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번화가의 비싼 아웃도어 매장까지 왔다. 상호는 진열대에서 옷을 고르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세희가 두꺼운 패딩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제일 싼 물건이었다.
“선생님, 이거…….”
“다른 거 골라.”
상호는 세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답했다.
이번에는 태화가 다른 패딩을 가리켰다.
“쌤, 저거 저거. 저건 어때요?”
적당히 비싸고 좋아 보였다. 상호는 그 패딩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보이네. 이걸로 해. 색은 뭘로 할래?”
“검정.”
“검정이요.”
세희와 태화가 같이 대답했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왜? 예쁜 색 고르지.”
“검정이 오래 입기 좋아요.”
“그래도 넷이 같이 맞춰 사는데…… 검은색이면 좀 그렇잖아.”
태화는 세희와 눈을 마주치다가 지윤과 나빛을 돌아보더니,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난 빨간 거. 빨강이 주인공이니까.”
“전 노란색이요.”
“지는…… 음…….”
나빛은 금방 대답했지만 지윤의 대답이 느렸다. 상호는 패딩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초록이나 파랑은 싫어?”
“아니예. 그냥 고민돼서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준다니까 배부른 소리를 못 할 뿐 색깔이 맘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상호는 세희를 돌아보았다.
“그럼 세희가 검은색 입을래?”
“아, 그럼 내가 검은색 할래요. 지윤이 네가 빨간색 해.”
태화가 잽싸게 손을 들었다. 세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내가 검은색 할 거…….”
“세희 그럼 하얀색은 어때?”
상호의 말에 세희가 난감해했다.
“하얀색은 때가 타서요.”
“그래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혹시 때 타는 거 빼고 싫은 이유가 있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상호는 세희의 귀에 속삭였다.
“그냥 사. 때 타면 새로 사줄게.”
“네?!”
세희는 화들짝 놀라더니 곧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선생님, 그, 그럴 필요는…….”
“세희는 하얀색.”
상호는 그렇게 정했다.
“태화가 검은색이면 지윤이가 빨간색이네. 나빛이가 노란색. 됐지?”
“네.”
“넹.”
“선생님…….”
세희가 울상을 지었지만, 상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산대를 향했다.
좋은 물건으로 네 벌을 사니 백이 우습게 깨졌다. 그래도 상호에게는 상관없었다. 차를 새로 뽑긴 했지만 아직은 통장에 여유가 있었다.
계산을 마치자 아이들이 패딩을 하나씩 들고 웃었다.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잘 입을게예.”
상호는 지윤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지윤이 너 그거 어머님이 물어보시면 뭐라고 할 거야?”
“쌤이 선물로 줬다고 해야지예.”
“그래도 괜찮겠어?”
“뭐라 하셔도 어쩌겠습니꺼. 그기 사실인디.”
어쩔 수 없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들을 쓱 훑어보았다.
세희가 하얀색. 지윤이 빨간색. 나빛이 노란색. 그리고 태화가 검은색.
상호는 그 화사한 빛깔 사이의 검은색을 보고 괜스레 마음이 선뜩해졌다.
“태화야. 검은색 말고 다른 건 어때?”
“네? 이미 샀잖아요.”
“여기서 바꾸면 되니까. 혹시 바꿀 생각 없어?”
“아뇨. 딱히 없는데.”
“……그래.”
유난을 떨 일은 아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로 바깥을 가리켰다.
“나가자, 얘들아. 나빛이도 집 가야지.”
“네.”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근데 쌤. 쌤 생일은 왜 안 알려줘요?”
“내가 너희한테 그걸 말해서 뭐 해.”
“선물 받으면 좋잖아요, 헤헤…….”
“너희 무서워서 못 알려준다.”
“지났습니꺼? 남았습니꺼?”
“지났지. 한참 전에 지났어.”
“선생님.”
“응?”
세희가 웃었다.
“들키면 각오하세요.”
