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연극이 끝나고, 다른 공연들이 이어졌다.
일부러 처음 앉았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왔건만, 아무리 안대를 벗었어도 여고의 남선생은 그리 숨기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상호의 반 아이들이 그의 오른쪽에 한 명씩 착석하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쪽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를 외면하고 왼쪽에 앉은 설미와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갔다.
“회식은 어디로 간대요?”
“몰라. 삼겹살 같은 거 먹지 않을까?”
“삼겹살 좋아해요?”
“아니, 그냥저냥 좋은 수준인데. 근데 상호 씨, 오늘따라 살갑다?”
“에이, 저야 뭐 설미 선생님한텐 늘 그렇…… 엥.”
누군가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귀에 속삭였다.
“쌤예.”
지윤이었다.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있지예.”
황금색 밧줄이 그의 양 손목을 모아 묶었다.
“쌤이 우리 소원권을 씹었다는 거예.”
“소원권은 저번에 교실에서 한 걸로 끝난 거 아니야?”
“아닙니더. 지들이랑 같이 연극하는 게 소원이었던 거지예.”
지윤이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세희와 태화와 나빛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들었다.
“지들이 쌤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는디예.”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얘들아, 선생님도 소원이 있어……. 너희 소원만 소원이 아니라…….”
“지들이 쌤을 때릴 수는 없고……. 쌤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 보니까 이거밖에 없더라구예.”
“지윤아, 잠깐만, 잠깐만, 이거 놓고…….”
“벌은 받아야지예.”
아이들은 그를 강당 밖으로 끌고 나왔다.
상호는 지윤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교실까지 끌려왔다. 검은 세희의 손에 들려 있었다.
태화가 의자를 교실 한가운데에 내려놓자 지윤이 거기에 상호를 앉혔다.
뭔 짓을 하려고 이러나. 상호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얘들아……. 선생님 회식 가야 돼…….”
“혼자만 맛있는 거 먹으려고요?”
태화가 화장품을 꺼냈다.
나빛도 종이 가방에서 금색 가발을 꺼내며 웃었다.
“해야 했던 걸 하는 것뿐이에요.”
금색으로 빛나는 밧줄이 그의 몸을 의자에 칭칭 묶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끊어버릴 수 있었지만, 아이들 표정을 보니 그랬다가는 밧줄만 끊기는 게 아니라 관계도 끊겨버릴 것 같았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해 봐. 하고 싶은 대로 해…….”
“진짜요? 해도 돼요?”
태화가 입술을 확 들이댔지만 지윤에게 뿔을 잡히고 말았다. 지윤이 태화의 뒤통수를 치며 혀를 찼다.
“지랄 마라, 가스나야. 그거는 연극 끝나면 끝난 기라.”
“왜! 원래 내 건데! 제비뽑기로 정했잖아!”
“끝났으면 끝난 기지 그게 평생 니끼고. 저 바라. 세희는 가마이 있지 않나.”
뒤돌아 있던 세희가 지윤의 말을 듣고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본 지윤이 고개를 기웃했다.
“뭐하노, 세희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째 발음이 부정확한 게 입 안에 뭔가를 머금은 모양이었다. 상호는 세희가 주머니에 구취 제거용 사탕을 숨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건 안 된다, 얘들아…….”
“봐라 임마. 쌤이 안 된다지 않나. 후딱 찍고 끝내자니께.”
그 말에 상호의 묶인 두 팔이 움찔했다.
“……찍는다고?”
“예.”
“저번에 찍었잖아.”
“그건 얼굴 안 나오지 않았습니꺼.”
지윤이 팔짱을 끼고 턱짓했다.
“시작허자.”
그러자 세희가 그의 머리에 가발을 씌우고, 태화가 립스틱을 그의 입에 문지르려 했다. 상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반항했다.
“야, 얘들아. 뭘 그런 사진을 찍으려고 하냐! 잘 나온 사진을 가져야지 뭐하러 웃기는 사진을…….”
“선생님.”
나빛이 그의 머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뒤통수에 포근한 품이 닿았고, 의자 뒤에 묶인 손에는 온기가 느껴졌다.
“가만히 계세요.”
“……그래.”
움직이면 범죄다.
상호는 저항을 멈추고 태화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 * *
잠시 후, 화장이 끝나고.
“짜잔~.”
태화가 핸드폰을 상호의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금색 가발을 쓰고 우스꽝스럽게 분장을 한 남자가 초탈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 눈에 난 험상궂은 흉터가 퍽 엽기적이었다.
포기하자고 생각했지만, 그 꼴을 보니 다시금 온몸의 근육이 움찔거렸다. 저 핸드폰을 뺏어서 지우든 부수든 해야 한다고.
