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렇게 상호의 반은 의외로 선전했지만, 예상대로 꼴등을 했다.
그 후 운동장을 정리하고, 씻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저녁을 먹으러 급식소로 모였다.
지윤이 상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아주 신이 난 목소리였다.
“이야, 쌤예. 오늘 메뉴가 예술인디예.”
그 말대로 식판 위 구성은 평소보다 꽤나 화려했지만, 상호에게는 최후의 만찬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도망치지……?’
뛰지도 못하는 이 다리로. 그는 한숨을 쉬며 김치를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그때 누군가의 젓가락이 그의 젓가락을 막아섰다.
“응?”
상호는 고개를 들어 그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태화였다.
태화가 눈을 찡긋하고는 입술을 쭉 내밀고 앙큼하게 쪽쪽 소리를 냈다.
“처음이 김치 맛이면 좀 그렇잖아요.”
“양치할 거야, 당연히…….”
“에이, 뻥치지 마요.”
태화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도망칠 생각 만땅이잖아요.”
상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태화의 목소리가 마치 뱀의 혀처럼 귀에 감겨들었다.
“죽어도 못 도망치니까, 곱게 포기해요.”
“시끄러, 너희 묶어놓고 가면 되지…….”
“그러면 선생님 사진 복도에 걸어버릴 거예요.”
너도 찍었냐. 상호는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태화를 향해 내공을 뻗었다. 핸드폰을 뺏으려고.
핸드폰은 치마 주머니에 있었다. 그가 허공섭물로 핸드폰을 빼내자마자 태화가 소리를 빽 질렀다.
“범죄 멈춰!”
‘아오…….’ 결국 상호는 내공을 거두고 식사를 계속했다. 김치를 집으니 태화가 또 한소리 했다.
“아이씨, 김치 먹지 말라니까요!”
“니가 그걸 안 하면 되잖아. 연극인데 뭘 하려는 거야…….”
“언제나 실전처럼!”
태화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 말이 이리도 만능일 줄이야. 상호는 한숨을 쉬며 숟가락을 들다가 세희가 김치를 내려놓는 것을 발견했다.
“……세희는 왜 김치 안 먹어?”
“그냥…….”
세희는 아예 젓가락까지 내려놓았다.
“배가 안 고파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뻔했다. 상호는 당황했지만 조곤조곤하게 타일렀다.
“퍼온 만큼은 먹어야지. 항상 잘 먹었잖아. 힘들게 뛰어다니기까지 했는데…….”
“죄송해요, 이제 못 먹겠어요.”
“그라믄 내 도.”
지윤이 세희의 식판을 뺏고 텅 빈 식판을 내밀었다. 그새 다 먹은 모양이었다.
옆에서 나빛이 상호를 보며 웃었다.
“선생님, 준비해야 하니까 식사하시고 바로 강당 방송실로 와주세요.”
“바로? 시간 좀 있잖아.”
“준비에 시간이 걸려서요. 특히 선생님…… 헤헤.”
얼마나 제대로 하려는 걸까. 상호는 네 명의 아이들을 차례대로 흘끗했다.
슬슬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금방 갈게.”
상호는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음식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쌤은 왜 남겨요? 항상 다 먹었으면서.”
“화장실 가려고.”
그의 대답에 세희와 태화가 시선을 마주쳤다.
둘은 그렇게 한참 눈싸움을 하다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세희가 조금 더 빨랐다.
“내가 갈게.”
“내가 갈 거야.”
“너 분장 오래 걸리잖아.”
“누더기 하나 뒤집어쓰는 게 분장이냐? 니가 훨씬 오래 걸리잖아!”
“나도 옷 입고 머리 틀면 끝이거든?!”
“또 싸운다, 또 싸워. 니는 알콩이고 니는 달콩이가.”
투닥거리는 둘을 보고 지윤이 한마디 했다.
평소 같았으면 상호도 둘을 말렸겠지만 오늘은 오히려 기회였다. 그는 둘이 싸우는 틈을 타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빌어먹을 다리 때문에 멀리 못 가서 들키고 말았다.
“쌤 튄다! 저거 잡아!”
“도와드릴게요, 선생님.”
상호는 죽을상을 지었다.
“내가 화장실 가는 데까지 니들 도움을 받아야겠니……?”
“아이, 빨리빨리 준비해야 하잖아요. 팔 내놔요.”
“제발…….”
그가 아무리 한탄해도 세희와 태화는 옆에 달라붙기만 할 뿐이었다.