“……으응.”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상호의 등에 진땀이 줄줄 흘렀다.
세희는 그런 그를 살짝 젖은 눈으로 쳐다보다가, 패딩을 품에 꼬옥 안고 그 푸근함에 빠져들었다.
사랑하는 이의 품과 꼭 같았다.
110. 뜻밖의 만남
상호는 스탠드에 앉아서 운동장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학기 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다. 세희와 지윤은 기를 발출시킬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고, 나빛은 좀 더 단단한 성창을 더 많이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태화는 강한 마법을 더 배웠다.
그렇게 강해지다 보니 각자의 유형에 따른 특색도 명확해졌다.
“흐얍!”
기합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흑연 속에서 한 인영이 펄쩍 뛰어나와 한 바퀴 돌고는 땅에 안착했다. 몸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고, 강철 장갑을 낀 주먹에는 그보다 더 짙은 푸른빛이 안개처럼 끼어 있었다.
지윤이 주먹을 뻗자 흐릿한 권기가 쏘아져 나갔다. 권기는 아직 연기가 흩어지지 않은 폭발의 중심부를 향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검은 불덩이가 튀어나와 권기와 맞부딪혔다.
콰앙
폭발과 동시에 검은 연기가 모여들어 두터운 벽을 만들었다. 벽은 서서히 그 형태를 굳히더니 지윤을 향해 날아들었다.
지윤은 잠시 움찔하더니 그 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속임수라고 판단한 듯했다.
하지만 스탠드에 앉은 상호에게는 다 보였다. 벽 너머에서 태화가 뭘 하고 있는지.
“흐읍!”
지윤이 땅을 박차 연기의 벽을 뚫고 나왔다. 그녀는 곧 가만히 서 있는 태화를 포착하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태화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펑.”
그러자 땅이 물집처럼,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 사람 머리통만 한 것이 여러 개.
그 마나의 거품이 일제히 폭발했다.
콰아앙
“케헥!”
호신지기를 둘렀지만 너무 직격으로 맞았다. 지윤의 몸이 허공을 날아 땅바닥에 처박혔다.
지윤은 끙끙대며 일어났고, 태화는 상호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를 날렸다.
“아이고오…….”
“봤죠? 완벽한 허초! 역시 수제자!”
“그래. 잘했어.”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두 아이가 그의 앞으로 쪼르르 모여들었다.
“태화는 그렇게 하면 돼. 시간 벌고 큰 거 날리고. 오늘 잘했어. 그래도 자만하다가 본시험 때 사고나지 말고.”
“넹.”
“지윤이는…….”
상호는 잠시 고민했다.
반탄강권은 강기가 되어야 제 위력이 나오는 무공. 이제 권기를 쏘아내는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다른 아이들을 상대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일단은 강기를 뽑을 수준이 되어야 제대로 된 비교가 가능할 터.
다만 내공 외의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고, 아직은 안 좋은 습관이 꽤 남아 있었다.
“상대가 뭔가 준비하는 것 같으면, 너는 최대한 그 예상을 벗어나야 해. 상대의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더라도 말이야. 방금 그 벽 있지?”
“예.”
“네가 그걸 피할 위치가 안 됐고, 또 속임수로 판단하고 오히려 돌진한 것까진 좋았지만, 그래도 정중앙이 아니라 가장자리. 되도록이면 모서리 쪽으로 뛰었어야 했어. 그럼 후속타에 직격을 당하진 않았을 거야.”
지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싸울 때 머리 쓰기 너무 어렵습니더.”
“어쩔 수 없지. 익숙해져야지. 대련 많이 해. 실전에서 죽으면서 배울 수는 없으니까…….”
전쟁에선 재능 있는 자들만이 살아남았지만, 학교는 재능을 키우는 곳이다.
상호는 조언을 마치고 세희와 나빛을 돌아보았다.
“다음, 세희…….”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만.”
어째 요즘 수업시간에 전화가 자주 온다. 상호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이번에는 도현이었다.
