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손님~ 커피 남기지 않습니다~.”
“빨리빨리 먹고 일어납니다.”
태화와 세희가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둘 다 갈색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수첩과 볼펜을 든 채였다.
설미의 반이 차린 카페. 문가에는 다른 반 학생도, 교직원들도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파는 건 차와 커피, 떡과 빵.
꽤나 잘 꾸며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났고, 설미의 학생들도 진짜 점원처럼 친절했지만, 두 명의 군필여고생이 교실 한가운데에 쏘다니며 주변을 완전히 휘어잡는증이었다.
구석에 처박혀서 커피를 마시던 상호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수그렸다.
‘제발 등짝에 내 이름 달고 그런 짓 하지 마라…….’
옆 책상에 앉은 다른 반 아이들이 수군거 렸다.
“쟤들강쌤 반이지?”
“설쌤 반 망치러 들어온 스파이래.”
“강쌤 반은 사람이 적어서 못 했대. 그래서 앙심을 품어가지고 저런다는데…….”
“다른 둘도 다 부숴 버 리려고 돌아다니고 있다더라.”
“개쩌네, 상호부대…….”
이게 뭔 괴소문일까. 그 말을 들은 상호의 몸이 더욱 쪼그라들었다. 아이들이 너무 부끄러워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으니, 문 앞에 북적이는 손님들 사이로 나빛과 지윤이 들어왔다.
“쌤예. 지들왔심더.”
“선생님, 이거 드세요.”
상호는 나빛이 내민 솜사탕을 먹으며 말했다.
“잘 놀다 왔어?”
“예.”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지윤의 표정은 심통이 나 있었다.
“쌤은 와 같이 안 놀아 주십니꺼. 이리 앉아만 있을 기면.”
“너희끼리 놀아야지, 쌤은 눈치 보여서 못 놀아.”
그는 손사래를 치고는 교실 증앙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희야, 태화야. 교대해.”
“아, 네.”
둘은 나빛과 지윤을 보고는 후다닥 달려왔다.
순식간에 앞치마를 넘 겨준 둘은 상호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상호는 당황해서 책상을 잡고 버텼다.
“얌마, 이거 안 놔!”
“아~ 가자가자가자~! 와이프잖아~!”
“너 말조심하랬지! 아오…… 너 이리 와봐.”
그는 태화를 끌고 문으로 향했다. 태화가 교실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꺄하~ 데이튼가봐~. 나빛아, 지윤아, 조뺑이쳐~.”
그들의 뒤를 세희가 졸졸 따랐다.
복도 끝으로 간 상호는 태화의 얼굴 앞에 검지를 들어 올리려다가, 세희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침음했다.
“세희야, 저기 가 있어.”
상호의 손가락이 복도 먼 곳을 향했다.
하지만 세희는 묵묵부답이었다. 오히 려 그의 재킷 옷자락을 붙잡을 뿐.
혼내지 말라는 무언의 부탁 같았다.
‘그래도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남들 앞에서 반말을 하질 않나, 와이프라고 하질 않나. 2학년 3학년 올라가면 점점 더 심해질 텐데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크게 한 번 혼내야 했다.
상호는 세희를 내버려 두고 태화와 눈을 마주쳤다.
“이태화.”
그 딱딱한 부름에 방글방글 웃던 태화의 웃음이 흐려졌다.
그 웃음이 사라지는 모습이 또 두려웠다. 기껏 엄하게 다잡은 마음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까불거리면서도 마음은 여린 아이. 곁에서 봐왔기에 더욱 애가 탔다. 쉽게 상처받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저 눈이 특히 그랬다.
“……태화야.”
그는 결국 다시 이름을 부르며 태화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이 항상 말하지. 다리 떨지 말고, 버릇없이 굴지 말고, 철 좀 들라고.”
몇 번째 말하는 것인지 몰랐다.
“선생님 이 자꾸 듣기 싫은 말만 하지?”
태화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상호는 쓰게 웃었다.
“쓴소리를 달게 들어야 사람들한테 쉽게 사랑받는 거야. 듣기 좋은 말만 듣는 인간을 봐봐. 얼마나 재수가 없냐.”
