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눈을 뜨니 얼굴 네 개가 보였다.
‘?’
시야의 네 방향에 하나씩. 10시 방향에 세희, 2시 방향에 태화, 4시 방향에 지윤, 8시 방향에 나빛.
상호는 눈을 끔뻑거리며 아이들과 한 번씩 시선을 마주쳤다.
“……뭐해?”
“죄수번호 육천구백육십구번.”
태화가 입술을 쭉 내밀며 다가왔다.
“형을 집행한…… 우붹!”
“비켜.”
상호는 태화의 입술에 검지를 푹 박아넣고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보다 먼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들 일찍 일어나 버렸다.
‘빨리 아침밥 차려야겠다.’
그는 일어나서 방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씻고 수업 준비해. 밥 먹고 바로 나갈 수 있게.”
“네.”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밥을 차리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상호는 빨래 바구니에 쌓인 아이들의 체육복을 들어 세탁기에 넣었다. 체육복이 두 벌씩 있으니, 오늘 여벌로 수업하고 나면 내일은 이걸 다시 입어야 했다.
아침 먹고 건조기까지 돌려놓으면 되겠다. 그는 돌아서서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아침은 좀 심심하게 먹는 게 좋겠지.’
자반고등어와 된장찌개. 이미 어제 장을 볼 때 계획해 놨다.
상호는 쌀을 퍼서 밥솥에 넣고 취사를 돌렸다. 세희와 지윤이 쪼르르 달려와 그의 옆에 섰다.
“도와드려요?”
“아니. 혼자 하지 뭐.”
어제 저녁도 그 혼자서 다 했다. 아이들이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상호가 내공을 뻗자 가스레인지가 혼자 켜지고 프라이팬에 기름이 둘러졌다.
“너흰 가서 준비해.”
“다 했습니더.”
“그럼 쉬고 있어. 밥 지으려면 좀 걸리니까.”
“네.”
두 아이는 소파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티비를 보고 핸드폰을 하는 동안 식사가 완성되고 세탁이 끝났다. 상호는 밥을 퍼서 그릇에 담으며 소리쳤다.
“얘들아, 밥 먹어라.”
“네.”
아이들이 식탁에 착석했다.
상호는 찌개와 고등어를 식탁에 놓고 베란다의 세탁기로 가서 체육복을 건조기로 옮겼다.
식탁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쌤, 빨리 와요.”
“어서 드세요~.”
“응. 갈게. 먼저 먹어.”
그는 건조기를 켜고 식탁으로 향했다.
다들 안 먹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상호가 앉아서 숟가락을 들자 그제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상호는 밥을 먹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다섯이서 아침 먹은 건 처음인가?”
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은율이가 있거나, 쌤들이 있거나 했지예.”
확실히 다섯이서 아침을 먹은 건 처음이었다. 주말 외식은 점심이나 저녁이고, 학교에서 먹는 아침에는 나빛이 없으니까.
상호는 된장찌개를 한 술 홀짝이고 말했다.
“집에서 먹을 땐 다섯이 제일 좋은 것 같다. 단출하고.”
태화가 실쭉 웃었다.
“내년에도 쌤 집에는 우리 넷만 오는 거예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지.”
“예현여고 교사 강땡땡, 반 학생 십여 명을 자택으로 데려와…….”
“……오지 말자, 그냥.”
다섯은 그렇게 아침을 먹었다.
115. 연말평가
“밥 줘.”
태화가 거실 바닥에 뒹굴며 배를 벅벅 긁었다.
완전히 개백수가 되어버린 모습. 상호는 설거지를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금방 차려 줄게. 설거지부터 하고.”
“아이~ 씻팔! 제자가 굶고 있잖아!”
“하…….”
상호는 닦은 그릇을 건조대에 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내가 죽기 전에 쟤 철드는 꼴을 볼 수 있을까……?’
“꺄하하!”
