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눈을 떠 보니 해가 중천을 조금 넘어 있었다. 상호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코에 닿는 음식 냄새와 귀에 닿는 보글보글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그가 답을 도출하기 전에 눈앞에서 꼬리가 살랑거 렸다.
“아, 쌤 깼다.”
태화가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네가왜여기 있냐?”
“기억 안 나, 오빠?”
“……남의 집에막들어오지 마.”
“뭐 어때. 우리 사이에.”
보나 마나 순간이동으로 왔을 게 뻔했다.
음식 냄새는 주방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방이라고 해 봤자 침대에서 4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상호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희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세희도 왔네.”
“아, 네. 일어나셨어요.”
세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냄비에 열중했다.
대체 왜 세희가 밥을 하고 있을까. 씻지도 않고 자서 차림새가 개판이었다. 상호는 몸을 일으켜 앉고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런 그에게 태화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쌤.”
비닐에 싸인 두부였다.
“이거 먹어요.”
“맨 걸로?”
“먹고 새사람 되는 거예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얌마, 죄 안 지었어…….”
마침 출출하던 차에 잘 됐다. 상호는 두부를 받아 깊숙이 베어 물었다.
그러자마자 세희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 다보았다.
“야. 이태화. 두부 가져와…….”
이미 반 넘게 먹어버린 참이었다.
상호는 두부를 입 안 가득히 담은 채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세희의 눈치를 보았다.
“……미앙헤.”
“……많이 드세요.”
입에 들어간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두부를 꿀떡꿀떡 목구멍으로 넘기고 물었다.
“너희 점심 지금 먹는 거야?”
“네.”
“지윤이는?”
“낮잠 자요.”
세희가 식탁에 냄비를 내려놓았다.
“식사하세요.”
상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된장찌개였다. 두부가 없어서인지 뭔가 허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냄새는 꽤나 입맛을 당겼다.
그는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다음부턴 연락하고 와.”
“연락을 안 받잖아요.”
태화가 옆에 앉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연락이나 받고 그런 말을 하세요.”
“나도 내 인생이 있어, 인마. 그리고 연락 안 받으면 들어오질 말아야지. 내가 무슨 상태일 줄 알고 이렇게 막 들어와.”
상호는 숟가락을 까딱이며 혼을 냈다.
그러자 태화가 마주 앉은 세희를 째려보더 니 눈살을 확 찌푸렸다.
“야, 너는 왜 뭐라 안 해? 맨날 나만 따지더라?”
“선생님 말씀이 다 맞으니까.”
“뭐? 같이 들어와 놓고 그러기냐?”
“난 내가 잘못한 건 알아. 그러니까 너처럼 안 따지지.”
“쌤, 들었죠? 얘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한다니까요. 사람 죽여놓고 사과할 년이에요.”
그 말에 상호의 몸이 움찔했다. 사람 죽여놓고 미안하다 사과했던 인간.
바로 어제 만나고 왔다.
“……다음부턴 이러지 마.”
꾸중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찌개를 한입 먹어보니 역시 맛이 좋았다.
“세희는 요리 잘하네.”
“쌤, 밥은요? 밥은 제가 했어요.”
“즉석밥이잖아.”
“전자레인지 돌리는 것도 기술이에요.”
상호는 태화의 치근거림을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둘을 보고 있으니 문득 중간평 가 때 일이 생각났다. 그는 둘을 번갈아 흘끗하다가 물었다.
“너희 누구한테 졌어?”
“네?”
“중간평가.”
“……아.”
세희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반면 태화는 당당했다.
“칼쟁이요.”
“그러니까누구.”
“몰라요. 이름 안 외웠는데. 근데 어차피 쌤도 모를 거잖아요.”
그 말이 맞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은율에게 졌다면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둘 다 은율에게 진 게 아닌 모양이었다.
“세희도 모르는 애한테 졌어?”
“……네.”
“둘 다 16강에서 떨어진 거지?”
“네.”
상호는 둘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솔직히 말해 봐. 집중을 못 해서 진 거야? 아니면 실력이 부족했어?”
“집중, 집중 못 해서 그랬어요…….”
“분명해?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어?”
“그건…….”
세희가 밥을 깨작거 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밥까지 차려 줬는데 너무 삭막하게 굴었나. 상호는 세희의 눈치를 살피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얘들아. 토너먼트라는 거는…… 재수가 없으면 64강전에서 1등 후보를 만날 수도 있는 방식이야. 64강전에서 떨어지면 아무리 패자조에서 열심히 해도 33등이 끝이잖아. 그동안 해봤으니까 알지?”
“네.”
“10등이 목표더라도 1등한테 비벼볼 실력이 있어야한단뜻이야.”
이 둘에게 특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세희 네가 아무리 1등을 해봤다 해도…… 다른 애들도 한창 강해질 때란 말이야. 특히 1학년은. 지금 네 실력이 1등을 할 실력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어. 그거는 네가 만약 이번에 1등을 했었더라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소리야.”
“네…….”
“그리고 태화도. 태화 너는 저번부터 아슬아슬했잖아.”
“저는 은율이랑 나빛이한테 졌는데요. 이번에만 모르는 애한테 졌지.”
질 만해서 진 거 아니냐, 그런 뜻이었다.
“그 둘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너희는…….”
상호는 한숨을 쉬고 둘과 눈을 마주쳤다.
“너희가 10등 못 해도…… 선생님은 안 도와줘. 학비를 대신 내준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 알아.”
“알아요.”
세희가 작게 중얼거 렸다.