“듣기 싫은 게 아니라요.”
태화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그냥 내가 이런 사람인데. 쌤이 싫어하는 거잖아요.”
“내가 널 왜 싫어해? 너 뭔 소리야? 너 내가 널 싫어한다고 생각해?”
상호는 그렇게 따지며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태화를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싫어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하는지 보여줘?”
“네.”
“안 보여줘. 너안싫어하니까.”
태화가 반항해도 그는 흘려 넘기고 한 발짝 다가섰다. 붉은 눈동자가 코앞에서 넘실거 리고 있었다.
“근데 네가 자꾸 그러면 내가 잘해줄 수가 없어. 아직도 모르겠어? 왜 내가 자꾸 너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지?”
“몰라요. 말로 해요. 나 그런 거 잘 모르니까.”
“너 계속 보려고 그러는 거야.”
그 말에 태화. 그리고 세희가 살짝 움찔했다. 상호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니 1년 3년 볼 거면 이러지도 않았어. 그냥 냅두고 내 할 일 하지. 니가 치마를 줄이건 꾀병을 부리건 상관 안 한다니까? 근데 내가 왜 이러겠어? 응?”
“진짜로…….”
태화는 눈길을 살짝 돌려 세희를 쳐다보더 니, 다시 상호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우리 데리고 살려고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상호는 고개를 저 었다.
“내가 너희 인생을 책임져 주진 못해. 너희 졸업해도 선생 일은 계속할 거니까. 그래도 필요할 때 도와주는 정도는 할 의향은 있어. 물론 그것도 너희가 허락한다면 말이지만.”
맘 같아서는 더 해주고 싶지만, 버릇 나빠지니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세희와 태화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화내기 전에 말 좀 들으…….”
둘이 상호의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
상호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러 올라가는 손을 멈칫하며 생각했다. 어리광부리라고 한 말이 아닌데. 철들라고 한 말인데.
‘내가잘못말했나?’
둘은 한참을 그렇게 그에게 붙어있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상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상호는 당황하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왜. 왜.”
“같이 놀아요.”
“안 돼, 나빛이랑 지윤이한텐 같이 못 논다고 말했는데…….”
태화의 말을 거절하니 이번엔 세희가 물었다.
“선생님 이 학생이랑 놀면 안 된다는 법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런 선생이 어딨어.”
“우리 같은 학생도 없고, 선생님 같은 선생님도 없잖아요. 그냥 신경 쓰지 말아요.”
세희가씩웃었다.
상호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알았다, 알았어 ……. 조금만 노는 거 야.”
“아싸! 빨랑 가요! 귀신의집 줄 섰대요!”
“당기 지 마…….”
둘은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 * *
“어서 오세요~ 꺅! 강쌤!”
“안녕…….”
상호는 검은색의 작고 네모난 천막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원인들은 지금 그의 옆에 꼭 붙어서 생글뱅글 웃고 있었다. 이곳저곳 신나게 쏘다녔는데도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기는 의자가 있구나. 그는 그렇게 푸념하며 털썩 앉았다.
태화와 세희도 옆에 앉았다.
“궁합 보러 왔어용~.”
“점 좀 쳐 주세요.”
“넹~.”
두건을 뒤집어쓴 여학생이 책상에 카드를 마구 섞었다. 여학생은 상호를 본 순간부터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푸르스름하고 동그란 싸구려 램프가 안을 은은하게 밝혔다.
“타로 점 보신 적 있으세요?”
여학생의 물음에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타로 점은 미래를 예언하는 점이 아니에요. 인생의 요소, 주의해야 할 점들을 상기시켜줄 뿐이죠. 간단한 걸로 시작해서 설명해볼게요. 선생님부터 시작할까요?”
“……뭔진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보자.”
“세 장을 뽑아서 앞에 놔 주세요.”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카드 세 장.
“각각이 선생님의 과거, 현재, 미래예요. 자, 과거부터.”
여학생이 그의 기준으로 왼쪽에 놓인 것을 뒤집었다.