용건만 빠르게 말하고 끊을 수 있을 테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어, 형. 나 수업 중인데.”
[야, 상호야. 헬기 보냈거든?]
“……응?”
머리 위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렸다.
* * *
“에휴…… 쯧.”
상호는 바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산 정상의 우뚝 선 바위. 탁 트여서 아주 먼 곳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시야 끝자락에 한반도와 맞닿은 아르게스가 보였다.
거기서 그는 도현과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이따금씩 칼을 던지며.
칼이 다시 돌아올 때는 꼭 궤적에 핏방울이 날았다.
“아니, 바쁜 사람한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미안해. 하필 오늘이 봉인의식이라 그랬어. 지금 하고 있다.]
“민정이 누나는 안 된대? 바쁘대?”
[전화를 안 받더라고. 자는가 봐. 그렇다고 핫라인으로 깨우기는 뭣해서…… 그냥 너 불렀지.]
상호는 혀를 찼다.
몬스터가 공격해 오는 일이야 가끔 있는 일이지만, 요즘은 그 빈도가 점점 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꽤 강한 놈들도 자주 보이고.
다만 그가 여기 와 있는 이유는 강해서가 아니라, 몬스터와 가장 많이 싸워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때 보이냐?]
“확실히…….”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저 멀리 보이는 몬스터들의 동태를 살폈다.
“뭔가에 쫓기는 느낌이네.”
[그렇지?]
“어. 허둥대고 급한 게 딱 그 꼴인데. 뭔가 오고 있긴 한가 보다.”
[지성이 없는 놈이겠지? 좀 큰 놈이려나?]
“그건 봐야 알지. 뭐 저렇게 많이 도망오는 걸 보면…… 멀리서도 감지가 되는 녀석이긴 하겠지. 크거나, 시끄럽거나, 냄새가 심하거나…….”
그가 검을 던지자 개미만큼 보일 정도로 멀리 있는 오우거의 목이 톡 하고 떨어졌다.
검은 까맣게 변해가는 단풍에 피를 흩뿌리며 돌아왔다.
“그 의식은 언제 끝나는데?”
[좀 걸려. 4시간쯤 걸리겠다.]
“밥도 못 먹겠구만…….”
[나도 못 먹어, 임마. 미안한데 조금만 참아라. 너 덕분에 헌터 몇백 명이 쉬고 있는 거야.]
“몰라. 난 우리 애들이 더 중요해. 다음부턴 시키지 마.”
능선 쪽에서는 헌터들이 몬스터를 쫓아 달리고 있었다. 상호는 그쪽은 도와주지 않았다. 저들은 저게 직장이고, 돈 받은 만큼 일해야 하니까.
‘저 정도면 조뺑이도 아니지.’
그렇게 한가롭게 적당히 큰 놈들만 쏙쏙 골라 처리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한 무리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상호는 반응하지 않고 칼집을 짚은 채로 묵묵히 검을 던졌다.
“응?”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요? 헌터 분인가?”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상호의 뒤에 나타난 이들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어진 청년의 말에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어때요. 켕기는 일도 아닌데. 시작하죠.”
그 말에 호기심이 동했다. 상호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전투복을 입은 사내들이 등에 멘 장비를 내려놓고 조립하고 있었다. 안테나와 화면이 달린 커다란 기계였다.
미약한 마나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아마 마법공학이 적용된 물건인 듯했다.
‘뭐여, 저건.’
사내들은 작업을 하면서도 상호를 경계했다. 검고 질겨 보이는 전투복을 입은 사내들 사이에는 양복을 입은 이가 한 명 서 있었다. 꽤나 훤하게 잘생긴 청년.
아마 저자가 사장이라고 불린 인물인 모양이었다.
‘젊어 보이는데. 뭐 헌터 관련 회사인가…….’
상호는 신경을 끄고 검을 던지는 데에 집중했다.