“열심히 할게요.”
태화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상호는 즉석밥을 마지막 한 톨까지 닥닥 긁어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어. 설거지는 나중에 하고, 나가서 수업하자.”
* * *
‘이렇게 셋이서 수업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네.’
상호는 스탠드에 앉아 세희와 태화를 바라보았다.
둘은 운동장에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학교 수업 시간엔 저 둘이서 자주 대련을 붙였지만, 이렇게 셋만 따로 모여서 대련을 시키는 것은 뭔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시작은 이미 했다. 둘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세희는 검을 뽑으면서도 흔들림 없는 눈으로 태화의 일 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흡!”
세희가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태화도 순간이동을 썼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둘이 동시에 사라진 걸로 보였겠지만, 상호에게는 명확하게 보였다.
세희의 검이 태화가 서 있던 자리를 갈랐고, 태화는 처음 세희가 땅을 박찼던 자리에 나타났다.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근접할 수밖에 없는 무예가의 특성을 이용한.
세희의 날카로운 눈빛이 태화를 향했다. 상호는 둘이 싸우고 있는 운동장을 내 려다보았다.
‘지금은세희가불리하다.’
둘은 맨땅에서 대련하는 중이었다. 결계를 박차고 이용할 수 있는 시험 때와는 달랐다. 이런 환경에서는 순간이동을 쓰는 마법사가 좀 더 유리했다.
거기에 더해서.
“흡!”
세희가 땅을 박차는 척해서 순간이동을 유도하고 곧바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지만, 태화는 검지를 들어 보랏빛 광선을 내쏘았다.
세희는 검을 거두고 광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고운 이마가 찡그려졌다.
“끙…….”
아주 간단하게 강한 위력을 뿜어내는 마법사. 심지어 악마 융합체라 더욱 빠르고, 더욱 강했다.
태화는 손짓 한 번으로 상대의 계산을 모두 무너트릴 수 있었다.
‘쟤는 대체 왜 10등 안에 못 들어갔지?’
상호는 속으로 살짝 한탄했다.
세희도 나빛도 없었고, 은율과붙은 것도 아닌데. 참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저렇게 강한데 왜 그만큼의 성적이 안 나오는지.
하지만 세희도 절대 만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퍼엉
보랏빛 광선이 땅에 부딪혀 폭발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히가 서 있던 자리였다.
태화가 아무리 빠른 공격을 날려도 세희의 터럭 하나 건들지 못했다. 이제 세희의 경공은 날아가는 새보다 빠른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 가벼운 몸이 또 땅을 박찼다.
검이 태화의 허 벅지를 향해 날아들고, 태화가 순간이동을 시전하는 바로 그때.
“됐다. 그만해.”
상호는 손뼉을 짝 쳤다.
어떻게 결정타를 먹이는가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실력을 확인하려고 대련을 시킨 게 아니었다.
세희와 태화가 그의 앞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너희는서로를너무잘알아.”
그 말에 둘은 어 리둥절해하며 큰 눈을 연신 깜작거 렸다.
“……네?”
“몸에 너무 익어 버렸어. 서로싸우는 방식이.”
상호는 둘을 번갈아 가리 켰다.
“태화가 순간이동 할 때. 마법 쏠 때. 세희가 칼 휘두르려고 달려들 때. 그럴 때 너희는 예상을 먼저 해 버려. 행동하기도 전에. 서로 약간만 움직여도 다음 행동을예상해 버린단 말이야. 그리고 또 꼭 그 예상대로 움직여. 다 몸에 익어 버려서 그래. 그래서 모르는 애들이랑싸울 때 유난히 약해지는 거야.”
“그럼 어떡해요. 우리끼리밖에 안싸우는데.”
태화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얘 아니면 지윤이고, 지윤이 아니면 나빛이잖아요.”
“외우지 마. 뻔하게 움직이지도 말고. 변주를 주란 말이야.”
상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던 손은 점차 그 속도를 높이더니, 어느 순간 두 개로, 세 개로 나뉘며 잔상을 늘려갔다.
세희가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화도 입을 떡 벌렸다.
“우와, 쒸바, 뭐야. 개쩔어.”
잔상들은 흐릿하지 않고 경계가 뚜렷했다. 상호는 잔상을 여덟 개까지만 늘리고 그대로 유지했다.
“너희가 아직 이 수준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런 속임수를 숨쉬듯이 쓰고, 또 숨쉬듯이 상대해야 해. 이런 식으로.”
여덟 개의 손은 동작이 제각기 달랐다. 검지를 까딱이는 것, 손을 흔드는 것, 엄지를 치켜세운 것.
“그러니까잘 고민해 봐. 어떻게 상대를 속일지. 허허실실. 그러니까 실초를 숨길 수 있는 허초가 곧 살초가 되는 거지. 말이…… 이해가 되려나?”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멈줬다. 그런데 갑자기 태화가 눈을 반짝였다.
“쌤. 분신술도쓸수있어요?”
“분신술?”
그건 왜 물을까. 상호는 눈을 끔뻑 였다.
“다리가 멀쩡했으면 보여줄 수 있는데…… 지금은 못 하지.”
“아, 그런가.”
“근데 왜?”
태화는 아쉬 워하는 표정을 지 었다.
“그냥, 쌤이 두 명이면 두 배로 기분 좋을 테니까.”
“……그래.”
상호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어 보니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저녁 먹을 때까지만 좀 더 대련하자. 괜찮지?”
“넹.”
“네.”
둘은 다시 운동장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