* * *
“쌤~.”
화장실 밖에서부터 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치질 걸려요~.”
제발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 상호는 남자 화장실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고민했다.
창문 밖으로 도망치는 건 너무 뻔해서 금방 잡힐 테다. 차라리 민정이라도 불러서 공간이동을 할까. 하지만 부른다고 금방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애들을 쓰러트리고 도망칠 수도 없고. 또 그냥 도망쳐 버리자니 연극을 망칠 것이 걱정이었다.
손에서 염주가 하염없이 돌아갔다.
‘……그 방법밖에 없나.’
상호는 생각을 정리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앞에서 기다리던 태화가 낄낄 웃었다.
“변비 걸렸어요?”
상호는 그 말을 무시하고 태화 옆에 선 세희를 보았다.
“세희야, 잠깐만 핸드폰 좀 빌려줘. 배터리가 다 됐다.”
“아, 네.”
세희는 거리낌 없이 핸드폰을 내어주었다.
믿고 있는 것이리라. 핸드폰으로 애먼 짓을 하지 않으리란 믿음과 도망치지 않을 것이란 믿음.
상호는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그래도 제 위신이 최우선이었다.
“선생님 전화 한 통만 할게. 조금만 기다려.”
“네.”
그는 세희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 화장실로 돌아갔다.
* * *
볼일을 마친 상호는 세희와 태화의 손에 붙들려 체육관 2층까지 끌려갔다.
강당은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마이크와 스피커를 테스트하는 소리, 강당 구석에서 뭔가를 연습하는 학생들, 염력 마법으로 의자의 열을 맞추는 마법사 선생들.
그 한쪽에서 나빛과 지윤이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도망 안 치셨네예. 잘 생각하셨심더.”
지윤이 씩 웃었다.
상호는 강당 단상 옆 방송실을 흘겨보았다.
“……그래.”
계획대로 잘 되고 있을까. 그는 가슴을 졸이며 초조한 눈빛으로 방송실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그를 붙들고 방송실로 잡아끌었다.
“쌤, 빨리 준비하러 가요.”
“얌마. 지금은 다른 애들 있을 거 아냐.”
“뭐 어때요. 어차피 보게 되어 있는데.”
“안 돼, 안 돼. 이따가 갈아입을게. 분장도 금방이잖아.”
“그렇게 부끄러워요?”
“당연하지…….”
“뭐, 알아서 하세요. 도망만 치지 말고.”
태화가 어깨를 들썩였다.
이제 됐다. 상호는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했다. 약간 자포자기한 표정을 지어내며.
“에휴…….”
한숨까지 푹 내쉬어 주자 아이들은 한 점 의심 없는 얼굴로 키득거렸다. 그에게 어떤 계획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밖에서는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상호는 아이들과 함께 객석에 앉아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학생 둘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게 첫 번째 공연. 상호의 반은 세 번째 공연. 두 번째 공연 전에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이 아래로 내려오자 세희가 상호를 불렀다.
“선생님.”
“아, 어. 가자.”
그는 아이들과 함께 바삐 방송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무도 없었다. 상호의 시선이 쪽방을 향했다. 잡다한 방송 도구를 넣어두는 작은 창고였다.
“얘들아. 선생님 저기서 갈아입고 올게.”
“굳이요? 쌤 웃통만 벗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벗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럼 그렇게 해요.”
상호는 태화에게서 옷이 든 종이가방을 받아들었다.
별안간 태화가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얀 구슬이었다.
“이게 뭐야?”
“박하사탕.”
태화가 실쭉 웃으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됐어, 인마.”
상호는 혀를 차고 쪽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태화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옷을 입고 머리를 묶는 등 분장을 하고 있었다.
세희는 근위대의 것을 닮은 푸른 제복과 하얀 바지를 입고 머리를 틀었다. 나빛은 하얀 드레스를 교복 위에 입었고, 지윤은 변사라서 딱히 분장을 하지 않았다. 태화도 종이 가방에서 거적떼기를 꺼내 뒤집어썼다.
그녀들의 분장은 그게 끝이었다.
태화는 상호가 들어간 쪽방의 문을 두드렸다.
“쌤. 저희 끝났어요. 빨리 입고 나와요. 화장하게.”
어째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설마 싶어서 문고리를 거칠게 돌려댔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야이씨, 쌤! 문 안 열면 부술 거예요! 뻗대지 말고 나와요!”
