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갈라진 틈 사이로 별빛이 보였다.
소녀는 그 틈 사이로 흘러드는 공기를 허겁지겁 들이켰다. 달았다. 너무도 달콤했다. 몸이 배배 꼬일 만큼 황홀했다.
“흐으, 흐으, 후아…….”
틈을 비집고 나와 보니 괴물의 발버둥으로 주변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내장을 끊고 배를 갈랐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소녀는 검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뽑았던 검기.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고 크기도 작았지만, 분명 좀 더 단단하고 뜨거운 느낌이었다.
소녀는 검을 움켜쥐고 고민했다.
‘또 하라면 할 수 있을까……?’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밤중의 산속. 건물도, 전봇대도, 송전탑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지?’
알 방법은 단 하나. 산 위로 올라가는 것.
꼭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처럼 온몸이 축축했다. 괴물의 배를 가르고 나온 소녀는 지친 몸을 이끌어 정상을 향했다.
* * *
소녀는 그 후로 문명의 흔적을 보지 못했다. 찾을 여력도 없었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생존이란 두 글자뿐.
걸음마다 핏방울.
숨결마다 악취.
맑은 물에는 항상 몬스터들이 모여들었기에, 소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흙탕물과 잎에 맺힌 이슬, 그리고 이따금씩 내리는 비가 전부였다.
벌레의 진액이 잇몸에 끼고, 괴물의 피가 머리카락에 말라붙고.
학교 전투복은 찢어지고, 신발은 터지고, 수련용 가검은 이가 빠져 톱처럼 변했다.
그 톱으로, 베지 못하고 썰었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밤낮으로 괴물들을 죽이고, 물을 찾고 벌레를 먹고. 그걸로 배를 채우다가 언젠가부터 몬스터의 고기를 뜯었다. 최대한 동물을 닮은 녀석으로. 맛이 형편없었지만 벌레보다는 나았다.
잠을 참을 수 없을 때는 나무에 올라가거나 땅굴을 찾아 숨었다.
안락은 호화고 청결은 사치.
그러기를 몇백 일.
아무리 걸어도 도시는 보이지 않고. 공기는 점점 차가워져 갔다. 그날도 소녀는 잘 곳을 찾아 헤맸다. 조금이라도 아늑하기를 바라며.
‘집…….’
집은 없다. 학교의 기숙사가 있을 뿐.
하지만 그곳이 그리웠다. 옆방에 놀러 가면 항상 있는 친구들. 주말에도 만나서 함께 밥을 먹는 선생님.
‘사람…… 사람이 보고 싶어.’
이제는 말을 하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소녀는 담임이 감아 준 칼자루의 가죽을 만지작거리며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큰 언덕인 줄 알았더니 몬스터의 시체였다. 아마도 용. 상처를 보니 비슷한 크기의 무언가에게 목을 물린 것 같았다.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을 했다.
내장을 치우면 잘 만한 공간이 생길 것이다. 소녀는 용에게 다가가 배를 가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아직 따뜻한 피가 흘렀다. 소녀에게는 그 온기도 감지덕지였다. 피 냄새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소녀는 피 웅덩이에 몸을 누이며 눈을 감았다.
* * *
그날은 뭔가 달랐다.
평소에는 자면서도 귀를 열어두는 탓에 몬스터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깨어났었는데, 그날은 깊은 잠에 빠져 푹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소녀는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켰다. 유난히 몸이 가벼웠다. 간만에 잠을 잘 자서 그런지 기운이 넘쳤다. 어째 주변에 몬스터도 없고 조용한 것이, 실로 마음에 쏙 드는 날이었다.
꼬르륵
배에서 천둥이 쳤다.
소녀는 습관적으로 먹을 것을 찾으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용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교과서에서 봤던 것 같은데. 엄청 맛있다고…….’
그녀는 땔감을 가져와 식사 준비를 했다.
불을 피우고 칼에 꽂아 구워서 먹어보니 교과서의 내용대로 맛이 아주 좋았다. 여태껏 먹었던 몬스터들의 고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기름지고 부드러운데 소 같은 느낌도 있고 닭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오랜만에 배를 채우니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맛있는 걸로.
