씩 웃고 국을 홀짝이더니, 상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또 추행의 시작인가. 상호는 말없이 밥을 우물거렸다.

“강 선생.”

“예.”

“1등이지?”

 태화가 1등을 한 것은 당연히 알고 있을 테고. 반 평균을 묻는 것 같았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세희가 2등 1등 16등 33등. 평균 13등.

태화가 5등 17등 11등 1등. 평균 8.5등.

나빛이 39등 9등 54등 9등. 평균 27.75등.

지윤이 51등 35등 17등 34등. 평균 34.25등.

총 평균 20.875등.

그것도 반 전원이 매번 64강에 들었다.

“태화가 1등을 못 했어도…… 반평균 1등은 확정이었죠.”

 상호는 해련과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해련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강 선생이 잘 가르치는 건가?”

“예.”

 당당한 목소리였다.

 그는 해련과 잔을 부딪치고 쭉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무슨 무공, 무슨 마법을 가르쳤는지를 떠나서…… 최선을 다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거면 잘 가르친 게 확실하죠.”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가르침이다.

그걸 해낸 아이들은 그의 자존심이 되었고, 또 그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목소리가 당당했다.

해련은 상호의 의젓한 대답을 듣고 빙긋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가 술병을 잡아 잔을 다시 가득 채웠다.

“강 선생.”

“예.”

“이제 이야기해 줄 때가 된 것 같은데.”

“어떤 거…….”

 해련의 손이 그의 왼쪽 다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아아. 이거요.”

 이건 술이 더 들어가야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는 잔을 들어 해련의 것과 부딪쳤다.

 그리고 잔을 단번에 쭉 비운 후 입을 열었다.

* * *

과거 이야기. 다리 이야기. 그리고 다혜 이야기.

마지막에 와서는 혀가 슬슬 꼬이고 있었다.

“그래서…… 으음. 다혜가 그 다음 날도, 다음 날도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직접 가르쳐야겠다, 해 가지고…….”

“우리…… 히끅, 학교에 왔어?”

“예에에.”

“그렇구나~.”

 해련은 이제 밥그릇으로 술을 마셨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이게 사람인지 술통인지…….’

 분명 내공을 돌리는 낌새가 없었는데 끝도 없이 들어간다. 그는 해련이 들어 올린 밥그릇에 술잔을 부딪쳤다.

 그런데 갑자기 칸막이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부협회장님. 일찍 오셨네요.”

“아, 하 사장님. 류 이사장님은 아직 안 오셨고?”

“예. 제가 너무 일찍 온 거죠.”

 하나는 아주 최근에 들었던 목소리였고, 하나는 너무 익숙한 목소리.

나로.

도현.

상호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X바! 이 양반들이 왜 저기 있어.’

 둘이 아는 사이였던 걸까. 상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로는 무예가가 아니니까 지금까지의 대화를 못 들었겠지만, 도현은 칸막이 하나쯤이야 가볍게 무시하고 엿들을 수 있을 터였다.

거기다가 류 이사장이라니. 설마 류혁을 말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해련의 입까지 막아야 했다.

“으흐흐, 강 선생~.”

 그런 상호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련은 그의 옆에 바싹 다가앉으며 술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상호의 넥타이를 끌렀다.

“덥지 않아요? 좀 벗어, 벗어.”

“전 괜찮아요…….”

“아하~, 너나 벗어라~.”

 해련이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상호는 식겁하며 그녀의 손등을 찰싹 쳤다.

 그리고 옆방에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정신 차리세요, 교장선생님!”

“말짱한데에~.”

“그럼 더 문제예요……. 자제분들 생각하세요, 네?”

 하지만 해련은 킬킬거리며 앞섶을 살짝 열었다.

“강 선생. 계곡주가 뭔지 알아요?”

 상호는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 양반 지금 미쳤다. 그는 곧바로 검을 챙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해련이 그의 벨트를 덥석 잡고는 확 잡아끌어 바닥에 넘어뜨렸다. 왼쪽 무릎을 찧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크흡……!”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에게 해련이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도망쳐요? 젊은 애들은 다 이러고 논다더만.”

“누가 그런 염병을…….”

