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후는 야외 수업이었다.
상호는 스탠드에 앉아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세희와 태화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의 옆에는 미진이 서 있었다.
미진은 아이들의 실력을 보고 감탄했지만, 이따금씩 의심 섞인 눈초리를 상호에게 보내곤 했다. 상호는 아이들의 대련을 살피면서도 그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고 아이들의 실수와 안 좋은 습관을 찾는 데에 집중했다.
곧 세희가 태화를 와락 덮쳐 바닥에 쓰러트렸다.
“윽……!”
태화는 순간이동을 쓰려 했지만, 세희의 칼날이 먼저 목에 닿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손뼉을 짝 쳤다.
“됐다. 들어와.”
세희는 벌떡 일어나 태화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 행동이 둘에게는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상호는 다가온 아이들에게 한 마디를 했다.
“틀렸어.”
그 말에 미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호도 그녀가 왜 그러는지는 알았다. 이미 1학년 수준을 뛰어넘은 아이들에게 칭찬을 안 하고 꾸중을 하다니. 그것도 B급 주제에.
하지만 전투 수업만은 무조건 그의 뜻대로 할 것이었다. 상호는 세희와 태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번에 허초 쓰라고 한 것 때문에 그렇게 한 거지?”
“네.”
오늘 둘은 어설프게 허초를 쓰며 허점을 노출했다.
“허초는 그렇게 쓰는 게 아냐. 처음부터 뺄 생각을 하면 안 돼. 한없이 실초에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야. 상대가 허초를 받아치지 못한다면 곧바로 실초가 될 수 있게.”
세희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허초랑 실초랑 차이가 뭐예요?”
“허초도 결국 실초야. 실전에서 쓰는 이상 그게 속임수든 뭐든 간에 결국 다 실초란 말이야. 허초라는 말은 그냥 단어가 그런 것뿐이지 그걸 가지고 가짜로 공격했다가 빼는 초식이라고 해석하면 안 돼. 딱 정리해 줄게. 허초는 다음 수를 생각하는 초식이고, 실초는 다음 수를 생각하지 않는 초식이야. 말이 어렵나?”
“어…… 그러면 상대를 쓰러트리는 공격만이 실초고, 그 전에는 전부 허초라는 뜻이에요?”
“아니지. 허초는 상대의 대응을 이끌어내서 그 대응을 기반으로, 내 계산대로 다음 초식을 이끌어나갈 수 있게 하는 공격이고, 실초는 상대가 대응할 수 없을 거라 가정하고 날리는 공격인 거지. 물론 상대가 피할 수도 있어. 반격이 날아올 수도 있지. 그때는 나도 죽기살기로 피하고 다시 계산해야 하는 거야.”
입을 푼수처럼 헤 벌리고 듣던 태화가 눈을 끔뻑이며 한마디 했다.
“뭔 말인지 모르겠는뎅.”
“속이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속이다가도 기회가 생기면 바로 파고들 준비를 하란 뜻이야. 더 설명해 줘?”
“우씨, 첨부터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지…….”
“알아들었어?”
“네.”
태화도, 세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진은 이제 대놓고 그에게 멸시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헛소리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는다는 듯이. 상호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A급한테도 어려운 이야기를 애들한테 해 버렸구나…….’
“미진 씨. 뭐 궁금한 거 있어요?”
“강 선생님은…….”
미진의 시선이 상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직접 시범은 안 보여주시나요?”
오늘은 목각인형으로 수업하는 날이 아니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이 이래서.”
“그러면…….”
미진은 말을 빨리 잇지 못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생각이 뚝뚝 끊어지는 모양이었다.
눈은 그렇다 쳐도 절름발이에 B급, 직접 나서지는 않고 학생들에게 대련이나 시키는 주제에 잘난 척 질책만 하고, 교과서 내용을 틀렸다고 말하면서 자기 생각만 관철시키는 팔자 늘어진 꼰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잠시 후에 미진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학생들은 뭘 보고 배워요?”