청년은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청년이 상호가 서 있는 바위로 다가가자 사내들이 제지했다.
“사장님.”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도 사내들은 청년의 주변에 서서 상호를 예의주시했다.
청년이 상호를 향해 물었다.
“거기 헌터님은 뭘 하고 계십니까?”
상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몬스터 잡죠.”
“바쁘세요?”
“조금.”
그가 대답하자 청년은 바위에 손을 얹고 올라오려 했다. 그런 청년을 사내들이 붙잡았다.
“사장님!”
“에헤이, 괜찮대도.”
“아니 위험하다니까요!”
“여기 온 건 안 위험한가?”
청년은 막무가내로 바위를 올라왔다. 사내들은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기계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들 중 한 명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괴짜시라니까, 정말…….”
상호는 옆에 선 청년을 흘깃했다.
청년이 돌가루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씩 웃었다.
“이야기 정도는 괜찮겠지요?”
“별로 할 말은 없지만…….”
“흐흠, 실은 심심하신 것 같은데.”
청년은 상호가 검을 잡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예가신가요? 아니면 마법사?”
묻는 것을 보니 마나를 느낄 줄 모르는 듯했다. 상호는 다시 검을 던지며 대답했다.
“무예갑니다.”
“그 검으로 몬스터를 잡고 계시는 건가요?”
“예.”
“한 번에 한 놈씩?”
“예.”
“이야…….”
청년은 흥미가 동한 듯 눈을 반짝였다.
“신기한데요. 혹시 등급을 좀 여쭤봐도 될까요?”
“B급입니다.”
“네? B급?”
“다리가 안 좋아서.”
상호는 칼집으로 바위를 톡톡 쳤다. 기웃거리던 청년의 고개가 곧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러시다니 그런 거겠죠.”
이야기를 하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겼다. 상호는 사내들이 붙들고 있는 기계를 쳐다보았다.
“여기까진 뭐 하러 올라왔어요?”
“아, 저거 때문에요.”
청년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엄지로 기계를 가리켰다.
“주변에 있는 몬스터를 종류별로 탐지해 주는 기계예요. 저거 정확도를 좀 체크하느라. 마침 주의보가 내려왔길래 달려왔죠.”
“만든 거예요?”
“네. 제가 발명했죠. 기술고문은 따로 있지만.”
“뭐 상품 테스트 같은 거예요?”
“아뇨, 이걸 파는 건 아니고. 회사에서 목표로 하는 몬스터만 쏙쏙 골라서 사냥할 수는 없을까, 해서 만들어 본 거예요.”
“……흐음.”
몬스터를 소재로 해서 뭔가를 제작하는 회사인가.
궁금증이 다 풀려서 입을 닫은 상호에게 청년이 말했다.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요.”
청년이 손을 내밀었다.
“하나로입니다.”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의 시선이 사내들의 옷을 향했다. 그들의 가슴팍에 박힌 회사명은 TG.
“……강상호입니다.”
상호는 결국 악수를 받으며 본명을 말해주었다.
그러고 보면 나빛과 웃음이 꽤나 닮아 있었다.
‘나랑 동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빛이 말했던 머리 좋은 오빠. 봉진이 말했던 스물세 살 아들.
상호는 나로를 슬쩍 훑어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회사 이름이 뭐예요?”
“TG 헌터 메이커스입니다. 근데 아직 사업을 시작한 건 아니라, 지금은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태궐 계열이에요?”
“아, 아시는구나.”
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다시 물었다.
“아버님 성함이 혹시……?”
“하긴 하씨니까 알기 쉽죠?”
나로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버지가 회장님이에요.”
역시나. 이제 완전히 확실해졌다.
상호는 나로에게 자신이 나빛의 담임이란 사실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말해봤자 어색해지기만 할 것 같아서 굳이 꺼내지 않았다. 제자의 오빠와 동생의 담임보다는 그냥 등산하다 만난 사이로 하는 게 더 편했다.
