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501)

* * *

“조오오올라 높자나아아!”

 태화가 빽 소리쳤다. 상호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한 얼굴로 대꾸했다.

“왜 엄살이야. 날고 있으면서.”

“이거도 오래 하면 힘들단 말이에요!”

“다 왔어. 쫌만 더 가면 돼.”

 걷다 보니 탁 트인 평지가 나타났다. 아직 겨울이 되지 않아 예쁘게 꽃이 남은 잔디밭.

나빛의 얼굴이 환해졌다.

“소풍 와도 되겠어요.”

 태화가 핀잔을 주었다.

“뭣하러 이런 데에 와? 을씨년스럽기만 하구만.”

“그래두, 여름에 햇살 좋을 때 오면 좋을 것 같애.”

“여름엔 벌레가 득실~득실~할 텐데? 너 벌레 못 잡잖아.”

“선생님이 잡아주실 거야.”

“참나…….”

 나빛은 콧방귀를 뀌는 태화를 무시하고 상호를 향해 물었다.

“선생님. 저희 여기 내년에 오면 안 돼요?”

“내년에?”

“네. 이렇게 다섯 명이서요.”

“내년이면 새로운 애들도 올 거고…… 바쁘고…….”

 상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많이 힘들 것 같아.”

 다섯 명이 그대로 있을 거란 보장도 없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빛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밝게 웃기만 했다.

“올 수 있을 거예요.”

 상호는 그 말을 듣자 문득 생각이 났다. 세희와 태화의 장학금뿐만 아니라, 나빛의 천사화도 문제라는 것이.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반은 왜 다 아프고 불쌍한 애들만 있냐…….’

 내년이 되어도 제일 많이 돌볼 아이들은 이 아이들이리라. 2학년이 새로 오든, 1학년이 새로 오든.

상호는 눈을 뜨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수업하자.”

 * * *

“흐잉…….”

 나빛이 코를 훌쩍였다.

상호는 태화의 마법으로 초토화된 잔디밭을 보고 진땀을 흘렸다.

“나빛아, 괜찮아. 다져놓으면 잔디는 금방 자라니까…….”

“꽃이 다 죽었어요…….”

 태화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확 타올랐다.

“꽃도 못 죽여? 그러고도 네가 헌터야?!”

“헌터는 지키는 직업이야! 선생님이 그랬어!”

“그래서 삐져떠요? 삐순이또삐져떠~, 꽃주거서삐져떠~ 후잉후잉~.”

 나빛의 얼굴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너 이리 와.”

 나빛의 등 뒤에서 성창 열두 개가 펼쳐지며 태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태화는 식겁하며 순간이동을 쓰고는 상호의 등 뒤로 숨었다.

“쌤! 쌤! 쟤가 나 때려요!”

“나빛이 창 두 개 늘었네. 잘했다.”

“앗. 감사합니다.”

“왜 나만 미워하는데에에!”

“시끄러워, 바보야.”

 어느새 다가온 세희가 태화의 뒤통수를 쳤다. 상호는 세희를 보며 물었다.

“끝났어?”

“네.”

 세희가 검지로 가리킨 곳에는 지윤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지윤이 손을 들며 한탄했다.

“쌤예, 지는 진 게 아입니더.”

“그러면?”

“배가 고파가꼬 더는 못 하겠어예…….”

“그래.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상호는 내공을 뻗어 지윤을 일으키고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세희는 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맑은 눈빛을 그에게 보냈고, 태화는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그윽하게 봐요? 내 심장 터트릴라고?”

 나빛은 배시시 웃었고, 지윤은 흙을 털다가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상호는 아이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와 봐.”

“아싸! 안아죠용~!”

“아니야, 임마. 파이팅하자고.”

 그는 태화의 뿔을 밀어내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한시도 후회 없도록 노력하는 거야.”

“예.”

“넹.”

 아이들이 손을 모았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녁 먹고 다시 온다. 알겠지?”

“네!”

“으엑…….”

 태화가 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그래도 고개는 끄덕였다. 상호는 그걸 확인하고 손을 올리며 말했다.

“파이팅.”

“파이팅!”

 주홍빛 하늘에 기운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멀리 타오르는 노을에게 들으라는 듯이.

 114. 단란한 나날

“우움!”

 태화가 볼이 미어터지게 음식을 문 채로 말했다.

“마디떠여!”

“먹으면서 말하지 마라.”

 상호는 촉촉하게 익힌 소고기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먹을 만해?”

“웅.”

“엄청 맛있어요.”

 세희도 평소와 달리 먹성이 좋았다.

요리 몇 개를 더 가져왔지만 아이들은 금방 다 먹어치웠다. 나빛이 등받이에 기대어 양손을 배에 올렸다.

“배불러요…….”

“나가서 걷자. 다들 배부르지? 더 안 먹어도 되지?”

“네.”

“가자, 그럼.”

 그릇과 냄비가 저 혼자 떠올라 싱크대에 안착했다.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존맛탱이네. 돈 벌면 쌤부터 사야겠다.”

“……그냥 밥을 해달라고 해.”