오늘은 힘내서 도시를 찾아볼 수 있겠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행복한 얼굴로 고기를 뜯었다.
* * *
‘X발…….’
소녀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배고파!’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았다.
드래곤 고기를 뜯은 지 딱 하루째. 며칠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입과 배가 깨어나 버렸는지 밥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조금 챙겨왔던 고기도 다 먹고 없다. 이제는 사냥을 해야 했다. 그런데 어째 몬스터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사람 냄새를 맡고 죽어라 달려들던 놈들이 대체 왜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없는지. 단체로 독심술이라도 배운 걸까.
소녀는 이를 갈며 몬스터를 찾아 헤맸다.
* * *
그러기를 한 달째.
소녀는 땅을 네발로 기며 코를 킁킁거렸다. 발자국이나 배설물 같은 흔적을 찾아서. 눈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한 달을 굶으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벌레로는 배가 채워지지 않았다. 고기. 고기를 먹어야 했다.
흙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던 소녀는 곧 배설물처럼 보이는 덩어리를 발견했다.
‘찾았다!’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샅샅이 살피니 발자국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족 보행을 하는 대형 몬스터.
평소대로라면 이족 보행을 하는 몬스터는 먹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찾고, 쫓고, 잡고. 죽이고, 찢고, 뜯어서 먹으리라. 소녀의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달리다 보니 멀리에 오우거 세 마리가 보였다.
‘와…….’
입에 침이 줄줄 흘렀다. 소녀는 턱에 흐르는 침을 손목으로 닦았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저 흉측한 괴물들이 고깃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검을 치켜들고 오우거들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자 오우거들은 킁킁거리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꾸워어억!”
기겁을 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다. 소녀는 눈에 불을 켜고 오우거들을 쫓았다. 지금 놓치면 또 며칠을 더 굶을지 몰랐다.
소녀에게도 오우거에게도 생사가 달려 있었다. 중천에 있던 해가 지고, 달과 별이 떴다가 다시 지고. 새벽이슬이 맺힌 풀들이 발목에 스치며 아침 안개가 흘러가는 와중에도 그들의 목숨을 건 추격전은 끝나지 않았다.
점심이 되자 소녀와 오우거들은 해안가에 도착했다.
친숙한 식물들과 지형이 소녀의 눈에 들어왔지만, 뇌는 그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 소녀의 뇌는 오우거들을 쫓으라는 명령만을 다리에 하달하고 있었다.
소녀는 몬스터들을 향해 달렸다.
그때.
휘릭……
길쭉한 무언가가 날아와 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소녀는 움찔하며 멈춰 섰다가 이내 그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
사람의 검이었다.
‘……어?’
소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홀린 듯 그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그녀의 손을 피해 어딘가로 둥실 날아가기 시작했다. 소녀는 배고픔도 잊고 그 검을 잡으려 했다.
저 홀로 떠다니는 검이 참으로 신기했다.
‘뭐야, 이거. 우와…….’
꼭 나비를 쫓는 것 같았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검을 향해 달렸다. 검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며.
손끝이 칼자루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오르막인지도 모르고 달렸다. 나무를 돌고 바위를 넘고.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새 산의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였다.
검은 그 바위 너머로 사라졌다.
‘안 돼!’
놓칠 수 없다. 소녀는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찼다.
그렇게 바위를 넘는 순간.
“찾았다.”
누군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뛰어오른 속도 그대로, 넓고 따뜻한 품에 깊숙이 안겨들었다.
너무 순식간이라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찾았어…….”
그 울음과 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듣자 소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사람.
심지어 아는 사람.
계절이 네 번이나 지났지만, 그때 일은 기억하고 있었다.
“늦었잖아.”
사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나도 만나고 싶었어요.
약속 지키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말하는 법을 잊어서.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사내를 마주 끌어안았다.
‘아저씨.’
“아, 아, 아으…… 우윽…….”
“괜찮아.”
사내의 큰 손이 소녀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맥이 탁 풀렸다.
1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소녀는 다리에 힘을 풀고 사내의 품에 쓰러졌다.
“다혜야……? 다혜야!”
사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주 먼 곳처럼 아련했다. 소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 * *
상호는 다혜를 한 손으로 안아 들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아래에는 나로와 나로의 직원 몇 명이 남아 기계를 지키고 서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지금 오우거를 쫓는 중이었다.