 그때 칸막이 너머에서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류 이사장님.”

“먼저 오셨습니까.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희가 일찍 왔는걸요.”

 류혁이 왔다. 상호는 황급히 해련의 입을 막았다.

해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상호는 더욱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겨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으응…….”

 해련이 콧소리로 교태를 부렸다. 화를 내기는커녕 즐기는 모습이었다.

‘돌겠네, 진짜…….’

 상호는 하늘에 맹세했다. 반드시 이 할머니의 아들 번호를 알아내고 말리라. 그래서 주책 부릴 때마다 일러바칠 것이다.

해련의 달뜬 숨이 상호의 손바닥을 덥혔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엔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녀의 손이 상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옆방에 전우와 학교 이사장과 학부형이 있다. 들켰다간 아주 개박살이 날 터였다. 상호는 해련을 살짝 밀쳐 바닥에 눕힌 후 옴짝달싹 못 하도록 그 위로 몸을 겹쳤다.

 그리고 한 손으론 입을 막고, 한 손은 검지를 펴 그녀의 눈앞에 들이댔다.

“가만히 있어요. 입도 뻥긋하지 말고.”

 그 말에 해련이 눈웃음을 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상호의 손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손을 떼어 달라는 것 같았다. 상호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완고한 손짓에 이끌려 손을 떼고 말았다.

해련이 그의 멱살을 잡아 서로의 얼굴이 가깝도록 끌어당기고는 술 냄새 가득한 입을 열어 속살거렸다.

“30년 만이니까, 서툴러도 이해해요.”

 그녀의 손이 상호의 바지춤을 와락 붙잡았다. 상호는 기겁하며 그녀의 손을 쳐냈다.

“아니, 가만히 있으라고요……!”

 목소리가 너무 크다. 그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와 해련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옆방에서도 불안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 침묵은 도현의 어리둥절해하는 목소리로 깨졌다.

“옆방에 제 친구가 있는 것 같은데…….”

“신기하네요. 제가 얼마 전에 만난 친구도 저런 목소리였는데.”

“제가 아는 사람하고도 목소리가 닮았습니다.”

 조졌다.

상호는 해련의 몸 위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해련이 그의 멱살을 놓질 않았다.

칸막이 너머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냐?”

 상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저히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는 눈을 감았다.

‘염병. 기껏 내기 이겼더니 추문으로 짤리게 생겼네…….’

 칸막이가 드르륵 접혔다.

 120. 어쩌다 마주친

도현은 딱히 한식을 좋아하진 않았다. 애초에 겨우 33살인 청년이었고, 다른 부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겪으며 맛을 따지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꾸 이 한식집으로 약속을 잡는 것은, 이런 곳에 오면 기자들도 눈치껏 얼굴을 내비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높은 양반들하고 회담하겠거니, 하고. 녹음기 같은 것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마루를 걸어 예약된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부협회장님. 일찍 오셨네요.”

“아, 하 사장님.”

 태궐그룹 회장의 아들, 하나로.

이제는 자주 만나서 익숙한 사이였다. 도현은 나로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기로 한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류 이사장님은 아직 안 오셨고?”

“예. 제가 너무 일찍 온 거죠.”

 나로가 잔에 물을 따르며 답했다.

예현여고의 이사장, 류혁. 그 사람도 오늘 자리에 같이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도현은 물을 홀짝였다.

“사업은 잘 되고 있어요?”

“예. 이제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의 사업은 몬스터의 사체를 소재로 쓰는 제조업. 그것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가공할 수 없는, 즉 헌터가 마나를 사용해야 가공이 되는 소재를 취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로는 도현과는 관련 사업에 대한 홍보를, 류혁과는 관련 사업에 대한 교육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나로가 고개를 꾸벅였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요. 일자리가 늘어나면 헌터들도 좋지.”

 그때 문이 열리고 혁이 들어왔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류 이사장님.”

 혁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먼저 오셨습니까.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희가 일찍 왔는걸요.”

 같이 일어난 나로가 마주 고개를 숙였다.

나이는 혁이 34살로 제일 많았지만, 사회적 지위는 혁이 세 번째, 나로가 두 번째, 도현이 첫 번째였다.