다른 아이들도 신나게 사진을 찍어댔다.
“찍었어?”
“응, 찍었어.”
나빛이 키득거렸다.
세희는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고, 지윤은 배를 잡고 끅끅거렸다. 상호는 그런 그녀들을 향해 물었다.
“얘들아, 이제 풀어줘라. 화장 지우고 회식 가게…….”
“선생님.”
“쌤예.”
그의 앞에 아이들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방금 찍은 상호의 얼굴과 그 사진이 전송될 연락처가 띄워져 있었다.
태화는 민정. 나빛과 지윤은 각자의 어머니.
“세희 닌 누구 없어?”
“나는…… 음…….”
태화의 물음에 세희는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은율이밖에 없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상호의 머리가 아뜩해졌다.
차라리 민정이 제일 낫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저 염병할 사진이 보내지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만 했다. 그는 거의 애걸복걸하다시피 빌었다.
“얘들아…….”
“그러니까 앞으로 잘하라구예. 일 키우지 말란 말입니더.”
아이들의 손가락은 전송 버튼에 닿기 직전이었다.
나빛과 태화가 외쳤다.
“소원권을 썼으면 소원을 들어주고!”
“어른이라면서 다 자기 맘대로만 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세희가 한마디를 날렸다.
“저희한테서 자꾸 도망치지 마세요.”
니들이 이러는데 도망을 안 치게 생겼냐. 상호는 속으로 한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터 소원권 쓴다고 하면 무조건 들어줄게……. 그러니까 제발 그 사진은 지워 줘.”
“지우면 또 그럴 거잖아요.”
“그럼……, 그럼 그냥 너희만 보고, 절대 다른 사람들한텐 보여주지 말고…….”
“앗.”
나빛이 몸을 움찔하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상호의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쫙 흘렀다.
“……나빛아?”
그의 부름에 나빛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실수. 에헤헤…….”
“이야, 사람 하나 보내버리고 실수~, 에헤헤~, 래.”
태화가 깐죽거리며 상호의 코앞에서 대놓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나도 실수~, 에헤헤~.”
“야, 그걸 보내뿌면 우짜노. 두고두고 무기로 쓰는 기지…….”
지윤이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씩 웃었다.
“지는 안 보냈어예, 쌤. 앞으로 지 말 잘 들으셔야 할낍니더.”
“저도요.”
세희가 상호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말은 상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빛이 성력으로 이뤄진 밧줄을 풀어도 상호는 망연자실한 채로 의자에 축 늘어져 있기만 했다.
눈에 습기가 차서 시야가 자꾸 아른거렸다.
‘교사…… 너무 힘들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쉼 없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103. 술자리
“작년 회식 같이 갔었지? 연말에.”
설미가 운전대를 돌리며 물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둘은 설미의 차를 타고 회식 자리로 가는 참이었다. 갈 때는 설미가, 올 때는 상호가 운전하기로 했다.
설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 보니까 상호 너 술자리 예의 잘 모르는 것 같던데.”
“그랬어요?”
“응. 상석도 잘 모르고, 잔도 자꾸 혼자 비웠잖아.”
그런가.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하긴 술은 대부분 도현하고만 마셨으니까. 그래도 알 건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다만 하나 의문이 드는 게 있었다.
“교장선생님 딱히 그런 거 안 따지지 않아요?”
“그래도! 막내니까 조심해야지.”
설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얼마나 잘 하는지 두고 볼 거야.”
“실수하면 혼내게요?”
“응. 주말마다 같이 마시러 다니면서 가르쳐줄 거야.”
“좀 봐줘요.”
상호는 쓰게 웃었지만, 설미는 그런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엷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착했네. 들어가자.”
* * *
“아핫, 아하하핫…….”
해련이 상호의 무릎을 찰싹찰싹 치며 웃었다. 방금 막 옆 테이블에서 한 선생이 케케묵은 농담을 한 참이었다.
“강 선생, 들었어? 새벽이슬이 아니라 새벽에술이래, 푸흐흐…….”
‘……할머니!’ 상호는 목구멍까지 치솟은 그 말을 술로 가라앉혔다.
설미가 두고 본다고 했지만, 상호에게는 실수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고깃집에 들어가자마자 해련의 옆자리로 끌려왔기 때문에.
상호가 앉은 곳은 4명짜리 식탁. 옆에는 해련이, 마주 앉은 곳에는 설미가 앉아 있었다. 한 자리는 비었다. 아무리 해련의 성격이 좋다 해도 교장의 코앞에 앉기는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해련은 막무가내로 그에게 술을 권했고, 상호는 하는 수 없이 술을 받게 되었다. 마침 애들 때문에 고단해서 술이 고프기도 했고.