“실전을 통해서 배우죠.”
그 말에 미진이 발끈했지만, 그 이상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를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세희는 멍한 눈빛으로 미진을 쳐다보았고, 태화는 뚱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지윤은 저번처럼 웃음을 참았고, 나빛은 늘 그렇듯 곱게 웃기만 했다.
상호는 미진을 향해 살짝 웃어 주고 수업을 계속했다.
“다음. 지윤이, 나빛이.”
* * *
일과가 끝나 드디어 종례.
상호는 교탁에 손을 얹고 아이들, 그리고 미진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얘들아.”
“넹.”
“미진 씨도 고생했어요.”
“…….”
“곧 11월이네. 11월은 특별한 행사가 없으니까, 수련에만 열심히 집중하자. 알았지?”
“네.”
“그래. 수업 끝. 내일 보자.”
상호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이 가방을 챙기며 일어났다. 하지만 제일 먼저 문으로 향한 것은 미진이었다. 교실을 나서는 잰걸음이 아주 쌀쌀맞게 빨랐다.
아이들은 미진이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상호의 눈이 끔뻑거렸다.
“얘들아?”
“저 언니 왜 저래요?”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쌤을 무슨 벌레 보듯이 보던데요?”
“그냥 어색해서 그런 거지.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친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쌤을 완전 븅신 호구 조빱 찌질이 새끼로 본다니까요!”
“얌마, 어디 어른한테…….”
상호는 쓰읍 하고 으르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태화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쌤이 좀 호구지만! 몸도 조금씩 븅…… 하자가 있지만! 그래도 조빱 찌질이는 아니잖아요! B급따리지만!”
“너 또 상담할래?”
“말의 뜻을 들으세요, 뜻을!”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야. 쌤이 알아서 할게.”
“아니 옆에서 보면 짜증난다니까요! ……잠깐만, 니들은 왜 또 가만히 있냐? 너흰 저 언니 맘에 들어? 쌤 싸가지없게 꼬라보는 거 못 봤어?”
태화가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며 어이없어했다. 세희, 지윤, 나빛이 차례로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마음이 넓어서 괜찮아. 속 좁은 너랑은 다르게.”
“쌤은 익숙하실기다.”
“어차피 지내다 보면 교생선생님도 아실 거야. 우리 선생님 좋은 사람인 거…… 헤헤.”
“……니들은 느긋해서 좋겠다.”
태화는 혀를 차고 가방을 멨다.
“몰라. 쌤이 알아서 해요. 근데 우리가 그 언니랑 친해지긴 글러먹은 것 같아요.”
“……으음.”
생각해 보면 그 문제는 있었다. 그가 출장을 가면 미진이 담임을 맡을 텐데, 이대로라면 아이들이 미진의 말을 안 들으려 할 테고, 그건 상호에게도 곤란한 일이었다.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도 너무 안 좋게 보지 마. 그냥 평범한 반응이니까. 날 봤는데 교생선생님 같은 반응이 안 나오면 그게 이상한 거야.”
“그래도 호구로 보는 건 짜증나잖아요. 한번 뒤엎어요.”
“좀 호구로 보면 뭐 어때.”
그의 대답에 태화가 중얼거렸다.
“차암 남자 볼 줄 모르는 언니네. 쯧…….”
“남친 있대.”
“그래요? 얼마나 대단한 양반이길래 쌤한테 이러는지 모르겠네.”
“얌마, 그거랑 이거는 다른 이야기지. 애인은 애인이고 나는 직장 상사일 뿐이고…….”
상호는 교탁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신경 쓰지 마라. 딱히 선생님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 내가 당장 어디 출장을 가는 것도 아니고, 3학년 가르치느라 바쁜 것도 아니고. 그치?”
“……네.”
“이제 가서 쉬어. 선생님은 교무실 가서 또 알려줘야 돼.”
