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501)

* *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공연은 연극을 하겠다고 보고해 놨고, 순서는 적당히 앞쪽을 배정받았다. 이제 남은 기간은 나흘. 제대로 준비는 되어가고 있을까.

그가 아침에 교실에 들어서는데 지윤 혼자 앉아 있었다.

“뭐야, 지윤이만 일찍 왔네.”

“아, 쌤예.”

지윤이 다가와서 종이 뭉치를 건넸다. 상호는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뭐야……. 아, 대본이야?”

“예.”

한번 읽어 볼까. 첫 장을 넘겨보니 등장인물이 다섯 명이었다.

‘결국날넣었구만.’

상호는 초조해하며 내용을 쭉 읽어 내 려갔다.

배역은왕비, 공주, 마녀, 왕자, 변사.

‘내가 왕자역할……이겠지?’

역시나 왕자와 공주의 입맞춤이 나왔다. 그는 종이를 휙휙 넘기며 끝까지 쭉 읽었다.

어째 왕자의 대사가 많았다.

“대사가 너무 많은데…… 쌤 이런 거 안 해 봐서 잘 못해.”

“쌤은대사없는디예.”

“응?”

“쌤은 공주역할입니더.”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 인가. 상호는 내공 때문에 살짝 그슬린 대본을 다시금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확실히 공주는 대사가 없었다. 행동만 있을 뿐.

“독 묵고 벙어리 된 설정이라서예. 쌤은 대부분 누워 있을 겁니더.”

지윤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디 공주가 왕자랑 마녀랑 키스를 하거든예.”

“……누군데.”

“왕자가 세희고 마녀가 태화입니더.”

그 둘인가.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그래서?”

“그 가스나들은 진짜로 할라 칼 테니까예. 알아서 막으이소.”

지윤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 말이 맞았다. 둘 다 그가 가만히 누워있으면 멱살 잡고 입술을 박아 버릴 아이들이 었다.

“너랑나빛이는?”

“나빛이가 왕비고 지가 변사예.”

“어떻게 정했는데?”

“제비뽑기로예. 아오, 내가 왕자였으면 입술 찐하게 박았을 턴디…….”

지윤이 분통이 터진다는 듯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상호는 가슴을 졸이며 대본을 내 려다보았다. 불안한 점이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분장도 해야 돼?”

“당연하지예.”

지윤의 말이 그의 가슴팍에 비수처럼 꽂혔다.

“쌤이 그렇게 입고 있으면 누가 공주로 보겠심니꺼. 당연히 여장을 해야지예.”

“그냥 옷만 입는 것도 아니고…… 여장이야?”

“그기 포인틉니 더. 말 한 마디 안 하는 대신 여장으로 조지는 거지예.”

지윤이 낄낄 웃었다.

상호는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사회적으로 살해당할 거라고.

‘……도망쳐야겠다. 무조건.’

그때 문이 드르륵 열리고 아이들이 들어왔다. 세희, 태화, 나빛 세 명이.

다들 종이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아, 쌤와있네. 쌤!”

태화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상호는 태화의 종이 가방에서 옷자락 같은 것이 삐죽 튀어나온 것을 발견했다. 얇고 반투명한 분홍빛의 천.

‘태워 버릴까?’

진지한 고민이 었다.

“선생님, 반티 만들어 왔어요.”

나빛이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티셔츠를 본 상호의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군대에서 입었었던 디지털 위장무늬라서.

그는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뭐야, 그거?”

그게 끝이 아니었는지, 나빛이 티셔츠를 돌려 뒤를 보여주었다. 등짝 부분에 하얀색으로 박힌 글자가눈에 띄었다.

상호부대.

상호는 할 말을 잃었다.

“어…….”

“모자도 있어요!”

빨간 야구모자 앞쪽에도 노란색으로 글자가 박혀 있었다. 상, 그리고 호.

하필이면 눈에 미치도록 띄는 색배치였다.

‘염병…….’

어지간하면 예쁘다 잘 만들었다 칭찬을 해줄 텐데. 도저히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빛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셔츠를 내밀었다.

“선생님도 하나 가지세요.”

“어…… 응…… 그래. 누가 날 헷갈릴 일은 없겠구나.”

물론 지금도 아주 눈에 띄는 외눈 절름발이 검사지만. 상호는 간신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 태화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쌤. 이거 한번 입어 봐요.”

분홍 드레스와 가발이 었다. 싼티 나는 금색 가발.

상호는 검을 꽉 부여잡으며 뒷걸음질쳤다.

“……안 돼.”

“아왜요~. 쌤설명안들었어요?”

태화가 지윤을 돌아보며 눈빛을 보내자 지윤이 고개를 저었다.

“다 설명 드맀다.”

“쌤 대사 안 드렸잖아요. 이 정도는 해 주셔야죠.”

상호는 가까이 다가오는 태화를 내공으로 붙들었다. 당황과 황당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여장은 때려죽여도 안 된다. 손바닥에 땀이 흠뻑 배어났다.

“얌마. 어른이 체면이 있지 애들끼리 놀자는 것도 아니고……. 안 돼. 이거 안 돼. 너희 고집부리면 선생님 화낸다.”