“쌤 사서 쌤 먹어야지~.”

“나가.”

 상호는 태화의 등을 떠밀며 아이들과 집을 나섰다.

* * *

수업을 끝내고 나니 흙에 땀에 난리도 아니었다. 상호와 아이들은 현관문을 열기 전에 몸을 털었다.

집으로 들어가서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늦었다. 바로바로 씻어.”

 상호는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지쳐서 녹초가 되어버린 아이들은 군말 없이 욕실로 향했다.

“나 먼저 씻을래.”

“넌 별로 뛰지도 않았잖아. 나랑 지윤이 먼저지.”

“뭐래! 먼저 벗으면 먼저 들어가는 거지!”

 태화가 그렇게 소리치며 옷을 벗어젖히려 했다. 상호는 식겁해서 허겁지겁 안방으로 도망쳤다.

‘아오, 쟤는 진짜…….’

 바닥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쌤! 놀아줘요.”

 태화였다.

욕실에서 애들이 씻고 있는데 지금 나갔다가는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몰랐다. 상호는 문을 향해 말했다.

“너희 다 씻으면.”

 그가 그 말을 하자마자 태화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상호는 움찔하며 성을 냈다.

“얌마! 남의 집 안방을 그렇게…….”

“뭐 어때. 놀아죵.”

 태화는 상호의 옆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럴 거면 대체 뭐 하러 들어왔는지. 상호는 검지를 들어 태화의 발을 꾹꾹 눌렀다.

“놀아달라면서 폰은 왜 해?”

“쌤, 쌤. 이 기사 봤어요?”

“뭔데?”

 상호가 고개를 기울이자 태화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삐뚤빼뚤하게 신문이 그려져 있었다.

 -예현여고 교사 강??, 여학생 4명 자택에 감금하다 체포돼 

“……얌마.”

“헹.”

“가서 나빛이랑 놀아.”

 태화는 데굴데굴 굴러서 방을 나갔다.

곧 샤워를 끝낸 지윤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들어왔다. 위는 긴팔인데 아래는 반바지라 탄탄한 하체 근육이 훤히 드러났다.

“쌤예. 놀아주이소.”

“나빛이랑 놀아…….”

“나빛이 태화 패고 있던디예.”

 또 뭔 짓을 한 걸까.

상호는 손으로 방바닥을 두드렸다.

“앉아 봐. 머리 말려 줄게.”

“진짜예?”

 지윤은 싱글벙글 웃으며 상호의 다리 사이에 양반다리를 틀었다.

상호는 지윤의 목에 걸린 수건을 들어 머리를 빠르게 탈탈 털었다. 젖은 수건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지윤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부지가 자주 이래 해주셨심더.”

 상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래?”

 그는 곧 씩 웃어주고 마저 물기를 닦아주었다.

곧 머리카락이 보송보송해졌다. 상호는 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됐다.”

 그가 수건을 내려놓자마자 문이 또 열리고 세희가 들어왔다. 세희는 상호의 앞에 앉은 지윤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저도 해주세요.”

“……응.”

 한 명씩 다 해주게 생겼다.

 그래도 상호는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세희의 수건을 받아들었다.

평소엔 굵게 땋아서 가슴께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이 등허리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그는 정성스럽게 머리카락을 닦으며 물었다.

“세희 머리 땋는 데 시간 얼마나 걸려?”

“음……. 처음엔 오래 걸렸는데, 지금은 1분이면 해요.”

“언제부터 땋았어?”

“중학교 1학년 때부터요. 그때부터 쭉 기른 거예요.”

 세희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선생님은 짧은 게 좋으세요, 긴 게 좋으세요?”

“난 그냥 세희 땋은 게 제일 좋은데. 처음 만났을 때 딱 봐서 예뻤으니까.”

“그럼 저 말고 그냥 여자 머리로는요?”

“그냥?”

 상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예경. 효은. 민정까지.

“음…… 통계적으로는 긴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지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우씨, 내도 길러뿔까…….”

“……지윤이는 머리채 잡히잖아. 안 그래도 유술에 약한데……. 그리고 통계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쌤은 머리 짧은 사람도 좋…….”

 대체 애들한테 좋고 자시고를 왜 따지고 앉았을까. 상호는 그걸 퍼뜩 깨닫고 말을 고쳤다.

“……너흰 뭘 하든 예쁘니까 그냥 맘대로 해.”

“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나빛과 태화도 방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다 씻었어요~.”

“그래.”

 상호는 몸을 일으켜 안방을 나서며 말했다.

“일찍 자. 아침 일찍 깨울 거야. 놀 시간은 앞으로도 있으니까, 괜히 수다 떨다 늦게 자지 마.”

“쌤 올 때까지 안 잘 건데요.”

 태화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상호는 기다리지 말고 빨리 자라고 답하려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와?”

“같이 자요.”

“뭘 같이 자, 인마.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누워서 자.”

“어차피 우리 한 번씩 쌤이랑 다 잤잖아요.”

“……그랬냐?”

“그랬죠.”

 아이들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호는 당황하며 아이들의 시선을 피했다.