“네.”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문을 나서던 태화가 상호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쌤, 파이팅.”
뒤이어 지윤이 씩 웃으며 윙크를 했고, 세희도 살짝 쓴 기운이 느껴지는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나빛이 양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응. 나빛이 내일 보자.”
상호도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이 다 떠나자 그도 나갈 준비를 했다. 이제 교무실로 가서 미진에게 업무를 가르쳐야 했다.
어제 미진에게 컴퓨터 비밀번호를 알려줬을 때가 기억났다.
‘키보드 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던데…… 나보다 컴퓨터는 잘 다루는 것 같고. 업무도 깐깐하게 잘하려나.’
좀 있으면 후배에게 잔소리를 듣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전투가 아니라 업무니까, 좀 들을 법도 했다. 아직도 미숙한 부분이 많았기에.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다. 상호는 초탈한 웃음을 지으며 교무실로 향했다.
107. 오해
‘……벌써 이렇게 됐나.’
11월 1일의 아침. 상호는 핸드폰의 날짜를 보며 생각했다.
다혜가 실종된 지 어느덧 1년째.
살아 있는 게 맞긴 할까. 맞다면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쪽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의 마음은 오늘따라 울적했다.
‘출근하기 싫다…….’
평소 같았으면 아이들 보고 싶어서 기꺼이 학교에 갔겠지만, 요즘은 영 피곤해서 그런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피곤의 원인은 한 여인.
그녀를 떠올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늘 가면 또 한 소리 하려나. 에휴…….’
상호는 출근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 * *
“어제 수정 잘못하셨던데요.”
미진이 자리에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학생이 넷인데 유형은 셋이잖아요. 왜 유형도 넷으로 쓰셨어요?”
“아, 그거…….”
상호는 눈알을 굴리며 변명을 찾다가, 이내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실수했어요.”
“…….”
미진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는 멋쩍게 웃었다.
미진이 일을 시작한 지도 나흘째. 그녀는 첫날 이후로 상호의 수업에 나오지 않고 교무실에서 업무만 봤다. 아마 해련이 그렇게 시켰다는 모양이었다. 교장실에 찾아가 불평이라도 한 걸까.
어쨌든 상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귀찮아서.
“고마워요. 미진 씨 아니었으면 일을 두 번 할 뻔했네.”
그는 출석부를 챙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내가 할 일을 미진 씨가 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렇게 다 해버리면 내가 할 일이 없잖아요.”
“……흥.”
미진은 들릴 듯 말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일을 대신해 주는 걸 보면 아주 밉지는 않은 모양이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교무실을 나섰다.
* * *
“아니죠.”
해련의 검지가 상호의 코앞에서 양옆으로 흔들렸다.
“그거는 이거예요. 나는 저런 월급 도둑하고는 다르다, 나는 상사보다 유능하고 일에도 열심이다, 그런 뜻이지. 둘만 있을 때는 보고 안 하죠? 꼭 교무실에서만 그러죠?”
점심시간에 해련의 손에 붙잡혀 교장실로 납치된 참이었다. 상호는 소파에 앉아 해련에게 어깨동무를 당한 채로 눈을 끔뻑였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니까. 남들한테 알리고 싶은 거예요. 나 유능해요, 쟤 무능해요. 그러니까 둘이 있을 땐 말도 안 걸고 남들 있을 때만 그러지.”
해련이 키득거렸다.
“나랑 이야기할 때 그러더라고. 배울 게 없는 것 같다고. 아무리 봐도 낙하산으로밖에 안 보인대. 그래서 내가 그럼 수업 참관은 하지 말고 업무만 보라고 그랬어요.”
“그건 뭐 어쩔 수 없죠. 따로 증명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니. 무능해 보이는 게 당연하죠.”
“무능도 무능인데, 내가 보기엔 그…… 강 선생을 물러터진 팔푼이로 보는 것 같더라고.”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자기 입으로 그랬어요?”