“소원권.”

넷이서 한목소리로 한 단어를 말했다.

그 단어를 2학기 들어와서는 깜빡 잊고 있었다. 상호의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너희 소원은 겨우 그 정도야? 뭔가…… 뭔가 더 좋은 거 있을 거 아냐. 선생님이 축제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 응?”

“에이, 그건 조르면 사줄 거잖아요.”

태화가 실쭉 웃었다.

상호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푸념했다.

‘얘들이 선생을 봉으로 보는구나…….’

“얘들아, 어른은 있잖아. 무게라는 게 있어야 사회생활이 되고…….”

“아, 몰라몰라몰라! 또 약속 안 지키게?!”

“얌마, 이젠 학교에서까지 반말…….”

“소원권인데 자꾸 핑계 대기야?!”

“내 소원이다, 내 소원. 제발 선생님 말 좀 들어라…….”

누군가 그의 팔꿈치를 톡톡 두드렸다. 상호는 옆을 돌아보았다.

세희가 화장품을 들고 서 있었다.

“한번 해 봐요, 선생님.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잖아요.”

괜찮아도 문제고 안 괜찮아도 문제다. 상호는 고개를 푹 떨구며 손을 허공에 하염없이 내저었다.

“세희야, 선생님 이런 거못해…….”

“선생님.”

“세희야, 제발태화좀설득…….”

“선생님.”

세희가 그의 양복 재킷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

“벗으세요.”

* * *

“씨부럴…….”

세상이 싫다.

상호는 침대에 널브러지며 한탄하고는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키읔이 핸드폰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

남 비웃는 걸 참 좋아하는 여자다. 그는 이를 갈았다.

-웃기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방금보다도 키읔의 수가 많았다.

그 키읔들 위에는 여장을 한 상호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진이 전송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가 찍어서 보낸 게 아니라, 나빛이 끽어서 효은에게 보낸 걸 효은이 다시 그에게 보낸 것이 었다.

효은의 문자가 또 도착했다.

-너 요즘 이 러고 사냐? 재밌게 노네 크 크 살판났네 크상호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꺼져

-ㅋㅋ이거 언니한테보낼까?ㅋ

그 말에 상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꼬라지를 민정이나 도현이 본다면.

그는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ㅋ처신잘해ㅋ

앞에도 붙고 뒤에도 뭍는 키읔이 미치도록 신경을 박박 긁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상호는 핸드폰을 끄고 대충 던져놓았다.

‘시발, 나중에 폰 훔쳐서 지워 버려야지…….’

약점 잡혀 사는 건 딱 질색이다. 미안한 일로 약점이 잡히면 그나마 받아들이고 살겠는데, 이런 웃기는 일로 약점이 잡히기는 죽어도 싫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저 정신 나간 꼴로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니.

‘얘들아. 미안하다.’

죽어도못하겠다.

그는 결심을 굳히며 눈을 감았다.

< 예현제>

축제날이 밝았다.

다른 반들은 전날부터 열심히 교실을 꾸미고 지금까지도 준비를 했지만, 상호의 반은 설미의 반과 합치느라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꼽사리를 끼는 이상 가서 도와줘야 할 터. 상호는 위장무늬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을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그 꼴로 괜찮겠어? 다른 반 애들은 예쁘게 입었던데…….”

그 말에 태화가 콧방귀를 뀌었다.

“구라치지 마요. 여곤데 예쁘게 입는 인간이 어딨어요. 공학도 아니고.”

“진짜야, 임마. 설미 선생님 반 가봐. 카페 유니폼 이쁘게 차려입고 있다니까.”

“그거 다 겉만 그런 거라니까요. 운동회 때 봐요. 누구 말이 맞는지.”

“하아…….”

그는 한숨을 쉬 었다.

사실 카페 유니폼이라고 해 봤자 교복에 갈색 앞치마였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일부러 과장해 말한 것이었다.

“아직 안 늦었다, 얘들아. 지금이라도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상호부대가 뭐 어때서 그러십니꺼.”

지윤이 모자를 눌러쓰며 말했다. 빨간 바탕에 노란 글자로 ‘상호’라고 적힌 모자였다.

“지들이 좋으면 됐지예. 와 쌤이 뭐라 그러십니꺼.”

“내 이름이잖아…….”

“그럼 이건 어때요?”

별안간 태화가 뒤로 빙글 돌았다.

셔츠에 새겨진 ‘상호부대’의 ‘부대’부분에 하얀색으로 줄이 쳐져 있고, 그 위에 글자 세 개가 적혀 있었다.

와이프.

“상호와이프!”

태화가 외치자 상호의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남의 이름 함부로 다루지 마라. 맘 같아서는 그렇게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축제랍시고 한껏 들뜬 아이들을 보니 화를 내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교실 문을 향했다.

“됐다. 가자, 얘들아. 설미 선생님 반으로…….”

“네! 충성!”

“앞으로~ 갓! 멋있는~ 강상호~ 많고 많지만~.”

하지 마!

소리를 안 지를래야 안 지를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