소파 쪽에서 지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티비에는 요즘 유명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나빛의 코 고는 소리도 함께였다.
“쿠우울…….”
상호의 손에서 그릇들이 처량하게 달그락거렸다.
백에 하나 효은에 태화까지 달고 살게 되었다가는 인생을 저당 잡힐 것 같았다.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설거지를 하는데, 누군가가 그의 옆구리를 살포시 눌렀다.
“선생님. 건조기 다 됐어요.”
뒤를 돌아보니 세희가 빨래를 들고 눈을 깜작이고 있었다.
이 얼마나 견실한 아이인가. 상호는 코를 훌쩍이며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잘했어…….”
“왜 우세요.”
“그냥, 기특해서…….”
한창 감동에 빠져 있는데 거실에서 태화가 빽 소리를 쳤다.
“밥 달라고!”
상호는 더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렸다.
“이태화. 너……, 밥 먹으면 진짜 꼭 10등 해라.”
“하면 되잖아.”
“너 지금 하는 걸 보면…… 하아…….”
아무리 봐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훈련이든 연말평가든 대충 때우고 끝내버리겠다는 것 같았다.
상호는 밥솥을 열고 방금 막 설거지를 끝낸 밥그릇에 다시 밥을 퍼 담았다.
“태화. 이리 와 봐.”
옆에 서 있던 세희는 눈치를 보더니 소파로 향했다. 태화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상호의 앞에 섰다.
상호는 밥그릇을 하나씩 식탁에 가볍게 던지며 말했다.
“넌 우리 학교 왜 왔어?”
“밥이 맛있대서.”
태화가 즉답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잠시 당황했지만, 상호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뭔가 좀 더 잘해보고 싶었던 거 아니야? 나름 명문이잖아. 잘 졸업해서 잘난 사람 되면 좋지 않아?”
“할건뎅.”
“근데 너 하는 거 보면 믿음이 안 가.”
“믿으세요, 그럼.”
태화가 실쭉 웃었다.
“그럼 되잖아.”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무책임한 말인데.
어찌 된 까닭인지 상호에게는 세상 믿음직스럽게 들렸다.
“……그래.”
상호는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내며 말했다.
“밥 먹으면 꼭 10등 하는 거야.”
“넹.”
태화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 * *
훈련은 주말 내내 이어졌다.
새벽에 일어나 밥 먹고 등산하고 수업하고. 하산해서 점심 먹고 등산하고 수업하고. 하산해서 저녁 먹고 등산해서 수업하고. 하산해서 씻고 자고.
그렇게 일요일 저녁이 되었고. 상호는 뒷산 위 평지에 서서 대련 중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익숙한 색깔이네.’
노을을 배경으로 수련하는 아이들.
사흘째 봐왔지만, 그래서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하늘의 색. 공기. 상황. 그 모든 요소가 기시감처럼 머릿속을 살살 건드렸다.
상호는 곧 이 광경을 언제 봤는지 떠올렸다.
‘1년인가.’
다혜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후회와 이별로 기억된 풍경.
다행히 다혜는 돌아왔지만, 새로운 후회와 이별은 늘 그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그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후회하지 않기를, 이별하지 않기를.
하지만 세상은 바란다고 이뤄주지 않았고.
대신에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는 이별을 선사했다.
‘……이별은 질렸어.’
시험까지 앞으로 3일.
저 노을을 바꾸겠다. 후회와 이별에서, 낮의 끝에서. 뜨겁게 불태운 하루의 결실로.
상호는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그만 됐다.”
아이들이 그의 앞에 모여들었다.
“다들 잘하고 있어. 지금 수준에선 더 해줄 말이 없고……. 다만 아주 약간 더. 약간만 더 잘했으면 좋겠다.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싸우는 순간에도 나아가란 뜻이요.”
세희의 대답에 상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입꼬리가 자꾸 스멀스멀 올라갔다.
이젠 설명을 안 해도 다 안다.
“가자. 가서 밥 먹자.”
