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운동장 한쪽에 놓인 게시판.
세희와 태화는 그 앞에 서서 대진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냐?”
“……그러게.”
다른 학생들은 이름을 확인하고 금방 빠졌지만, 둘은 하염없이 그렇게 서 있었다.
“X됐는데.”
“그러게.”
둘은 각자의 이름을 쳐다보았다.
방향이 같았다.
-천세희┻이태화
“져줘? 난 쌤한테 빌붙어 살면 되는데.”
“나도 선생님 무공 공부하면서 살면 돼.”
하지만 서로의 말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서로가 알았다.
태화의 붉은 눈동자가 세희를 곁눈질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처음이었지.”
“그렇지. 나빛이는 인형이랑 놀았고.”
“그땐 누가 이겼더라?”
“내가.”
“그랬나?”
태화는 뒷짐을 진 채로 꼬리를 움직여 세희의 손을 문질렀다. 세희도 살며시 그 꼬리를 잡았다. 둘은 고개를 돌려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검고 매끈한 꼬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느긋한 듯이.
그 미묘한 기류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조용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116. 나쁜 아이
상호는 경기장 위로 세희와 태화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예상은 했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64명 중에 둘이 만날 확률은 분명 충분히 존재했다.
하지만, 무언가 외력이 작용한 것 같다는 느낌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나빛이도 있고 지윤이도 있는데. 하필이면 저 둘.
상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류혁 이사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에서 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만.
그의 착잡한 시선이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세희가 결연한 눈빛으로 검을 뽑고 있었다.
반면에 그 앞에 선 태화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다리를 건들거렸다.
늘 그렇듯, 진지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믿으랬으니까.’
그렇지만 상대가 세희일 거라고는 상정하지 않았을 터.
둘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상호는 염주를 굴리며 경기장으로 걸어갔다. 그 위에서는 결계가 펼쳐지며 시합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 * *
세희는 검을 꺼내며 태화를 노려보았다.
이야기는 이미 게시판 앞에서 끝냈다. 이제는 확인을 해야 할 시간. 실력이든, 마음이든.
하지만 태화의 입은 늘 그렇듯 닫혀 있질 않았다.
“아직 안 늦었어.”
태화가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고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져줘?”
“시끄러.”
“넌 항상 나한테 시끄럽다고 하더라.”
그야 시끄러우니까.
세희는 칼집을 바닥에 던지고 검을 태화에게 겨눴다. 태화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제 그 지겨운 잔소리 안 들어도 되겠네.”
태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검은 연기가 흩날렸다.
선공. 마법사답지 않은 선택이다. 세희는 시야를 빠르게 훑으며 몸을 수그렸다.
앞에는 없다. 그렇다면 뒤.
세희의 몸이 옆으로 화살처럼 튕겨 나갔다.
콰드득……
검은색 결정으로 이뤄진 거대한 손이 땅을 그러쥐었다. 방금까지 세희가 있던 자리였다.
세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 결계를 박찼다.
‘……뭐야.’
방향을 꺾어 중앙을 향해 뛰었는데, 태화는 보이지 않고 결정 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저 뒤에 숨어 있다.
하지만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세희의 발이 바닥을 힘차게 굴렀다.
마법보다 빠르게 베면 그만이다.
“흡!”
보법은 그리 많이 배우지 못했다.
그녀가 스승에게 배운 보법은 단 하나였다. 오로지 속도에만 집중하는 이름 없는 보법.
그리고 그녀의 쾌검과, 쾌검을 운용할 때 천색창염의 강기가 움직이는 방식.
‘검이 흔들리지 않게.’
칼의 중심에 내공을 세우고.
‘무엇이든 벨 수 있게.’
남은 내공을 전부 날에 집중시킨다.
그녀가 그렇게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렀을 때.
파앙
파공음과 함께 하늘빛이 번쩍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섬광이었다.
‘……뭐야.’
세희는 처음 보는 현상에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경기장의 대각선 반대편에서 그녀가 서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땅이 파여 있었다. 중앙에서 결정 손이 부서져 내렸다.
