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태화는 계속 이겼다. 8강도, 4강도.
이미 16강에서 승리한 이상 태화가 장학금을 받는 것은 확정되었지만, 아직 아이들이 모르는 내기가 진행 중이었다.
‘지금이라면 분명히 보고 있겠지.’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연말평가의 결승전.
아이들은 물론이고 선생들까지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히 경기장 위의 두 소녀.
태화와 은율.
상호의 눈동자도 그 둘을 향했다.
‘은율이는 세희한테 졌고. 태화는 세희를 이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태화가 더 강하다. 하지만 전투는 주먹구구처럼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다.
어떻게 될지는 상호도 알지 못했다.
‘전부터 궁금했어.’
상호는 태화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10등 안에 든 태화가 더 노력할 수 있을지.
1년 동안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줘 봐.’
그는 검을 양손으로 짚고 가만히 기다렸다.
* * *
“오랜만이네.”
태화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은율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넌 저번에도 1등 했던가?”
“응.”
“대단하네. 1등 2등 1등?”
“응.”
은율의 말에 태화는 실쭉 웃었다.
“그럼 이번엔 2등이네? 수학적으로.”
“글쎄.”
은율은 검을 뽑아 들며 스산한 목소리로 답했다.
“세희 말고는…… 아무한테도 져본 기억이 없네.”
그리곤 눈 깜짝할 사이에 태화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건가. 태화는 결계 구석으로 순간이동을 하며 혀를 찼다.
‘빠르네.’
그래도 세희보다 빠르진 않으니까.
둘이 성격이 비슷하니 같은 전법이 통할 테다. 태화가 손을 뻗자 검은 결정창이 은율을 향해 날아들었다.
은율이 옆으로 달려 피하자 결정창은 바닥에 부딪혀 부서졌다. 노리고 날린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맞추기 어려웠다.
태화는 위로 손을 뻗었다.
화르륵……
거대한 불덩이가 손바닥 위에 생겨났다.
피처럼 붉은 진홍빛 화염구. 평소에 자주 쓰던 검은 불꽃과는 확연히 다른 빛깔이었다. 은율이 달려들려다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태화는 불덩이를 든 채로 걸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너 이거 좋아하지?”
그녀의 걸음은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은율이 검을 늘어뜨렸다. 태화는 천천히 은율을 향해 원을 조여들었다. 아주 조금씩.
은율도 살며시 발을 떼었다.
* * *
“왜 안 달려들어?”
나빛이 세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세희는 옆에 서 있는 상호의 눈치를 살피며 설명했다. 훨씬 강한 사람 앞에서 아는 척을 하려니 부끄러웠다.
“저 불 때문에 그래.”
“저게 뭔데? 세희 넌 알아?”
“아니. 모르니까 못 달려들지. 저게 갑자기 터지면 어떡할 거야.”
“아하!”
나빛이 손뼉을 짝 쳤다.
하지만 궁금한 게 다 풀리지는 않았는지, 다시금 세희를 돌아보며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면 은율이가 태화한테 안 가면 되는 거 아냐? 그냥 피하면 되잖아.”
“저 불덩이의 위력을 모르니까. 피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 거야. 그래서 기다리는 거지.”
“뭐를?”
“불덩이를 던지거나, 더 가까이 다가오는 거.”
섣불리 뛰었다가 그 방향에서 불덩이가 터지면 곤란하니까, 은율은 태화가 불덩이를 던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 반대 방향으로 피할 터였다.
혹은 폭발보다 빠르게, 태화의 반응속도보다 빠르게 벨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리거나.
태화도 그걸 아니까 거리를 슬금슬금 좁히고 있을 터.
은율은 태화의 손이 움직이기를 기다렸고.
태화는 은율의 발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그럴 거라고, 세희는 생각했다.
“……, …….”
별안간 태화가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작아서 세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빛이 양쪽 귓바퀴에 손을 오므려 붙였다.