나로가 상호의 품에 안긴 다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애는 누구야?”
“우리 학교 학생.”
“학교? 상호 너 선생님이야?”
“응.”
상호는 다혜를 내려다보았다.
온몸에 뒤집어쓴 피. 아마 이것 때문에 몬스터들이 도망쳐 온 것일 터였다. 필시 용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의 혈액.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한 원인을 해결한 셈이니, 더 이상 이곳을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도현의 번호를 누르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생각을 바꿔 건흠의 번호를 눌렀다.
[……뭐야, 강 선생. 웬일이야?]
“아, 주 선생님. 그게…….”
1초라도 빨리 알려주고 싶어서 전화는 걸었지만, 왜 자신이 여기 와 있는지는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상호는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했다.
“제가 지금 일이 있어서 동해 쪽에 왔는데요.”
[뭐야, 언제 갔어? 출근하지 않았었나? 뭐 어쨌든 간에…….]
건흠이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해 쪽? 뭐 단서라도 찾았나?]
“예, 찾았습니다.”
[정말? 어떤?]
“본인이요.”
[……뭔……뭐?]
상호는 조곤조곤하게 대답했다.
“다혜 찾았어요. 살아 있고, 많이 안 다쳤습니다.”
그 말에 핸드폰 너머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당황하며 핸드폰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세요? 주 선생님? ……아, 끊겼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이번엔 도현의 번호를 눌렀다.
“형.”
[어, 왜. 아직 안 끝났는데. 교대하려면 좀 걸릴 것 같다.]
“여기 일이 끝났어. 차든 헬기든 보내 줘.”
[끝? 뭐 해결이 된 거야? 이제 몬스터 안 와?]
“그럴 거야. 그리고 여기 환자 있어. 형이 뭐라든 간에 난 그냥 갈 거니까 그리 알아.”
[그래, 뭐. 알았어. 고생했다. 차 보낼게. 잠깐만, 환자 심하냐?]
그 말에 상호는 다혜의 상태를 살피고 대답했다.
“아니, 그냥 지쳐서 쓰러졌는데…… 그래도 신앙인 한 명만 같이 보내 줘.”
[그래.]
도현과의 통화도 마무리가 됐다. 상호는 나로를 돌아보았다.
나로는 멀거니 상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로. 나는 간다.”
“좀 기다리면 내가 태워다 줄 수 있을 텐데. 그게 낫지 않아?”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상호는 걸음을 옮겨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나로가 소리쳤다.
“맞다, 상호! 번호는?”
“굳이 필요 없을걸.”
“응?”
나로가 눈을 끔뻑였다.
상호는 고개를 돌려 나로를 흘끗했다.
“어차피 또 만나게 되어 있어.”
“그게 뭐야.”
나로는 킥킥 웃다가 손을 흔들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
상호도 마주 손을 흔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혜의 몸에서 피와 오물 냄새가 올라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더욱 굳게 끌어안았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에겐 익숙한 일이었기에.
문득 쓴웃음이 났다.
‘널 가르치고 싶었는데. 정작 이젠 가르칠 필요가 없구나. 그래도…… 참 다행이다.’
다리가 멀쩡했다면 경쾌하게 걸었으리라. 상호는 따뜻한 눈빛으로 다혜를 내려다보며 가까운 도로를 향했다.
더 이상 바람이 차갑지 않았다.
112. 모순
상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다혜가 그의 무릎을 벤 채로 자고 있었다. 기절한 사람처럼 조용히.
운전석에 앉은 사내가 물었다.
“학교로 갈까요?”
“……아뇨.”
학교에 가도 다혜의 방은 없다. 집도 없는 아이고.
그리고 신앙인에게 간단히 치료를 받긴 했지만, 몸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1년씩이나 제대로 못 먹고 다닌 것은 성력으로 치료할 수가 없으니.
며칠, 혹은 몇 주는 요양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협회로 갑시다. 협회 병원으로.”
“예.”
곧 차가 출발했다.
* * *
절름발이 외눈 검사와, 그 품에 안긴 피투성이 여학생.