태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그 기술이 뭐였는지 곱씹을 시간도 없이, 세희는 태화의 다음 수를 피해 앞으로 뛰쳐나갔다.
“개빠르네, 진짜.”
머리 위에서 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희는 반사적으로 발을 멈추고 몸을 확 수그렸다. 머리 위 허공에서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게 느껴졌다.
뜨거운 열기도 함께.
꼭 형체가 있는 불 같았다.
‘뭐지?’
세희는 바닥을 한 번 구르고 일어나 태화를 마주했다. 그리곤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저걸 불꽃이라고 불러야 할까, 광선이라고 불러야 할까. 밝게 보랏빛으로 타오르는 검이 태화의 두 뿔 사이, 양손, 그리고 꼬리 끝에 길게 자라나 있었다. 총 네 개.
태화가 밉살스럽게 이죽거렸다.
“내가 니들 무사기 때문에 이거 만들었어.”
그리곤 검은 연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세희는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태화가 오른쪽에 나타나 마법검을 휘둘렀다. 세희는 그걸 쳐내려다가 태화의 꼬리가 자신의 목을 향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급히 몸을 뺐다.
‘아비게일 보고 배웠구나.’
보법과 순간이동을 같이 쓰는 마법검사 외국 학생. 그녀를 보고 배운 것이 분명했다. 순간이동 직후에 공격하는 것이 아주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근접전은 이골이 났다.
‘은율이보다 훨씬 느리니까.’
세희는 뛰어올라서 경기장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맨 처음 시작했던 그 위치였다.
그녀를 따라 순간이동 해 온 태화가 수직으로 검을 휘두르려 했다.
세희는 그 순간을 노리고 발을 굴렀다.
퍼억
“……끄흑!”
칼집이 태화의 턱을 쳤다.
끄트머리를 밟아 칼집을 날린 세희는 쉴 틈을 주지 않고 태화의 몸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태화는 급히 마법검을 움직여 몸을 방어했지만, 세희의 검은 번개처럼 방향을 비틀었다. 꼬리 쪽으로.
악마의 약점.
연약한 부위.
그동안 대련을 하면서 한 번도 노린 적 없는 곳이었다.
“윽……!”
예상대로 태화는 기겁을 하며 꼬리를 빼려 했다. 하지만 세희의 검은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검이 꼬리를 쳤다.
세희는 승리를 확신했다.
“……어?”
검이 미끄러지기 전까지는.
꼬리는 마치 기름을 바른 듯이 검을 미끄러뜨렸다. 세희의 머릿속이 망치로 맞은 듯 멍해졌다.
‘이 마법은…….’
민정이 보여줬던 마법.
검이 미끄러져 중심이 흐트러졌다. 세희는 기우뚱거리다가 다시 공격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태화는 그동안 순간이동으로 거리를 확보한 채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검은 결정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끝이야.”
결정들이 사방에서 세희를 향해 날아들었다.
세희는 검의 내공을 거둬들이고 몸에 남은 내공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호신지기를 둘렀다.
하지만 곧 결정들에 둘러싸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윽…….”
세희는 침음을 흘렸다. 이 바보한테 설계에서 지다니.
눈을 질끈 감은 세희의 앞으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천세희.”
그 말에 눈을 떠 보니, 태화의 손에서 불꽃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불꽃은 이내 장미의 형상을 이뤘다.
“내 맘 알지?”
태화가 그렇게 말하며 세희의 코앞에 장미를 들어 올렸다. 불꽃이 일렁이는 장미는 겉보기엔 퍽 아름다웠다.
세희는 혀를 찼다.
“제일 아픈 거잖아.”
“그게 내 마음이라고.”
태화는 그 말을 남기고 손에서 장미를 놓았다.
세희는 떨어지는 장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땅에 닿기 직전에 피식 웃고 말았다.
“……나쁜년.”
폭발이 결계 안을 휩쓸었다.
* * *
상호는 결계 안에 가득한 흑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진행교사는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해 승패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상호에게는 보였다.