“뭐라고 하는 거야? 안 들려…….”
지윤도 귀를 기울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카는지 들리뿔질 않네. 세희 니는 들리나?”
“아니…….”
“주문이야.”
그 말에 아이들은 동시에 상호를 쳐다보았다. 상호는 단 한시도 태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나빛이 어리둥절해했다.
“악마는 주문 필요 없지 않아요?”
“간단한 것만 그런 거지. 악마들도 복잡한 거는 주문 외워야 해.”
물론 그 기준은 인간보다 훨씬 높지만.
악마의 영창. 상호는 눈을 반짝이며 태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에게는 들렸다.
“피보다 뜨거운 지옥과 들개보다 더러운 악마여…….”
* * *
태화는 영창을 이으며 은율에게 다가갔다. 손에 든 불덩이가 그 크기를 점점 불려가고 있었다.
열기가 너무 강해서 시전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얼굴에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대지의 부귀와 사해의 영달을 외면하고…….”
은율은 달려들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더 곤란한 마법이 되기 전에 처리하고 싶으리라.
태화는 은율의 발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천하를 비추는 천광을 질시하니…….”
그때 은율이 먼저 발을 굴렀다.
‘걸렸구나!’
태화는 그 즉시 영창을 멈추고 자신과 은율의 사이에 화염구를 내리꽂았다.
콰과광
폭음과 함께 경기장이 뒤흔들렸다.
이미 결계 구석으로 순간이동을 한 뒤였다. 태화는 검은 연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인기척이 느껴지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쓰러진 듯했다.
‘……끝인가.’
태화는 손등으로 이마의 진땀을 닦았다.
그때.
머리 위에서 아주 가느다란 바람 한 자락이 느껴졌다.
‘……!’
그녀는 반사적으로 결계를 박차고 앞으로 굴렀다. 그러자마자 은율의 검이 태화가 서 있던 자리에 내리 찍혔다.
은율은 땅에서 검을 뽑으며 태화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을 본 태화는 다급히 순간이동을 써 반대편으로 도망갔다. 결계의 구석은 무예가에게 훨씬 유리한 공간이었기에.
그제서야 태화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떻게 피한 거야?”
“안 피했어.”
은율은 검을 한 번 빙글 돌리고 태화를 향해 다가갔다.
“받아냈지.”
은율의 몸에는 안개처럼 희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저런 게 있다는 것은 태화도 알았다. 세희나 지윤과 대련할 때 이미 봤다. 호신지기인지 호신강기인지. 문제는 그 둘의 것보다 훨씬 짙고 두꺼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쳇.”
태화는 손을 들어 올렸다.
역시 코앞에서 터트리는 수밖에 없다. 주문 영창 없이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으로.
그녀의 손에 불꽃이 휘몰아쳐 장미의 형상을 갖췄다.
‘와 봐.’
태화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은율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철컥
“윽?!”
은율은 당황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결정 조각이 양 발목을 족쇄처럼 묶고 있었다.
언제 이런 함정을 준비했을까. 은율은 처음에 태화가 결정창을 날렸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불덩이를 폭발시켰던 것도.
“큭……!”
그녀는 넘어질 뻔했다가 빠르게 중심을 잡았지만, 그 아주 잠깐의 주춤거림이라도 승패가 갈리기엔 충분했다.
발치에 장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
은율의 맹한 목소리는 곧 이어진 격렬한 폭음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 * *
1등이 정해졌다.
상호는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아직 결계가 내려오기 전이었지만 손으로 간단하게 찢어 버렸다.
그는 그렇게 선 채로 연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연기 속에서 흙 지르밟는 소리가 났다.
자박……
그 발소리는 점점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한 발짝. 한 발짝. 상호는 그 걸음마다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연기 밖으로 태화가 걸어 나왔다.
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은 태화가 먼저 했다.
“어때?”
태화가 난장판이 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믿으랬지.”
또 반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혼낼 생각이 없었다.