혁이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들어오자 종업원들이 금방 상을 차려왔다. 술 한 병도 함께.

도현은 술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나로와 혁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아는 도현은 병을 따지 않고 숟가락부터 들며 입을 열었다.

“이사장님.”

“예.”

“그 요즘 벼르고 있다는 친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외로 능력이 좋아서.”

“자르지는 못하셨어요?”

“예. 마음에는 안 들지만.”

 도현은 쓰게 웃었다.

 그는 혁이 노리는 인물이 상호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혁은 상호에게 낙하산을 태워 내려보낸 게 도현이란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저 백수로 살다가 운 좋게 장애인 취업 지원에 뽑혀 굴러들어온 B급 헌터로만 알고 있을 터였다.

“왜 마음에 안 드시는데요?”

“무예가인데 다리를 못 쓰는 게 말이나 됩니까. 백번 양보해도 부교사지, 정교사로 둘 생각은 없었는데…….”

 혁은 한숨을 쉬며 술병을 땄다.

“교장님이 한사코 정교사로 해달라, 꼭 담임 시켜줘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담임 시켰죠.”

“교장님이 고집이 세요?”

“아뇨. 평소에는 자상하신 분인데……, 그때만 유독 고집을 부리셔서요.”

 혁이 도현과 나로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연세도 많으시고 좋은 일 하셨던 분이라, 그때는 그냥 져 드렸습니다.”

“능력이 좋다면서요. 결과적으로 그분 말이 맞았던 것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는데…… 또 모르는 일이죠. 내년에도 두고 볼 겁니다.”

 이야기를 듣던 나로가 고개를 기웃했다.

“다리를 못 쓰는 무예가요?”

“예. 거기다 눈도 한쪽을 다쳤어요.”

 혁이 잔을 들어 둘과 부딪치며 대답했다. 나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요? 저도 딱 그런 사람 만난 적 있는데.”

“그래요?”

“네. 11월에 강원도 갔다가요. 근데 그 친구는 엄청 쎘어요. 막 칼을 안 보일 정도로 엄청 멀리 던졌다가 받더라고요. 데려간 S급 헌터들도 다 놀랄 정도였어요.”

“비슷한 사람이 있나 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B급이라.”

 혁은 나로의 말을 일축했다. 반면 도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11월에 강원도…….’

 아마 나로도 상호를 만났던 듯했다. 도현은 잔을 한 번 기울이고 나로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 친구 성격이 어땠어요?”

“음…… 진중한 성격? 무게감 있는? 그런 느낌이요. 그래도 친절하고 물어보면 다 대답해줘서. 친구도 먹었어요.”

 성격만 안 건드리면 좋은 놈이니까. 도현은 확신을 가졌다. 나로가 상호를 만났다고.

 그런데 옆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가만히 있으라고요……!”

 셋의 잔이 멈췄다.

셋 다 눈을 끔뻑이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옆방에 제 친구가 있는 것 같은데…….”

“신기하네요. 제가 얼마 전에 만난 친구도 저런 목소리였는데.”

“제가 아는 사람하고도 목소리가 닮았습니다.”

 나로와 혁도 맞장구를 쳤다.

도현은 몸을 일으켜 방을 나눈 접이식 격벽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그 너머를 향해 물었다.

“상호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 착각할 리 없는 목소리였다. 도현은 칸막이를 드르륵 열어젖혔다.

‘……?’

 순간 그의 뇌가 정지했다.

칸막이 너머에 있는 것은 역시나 상호가 맞았다. 맞는데. 문제는 그 상호가 누군가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옷을 반쯤 풀어헤친 20대 후반 정도의 여인.

도현은 얼이 빠진 채로 상호에게 물었다.

“뭐하냐?”

 상호는 돌이 되어버린 듯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호의 밑에 깔려 있던 백발의 여인은 고개를 들어 도현과 혁, 나로를 둘러보더니,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배시시 웃으며 앞섶을 여몄다.

“아이고, 어린애들한테 못 볼 꼴을 보였네.”

“…….”

 혁도 상호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굳어 있었다.

오직 나로만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상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할 뿐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