태화의 주먹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다른 아이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옆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결국 태화는 손에 마나를 모았다.
“진짜 뿌숴요!”
그러자 문이 살며시 열렸다.
그 안을 본 지윤이 얼이 빠진 채로 중얼거렸다.
“……뭐여. 여장을 하랬더니 여자가 되어부렀네.”
키 큰 소녀가 드레스와 가발을 쓴 채로 뺨을 붉히고 있었다.
가는 허리와 쭉 뻗은 다리, 흰 피부가 옷차림과 잘 어울렸다. 세희는 소녀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은율이……? 네가 왜 여기……. 선생님은?”
태화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은율을 붙잡고 물었다.
“쌤, 쌤은? 쌤은 어디 가고 왜 네가…….”
은율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들의 시선을 피해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 * *
‘응~ 못해~.’
상호는 옷에 묻은 돌가루를 털었다.
장판을 들어내고 바닥을 잘린 원뿔 모양으로 도려내면 뚜껑처럼 열고 닫을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아래층으로 내려와 있었다.
공연 시작 직전이니, 찾으러 올 수도 없을 터였다.
‘어디 선생을 여장시키려고 하고 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제 애들 연극이나 구경하러 가야겠다. 상호는 한결 후련해진 걸음으로 위층을 향했다.
102. 잘못했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돌아가니 방금 막 연극이 시작된 참이었다. 상호는 아이들에게 금방 들키지 않도록 맨 뒤쪽 객석에 앉아서 안대를 벗었다.
단상에는 변사인 지윤이 잠시 의사 역을 맡고 있었다. 동그란 거울이 달린 머리띠를 쓰고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지윤은 왕비 역할을 맡은 나빛에게 다가갔다.
“왕비님, 입 벌려 보세요.”
“아~.”
나빛이 입을 벌리자 지윤이 그 안을 들여다보다가 한마디 했다.
“임신입니다.”
“네?”
객석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후 은율이 올라와 나빛의 뒤에 쪼그려 앉았다. 지윤이 가운과 머리띠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그렇게 왕비는 어렵사리 아이를 갖게 되고~, 아들을 원한 왕과는 달리 왕비는 예쁜 딸을 바라게 되는데, 그 기도를 하늘이 들었을까~.”
나빛의 널찍한 치마 아래에서 은율이 튀어나왔다. 예상치 못한 은율의 등장에 객석이 술렁였다.
“어, 은율이다.”
“저 애도 강쌤 반이야?”
“아니, 아닐 텐데. 뭐 친해서 데려왔나 보지.”
뻘쭘하게 서 있던 은율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뺨을 붉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기어드는 목소리를 내었다.
“……응애.”
“꺄하하하!”
몇몇 학생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아마 은율의 친구들인 듯했다.
지윤이 말을 이었다.
“근육이 탄탄한…… 아, 이게 아닌디. 어쨌든 어여쁜 공주를 낳게 되고~. 공주는 자라날수록 튼튼…… 아이고, 예뻐져서 이웃 나라까지 소문이 퍼지게 되는데~. 어느 날 궁에서 연회가 열리고!”
그러자 세희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굵게 땋은 머리를 동그랗게 묶었고, 푸른 제복에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세희는 손에 든 장난감 검을 치켜들며 포즈를 잡다가, 다시 내리고 떠듬떠듬 대사를 읊었다.
“아아, 저 탄탄한 어깨…… 아니, 어……, 늘씬한 다리를…… 보라! 마치…… 하아, 잘 모르겠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공주.”
예정에 없던 배우의 교체 때문에 차질이 생긴 모양이었다. 상호는 쓰게 웃었다.
별안간 누군가가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재밌네.”
상호는 움찔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태화가 순간이동으로 찾아온 줄 알고. 하지만 다행히도 아니었다.
설미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 설미 선생님.”
“애들이 준비 많이 했나 봐? 근데 상호 씨는 왜 안 했어? 왕으로라도 같이 나가 주지.”
“그게…… 다 사정이 있어요.”
상호는 머쓱해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설미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런데 상호 씨.”
“네.”
“오늘 회식 있는 거 알지?”
회식까지 있나. 상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색한 자리엔 가기 싫은데.
“그래요? 몰랐는데…….”
“내일 주말이잖아. 그래서 술 좀 마시게 될 것 같아. 상호 씨가 내 흑기사 해.”
“네?”
“아니면 반대로 할까? 내가 마시고 상호 씨가 운전할래?”