상호는 손가락을 까딱여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태화가 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계속 까딱였다. 태화도 점점 더 빠르게 달렸다.
빠르게. 빠르게.
이윽고 땅을 박차고 상호의 품에 뛰어들었다.
“꺄하하하! 내~꺼~야~!”
“그래, 니꺼 해라 임마.”
상호도 오늘만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는 태화를 마주 끌어안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땅에서 발이 떨어진 태화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깔깔 웃었다.
꼭 아버지와 딸 같았다.
“나 잘했지?”
“그럼. 최고로 잘했지.”
“그럼 나 소원권 줄꺼야?”
“줘야지.”
“옷도 사줄꺼야?”
“그래야지.”
“꺄하~.”
태화는 상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상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 드럽게 시끄럽다 했더니 학생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 개부러워! 나도 강쌤 반 갈걸…….”
“쟤 마법사 아냐? 강쌤 마법도 쓰나?”
“강쌤 의외로 엄청 똑똑한 거 아냐? 되게 잘 가르치나 본데?”
그중에서도 제일 시끄러운 건 역시 상호의 반 아이들이었다.
“이태화! 이태화!”
“야이 문디 가스나야. 또 무사기 이 지랄하믄 헷빠닥을 뽑아뿐다이.”
그렇게 소리치는 나빛과 지윤 옆에서는 세희가 빙긋 웃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해련과 설미, 그리고 미진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미진은 마지못해 친다는 느낌이 강하긴 했지만.
상호가 그렇게 주변을 쓱 훑어보는데, 품에서 태화가 속삭였다.
“쌤.”
“응?”
“내 소원. 뭔지 알죠?”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알지.”
그가 대답하자 태화가 키득거렸다.
“뭐? 나랑 같이 산다고?”
“얌마.”
상호도 그게 농담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진짜로 바라는 건 따로 있었으니까.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걱정 마.”
“그럼 됐구.”
태화는 그의 품에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지금은 이대로 있어줘요.”
“……응.”
둘은 하루 종일이라도 그렇게 지낼 것처럼 서로를 껴안았다.
118. 사(師)와 부(父)
오후 네 시. 연말평가의 정리가 끝났다.
아이들은 씻고 옷을 갈아입으러 교실로 먼저 올라갔고, 상호는 이제 종례 준비를 해서 복도를 걷는 중이었다.
별안간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 선생.”
뒤를 돌아보니 해련이 씩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교장선생님.”
“고마워요. 내기 이겼네.”
“그야 뭐……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교장선생님이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죠.”
“어쨌든 축하해요.”
해련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한잔할 거지?”
“예?”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해련과 또 술자리를 같이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연말에 회식 있잖아요. 그때 많이 마시면 되죠…….”
“좋은 날에 마셔야지. 500만원도 벌었으면서 섭섭하게 굴 거예요?”
“그건 학급이 받는 거잖아요……, 제 통장에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안 쏜다고?”
해련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상호는 다급히 양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교장선생님. 제가 실은, 아이들이랑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 해서…….”
“저녁 먹으면 술 못 먹나?”
“그, 그 다음엔 그, 태화 마법 가르쳐준 지인한테 가서, 고맙다고 하려고…….”
“그래서 못 쏘겠다?”
“예…….”
“강 선생.”
해련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상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강 선생한테 다른 걸 쏘게 할 수도 있어.”
차라리 총으로 쏘세요. 상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 주말……이나 금요일은 안 될까요?”
“강 선생한테 나보다 먼저인 사람이 있나?”
“제발……. 최대한 좋은 곳으로 준비할 테니…….”
그 말에 해련은 평소처럼 고상한 웃음을 지었다.
“기대할게요. 강 선생.”
“예…….”
주말까진 시간을 벌었다. 상호는 등을 툭툭 두드려주는 해련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다른 반 교실들은 시끌벅적했지만, 복도 끝에 있는 그의 교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들이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호는 교탁 앞에 섰다.
