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501)

* * *

“후우…….”

태화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고운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세희도 땋은 머리를 풀고 흙먼지를 털었다.

상호는 수돗가에서 적셔온 손수건을 들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수고했다. 밥 먹고 가서 쉬자.”

“쌤, 쌤. 나 먼저.”

태화가 먼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자 태화가 세희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헹.”

그러자 세희는 말없이 태화의 꼬리를 잡았다.

“으긱! 아이씨, 왜 그래, 미안해…….”

태화는 감전이라도 당한 듯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이어서 세희가 상호의 앞에 섰다.

상호는 세희의 얼굴도 닦아 주었다.

“세희야.”

“네.”

“우리 약속했지?”

세희가 물끄러미 눈을 마주쳐 왔다.

“네.”

천색창염을 가르쳐 주는 대신 꼭 1등 하기로.

둘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땀을 닦아주던 손이 옆으로 내려와 세희의 얼굴을 잡았다.

“믿을게.”

“믿으세요.”

단호한 선언에 단호한 대답이 따랐다.

상호는 세희의 이마를 엄지로 살짝 눌렀다. 일전에 입을 맞줬던 자리였다. 그렇게 서로의 결심을 확인하던 차에 태화가 사이로 끼어들었다.

“우씨, 편애 멈춰!”

“뭐, 뭐가 편애야, 인마.”

상호는 당황해서 세희를 놓고 떨어졌다.

“밥이나먹자. 밥이나…….”

그가 걸음을 떼자 세희와 태화가 양옆에 붙어 걸었다.

지윤을 불러서 외식을 할까 고민하는데, 태화가 그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올려다보았다.

“쌤. 근데 있잖아요.”

“응.”

“우리끼리 16강 전에 붙으면 어떻게 해요?”

상호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바뀔 거 없어. 그냥 최선을 다해.”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후회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항상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태화는 상호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죠, 뭐.”

납득했다는 표정이었다. 세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미래를 상상해 버린 상호는, 쌀쌀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멀리 떨어져 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학비 지원도 못 받고.

이사장과의 내기에서도 져 버린다면.

‘……그럼 내 방식을 증명 못 한 거니까. 애들 데리고 살지 뭐.’

그런 삶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선생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곁에 생긴 인연들을 지켜나가는 정도라면.

하지만 그럼 에도. 전쟁으로 삭아버린 가슴속에 남은 한 톨 오기가 불씨를 품은 듯 이글거 리며 싹을 틔우고 있었다.

상호는 두 아이의 손을 잡았다.

“세희야. 태화야.”

“네.”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꼭 1등 해.”

“1등은한명인데요.”

태화가 말꼬리를 잡았지만, 상호는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도 둘 다 1등 해.”

“……네.”

태화도, 세희도. 결연하다기보다는 쓸쓸한 목소리였다.

각자가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지는 서로 알지 못했다. 그래도 마음은 하나로 같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셋이 나란히 손을 잡은 이 걸음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그 하나의 생각을 세 가슴에 품으며.

셋은 걷고 또 걸었다.

< 축제 준비>

“상호 씨~.”

설미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한창 키보드를 두드리던 상호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를 흘끗하고는 다시금 모니터에 집중했다.

“네, 설미 선생님.”

“예현제 때 뭐 할지 생각해 놨어?”

설미의 물음에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예현제요?”

“뭐야, 몰라?”

“아니, 알긴 아는데.”

10월 중순에 있는 체육대회 겸 축제. 대충 일주일 남았다.

상호가 당황하자 설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 생각 안 했어?”

“아니, 뭐…… 슬슬 생각하면 되죠.”

“오늘 마감일인데?”

“네? 그냥 보고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그건 교실에서 하는 거 말하는 거고.”

설미가 손을 뻗어 상호의 볼을 잡아당겼다. 손이 작아서는 꼭 족집게로 꼬집는 듯했다.

“반마다 축제 공연 하나씩 해야 한다고 했잖아. 내 말 안 들었구나?”

“그랬어요?”

“응. 공연 순서 정해야 하니까 미리 말해야 된다고도 말했는데.”

“아…….”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축제는 당일치기. 오전에 교실마다 가게 비슷한 것을 열고, 오후에 점심 먹은 뒤 운동회를 하고, 저녁 무렵에 공연으로 끝.

거기까진 아는데 공연에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

“오늘 정하죠, 뭐. 퇴근 전에만 말하면 되잖아요…….”