카드에 그려진 것은 연인.
세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연인이네요. 선생님 기준으론 거꾸로 놓였구요. 연인의 역위치는 헤어짐과 선택의 갈림길을 뜻해요.”
그다음, 가운데 카드.
수레바퀴였다.
“이건 운명이에요. 정해진 운명. 이게 현재에 나온다는 거는 다음에 나올 미래의 카드에 좀 더 힘이 실린다는 거죠. 자, 그럼 미래는…….”
마지막카드는 탑.
여학생의 표정이 흐려졌다.
“탑은극적인 변화를 나타내요. 좋지 않은 쪽으로요. 주변에 뭔가큰 변화가 있거나, 신념이 무너지거나, 이별을 하게 될 수도 있어요. 아, 물론꼭 그런 건 아니구요. 타로는 그걸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거니까.”
상호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연인에서 살짝 놀라긴 했지만,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온 것도 아니고 스스로도 미래를 예언하는 게 아니라는데,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세희는 마음이 동한 모양이 었다.
“저도요.”
그 말에 학생이 다시 카드를 섞고 세 장을 뽑았다.
첫장은달.
“달은 광기와 감성, 비 밀을 뜻해요. 여자를 뜻하는 카드기도 하고요. 과거에 사연이 많다는 뜻일 수 있어요.”
둘째는 사자.
“이거는 힘. 힘은 도전과 노력. 용기를 뜻해요.”
셋째는 전차.
“역방향이네요. 역방향의 전차는…… 좌절과 역경을 뜻해요. 노력한 게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거예요.”
설명을 들은 세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던 태화가 핀잔을 날렸다.
“뭘 그리 진지하게 고민해. 누구나 사연 있고 노력하고 실패하는 거지. 당연한 걸 가지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태화 역시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아이, 궁합 보러 와서는 팔자 보고 앉았네. 나도 한번 해 줘요.”
카드가 다시 섞이고, 세 장이 뽑혔다.
첫 장은 악마. 그 카드를 보자마자 태화가 움찔했다.
“와, 씨, 뭐야. 신통방통하네.”
여학생도 태화의 뿔을 곁눈질하고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지 었다.
“악마는불행을뜻해요. 실패, 학대. 몰락 같은…… 하지만과거에 나온 거니까,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둘째는 매달린 남자의 그림.
“매달린 자는 희생을 뜻해요. 숭고한 자기희생의 뜻도 있지만…… 항거할 수 없는 권력에 의한 처형을 뜻하기도 해요.”
셋째는 해골.
“죽음은…… 뭐 당연한 말이겠지만 진짜죽음은 아니고, 끝을뜻해요. 주로 이별이죠. 영원한 이별.”
어째 세 명 다 내용이 좋지 않았다. 상호와 세희와 태화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자 여학생이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꼭 이대로 된다는 게 아니에요! 조심하라는 거죠.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운명. 그 단어를 들은 상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삶에는 방향이 있다.’
그 인간이 했던 말.
‘소위 운명이라고 부르지. 사람의 운명은 제각기 방향이 달라서, 누구는 오른쪽으로 가고 누구는 왼쪽으로 가기도 한다.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당시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나름대로 귀 기울여 들었었다.
‘이 운명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
‘그럼 이 망할놈의 세상은 왜 구해? 내 좆대로 살고 말지. 다 정해져 있으면.’
‘그러면 그 또한 운명이지. 네가 무엇을 하든 다 정해져 있어.’
‘귀신 씨부랄 까먹는 소리하지 말고 전쟁 끝내는 주술이나 펼쳐 봐, 형.’
‘운명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니까.’
‘옘병…….’
그런 대화를 했었다.
옛 회상에 잠겨 있는데 태화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상호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가요, 쌤.”
“아, 응. 그래.”
상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학생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안녕히 가세요, 강쌤~.”
“아, 맞다.”
상호는 천막을 나서 려다가 여학생을 돌아보았다.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너 주술사전형이니?”
“아뇨, 저희 반은 무예가요.”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그런데 어쩜 그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는지.
