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501)

* * *

마침내종례시간.

상호는 교탁에 손을 올리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고생했다. 고생했고…… 좀 있으면 또 중간평가야. 알지?”

“네.”

“연말평가 이전 마지막 평가니까, 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가르칠 거야. 필요하면 방과 후에도 수업하고…… 너희도 계속 수련해. 알겠지?”

“네.”

나빛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나빛아, 열심히할거지?”

여전히 침묵.

상호는 한숨을 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내일 보자, 얘들아. 나빛이는 잠깐 남아줘.”

그러자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은 상호와 나빛을 흘끗하며 교실을 나갔고, 교실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어떻게 달래냐…….’

상호는 마음을 졸이며 나빛에게 다가갔다.

나빛은 그를 본체만체하며 살며시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회색 눈썹이 햇살에 빛났다.

상호는 의자를 끌고 그 옆에 앉았다. 나빛이 바라보는 방향에. 그러자 나빛은 고개를 반대로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조용히 나빛의 손을 잡았다.

말로 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흥.”

나빛의 입에서 담배가 까딱였다.

그래도 상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할 일 없는 연인처럼,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웠다.

나빛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손이 진짜작네.’

그는 가끔 궁금했다. 그저 키의 비율대로 작아지는 것일 뿐인데, 어쩜 이리도 조그맣고 아담해지는지.

둘은 그렇게 가만히 손을 잡고 있었다. 시계의 분침이 한참을 나아가도록.

이윽고 나빛이 그를 바라보았다.

눈시울을 붉히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울어.”

“짜증나요…….”

입에서 떨어진 담배가 책상을 굴렀다.

“핸드폰 가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선생님은 내 연락만 안 받고, 다른 애들이랑은 놀러 다니면서 사진도 끽고 급기야는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학교 끝나면 쌤이랑 보지도 못하는데……. 다른 애들하고만 놀고……. 그런데 연락을 안 받으니까…….”

이미 한 말을 하고 또 한다. 서 러움이 가슴에 맺힌 모양이 었다.

상호는 자꾸 웃음이 났다.

“왜 웃어요? 웃지 마요, 짜증나요

“미안해, 미안해.”

어딜 봐도 귀여운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고등학교 3학년보다는 중학교 3학년에 가까운 아이들이었으니까.

그는 손수건을 꺼 내 나빛의 코에서 찔끔 튀어나온 콧물을 닦아 주었다.

“닦지 마요! 드러워요…….”

“뭐 어때. 그러라고 있는 손수건인데. 어쨌든 나빛아.”

“……네.”

나빛이 드디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일전처럼 맑은 눈빛으로.

“선생님이 연락 못 받아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 응?”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선생님이 좀 바빠. 나도 내가 뭘 한다고 바쁜진 모르겠는데…….”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꼴랑 네 명인데도 이렇게 바쁘면 내년에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이것만 기억해줘. 선생님은 네 연락 귀찮아서 무시하는 게 아니라고.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그렇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저한테만 그러시는 거잖아요…….”

“아니야, 다른 애들 것도 자주 못 봐.”

“애들이 그랬어요, 저한테만 그러신다고…….”

“너 놀리는 거야. 네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그는 나빛의 뺨에 손바닥을 대고 빙글빙글 비볐다. 나빛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코를 훌쩍였다.

“선생님도 재밌어서 저 놀리시는 거 아니에요……?“

“아냐, 아냐. 절대 아냐. 선생님은 선생님 웃긴 거보다 너 웃는 게 더 좋지.”

“그럼 저 웃겨 주세요.”

‘? ,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냐.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나빛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오, 나 이런 거 못하는데…….’

당황하던 그는 예전에 지윤이 들려줬던 개그를 재탕하기로 했다.

“나빛아.”

“네.”

“주먹밥이 왜 퍽퍽한…… 아차.”

반대로 말했다. 왜 물이랑 같이 먹어야 하는 건지 물어보는 건데.

상호는 복장이 터져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시발! 개그도 해본 사람이 해야지…….’

“선생님?”

나빛이 그를 불렀다.

정신을 차린 상호는 황급히 핸드폰을 꺼 내 들었다.

“나빛아, 잠깐만…….”

그리고 아재개그를 검색하는데. 말했다가는 따귀를 처맞을 쓰레기들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상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빌며 손가락을 바쁘게 놀렸다.

그때.

나빛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응?”

그가 고개를 퍼뜩 들자, 나빛이 방긋 웃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핸드폰에서 떼어냈다.

“괜찮아요.”

이제는 화가 다 풀린 모양이 었다.

상호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들었다.

“이제 이런 거안할거지?”

“네.”

“설령 하더라도 절대 피지는 마. 알지?”

“네.”

“믿는다.”

“저도요.”

나빛이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상호는 그 말의 뜻을 깨닫고 양손으로 나빛의 손을 감쌌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약속이에요. 무시하지 않기.”

“응, 약속.”

“약속 깨면 저도 깨요.”

뭘 깬다는 걸까.

물론 당연히 약속이겠지만. 꼭 뚝배기를 깨버 리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상호는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나빛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아침에 싸늘했던 만큼 따뜻하게, 마치 꿀을 바른 듯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응?”

“저는 크리스마스 예약해 둘게요.”

크리스마스 약속을 벌써 하자니. 상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그런 약속은 쉬이 할 수 없다. 또 어기게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을 보고 실망하는 나빛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렇게 무심코 약속해 버 렸다.

상호는 말을 하자마자 속으로 후회했지만, 그래도 나빛이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든 지키면 될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빛은 그저 웃기만 했다. 평소의 모습처럼.