잔인하고 더러운 꼴을 수없이 봐온 의료인들도 그 구성에는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상호는 자신과 다혜를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을 무시하며 협회 병원의 카운터로 다가갔다.
여직원이 그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입원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 저 말고 이 아이.”
상호는 헌터증을 꺼냈다.
이미 도현에게 말해 놓았다. 직원은 헌터증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상호는 그 말대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향해, 기다리고 있던 간호사들에게 다혜를 넘겨주고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한숨 돌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건흠 선생님인가?’
꺼내서 화면을 보니 해련의 번호였다. 상호는 전화를 받았다.
“예. 교장선생님.”
[강 선생. 우리 학교 학생을 찾았다면서요. 지금 어디예요?]
“협회 병원이요. 지금 입원시켰어요.”
[지금 주 선생이랑 가고 있으니까, 좀 이따 봐요.]
“예. 기다릴게요.”
그는 전화를 끊었다.
기쁜 마음도 슬슬 가라앉고, 이제는 걱정이 앞섰다. 다혜는 이제 어떻게 되는지.
하지만 혼자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상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해련과 건흠이 오기를 기다렸다.
* * *
복도 멀리에서 남녀 한 쌍이 뛰어왔다.
“강 선생! 강 선생!”
“주 선생. 병원에선 조용히.”
“아, 죄송합니다.”
건흠은 무예가 반 담임답게 빠른 속도로 달려와 상호의 어깨를 붙들었다. 눈에 희열과 걱정이 가득했다.
“다혜, 다혜는?”
“진정하세요. 아마 씻기고 있는 모양이니까.”
“상태가 어때?”
“멀쩡……한 편이죠. 몬스터들 잡으려고 뛰어다니더라고요.”
상호는 살짝 웃으며 건흠의 팔뚝을 토닥였다.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건흠은 그 말을 듣고서야 상호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련도 상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찾았어요?”
“그냥 운 좋게…… 다혜가 제가 보는 방향으로 오더라고요.”
“어떻게 알아봤대? 원래 아는 사이였어요?”
“네. 어쩌다 보니.”
“신기하네.”
해련이 상호를 바라보다가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상호는 움찔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왜요?”
“피가 묻었는데.”
“아, 다혜한테서 묻었나 봐요. 몬스터들 피를 뒤집어써 가지고.”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나더라니.”
해련은 손수건을 꺼내서 멀리 놓인 정수기를 향해 던졌다. 손수건은 저 혼자 움직여 물을 묻히고는 해련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상호의 볼을 닦자 상호는 건흠을 곁눈질하며 난색을 표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온몸에 다 묻었는데…….”
“그래도 잘난 얼굴에 묻은 건 지워야지.”
“네?”
“뭘 네예요. 뭐가 이상하다고. 손자뻘한테 잘생겼다고 하는 게 주책인가?”
하지만 해련은 은근하게 상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입술을 할짝거렸다.
“참 잘생겼다니까……. 50년만 일찍 만났어도…….”
그땐 그의 어머니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다. 상호는 덜덜 떨며 무릎에 주먹을 올리고 정자세로 굳었다.
“아이, 물이 부족하네.”
해련이 손수건에 침을 묻히려는 순간, 간호사가 나타나 상호를 구해주었다.
“강상호 님. 환자 보러 가실게요.”
“아, 예.”
세 사람은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안내를 받아 병상에 도착해 보니 병상이 하나 보였다. 그 위에는 소녀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많이 수척했지만 사지는 멀쩡하고 피부도 말끔했다.
다혜의 얼굴을 본 건흠이 병상을 향해 달려갔다.
“다혜야, 다혜야…….”
잠에서 깰까 봐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그저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기만 할 뿐이었다.
상호도 해련과 함께 병상에 다가섰다.
해련이 다혜와 건흠을 번갈아 쳐다보다 물었다.
“왜 실종됐었던 걸까요? 그땐 주 선생도 모른다 했었죠? 강 선생도 어쩌다 이 아이를 만났던 거예요?”
“그건 좀 길어서……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며 건흠의 눈빛을 살폈다. 아마 같은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주 선생님.”
“음.”
“다혜 일어나면…… 어떻게 하죠?”