“태화 오늘 잘했다.”
태화는 가슴을 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들 잘했어. 1년 동안 고생한 만큼 결과를 받은 거야.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운으로 결정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는 없겠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교탁을 탁 쳤다.
“고생했다. 내일도 수업은 하겠지만…… 한시름 덜었고, 곧 방학이니까. 마음 편히 먹고. 끝까지 잘 하자. 알았지?”
“세희는요?”
나빛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코를 훌쩍이고,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세희는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뭘 어떻게 돼.”
대답은 세희가 했다.
“어쩔 수 없는 거지.”
“내가 돈 줄게! 내가 아빠한테…….”
“됐어.”
세희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후회 없어.”
“그래도! 오빠한테라도 말해 볼 테니까…….”
“됐다니까.”
나빛이 울먹여도 세희는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상호는 아이들을 쓱 둘러보았다. 지윤은 아무 말이 없었고, 태화는 아예 의자를 뒤로 빼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나빛이 빽 소리쳤다.
“나 돈 많다니까! 내가 너한테 그 정도도 못 줄 것 같아? 친구잖아!”
“대출 받으면 돼.”
“……아.”
세희의 말에 나빛은 잠시 얼이 빠졌다가, 곧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너무 비싸잖아. 내가 도와줄게…….”
“됐다, 나빛아.”
상호는 교탁을 두드려 아이들을 집중시켰다.
“세희는 남아서 이야기 좀 하고. 너희는 먼저 가. 내일 보자.”
“네.”
태화와 지윤이 대답했다.
나빛은 책상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곧 지윤에게 번쩍 들려서 교실 밖으로 끌려나갔다.
“이거 놔! 선생님! 세희야!”
“아따, 고만하고 따라와라잉. 쌤이 알아서 하시겠제.”
이윽고 문이 닫히고, 교실이 조용해졌다.
겨울의 짧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서, 주홍빛 하늘이 커튼을 넘어 교실을 물들이고 있었다.
상호는 검을 짚으며 세희의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태화의 의자를 꺼내 앉았다.
“세희야.”
“네.”
세희가 몸을 돌려 그를 바로 마주했다.
상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세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기만 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오늘 태화랑 싸울 때. 잠깐 빛이 났었지?”
“아, 맞아요.”
“초강기야.”
“……네?”
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기도 못 만드는데 초강기라니.
“그…… 반짝인, 그게요?”
“응. 초강기는 그렇게 엄청 밝은 빛이 나거든. 선생님은 강기 색깔이 이래서 티가 안 나지만.”
상호가 검지를 들어 올리자 그 끝에 검푸른 불꽃이 한 자락 피어올랐다.
“뭐, 천색창염이 강기만 만들 수 있다면 초강기도 쉽게 만들어지긴 해. 그리고 네 안엔 내 내공하고 스승님 내공도 들어 있으니까. 네 재능하고 집중력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
“하지만, 전 아직 강기도 못 만드는데…….”
“곧 만들게 될 거야. 은율이도 이미 강기 초입에 들어섰어.”
태화와 싸울 때 보여줬던 호신강기. 다른 학생들의 것보다 훨씬 짙었다.
“다만…… 네가 그 초강기로 공격을 하게 되면, 보호 마법이 버티질 못해. 아티팩트가 깨지는 건 물론이고…… 사람이 다칠 수도 있어.”
세희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면…….”
“당분간 다른 애들하고 대련하지 마.”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다.
검기, 검강을 안 쓰게 한다면 안전하긴 하겠지만, 그러면 최선을 다해 공격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건 상호의 교육 기조와는 상반되는 일이었다.
안 좋은 버릇이 들 수도 있으니까. 아예 안 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윤이랑 목도로 싸우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진짜 대련은 절대 하지 마. 선생님이 허락할 때까지.”
“네.”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무서운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평소처럼 조언해 주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또 앞으로도 가르쳐 주겠다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미 결심했다.