“밥 먹고 또 와요?”
“아니. 오늘 밤은 푹 쉬어.”
그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힘든 수업 따라와 줘서 고맙다.”
“뭘 또 그러심니꺼. 별것도 아닌디.”
지윤이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상호도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1년 동안 고생 많았어.”
그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나빛이 멍하니 입을 빠끔거리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세요……?”
“그냥. 뭐 지금 못할 말은 아니잖아.”
“시험 끝나고도 있구, 방학식도 있는데…….”
회색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언제 이렇게 감이 좋아졌을까. 상호는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거 아냐. 그냥 너희 수고했다 싶어서 그런 거야. 정말로.”
“근데 왜 그렇게 아련하게 말해요?”
태화도 따지고 들었다.
괜한 말을 했나 보다. 상호는 일부러 눈살을 팍 찌푸리며 태화와 나빛의 볼따구니를 잡아당겼다.
“그냥 분위기 좀 잡아 봤다. 뭘 자꾸 꼬투리를 잡아. 제발 이상한 거 신경 쓰지 말고 시험이나 잘 봐라, 응?”
“아야야…….”
“부에에엑.”
그가 아이들의 볼을 놓자 옆에서 지윤이 주먹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럼 빠이팅 한 번 더 하실랍니꺼? 분위기 잡을 기믄.”
“또 파이팅이야? 또 우려먹어? 뭐 다른 거 없어?”
태화가 꼬리를 촐랑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지윤이 슬금슬금 상호에게 다가섰다.
“뭐 별거 있나. 하나밖에 없제.”
“아, 그건 몇 번을 해도 좋지. 인정~.”
태화도 요망한 웃음을 띠며 상호를 향해 다가갔다. 이어서 나빛도, 세희도.
상호는 팔을 벌려 아이들을 끌어안고는 힘껏 들어 올렸다.
“읏차.”
“꺅! 꺄하하하…….”
아이들이 다리를 바동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눈앞에 있는 얼굴들은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워서, 상호의 눈엔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어?! 쌤 운다!”
“왜 울어요? 역시 무슨 일 있는 거죠……?”
“똑바로 말하이소. 와 불안하게 자꾸 그러심니꺼!”
“아니라고…….”
다섯은 그렇게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 * *
훈련을 마친 그들은 월요일 아침에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는 여전히 붐벼서 수업을 하기가 어려웠다. 덕분에 상호와 아이들은 학교 부지 구석탱이까지 가서야 겨우 대련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월요일과 화요일을 보내고, 마침내 수요일.
“하나씩 받아.”
아이들은 상호가 던진 무언가를 받아들고 눈을 끔뻑였다. 낱개로 포장된 찹쌀떡과 길쭉한 가래엿이었다.
“쌤 이런 거 안 믿잖아요.”
“먹어. 너희들 조금이라도 기분 좋으라고 주는 거니까.”
“잘 먹겠습니다~.”
“조금씩 떼어서 꼭꼭 씹어 먹어. 체하지 말고……, 이태화. 뱉어. 그걸 한 번에 삼키냐!”
“우움.”
아이들은 떡을 다 먹고 엿을 쪽쪽 빨기 시작했다.
상호는 교탁 옆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먹으면서 들어. 너희 실력이면 충분히 10등 안에 들어가. 지윤이는 대진이 좋으면 가능하고, 나머지 셋은 당연히 들어가야 돼. 특히 나빛이 너.”
대놓고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전투 외적인 것에 정신이 팔려 중간평가를 망쳤다. 상호는 엄하게 말했다.
“너희는 시험에만 집중해. 분명히 말했어. 누가 보이든 말든, 쓰러지든 말든 절대로 신경 쓰지 마. 눈앞의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만 생각해. 전투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아무것도.”
“네.”
아이들도 굳게 다짐했다.
할 말은 그게 전부. 이제 다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상호는 교실 가운데로 걸어가 아이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을 까딱였다.