“바보처럼 웃는대. 행동도 굼뜨고 자꾸 까먹고 일도 못 한다고도.”
귀찮아서 웃고, 여유롭게 늘어져 다녔던 것이 그렇게 비쳐진 모양이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하죠. 일은 저보다 확실히 잘하더라구요. 똑똑하고.”
해련이 씩 웃었다.
“강 선생은 호구 맞는 것 같아.”
“그래요?”
“그래서 좋아.”
“예에…….”
해련의 손이 슬그머니 상호의 팔뚝을 주물렀다. 상호는 시계를 흘끗하고 교장실에서 도망칠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교장선생님. 저 업무가 있어서…….”
“요즘 업무 다 미진 양이 하잖아요.”
“그게, 그…… 같이, 같이 해야죠. 원래 제 일인데…….”
쩔쩔매는 상호를 해련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강 선생은 미진 양 어때요?”
그 물음에 상호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좀 나쁘게 보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붙임성은 좀 없지만 딱히 사람이 악해 보이지도 않으니. 일만 잘해주면 장땡인데 이미 잘하고 있었다.
“좋아요. 똑똑하고. 일 잘하니까.”
“은근히 뽐내고 깎아내리는 게 짜증나지 않아요?”
“그건 뭐…… 지금 제 상황이라면 누가 와도 그렇게 되죠. 어지간히 성격이 좋지 않은 이상……. 전 그냥 미진 씨 일 잘하는 걸로 만족해요.”
해련이 눈을 반짝였다.
“임 선생이랑 반대네.”
상호는 의아해했다.
“설미 선생님이요?”
“응. 임 선생은 강 선생 가르칠 때 그랬거든. 좀 바보 같고, 일머리 엄청 없고. 그래도 착해서 너무 좋다고.”
“……그랬어요?”
“엄청 예뻐했었어요.”
상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설미가 뒤에서 그를 그렇게 예뻐하는 줄은 몰랐다.
해련은 시계를 보더니 상호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가 봐요. 곧 이사장 오겠네. 그러고 보니 그 내기는 잘 되어가요?”
“네.”
“꼭 이겨요. 연말 회식 때 웃어야지.”
“그럼요. 이기려고 한 내기인걸요.”
상호는 교장실을 나서며 해련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응. 수고해요.”
닫히는 문 사이로 해련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상호는 몸을 돌렸다가 코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설미가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호 씨? 교장선생님이랑 이야기했어?”
“아, 네.”
“미진 씨 일로 이야기 많던데. 혼났나 보구나.”
그녀가 피식 웃었다.
“후배보다 일 못하는 선배라며?”
상호도 살짝 웃었다.
“네. 그렇게 소문이 났더라구요.”
“거봐. 상호 씨 일 참 못한다니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겠지?”
입으로는 힘들었다고 말하지만 그 위로는 싱글벙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상호는 설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가만히 그러고 있자 설미가 웃음을 흐렸다.
“왜, 왜 그래?”
“아뇨. 그냥.”
상호는 돌아서서 검을 짚어 복도를 걸어가며 무심하게 말했다.
“역시 예쁘다 싶어서.”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진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설미의 반응은 알지 못했다.
잠시 후 교장실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나더니, 해련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 선생, 괜찮아요? 코피, 코피 나!”
“으히히……, 괜찮아요. 흐히히히…….”
뒤이어 설미의 실없고 우스꽝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데, 거짓말은 아니지만…… 설마 오해하진 않겠지? 예쁘다 한 번 한 거 가지고…….’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애써 무시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 * *
오후의 실내수업 시간.
상호는 여느 때처럼 칠판 앞에 서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 넷과 함께. 미진은 없이.
“이 지역의 고블린들한테는 광산이 있어.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우선 도구와 분업이란 개념을 알겠지? 그리고 욕구와 관계없는 행동을 한다는 건 지배층이 존재해서 피지배층을 관리하고 있을 확률이 크다는 거…….”