그는 알면서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셋이요.”
“나도 스물셋인데. 말 놓지 그럼.”
“그럴까?”
나로도 금세 말을 놓았다.
그때 기계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아, 찾았나보다.”
나로가 바위에서 뛰어내려 사내들을 향해 달려가며 물었다.
“찾았어요?”
“네, 사장님. 오우거입니다.”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찾는 게 오우거였어?’
오우거는 진작에 십여 마리씩 죽여대고 있었는데. 너무 멀리서 죽여서 그동안 포착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검을 잡아 다시 던지지 않고 늘어뜨렸다. 나로가 어떻게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나로는 기계의 화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동쪽인가? 바다 쪽?”
“해안선 쪽인 것 같습니다.”
“누구 망원경 있어?”
상호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펼쳐진 바닷가를 살폈다.
기계가 감지한 대로 그곳에는 오우거 세 마리가 신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바닷가의 숲을 마구 헤치면서.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뭐지?’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고 오우거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지금까지의 몬스터들과는 심히 달랐다. 표정이. 원래도 일그러진 얼굴이 지금은 완전히 공포에 절어 찌그러진 메주가 되어 있었다.
무언가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 같았다.
‘뭔가가 오고 있다.’
상호는 검을 던질 준비를 했다.
그때 무언가가 숲에서 튀어나와 오우거들을 향해 달려갔다. 상호의 예상보다 훨씬 작은 체구였다.
세 마리 오우거는 그들의 주먹만큼도 안 되는 그 작은 무언가를 보고 괴성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러자 그 무언가가 오우거들을 미친 듯이 뒤쫓기 시작했다. 손에 칼을 들고.
상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뭐야.’
빨간 얼굴. 빨간 교복. 빨간 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여학생이었다.
111. 방황의 끝
위험한 작업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속전속결이라고 했다. 길어 봤자 세 시간이라며. 이 좁아터진 땅덩이에선 그 이상 시간을 끌기도 어렵다나. 소녀는 어른 용병들의 수다를 들으며 트럭에 앉아 있었다.
습격은 순식간이었다.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이 갑자기 나타나 맨 앞의 트럭을 들이받았고, 길 양쪽에서 다른 괴물들이 들이닥쳤다. 도망칠 새도 없었다.
죽었구나 싶었다.
그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아서, 소녀는 도마뱀을 닮은 괴물에게 통째로 잡아먹혔다. 다행히 이빨과 혀를 피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뱃속에 들어가 보니 운 나쁘게도 딱 한 번 씹혀버린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씹힌.
“……, …….”
아직 숨이 붙은 그 사내는 소녀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반밖에 남지 않은 구강구조로는 아무런 말도 지어내지 못했다. 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
남자는 몇 초 후 죽었다.
괴물의 목구멍은 소녀를 넘길 만큼 넓었지만, 뱃속은 딱히 넓지 않았다. 괴물이 몸을 꿀렁거릴 때마다 남자의 시체가 소녀를 핥았다. 내장이 터져 흘러나온 분뇨와 토사물이 온몸에 들러붙었다.
“우욱…….”
위액이 쏟아지자 흘러나온 내장과 피가 반죽이 되어갔다. 방수에 방염, 방검도 되는 학교 전투복이 소화액을 막아주었지만, 숨이 막혀오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소녀는 죽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이대로는 못 죽는다.
소녀는 검을 뽑아 온 힘을 다해 괴물의 내장을 찔렀다. 하지만 질기디질긴 내장은 쉬이 찢어지지 않았다. 검기를 끌어올려도 마찬가지였다.
소녀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되어도. 하지 못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야만 했다.
“크흐……! 흐윽……!”
소녀는 죽을힘을 다해 검을 내려찍었다. 한 번, 두 번.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산소가 부족해졌다. 오만 가지 역겨움이 뒤섞인 공기를 꾸역꾸역 입으로 삼키며, 소녀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