“헤헤

* * *

다음 날. 조례 시간.

상호는 교탁 앞에 서서 말했다.

“얘들아, 어제 문자 보낸 거 봤지?”

“네.”

일주일에 두 번 듣는 방과 후 영어 특강. 신청할 사람은 생각해 놓으라고 문자를 보내 두었었다.

“하고 싶으면 해. 1학년이 그나마 여유로울 때니까. 뭐 헌터한테 영어가굳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생각 있으면 오늘 안에 말해. 알았지?”

“네.”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어째 나빛만은 입을 열지 않고 멀뚱히 상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호는 마주 눈을 끔뻑였다.

“나빛이 왜?”

“저 그런문자못받았는데…….”

“……응?”

이게 무슨 소리 인가. 그가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지윤이 키득거 리며 나빛의 등을 두드렸다.

“쌤이 니 왕따시키는갑다.”

“삐순이~ 또 삐지게떠~.”

그 옆에서 태화도 깐죽거 렸다.

상호는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네 명에게 보냈는데.

연락처를 보자 뭐가 잘못되 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나빛이’에게 보내야 하는데, 그 바로 아래에 있는 ‘나빛이 아버님’에게 보내 버렸다.

상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나빛아, 미안해. 실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나빛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주머 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고 있었기 때문에.

〈쓰러지다>

주말. 9월의 마지막 날.

상호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이른 아침부터 교정에 나온 참이었다.

그의 앞에는 비슷한 차림을 한 세희와 지윤이 서 있었다. 셋 다 위아래 깔맞춤 트레이닝복을 입은 모습이 꼭 옛날 홍콩영화 액션배우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런 세희와 지윤의 옆에는 어째서인지 은율이 서 있었다.

상호는 은율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뒤통수를 긁적 였다.

“……은율이는 왜 왔어?”

그러자 세희가 은율의 허 리를 끌어당겼다.

“같이 배우려구요.”

“반이 다르잖아.”

상호는 난색을 표했다.

남의 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그 선생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다. 어떤 기조로 교육을 하고 있는지, 어떤 교육이 진행 증인지도 모르는데 그걸 무시하고, 툭 끊어버리고 새로운 교육을 할 순 없는 일이 었다.

하지만 은율은 경우가 약간 다르긴 했다.

집에서 조기교육을 받다가 학교 와서는 교육다운 교육도 받지 못하고 경한에게 이용만 당하고는 2학기가 되어서야 다른 반에 들어가 교육을 받는 처지. 그나마도 겉돌고 있을 터.

그러니 은율 본인이 정말로 원한다면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은율이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닌데 굳이……?”

상호가 고개를 기웃하자 세희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부탁드려요.”

“아니, 부탁할 일은 아닌데…….”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알았다. 은율이 검 배우러 온 거야?”

“네.”

은율이 눈을 똑바로 마주치 며 자세를 바로 했다.

“뭐 배우고 싶은데?”

“다요.”

“…0으 ”

상호는 살짝 당황하며 주머니에서 보호 마법 목걸이를 꺼냈다. 도미니크가 부숴 먹어서 민정에게 새로 받아온 물건이었다.

“그러면한번 붙어보자. 괜찮지?”

“네.”

은율이 목걸이를 걸고 먼저 검을 뽑았다.

상호는 세희와의 첫 대련을 떠올리며 물었다.

“칼 비싼 거야?”

“아니요. 괜찮아요.”

“알았다.”

상호가 검을 뽑자 세희와 지윤이 뒤로 물러났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너무 걱정하진 말고. 내 몸에 검이 닿으면 네가 이기는 거야.”

그는 은율과 눈을 마주쳤다.

“검기는 너한테 맞춰줄 거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선생님은 진짜로 못 달린다. 강도는 같고, 간격은 네가 우위란 소리야.”

“네.”

“네 이점을살려서공격해봐.”

은율이 발을 떼어 검을 휘둘렀다.

제법 날카로운 찌르기. 하지만 상호에게는 소심해 보이는 찌르기였다. 아슬아슬한 간격을 노렸지만 너무 겁내서 간격을 잘못 재었다. 이대로는 가만히 있어도 닿지 않는다.

상호는 굳이 대응하지 않고 서 있다가. 은율이 한 걸음 더 들어오고 나서야 검을 들어 가볍게 쳐냈다.

‘세희는 죽기살기로 한 번에 찔러 들었었는데.’

은율은 그 뒤로 몇 번을 더 달려들었지만, 번번이 허탕만 칠 뿐 유의미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결국 상호가 등 뒤로 달려드는 은율의 검을 낚아채듯 올려쳤고, 그녀는 검을 놓치며 뒤로 물러났다.

날아간 검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쨍강……

“은율이는 형식에 좀 얽매여 있네.”

상호는 검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누구한테 배운 건진 모르겠지만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동작이 군데군데 보인다.”

“아…….”

검을 집어 든 은율이 허리를 푹 굽혔다.

“감사합니다.”

“대련 많이 해. 너보다 강한 사람이랑.”

상호는 세희를 곁눈질하고 다시 은율을 바라보았다.

“시험 얼마 안 남았으니까 열심히 해. 지금까지 성적 좋았다고 자만하지 말고. 너희 시기엔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니까.”

“네.”

세 아이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돌연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완연한 가을의 바람이. 상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10월이구나.’

그녀가 죽은 달.

기 일은 5일 금요일. 아이들 중간평가는 4일 목요일.

딱히 챙겨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를 지윤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쌤예.”

“응? 아, 미 안. 잠깐 딴생 각 좀 하느라.”

상호는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계속하자. 다음은 지윤이.”

0