상호가 잔을 비우자마자 해련이 쿡쿡거리며 술병을 집었다.
“아이구, 강 선생. 참 잘 마시네.”
동시에 해련의 다른 손이 상호의 뒤로 은근슬쩍 다가와 엉덩이를 토닥였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할머니……!’
이건 추행일까, 귀여워하는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 자. 받아요, 받아요.”
해련이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상호는 병을 건네받아 해련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 설미에게도 병을 내밀었다.
설미가 난색을 표했다.
“운전해야지, 상호 씨…….”
“대리 부르죠. 괜찮으니까 그냥 마셔요. 난 어차피 안 취하니까.”
상호는 병을 까딱이며 재촉했다. 설미는 뚱한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셋은 건배를 하고 잔을 기울였다.
잔을 비우니 해련이 또 술병을 집었다. 상호는 식겁하며 병을 잡아 눌렀다.
“아니, 너무 많이 드시잖아요!”
“갠찬아요~. 어짜피 안 치하는데 머~.”
“이미 많이 드셨어요……. 내공이라도 한 번 돌리세요.”
“에이, 그럴 거면 술 안 마셨지.”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상호는 빠르게 쌈을 하나 싸서 해련의 입에 투척했다.
“좀 드시면서 마시세요. 연세도 많으신 분이…….”
“젊어졌는데 뭐 어때요.”
상호는 헛기침을 했다. 그 나이 먹고 추태 부리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그러자 쌈을 오물거리던 해련이 고개를 기울여 상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입에 든 것을 다 삼키고는 앳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아~, 나이를 뒷구멍으로 처먹었냐고~?”
해련은 상호의 손목을 덥석 잡아 자신의 엉덩이로 이끌었다. 상호는 황급히 손을 뺐다.
그러면서도 설미 때문에 큰소리는 내지 못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차마 알릴 수가 없어서.
대신에 천연덕스럽게 식사를 계속할 뿐이었다.
“설미 선생님. 한 잔 더 받으세요.”
“응.”
“강 선생, 나는? 나는 안 줘?”
“……자, 여기요.”
식탁의 소주병은 끝을 모르고 늘어만 갔다.
* * *
“히끅. 그래서 우리 상호가…….”
설미가 고개를 푹 숙이고 푸념했다.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내 마른 쳐 듯~찌도 안코, 발주를 느어부린 그에여어~.”
“아이고~.”
“구래서 다시 시켜, 시켯는대, 이버내는 배부늘 잘모탯드라구여어~.”
“아이고~.”
해련이 방글방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이 여자들 맛이 갔다. 상호는 대화에서 한발 떨어진 채 조용히 자작을 했다.
해련의 손이 자꾸 허벅지를 주물럭거렸지만, 이제는 떼어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교사들이 외투를 챙기며 일어났다. 자리를 파하려는 모양이었다.
“교장선생님. 저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응~ 월요일에 봐요~.”
그 자리가 마지막 남은 자리였다. 이제 예현여고에서 온 손님은 상호와 해련, 설미밖에 남지 않았다.
설미는 술을 들이키더니 비틀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상호…… 말 좀 드러…….”
그리고는 곯아떨어졌다.
상호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제 해련을 혼자 맡아야 한다니.
해련의 손이 더욱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교장선생님…….”
“아파요?”
또렷한 목소리였다. 상호는 퍼뜩 옆을 돌아보았다.
해련이 아주 말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 다리. 맞지 않나?”
그녀의 손이 상호의 왼쪽 다리를 쓰다듬었다.
상호는 잔을 기울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됐는지는 아직 못 말해주겠어요?”
“궁금하세요?”
“궁금하죠. 나는 강 선생 다리가 원래 어땠는지 알고 있으니까.”
군에서 해련을 만났을 때는 멀쩡했으니 말이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때 되면 말씀드릴게요. 여기서는 좀 그렇고.”
“그래요?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할까.”
해련은 설미를 흘끗하고는 상호에게 물었다.
“연상이 취향이라고 했죠?”
“예.”
“그럼 우리 학교에서는 내가 제일 취향인가?”
“예?”
상호의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게…… 꼭 그렇게 되는 건 아니죠.”
“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죠?”
상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해련이 그의 넥타이를 덥석 움켜잡았다.
“농담 아닌데.”
상호의 입에서 딸꾹질이 나왔다. 하도 깜짝 놀라서.
그런데 농담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교장……선생님?”
“그 딱딱한 호칭도 슬슬 고쳤으면 좋겠네. 둘만 있을 때는.”