“세희야.”
상호는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네.”
“대출 받을 거야?”
세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왜?”
“비싸잖아요.”
학생이 부담하기엔 너무 큰 돈이다.
“그걸 졸업하고 갚으려면…… 돈을 벌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천색창염 수련하는 거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사실은 두려웠다. 빚이라는 것 자체가. 인생을 갉아먹는 벌레처럼 느껴져서.
다만 무공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핑계가 아니고, 한 치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니까 퇴학당해도 괜찮아요. 저는…… 혼자서 선생님 무공 공부하는 걸로 충분하니까.”
선생은 선생의 일을 해야 하니까. 퇴학당한 아이까지 신경 쓸 순 없으니까.
혼자서 먹고살고, 천색창염을 공부하면 된다.
그걸로 충분한데.
“그렇게 살면 돼요.”
그렇게 살면 되는데. 자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세희는 간신히 웃으며 손을 뻗었다.
“손 주세요.”
상호는 말없이 왼손을 내어주었다. 세희는 그 손을 잡고 단전에서 내공을 꺼냈다.
1등 꼭 하라는 약속과 함께 받았던 내공.
이제는 돌려줄 시간이 되었다.
“감사히…… 잘 썼어요.”
세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공을 손에 그러모았다. 대략 9할 정도.
그게 다 받은 것이었다.
“이젠 제가 알아서 모을게요.”
그녀는 상호의 손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내공이 들어가질 않았다. 꼭 철벽에 막힌 것처럼 되돌아오기만 할 뿐.
세희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어 상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누구 맘대로.”
상호는 오른손을 들어 세희의 손에 얹었다.
까슬까슬하지만 따뜻한 손들이 세희의 작은 손을 감쌌다. 세희는 그 손들에서 내공이 흘러드는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선생님?”
“받아. 단전 많이 넓혀 줬잖아.”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세희는 상호의 내공을 막아내려고 용을 썼다. 차마 더 받을 수가 없어서.
그래도 강대한 힘은 억지로 뚫고 들어왔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서, 선생님…….”
“받으라니까.”
상호는 세희의 손을 끌어당겨 바싹 다가앉혔다. 서로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깝게.
그리고 속삭였다.
“대출 받지 마.”
“네?”
“내가 다 내줄게.”
“네……?!”
세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무참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참았던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제가, 제가 그걸 어떻게 받아요……?!”
부르짖듯이 그런 말을 쏟아냈다.
“나는 못 받아요. 나는, 나는 선생님한테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앞으로도 갚을 방법이 없는데! 이렇게 다 받기만 하면, 밥에, 옷에, 무공에, 내공으로 모자라서 돈까지 받으면…… 나는 어떡해요?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요?!”
“네가 날 선택했지?”
상호는 내공의 전달을 끝내고 양손으로 세희의 얼굴을 잡았다. 보드라운 뺨이 눈물에 젖어 촉촉했다.
“네가 신청서를 나한테 냈잖아.”
“그게 뭐요……!”
“나도 그걸 보고 널 선택했어. 스승과 제자는 서로가 선택하는 거야. 그러니까, 스스로가 선택한 인연이니까. 책임을 갖고 성의를 다해야 해. 네 마음대로 끝낼 수 있는 인연이 아니야.”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세희를 꿰뚫을 듯이 바라보았다.
“내가 포기하기 전까지 포기하지 마.”
처음 만난 날 했던 말.
세희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삼켰다.
받기만 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윽, 으흑, 으윽…….”
“그리고…… 선생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니까.”
상호는 세희를 품었다.
“갚을 필요 없어. 부모는 그런 거야.”
그 말이 직격탄이 되었다.
세희는 상호를 와락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갚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하염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모습이 꼭.
‘진짜 아빠랑 딸이 된 것 같네.’
상호는 말없이 세희의 등을 토닥이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하늘 아래의 주홍빛 태양을.
더 이상 노을은 후회로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