그가 머쓱해하자 설미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에휴, 정말……. 나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그러게요. 고마워요.”

빨리 물어보러 가야겠다. 상호는 급히 출석부를 챙겼다.

* * *

“……그래서 한 명은 나가야 해.”

그는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상이 있긴 한데…… 굳이 상 받을 만큼 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적당히만 해주면 돼. 혹시…… 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토론대회 때도 이랬다. 다들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춤이니 노래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아이들이었다.

상호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었다.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같이 해.”

“네?!”

아이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세희는 고개를 푹 숙였고, 지윤은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쳐다보았고, 나빛은 울상을 지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태화가 책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왜요? 왜 다 해요?”

“다들 하기 싫어하니까 다 같이 해야지. 한 명만 독박쓰는 꼴 못 본다, 나는.”

“우씨…… 그럼 제가 하죠 뭐.”

“네가?”

얘가 웬일로 이쁜 짓을 하나. 상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태화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축제날에 쓰러지면 되잖아요.”

“……안 돼. 꾀병 부리지 말랬지.”

“아 왜요! 내가 흑기사 한다니까!”

“학교 활동에는 다 뜻이 있는 거야, 임마. 성실하게 해.”

상호는 혀를 찼다.

“너희춤싫지?”

“네.”

“노래도 싫지?”

“네.”

“그럼 연극은 어때?”

세희가 초조한 듯 머 리카락을 만지작거 렸다.

“그 셋 중에선 그게 제일 낫겠지만…….”

“그래. 그럼 연극으로 하고.”

상호는 물백묵으로 칠판에 연극이라 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교실에서도 할 거 정해야지. 들어보니까 다른 반들은 카페 같은 걸 많이 하는 것 같던데 대답은 태화가 했다.

“임사체험 시키죠.”

“임사체험?”

“그 왜 있잖아요. 관짝 하나 놓고 사람 가뒀다가 시간 되면 꺼내는…….”

“……날로 먹을 생각밖에 없구나.”

“아니면 영화관?”

“좀 활동적인 걸 찾아봐.”

.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상호는 한숨을 푹 쉬 었다. 그러자 지윤이 한마디 했다.

“점이라도 볼까예?”

“점?”

“사주 보고. 궁합 보고. 뭐 그런 거 있잖아예.”

“그것도 다른 반에서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뭐, 어지간하면 조금씩은 겹칠 텐데. 적당히 무난한 걸로 정할까. 상호가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태화가 다시 끼어들었다.

“뭔가 특별한 게 필요한 거예요?”

“좀 평 범하면서도 약간은 특별했으면 좋겠는데…….”

“그럼 쌤을 팔죠.”

“……뭐?”

태화가 씩 웃었다.

“쌤이랑차마시는데천원.”

“얌마…….”

“쌤이랑 궁합 보는 데 천원. 사진 찍는 데 이천원.”

“그게 뭔…….”

“나는 평생 공짜!”

“내가무슨 연예인이냐?”

양심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 염치를 팔아먹는 일이었다. 상호는 태화의 이마에 지탄을 날렸다.

태화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켁!”

“어쨌든…… 정 좋은 생각 없으면 그냥 다른 반이랑 합쳐도 돼. 우린 넷밖에 안 되니까. 교대할 거 생각하면 둘밖에 안 되기도 하고.”

세희와 나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때 지윤이 손을 들었다.

“쌤예. 지들 반티는 안 만듭니꺼?”

“반티? ……아, 맞다.”

운동회가 끼어 있으니까. 반마다 입는 티셔츠도 주문해야 했다. 상호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채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때 세희가 그를 불렀다.

“선생님.”

“응?”

“저희가 알아서 해봐도 돼요?”

“……너희가?”

상호는 난색을 표했다.

사실 그는 학교 행사를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해 본 건 초등학교 때 운동회 몇 번이 전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차라리 아이들이 더 잘 알 것이었다.

“그래도 옷 주문하고 그래야 할 텐데, 너희가 어떻게 하냐…….”

“아, 그건 제가 할게요.”

나빛이 손을 들고 방긋 웃었다.

뭔가 해 보고 싶은 게 있나 보다. 상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반 티셔츠하고 연극 준비하고……. 너희들끼 리 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네.”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세희의 목소리가 제일 또렷했다.

다 맡겨 놓자니 살짝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 었지만, 그래도 제일 믿을 만한 아이라서 그나마 안심이 되 었다.

상호는 칠판을 지우며 말했다.

“그럼 수업하자,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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