해련이 눈을 찡긋했다.
상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어머님?”
“뭐?”
해련이 넥타이를 확 잡아당겼다.
“켁…….”
상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님에서 한 단계 깎은 건데.
그러면 설마 누나라고 부르라는 걸까.
“누님……?”
정답이었을까. 해련이 넥타이를 놓으며 빙긋 웃었다.
“응, 상호야.”
“……저 너무 어색해서 죽을 것 같은데 그냥 존대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사석에서까지 존댓말을 써야겠니?”
그 말도 맞지만.
윗사람하고는 괜히 친하게 지내다가 혼이 나거나 하면 더 불편해지니까, 어지간하면 거리를 조금 두고 싶었다.
“반말은 당연히 하셔도 되지만…… 그래도 익숙한 대로가 편해서요.”
“그래요 그럼. 익숙한 대로 할까. 그래도 교장선생님은 부르기 너무 긴걸.”
해련이 잔을 들었다.
“자, 누님한테 한 잔 올려봐요.”
“예에…….”
상호가 술을 따르자 해련이 술병을 받아 그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둘은 잔을 부딪치고 쭉 비웠다. 해련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강 선생.”
“네.”
“임자 있나?”
잔을 든 상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네.”
“어머, 정말?”
“네. 사실혼 관계예요, 이미.”
그 말에 해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가 있다고?”
“……아니, 애는 없고요.”
“에이, 그럼 결혼은 아니지.”
해련은 피식 웃으며 술을 따랐다.
“그럼 임자 없는 거네.”
“아니, 애인이 있다는 뜻…….”
“결혼 안 했으면 임자가 아니지. 주인이 아닌데.”
“……주인이나 마찬가지예요. 애인이.”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해련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잡혀 사나 봐?”
“그건 아니죠. 저도 잡고, 걔도 잡고. 그러는 거죠 뭐.”
그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해련은 이미 답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꽉 잡혀 사는구만. 하긴 강 선생은 여자한테 기 못 펴지.”
“아니에요.”
“아니긴 뭘 아니야. 학생들한테 업히고 던져지고 난리 났던데.”
다 봤나.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쨌든 임자 있습니다.”
해련이 상호의 허벅지에 다시 손을 올렸다.
“내가 그걸 왜 물어보는 것 같아요, 강 선생?”
“몰라요.”
“그래요?”
상호가 모르는 척 고개를 젓자 해련이 술병을 잡고 병째로 들이켰다.
그러고는 시뻘개진 얼굴로 킬킬거렸다.
“그럼 취한 김에 실수 좀 해볼까?”
해련의 손이 상호의 바지 벨트를 더듬거렸다. 상호는 기겁하며 그 손을 붙들었다.
‘아이씨, 이 양반 이미 취해 있었구만!’
“교장선생님, 주사 부리지 말고 정신 좀 차리세요……!”
“나도 젊은 애랑 좀 놀아보자~.”
“아오……!”
그때, 앞에 누워 있던 설미의 몸이 꿈틀했다.
“욱…….”
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회다. 상호는 해련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켜 설미에게 다가갔다.
“설미 선생님?”
“으응…….”
“괜찮아요?”
설미는 부스스 일어나며 눈을 끔뻑였다. 흐리멍텅한 눈이 상호를 향했다.
곧 그녀의 볼이 복어마냥 볼록 부풀었다.
“웁……!”
“잠깐, 잠깐만 참아요.”
상호는 한 손으로 설미를 안고 황급히 밖을 향했다. 뒤에서 해련의 칭얼거림이 들려왔다.
“강 선생~, 나도 취했는데~.”
“자녀분 부르세요!”
그는 그렇게 대꾸하고 설미와 함께 고깃집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서자마자 품에 안긴 설미가 중얼거렸다.
“……려줘.”
“네?”
“내려줘.”
상호는 조심스럽게 설미를 일으켜 세웠다. 설미는 자꾸 비틀거렸지만, 상호가 손을 잡아 주자 금방 중심을 되찾았다.
“괜찮아요?”
“응, 바람 쐬니까 좀 낫네.”
설미가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상호 너는 안 취했어?”
“네. 좀 마시긴 했는데 취하진 않았어요.”
“그럼 2차 갈까?”
“……네?”
상호는 귀를 의심했다.
“또 마시게요?”
“내일 주말이잖아. 상호 넌 술도 별로 안 마시고……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둘이서 2차를 가 보겠어.”
“2차…….”
술을 마구 마셔대지 않는 상호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어디로 가게요?”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그런 곳이 있어요? 뭐 노래방이라도 가요?”
“아니.”
설미가 씩 웃었다.
“좋은 곳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