누가 쓰러졌는지.
누가 이겨서 결계 앞에 서 있는지.
‘결국 이렇게 되나.’
그는 경기장 외곽을 빙 돌다가 걸음을 멈추고 뒷짐을 지었다.
결계를 올려다보니 흑연이 잦아들고 있었다. 상호의 앞에 뿔 달린 소녀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진행 교사가 선언했다.
“이태화. 승.”
결계가 내려가고 흑연이 풀풀 흩날렸다.
상호는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태화는 이가 드러날 정도로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호도 씩 웃어 보였다.
“잘했어.”
“믿으라고요. 나만.”
태화가 경기장에서 폴짝 뛰어내려 상호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 그 뜻을 깨닫고 주먹에 주먹을 맞대었다.
그리고 경기장 중앙에 쓰러진 세희를 바라보았다.
세희는 미동도 없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갔다 올게.”
“네.”
상호는 태화를 뒤로하고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다. 세희는 눈을 깜작이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상호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아?”
“네.”
세희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괜찮아요.”
울음을 참는 기색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졌으니까. 그냥 진 것도 아니고 실패했으니까.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것은 분명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상호는 세희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다독여 주었다.
“울지 마.”
“알아요.”
세희는 애써 웃었다.
“제가 지금 울면 쟤가 신경쓰잖아요.”
앞으로의 시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세희는 태연한 표정으로 상호와 함께 경기장을 내려갔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패자조의 시합이 남아 있기에.
의미는 없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노력해야 하니까.
세희는 상호를 향해 살짝 웃고 패자조의 경기장으로 향했다. 상호는 그 마음을 알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열심히 해.”
“네.”
세희는 그 대답을 남기고 돌아서서 걸었다. 평소와 같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 * *
“저짝은 태화가 이깄는갑네.”
지윤은 옆 경기장을 돌아보며 경기장으로 올라왔다. 그 위에서는 은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윤은 실쭉 웃었다.
“반갑데이, 은율이.”
“안녕.”
은율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지윤이 양 주먹을 부딪치자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은율이 니 그거 아나?”
은율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세희랑 태화는 10등 안에 못 드가믄 퇴학이래이.”
지윤은 은율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세희는 저게 마지막인기라. 저 패자조가. 학교에서의 마지막이라꼬. 긍께 니가 좀 가 도. 저기 가서 세희랑 시합해 달라 이 말이다.”
은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윤은 은율의 동요를 알아차리고 더욱더 밀어붙였다.
“그리고 은율이 니가 올라갔다가 말이다. 태화랑 붙으면 어떡할 기가. 니가 태화까지 보내뿌면, 태화 가는 그렇다 치드라도 울 쌤이 니를 원망할기라. 그래도 되긋나?”
은율이 손을 축 늘어뜨렸다. 지윤은 쾌재를 부르며 은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긍께 내가 좀 올라간다이!”
주먹이 은율의 얼굴에 날아갔다.
* * *
지윤은 바닥에 처박힌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율이 니 유술도 쓸 줄 아나?”
“조금…….”
“말을 했어야제.”
“……미안.”
“알면 칼 뽑을 때까지 기다리……. 아오, 내는 와 일케 운이 없노…….”
“나 갈게.”
은율은 총총걸음으로 경기장을 내려갔다.
남겨진 지윤은 좀 뒹굴다가 몸을 일으키고 한숨을 푹 쉬었다. 검을 뽑기 전에 기습하면 승산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에휴, 쌤이랑 유술 연습이나 더 해야제…….”
그녀는 일어나서 패자조 경기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패자조 경기 결과, 세희는 33등이 확정되었고, 지윤은 34등이 확정되었다.
본선은 계속되어 어느새 16강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상호는 경기장 위로 오르는 태화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이기면 10등은 확정.
문제는 상대가 나빛이었다.
‘쓰읍……. 하필이면.’
상호는 자꾸 아이들끼리 붙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반끼리 붙도록 대진을 조작한 것 같은데.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으니. 방법은 하나. 보란 듯이 1등을 해내서 완벽하게 이겨 주는 것이다.