그가 손바닥을 내밀자 아이들이 바로 손을 내밀었다. 태화가 한마디 했다.
“또 파이팅하게? 그냥 안아줘요.”
“아니. 두 손 다 줘봐.”
아이들이 어리둥절해하며 양손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상호는 다른 손을 위에 올려 아이들의 손을 감쌌다.
“겨울이니까, 손 잘 녹여. 특히 세희랑 지윤이.”
둘의 표정이 환해졌다.
따뜻한 온기가 손 열 개에 감돌았다. 상호는 그렇게 아이들의 손을 녹여주고 엄지로 창밖을 가리켰다.
“가자.”
“네.”
아이들이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오전은 인당 10판의 예선.
운동장에 솟은 경기장에선 학생들이 박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상호는 그중 세희의 경기에 특히 집중했다.
가장 1등을 할 확률이 높은 아이였기에.
채애앵
금속성과 함께 검이 하늘을 날았다. 세희의 앞에 서 있던 아이가 손목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윽……!”
“천세희, 8전 8승.”
진행 교사의 선언이 떨어지자 세희가 목걸이를 벗어 건네고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상호는 세희에게 다가가 팔뚝을 토닥였다.
“잘했어. 칼끝도 안 흔들리네.”
동영상으로 확인했던 실수들은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러면 무조건 1등이겠는데.”
그의 칭찬에 세희가 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또박또박하게 했다.
“선생님이 보고 계시면 누구든 이길 수 있어요.”
“그래?”
상호는 씩 웃었다.
“나도 그럴 것 같았어.”
분명히 잘 될 것이다. 분명히.
곧 진행 교사가 다시 세희를 호명했고, 세희는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상호는 세희가 또 이기는 모습을 흐뭇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10전!”
“10승!”
태화는 당랑권 같은 포즈를 잡았고, 나빛은 팔오금에 얼굴을 박으며 한쪽 팔을 옆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상호는 태연하게 답했다.
“잘했어.”
“우씨, 반응이 좋아야 하는 맛이 나지…….”
“10승!”
나빛이 한 번 더 포즈를 취했다.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옆에 선 지윤을 돌아보았다.
“세희도 10승이고…… 지윤이는?”
“1패입니더.”
“9승 1패? 이야, 잘했네.”
“8승 1패입니더.”
“……응?”
당황한 상호에게 지윤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대답했다.
“인간적으로 은율이는 빼야지예.”
“……에이, 노력해야지.”
그는 지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잘했어.”
다섯은 급식소로 들어가 배식을 받고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수다를 떨었다.
“니들 내 만나면 살살하래이. 쌤이 그랬다 아이가. 대진 좋으면 10등 드간다꼬. 내도 함만 찍어 보자.”
“안 돼. 항상 최선 다해야지.”
“내는 니들 꼬시는 기 최선인기라! 함만 봐도!”
“되겠냐? 쌤, 인10등 하면 이번에도 뭐 사줄 거예요?”
태화의 질문에 상호는 밥을 삼키고 대답했다.
“뭐…… 10등 하면 좋은 거 사주고, 1등 하면 더 좋은 거 사주겠지만…… 선생님이 봤을 때 열심히 했으면 그냥 사줄 수도 있지.”
사실 어떻게든 선물은 주게 되어 있었다. 어차피 아이들 중에 1등이 안 나오면 작별 선물을 줄 것이고, 1등이 나오면 해련에게 500만원을 타내서 선물을 줄 테니까. 통장에서 더 꺼낼 수도 있고.
상호는 국을 뜨며 아이들을 흘끗했다. 특히 태화를.
“열심히 해. 열심히 하는 척만 하지 말고. 선생님은 다 알아보니까.”
“넹.”
태화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 믿음직스럽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말에 한 말이 있으니. 상호는 그저 믿을 뿐이었다.
믿기로 했으니까. 상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는다.”
“넹.”
태화는 장난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