상호는 그제서야 말을 알아들었다. 한 명은 음주. 한 명은 운전.
“저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데…… 그래도 제가 마시는 게 낫죠? 설미 선생님 취하면 곤란하잖아요.”
“아니, 난 취해도 상관없어. 좀 마시고 싶기도 한데. 그냥 내가 마실게. 상호 씨가 운전해.”
“괜찮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괜찮아.”
설미는 빙긋 웃었다.
“상호 씨 믿으니까.”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취해도 내공으로 풀면 되고, 애초에 안 마시면 취할 일도 없고, 설미를 건드릴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럼 설미 선생님이 마셔요. 내가 운전할게요.”
“그러자. 저번엔 상호 씨가 먹었으니까. 그치?”
설미가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이제 공연 보자.”
단상에서는 왕자와 공주의 로맨스가 끝났고, 이제 태화가 등장할 차례였다.
단상 위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폭죽처럼 펑 하고 터졌다. 연기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허헝헝…….”
‘?’ 대본에는 분명 날카로운 웃음소리라고 적혀 있었는데. 상호는 황망한 표정으로 검은 연기를 쳐다보았다.
곧 태화가 양팔을 펼쳐 연기를 헤치며 나타나더니, 코를 훌쩍이며 대사를 읊었다.
“아, 나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킁, 내 비록 공주를 죽이러 왔지만…… 쿨쩍! 저 아름다운 모습에 나마저 빠져 버릴 것 같구나…… 크응!”
그 모습을 보고 설미가 눈을 끔뻑였다.
“저 애는 왜 울어?”
“다 사정이 있어요.”
“참 비밀이 많다니까, 상호 씨는……. 애들도 그렇고.”
무대에서는 이제 은율이 독을 마시고 쓰러지고 있었다. 은율이 바닥에 눕자 나빛이 달려와서 끌어안았다.
“흐어허엉…… 내 딸! 아이고, 내 딸…….”
태화가 옆에 다가와 속삭였다.
“제가 공주님을 깨울 방법을 압니다.”
“뭬라! 그게 무엇이냐!”
“진실된 사랑의 입맞춤만이…… 에휴, 공주를 깨울 수 있습니다.”
태화는 말하다가 갑자기 공허한 한숨을 쉬었다. 맘에 안 드는 거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상호도 태화가 왜 저러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저기 은율이 누운 자리에 자신이 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실실 웃고만 있었다. 태화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선생이랑 학생이 입을 왜 맞추냐. 당연히 안 되지. 연극이고 나발이고 말이야, 암.’
세희가 나빛의 옆으로 다가섰다.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왕비님.”
“자네가? 안 돼! 뭘 믿고 우리 딸 입술을 맡기나!”
“진실한 사랑이라면 안 될 게 무어 있겠습니까?”
세희는 그렇게 말하고 은율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기 시작했다.
둘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아이들이 꺅꺅 소리 질렀다.
“야, 진짜 하냐? 진짜 하냐?”
“으엑! 꺅! 진짜 하나봐!”
상호는 머리카락 사이로 솟은 귀들이 새빨갛게 익은 것을 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세희는 결국 살짝 비켜서 은율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쪽 하고 짧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은율의 손이 움찔했고,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자지러졌다.
“꺄아악! 했다 했어!”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세희는 몸을 일으키고 헛기침을 한 후 대사를 읊었다.
“아, 왜 안 되지? 마음이 부족한 것인가? 내 마음엔 이미 그녀밖에 없는데…….”
“저리 비켜라, 이 거짓된 놈아!”
태화가 세희를 밀치며 은율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은율의 얼굴을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태화의 작은 중얼거림이 상호의 귀에 들려왔다.
“시바, 너라도 먹어야겠다.”
태화는 그렇게 말하고 은율의 입에 정통으로 입술을 박았다. 은율이 당황하며 팔다리를 버르적거렸다.
“웁, 우웁! 우웅!”
“쮸와아압…….”
질척한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강당에 울려 퍼졌다. 관객들이 전부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세희가 태화의 등짝을 후려쳤다.
“야, 미쳤어? 적당히 해!”
“몰라 시바. 그냥 쌤이라고 생각할래.”
태화는 그렇게 대꾸하고 진한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어찌나 격렬한지 세희가 마이크를 뺏었는데도 강당에 소리가 가득 찼다.
상호의 옆에서 설미가 당황했다.
“대본에도 저렇게 나와 있어?”
“…….”
상호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