상호는 태화와 나빛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 *
나빛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발을 가볍게 굴렀다.
“태화 나빠.”
“뭐가, 초딩아.”
“세희한테 져줬어야지.”
“……넌 나는 생각 안 해?”
태화는 어이없어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나빛을 향해 뻗은 그 손에서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나빛은 등에 날개를 펼치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녀가 황금색 방어막을 만들며 방긋 웃었다.
“나한텐 아무것도 안 통할걸~.”
하지만 태화도 방법이 있었다. 아주 원초적인 방법이.
태화는 일부러 곤란한 척 머리를 긁적였다.
“야, 하나빛.”
“응?”
“너 돈 많잖아.”
나빛이 눈을 깜빡였다.
“내 돈은 아니지만…… 그렇지? 아무래도…….”
“양보하지 그래?”
태화는 뒷짐을 지고 말을 이었다.
“네가 나만큼 절실해? 솔직히 네 그 능력은 그냥 재능이잖아. 그런 능력으로 남들 이기면 미안하지 않아? 안 부끄러워?”
“응.”
나빛의 등 뒤에 성창 아홉 개가 원을 그리며 펼쳐졌다.
“재능까지 최대한 이용해야 최선인 거잖아.”
“참나…….”
태화는 혀를 차고는 한마디 했다.
“니 진짜 나쁘다.”
“헤헤…… 미안해. 어쩔 수 없어.”
“머리 나쁘다고.”
“응?”
별안간 태화가 검은 연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빛은 느긋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든 방향을 막아주는 방어막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 바로 옆에서 웬 장미가 튀어나왔다.
“……응?”
“니 방어막 졸라 넓더라.”
태화는 그렇게 속삭이고는 꽃을 나빛의 가슴팍에 부딪쳤다.
117. 증명
“아파…….”
바닥에 드러누운 나빛이 코를 훌쩍였다. 온몸에 검댕이 한껏 묻어 있었다.
태화는 그 앞에 다가섰다. 손이 얼얼했지만, 몸에 직격당한 나빛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아프라고 한 거니까.”
“너무 아파…….”
“아프라고 한 거라니까.”
“마음이 아파…….”
“뭐?”
태화가 눈살을 찌푸리자 나빛이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태화가 그동안 말 안 해주고 속여왔다는 게…….”
“비장의 무기니까 당연하지.”
이날까지 꾹 참아왔다. 일부러 져 가면서. 태화는 쪼그려 앉아서 나빛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무예가랑 마법사는 다르다고.”
“마사기…….”
“너만 하겠냐?”
그 말에 나빛이 볼을 부풀렸다.
태화는 조금 더 나빛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쌤한테 말해. 나한테 졌다고.”
“응?”
나빛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 같았으면 먼저 달려가서 자랑했을 텐데.
“왜? 직접 가서 말하면 되지 않아?”
“난 이젠…….”
결계가 내려가며 바깥이 펼쳐졌다.
태화는 돌아서서 경기장을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보여줘야 할 때가 됐어.”
그런 건가. 나빛은 태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서 상호가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님!”
그녀는 벌떡 일어나 담임을 향해 달려갔다.
상호의 옆에는 세희와 지윤이 서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나빛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지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푸훕, 킥!”
“풉…….”
세희도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빛은 의아해하다가 상호를 향해 겸연쩍게 웃었다.
“보셨어요?”
“응.”
“죄송해요. 한 번도 생각 못 했던 거라…….”
“다음부턴 조심해. 그리고…….”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셀카 모드로 나빛에게 건네주었다. 나빛은 화면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양 뺨에 검댕으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바보’라고.
“으익……!”
“있어 봐, 지워 줄게.”
상호가 손수건을 꺼내는 순간, 운동장 저편에서 진행 교사가 소리쳤다.
“16강 패자조! 부전패당하기 싫으면 빨리 와라!”
“네, 네에~!”
얼굴을 닦을 새도 없었다. 나빛은 상호의 손수건을 받아들고 황급히 패자조 경기장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