장학금을 못 받은 채로 1년이 지났다. 실종과 관계없이 이미 퇴학당한 상태.
“……글쎄.”
건흠이 중얼거렸다.
건흠의 시선이 침상 옆에 놓인 검을 향했다. 그의 방식대로 자루감기가 된 검.
건흠은 그 검을 잡아 뽑았다.
즈즈즉……
말라붙은 피가 갈려서 떨어졌다.
건흠은 톱처럼 이가 빠진 검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센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야지.”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담임은 건흠이니까.
“알겠습니다.”
이제 학교에서 보겠구나.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저는 밥이나 좀 먹으러 가겠습니다. 점심을 안 먹어서…….”
“아, 그럼 같이 갈까? 강 선생.”
해련이 잽싸게 그의 옆에 다가섰다. 그녀는 건흠을 향해 손을 흔들며 상호와 함께 방을 나섰다.
“잘 보살펴요, 주 선생. 난 강 선생이랑 식사하고 들어갈게.”
“예, 교장선생님.”
건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해련의 손에 이끌려 복도를 걸어갔다.
“교장선생님, 저 다리, 다리…….”
“업어줄까?”
“아니요…….”
“업혀, 업혀.”
해련이 쪼그려 앉아서 등허리를 툭툭 쳤다.
“빨리 업혀요. 삼대째…… 아니, 영감은 아니군. 어쨌든 아들딸 손자손녀까지 싹 재워버린 명품 등이라구.”
“안 돼요! 빨리 일어나요.”
성인 남자는 제정신으로 여자 등에 업힐 수 없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상호는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해련이 벌떡 일어나서 상호를 복도 벽에 밀어붙였다.
콰앙
해련의 손바닥이 상호의 얼굴 바로 옆의 벽을 강타했다.
그녀가 다른 쪽 손을 허리에 올리며 서늘한 표정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강 선생.”
“넵.”
상호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해련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강 선생 친구인가?”
“아닙니다.”
“상급자지?”
“예? 아, 네.”
“웃어른이지?”
“네.”
“강 선생이 강하다고 남들한테 막 대하면 되나?”
대체 누가 누구한테 할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대꾸를 할 수는 없는 법.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안 됩니다.”
“그렇지?”
“넵.”
“업혀.”
“넵.”
해련은 그제서야 활짝 웃으며 다시 쪼그려 등을 두드렸다.
상호는 그 등에 업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해련의 손이 오금을 받치는 게 느껴졌다.
“이야~, 강 선생.”
“네.”
“엄청 크네.”
“……키 말씀하시는 거죠?”
“글쎄?”
해련은 그저 웃기만 했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다가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저, 교장선생님.”
“응?”
“다혜가 복학한다면 아마 내년이겠죠?”
“그렇겠죠.”
“그러면 1학년을 다니고, 2학년을 통째로 쉬다가 복학하면…… 2학년이 되는 거예요, 3학년이 되는 거예요?”
해련은 고개를 살짝 기웃하다가 답했다.
“그거는 학비를 얼마치를 내느냐에 따라 다르죠.”
“학비요?”
“응. 1년치만 내면 2학년이 될 거고, 2년치를 내면 3학년이 될 거고.”
“1년을 쉬었는데 그걸 내야 해요?”
“사립학교 졸업장은 결국…… 같은 가격을 내야 살 수 있는 거니까요.”
그게 그렇게 되나. 상호는 혀를 찼다.
해련이 쓰게 웃었다.
“그건 이제 주 선생한테 맡겨요. 담임이니까.”
“그건 그래야죠.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강 선생은 따로 신경 써야 할 일이 있잖아요.”
해련이 내공으로 그의 다리를 받치며 손으로 엉덩이를 토닥였다.
“일주일 남았네.”
그 말이 맞다. 상호는 해련의 어깨에 얼굴을 푹 묻었다.
“어머, 왜 이래.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어요? 저번엔 자신 있다더니.”
“아뇨, 그냥…… 바빠서.”
“기운 내요. 어쨌든 좋은 일 생겼잖아요.”
그는 피식 웃었다.
“……그야 그렇죠.”
이제 다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또 모르지만.
그저 다혜가 금방 건강해지기를 바라며, 상호는 해련의 등에 업혀 병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