상호는 아이들에게 나온 미래를 떠올렸다. 세희는 좌절과 역경. 태화는 영원한 이별.
‘그냥 우연이겠지.’
그는 생각을 정 리하고 아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세희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태화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 궁합이나볼걸, 기분만 꿀꿀해졌어. 쌤. 뭐 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럴까? 세희야.”
상호는 세희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세희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웃었다.
“네.”
“우씨, 내가 말했는데 왜 세희한테 물어요?!”
“가자, 태화야.”
“치…….”
태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상호가 둘을 데리고 교실을 나서려는데, 천막 속에서 여학생이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하아, 하필 강쌤인데 안 좋은 것만 뽑히냐……. 아, 뭐지 대체? 좋은 것만 넣었었는데. 언제 섞인 거야.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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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못해
오후는 운동회.
그림으로 그린 듯 푸른 하늘 아래, 운동장의 가장자리에 천막이 여럿 있고 그 아래 아이들이 반마다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달려, 달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했잖아, 이년아!”
“에이, 왤케 느려! 좀 똑바로 뛰어 봐!”
다른 반에서 닦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동장에서는 2인3각과 피구가 진행 중이었다.
반마다 학생 수도, 학년별 학생의 수도 제각기 달랐기에 줄다리기처럼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종목이라도 최대 10명을 넘지 않았다. 사람이 적은 반이라도 공평하게 경기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나름대로 조정이 되었지만, 고작 네 명밖에 안 되는 상호의 반에게는 모든 종목을 다 뛰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고, 뒤지겄네…….”
지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한숨을 쉬었다. 방금 막 세희와 2인3각을 끝내고 천막 아래로 돌아온 참이었다.
앉아 있던 상호는 물수건으로 지윤의 얼굴을 닦았다.
“수고했어.”
“이거 하는 의미 있습니꺼?”
심통이 잔뜩 난 표정이었다.
“승산이 없잖아예. 네 명이서 뺑뺑이 돌면…… 그것도 둘은 저 모양 저 꼴이고.”
상호는 지윤이 가리킨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나빛과 태화가 탁자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우에엑…… 힘들어…….”
“쌤, 때려쳐요 그냥…….”
그 옆에 앉은 세희도 반쯤 맛이 간 모습이었다.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것이.
피구, 2인3각, 줄다리기, 공굴리기, 놋다리밟기 등등. 온갖 경기를 네 명이서만 뛰었으니 죽어날 만도 했다. 그래도 필요 인원이 4명 이하인 경기들은 그럭저럭 성적이 괜찮았고, 줄다리기는 당연히 졌지만 놋다리밟기는 1등을 했다. 딱 두 걸음만으로.
그래서 점수는 의외로 중위권이었다.
“계주 점수 높잖아. 이번에 잘하면 전체 3등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전 뛸 수는 있는디…… 쟤들이 못할 것 같은디예.”
“천천히 뛰어도 되니까 한번 해 봐.”
스탠드 가운데에서 메가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 잠시 후 반 대항 이어달리기 경기가 있겠습니다. 차출된 선수들은 경기 준비해서 여기 앞으로…….]
상호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빨리 안 뛰어도 되니까 열심히만……, 세희야?”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난 세희가 좀비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세희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스탠드를 향하며 중얼거렸다. 눈의 초점이 풀려 있었다.
“할 수 있어…… 뛸 수 있어…….”
“세희야?”
“멀쩡하다…… 멀쩡하다……. 나는, 나는…….”
하나도 안 멀쩡해 보였다. 상호는 황급히 세희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야, 됐어, 세희야. 쉬어. 괜히 또 쓰러져서 연극 못 하면 안 되니까…….”
“항상…… 최선…… 선생님이 그렇게…….”
“많이 노력했다니까. 이제 쉬어도 돼…….”
그제서야 세희는 그의 팔에 기대어 축 늘어졌다.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내년에 제대로 하자, 내년에. 올해는 전초전. 알겠지?”
“네에…….”
다른 반에서는 응원 소리가 하늘을 찔렀지만, 상호의 반에서는 앓는 소리가 바닥을 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