나빛이 가정방문 때. 지윤도 가정방문 때. 세희는 강원도 갔을 때. 태화는 섬 갔을 때.

생각해 보니 그랬다.

“침대도 좁은데 그냥 넷이서 누워. 뭘 같이 자자고 그러냐.”

“저번에 은율이까지 다섯이서 누우니까 그럭저럭 되던데요.”

“시끄러, 임마. 빨리 자.”

 상호는 태화의 말을 묵살하고 욕실로 향했다.

안에서 옷을 벗고 샤워를 시작하는데 문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공을 귀에 집중시켰다.

“야 씨……, 그냥 눈 딱 감고 열까?”

“미칬나 가스나야. 아무리 쌤이라도 그거는 빡치제.”

“근데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너 이 기회 그냥 날릴 거야?”

“……내는 모른다. 니 알아서 하래이.”

“그러면…….”

 상호는 반사적으로 내공을 뻗어 문을 꽉 잡아두었다. 절대로 열리지 않도록.

 아니나 다를까, 문고리가 미친 듯이 철커덕거리며 흔들렸다.

“나와라! 교보재!”

“맞는다, 진짜!”

 상호는 이를 갈며 서둘러 목욕을 마쳤다. 시간을 끌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샤워기를 끄자 문고리가 더욱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쌤! 나 급똥! 빨리!”

“너 때문에 내가 못 산다, 진짜…….”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옷을 입었다. 하얀 반팔과 검은 긴바지.

밖으로 나와 보니 아이들 넷이 다 모여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호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뭐해?”

“비켜 봐요.”

 태화가 고개를 욕실로 들이밀며 코를 킁킁거렸다.

“흐매~ 좋은거.”

“나와! 아오…….”

 상호는 태화의 뿔을 잡고 욕실에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서 자라니까, 얘들아. 내일도 시간 있고 일요일도 시간 있잖아. 시험 끝나면 또 놀 거고…….”

“같이 자입시더.”

 지윤이 그의 허리를 잡고 단번에 둘러업었다. 상호는 해련에게 업혔을 때를 떠올리며 당황했다. 이 나이 먹고 왜 이렇게 자꾸 업혀지는 건지.

“뭘 같이 자! 소파에 내려줘…….”

“소파에서 자면 춥잖아예. 장판 뜨끈~하게 뎁히고 이불 덮으이소.”

“쌤은 겨울에도 자주 밖에서 자서 괜찮아. 지윤아, 일단 좀 내려놓고…….”

 하지만 아이들은 그를 기어코 안방으로 데려왔다. 지윤이 방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장판 어딨습니꺼?”

“아, 여깄다. 전기장판. 세희야, 도와줘.”

 나빛과 세희가 장롱에서 전기장판을 꺼내 침대에 깔았다. 곧 그 위로 상호가 던져졌다.

“켁!”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어른답게 대처하는 수밖에. 상호는 한숨을 푹 쉬며 침대 구석으로 꿈지럭꿈지럭 움직였다.

“알았다, 알았어. 자자…….”

 하지만 아이들은 겨우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아닌 듯했다.

태화와 지윤이 그의 왼팔을 잡았다.

세희와 나빛도 그의 오른팔을 잡았다. 상호는 아이들이 뭘 하려는지 깨닫고 힘으로 팔을 오므렸다.

“야이씨…… 죽어도 안 돼! 빨리 자!”

“에이, 해주세요~.”

“내가 니들 아빠야? 오빠야? 어디까지 해달라고……!”

“헤헤.”

 나빛이 성력으로 만든 깃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그의 코와 귀에 사정없이 쑤셔 박았다. 아무리 육체적 고통에 내성이 있는 상호라도 간지럼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상호는 발을 버둥거리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다가, 이어지는 아이들의 파상공세에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만! 그만! 알았어…….”

“진작 그러셔야지.”

 태화가 그의 옆구리에서 손을 떼며 코웃음을 쳤다. 아래쪽에서는 세희가 머리카락으로 발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지윤이 키득거리며 상호의 팔을 벌렸다.

“아침까지 고대~로 계셔야 합니더.”

“알았어…….”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양팔에 머리가 두 개씩 놓였다. 전기장판과 두터운 이불, 그리고 다섯 명이 찰싹 달라붙어 누운 덕분에 금방 따뜻해졌다.

“불 끌게.”

“네.”

 상호는 내공을 뻗어 전등을 껐다.

시야를 뒤덮은 어둠 속, 그의 왼쪽 상완 쪽에서 태화가 중얼거렸다.

“예현여고 교사 강땡땡, 제자들과 부적절한 관계 가지다 체포…….”

“푸흡!”

“킥킥킥…….”

 왜 웃니, 얘들아. 스릴러 영화 그 자체인데. 상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태화의 실없는 농지거리가 이어졌다.

“조사 결과 제자들 전원 임신, 충격…….”

“……시끄러.”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 징역 50년 확정…….”

“……엄청나네.”

“킥킥…….”

 피곤한 하루라 수다가 많진 않았다. 아이들은 금세 잠에 빠져들어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었다.

상호도 곧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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