갑자기 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잠시만.”
상호는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효은의 전화였다.
수업 중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래도 일단은 끊고 부재중 메세지를 보내 두었다.
그는 다시 수업을 시작하려 했다.
“확률이 크다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지배층에겐 지배를 할 수 있는 원동력, 그러니까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
진동이 또 울렸다.
두 번씩이나 전화한 걸 보니 확실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핸드폰을 들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선생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네.”
아이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바닥을 펴 보이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왜.”
[왜에?]
효은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몇 주째 목소리 한 번 안 들려줘 놓고, 왜에?]
“뭔 몇주야. 사나흘쯤 됐겠지…….”
[문자밖에 안 했잖아, 바보야!]
“그럼 뭐……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응.]
상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겨우 그걸로…… 됐어. 끊어. 이따 이야기해.”
[질렸냐?]
“뭐?”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효은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나 질렸냐고.]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목소리 듣고 싶으면 전화를 진작 했어야지.”
[너는 내 목소리도 안 듣고 싶고, 보고 싶지도 않은가봐?]
“너 뭐 갱년기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상호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억누르며 서쪽 계단으로 향했다.
“오늘 기분 안 좋아? 갑자기 왜 그러는데.”
[니가 나를 안 찾잖아.]
“바빠서 그래. 이번 시험은 진짜 중요하단 말이야.”
[나보다 애들이 중요해?]
참 애처럼 군다.
상호는 계단 앞을 서성이며 목청을 올렸다. 구석진 곳이라 반까지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니가 애야? 앞가림을 못해? 너 돈도 많잖아. 우리 애들은 시험 못 치면 퇴학당하고 기숙사 쫓겨나서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내가 너를 먼저 챙겨야 해?”
[그렇다고 전화를 안 해? 밤에 전화 잠깐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니가 걸면 되잖아!”
[그러니까 왜 네가 먼저 안 거냐니까? 니가 날 안 원하는 거라니까?]
“아니 이 미친…….”
뚜껑이 열려버린 상호는 여기가 학교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대체 뭐가 맘에 안 드는데! 갑자기 전화해서 왜 지랄이야!”
효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렸나보다, 너.]
“아니라고.”
[뭐 그런 거지. 그냥 불쌍했을 뿐이고. 언니만큼의 사랑은 당연히 못 주겠고. 절대 먼저 찾지는 않고 그냥 가끔 관리해주는 거지. 어장처럼.]
검을 짚은 상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 어쩌자고. 헤어지자고?”
[니가 먼저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대답이었다.
[헤어져, 그래. 새끼야. 헤어져. 사랑해주지도 않는 새끼를 사랑하는 것도 질렸어, 이제.]
“뭘 헤어져? 야, 내가 X발 물어본 거지 언제 헤어지자고 말을 했…….”
[니X미.]
뚜──
전화가 끊겼다.
상호는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다가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X발! 지 생각밖에 안 하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봤다. 새치기해놓고는 빤질빤질하게 뻗대던 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요즘 들어 효은에게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들 연말평가와 미진, 그리고 다혜까지 신경 쓰느라.
상호는 신경질적으로 벽을 쾅쾅 내리쳤다.
“지랄맞네. 배때지 뚫리게 해댈 땐 언제고…….”
그때 아래층에서 아주 작은 발소리가 났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 무게가 가벼운 것을 보니 아마도 여자. 당황한 상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언제부터…….’
하도 격앙된 채로 통화를 해서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계단으로 목소리가 다 들렸을 위치였다.
‘……이미 들린 걸 어쩔 수는 없고.’
상호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조심스럽게 그의 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밑에 있는 게 누군지 궁금했지만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기를 바랄 뿐.
‘그나저나 얘는 어쩌나. 아오…… 11월은 일정이 없어서 편하겠다 싶었더니……. 뭐 사과하기 좋은 핑계 없나? 하아…….’
그는 한숨을 푹푹 쉬며 교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